제 14 강의
(2010. 9. 13. 사제 피정)
14. 하느님 뜻 안에서 어떻게 기도하는가?
기도하는 방법
○ 성령께서 오시기를 비는 기도
오소서, 오 성령님, 창조주시여, 저희 마음에 오소서.
당신 은총과 함께, 창조하신 저희들을 찾아오소서.
오, 정다운 위로자시며 지고하신 아버지의 선물이시여,
당신은 살아 있는 물이요 불이며 사랑이시고,
영혼의 거룩한 기름부음,
하느님의 손가락, 구세주의 약속이시니,
당신의 일곱 은사를 쏟아 부으시어
저희 안에 말씀께서 살아 움직이시게 하소서.
저희의 지성을 밝히는 빛이 되시고
저희의 마음을 태우는 불꽃이 되시어
저희의 모든 상처를 당신 사랑의 향유로 치유해 주소서.
저희를 원수에게서 지켜 주시고 평화를 선물로 주시며
당신의 힘 있는 인도로 모든 악에서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영원한 지혜의 빛이시여, 사랑이신 당신 안에 일치해 계신
천주 성부와 천주 성자의 위대한 신비를 저희에게 알려 주소서.
영광이 천주 성부와 부활하신 성자와 보호자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오니,
아버지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시어
아버지 뜻의 무한성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면 아버지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아닌 것은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아버지 뜻의 나라를 청하나이다.
성모송
영광송
이 강의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에 바쳐지는 강의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느님의 뜻 기도 모임 때의 시작기도에 관해서 두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부분에서 나오는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소서.’ 이런 기도들입니다.
시작 기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오늘은 11권에서 나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말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십니다.
11권 64장 1913년 10월 2일 일기 :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결합되면 영혼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형성된다.
하느님의 뜻을 소유함은 전부를 소유하는 것.
9 “내 딸아,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그러면 ‘예수님, 저는 당신 뜻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내 뜻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으므로 너의 사랑이 어디서든지 나를 에워쌀 것이고,
너의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하늘 저 높은 데까지 또 땅 밑 저 심연의 밑바닥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11 그런즉 네가 ‘당신을 흠숭합니다. 찬양합니다. 찬미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고자 한다면
내 뜻과 일치하여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흠숭과 찬양과 찬미와 감사로 하늘과 땅을 채우게 된다.
내 뜻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내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말씀, 같은 주제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같은 비밀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을,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물어보십니다.
“너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아주 깊고 심오한 뜻으로, 또 가장 완전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비밀은, 그분의 뜻과 함께, 그분의 뜻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간적인 의지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물론 진실한 사랑일 수 있지만,
우리가 아주 작은 미소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비록 진실하긴 하지만 미소한 피조물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창조된 우리의 작은 인간적 의지가 하느님의 뜻 안에 녹아들어가서 합쳐지면,
그 마음의 강대하고 무한함은 작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무한한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 뜻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예를 들어서 말한대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조각이나 그림을 배우려고 하는 제자들이 있다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배우려는 참 착한 제자라면, 스승의 모든 말에 완전히 순명합니다. 그러면 그 화가, 조각가 스승이 제자가 잘 배우게 하기 위해서 제자에게 첫 번째 명령을 합니다.
“가게에 가서 캔버스(canvas)와 붓, 그런 것들을 사오라.”는 명령입니다.
스승은 스승 자신의 캔버스(canvas)를 가지고 있고, 제자는 제자 자신의 캔버스(canvas, 화폭)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승이 자기의 화폭에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이 하는 대로 그대로 본 따서 그리라고 제자에게 지시합니다. 제자 자신의 화폭에다가, 캔버스(canvas) 위에 그리라고 지시합니다.
일주일 동안 일을 한 다음에, 제자는 한 주일 동안 모든 사소한 것을 다 스승의 명령에 복종한 다음에, 주의를 무척 많이 기울여서 스승도, 제자도 이제 그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러면 스승의 작품이나 제자의 작품이나 아주 똑같아집니다. 제자가 스승의 지시에 순명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스승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자보고 “이제 네가 그린 그림에다 네 사인을 넣어라. 서명을 해라.” 고 지시합니다. 스승이 제자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스승인 레오나르도 자신도 자기가 그린 그림에다 자기 사인을 합니다. 서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둘 다 그림을 가지고 미술관에 갑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백만 달러이고 제자의 그림은 10달러입니다. 그림은 똑같은데. 그런데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것이고, 그것은 제자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10달러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의지만 가지고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10달러 짜리 밖에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합니다. 스승한테 완전히 복종하면서,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하면서, 좋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내 인간적인 의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의 가치는, 피조물이 만든 거니까, 피조물의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일인데 주님이 하신 것은, 그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가집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리를 배울 때,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피 한 방울로도 온 인류를 다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흘린 한 방울의 피는 하느님의 행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일을 하자고, 우리에게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한테 그렇게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서 언제나 좋은 일을 하라고 또 주님의 일을 모방해서 똑같이 하라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의 의지로만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뜻이 합쳐진 상태에서 그 일을 완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사용했던 예에서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자보고 ‘와서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보고 ‘네 손을 내게 다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와 스승이 손을 잡고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합니다. 스승이 제자보고 말합니다.
“우리가 두 손을 맞잡고 그림을 그리려면
너의 손은 내 손에 완전히 열려 있고 내 손이 하는 대로 따라 해야 된다.
내 손의 모든 동작을 따라서 해야 된다. 같이 해야 된다.”
얼마 후에 그 그림이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림이 완성된 다음에
‘이 그림은 우리가 같이 그린 거니까 너의 서명도 들어가고 나의 서명도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행위자이기 때문에, 둘 다 작업을 함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모든 부분에 제자의 의지와 제자의 주의력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그림의 부분 부분마다 스승의 의지도 거기에 함께 있었습니다. 둘이 손을 같이 잡고 했기 때문에 스승의 의지도 그 그림 안에, 제자의 의지와 함께 모든 부분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스승에게 속한 부분도 있고 또 제자에게 속한 부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자는 스승, 즉 하느님을 동반자로 가졌기 때문에 그 제자의 행위들은 그분의 아주 한없는 행위 속에 참여했습니다.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 안에는 이렇게 둘이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그 양쪽의 사랑과 의지가 완전히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합쳐진 것이고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제는 스승에게 속한 것을 제자가 완전히 같이 소유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진실한 사랑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의 행위를 그분의 의지로 완성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의지로 이것을 완성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결과가 더 있습니다.
10 “내 뜻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으므로
너의 사랑이 어디서든지 나를 에워쌀 것이고,
너의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하늘 저 높은 데까지
또 땅 밑 저 심연의 밑바닥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천상의 책 11-64,10)
이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인데 묵시록에 들어가 보면, 하늘에 수많은 무리들이 있는데 그중에 어떤 그룹이 있습니다. 어린 양을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그룹이 있습니다. 양이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과 모든 곳에 있는 존재들이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증가합니다. 몇 배로 불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다 하느님의 뜻과 함께 하는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만약 누가 하느님 뜻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 우주의 모든 사람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그 사람과 함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이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보여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흠숭과 찬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럴 때, 하느님 뜻 안에서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흠숭과 찬양과 찬미와 감사로 하늘과 땅에서 튀어 오르게 되는데 이것은 하느님 뜻 안에서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아주 한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효과를 냅니다.
제가 다른 예를 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전자 통신이 있습니다. 세틀라이트 위성도 있고 컴퓨터로 하는 것도 있고, 우리는 아주 많은 통신 수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좋은 가르침이나 작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노력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사진을 하나 찍으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사진을 하나 찍어서 그 사진을 내가 인터넷에 넣으면 온 세상에서 다 그 사진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사진 한 장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게 하려면 말할 수 없이 힘든 작업과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이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으면 옛날에는 애를 많이 쓰고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쉬운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TV 방송국에 연결이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끼리만 알고 우리끼리만 지금 진행하는 겁니다. 이 집안에 사는 다른 신부님들도 우리와 같이 살지만 우리가 하는 것을 하나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인터넷에 연결시키면, 물론 어려움도 있고 그렇지만 하여튼 온 세상에 즉시 연결이 됩니다. 즉시 퍼집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인터넷에 연결시켜 이것을 온 세상에 퍼트린다면, 내 말을 퍼트리고 전달한 공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방송사나 TV 회사, 인공위성 주인에게 그 공로가 돌아갈까요? 내 목소리만 가지고는 내 말이 온 세상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공로는 위성회사 사장, 방송사에게 넘어갑니다.
내 힘만 가지고는 이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공위성의 소유주가 이 굉장한 홍보수단을 가지고 나한테 도와주겠다고 하면, 내 목소리를 거기다가 집어넣고 디지털화하면,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처럼 소리의 속도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속도로 온 세상을 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인공위성 사장이 도와주면 빛의 속도로 온 세상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주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들은 호주신부님의 목소리는 못 듣고 내 목소리만 듣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스템, 체제가 내 목소리에다 무엇을 해주는 겁니다. 내 목소리를 빛과 같이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인간적인 조건에서는 내 목소리를 빛으로 돌아다니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목소리는 자연적으로 그 음의 속도, 소리의 속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빛의 속도로 다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소리가 전기, 빛, 전자 그런 걸로 들어가면, 내 목소리가 그 안에 도입되면, 그러면 내 목소리가 빛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성한 신적인 인터넷의 주인, 말하자면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런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 우리 강론이나 우리의 발걸음이나 우리 행위 모두를 하느님의 빛 안에서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의 영원한 신적인 삶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한테 이렇게 신적인 생명을 나누어 주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100년 동안 보속을 해도 우리는 그런 것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의 덕을 아주 영웅적으로 실천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선물을 또 인류에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 선물은 그분의 신적인 빛 안에서 작용하는 선물입니다. 그분의 신적인 빛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그 선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선물을 놓쳤고 그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신적인 인터넷, 그 나라를 자기들 손에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아담을 버릴 수 있었겠느냐?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아담은 내 뜻 안에서 살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아담이 내 뜻 안에 살았는데, 그것은 정말 멋있고 경이롭고 굉장한 것이었다.
아담이 창조된 후에 그렇게 짧게 살았던 것은 아담이 나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만큼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담이 나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한 것은, 나의 뜻의 아주 무한함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느님의 영원한 행위 속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오늘날까지도 내가 이 무한한 우주 안에서 아담이 그때 말했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나는 아직도 듣고 있다.
온 우주가 아담을 위해서 창조되었는데 그 안에서만 듣는 게 아니라,
아담의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인간의 영원한 행위 속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리를 내 모든 속성 안에서, 하느님 존재의 가장 깊은 속에서 그 사랑을 듣는다.
그 아담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내 깊은 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고 내가 그것을 듣는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명했다.
그러니까 아담이 최초에 받았던 그 선물을 그 모든 후손에게 주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그 아담이 처음 받았던 그 선물 속으로 들어가서 살 수 있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짧은 장을 아주 간단한 말로 끝을 맺으십니다.
“내 뜻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하고 쉽고 그러고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내는 말이 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 인터넷이나 인공위성의 경우처럼 단추 하나 누르는 것처럼 간단한 일입니다.
최 신부님, 최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카를로스 신부님의 소리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듣게 하려면, 신부님은 거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이 조그만 것이 인공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추만 하나 누르면 카를로스 신부님의 목소리가 여기 들어가서 온 세상으로 전달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한 모든 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이제 믿음의 문제입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신부님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다 들린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인터넷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공위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라도 최 신부님이 단추만 누르면 된다고 하시니까 그걸 믿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단추 하나 누르듯이 간단하고 쉬운 일이지만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한 분이십니다. 단순하십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을 만들 때는 거룩함이, 성스러움이 쉬운 거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만들었다.
그래서 거룩함이 모든 사람들의 손 안에 있는 아주 쉬운 거라고, 간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거룩함이, 성스러움이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집을 떠나 버리면 모든 게 다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집으로 다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심이 많고 그렇게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중단된 축제를 다시 계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 집으로 불러들이십니다.
다음 장으로 가겠습니다. 짧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장입니다.
11권 78장 1914년 9월 25일 일기 :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뜻으로 바치는 기도의 열매.
1 복되신 예수님께 나의 보잘것없는 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이 기도를 쓰시는 것이 나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분께서 친절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나와 함께, 바로 나 자신의 뜻으로 바치는 기도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에게 주어질 수 있다. 마치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바쳐진 기도처럼 모든 이가 자기 몫의 효과를 받는 것이다.
3 그렇지만 이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작용한다.
영성체나 내 수난의 경우와 같이, 나로서는 그 열매를 모든 사람에게 각각으로 다 주지만
효과를 내는 정도는 그들의 지향에 따라 다른 것이다.
4 그러니 열 사람이 받건 다섯 사람이 받건 열매 자체는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다.
이러한 것이 나와 함께, 나의 뜻으로 바치는 기도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라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영성생활을 하는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단계에는 기도나 영적인 것들이 케이크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케이크가 한 개 있는데, 내가 한 사람한테 케이크 한쪽을 요만큼 잘라서 주고, 또 다른 사람한테 한쪽을 잘라서 주고 나면 우리가 가진 케이크가 점점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기도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얼마만큼 기도를 할지 이런 것이 무척 어려워지고 힘들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많이들 마음을 씁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이런 게 사실이며 누구한테 얼마를 주면 그만큼 딴 사람에게 줄 것이 줄어드는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케이크로 예를 들면, 내가 케이크를 잘라서 이분도 드리고, 이분도 드리고, 이분에게도 주고 이분에게도 주고 여러 사람에게 주고 나면 맨 나중에 나한테는 케이크가 하나도 안 남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들은 케이크와는 반대입니다. 영적인 선물에서는 이 케이크와는 반대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 내가 어떤 진리에 대해서 마음으로, 정신으로 안다면 내가 아는 이 진리를 딴사람에게 얘기해주면, 그 결과로 그 사람이 진리의 반을 갖고 내가 나머지 진리의 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불어납니다.
그래서 남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나는 그 진리를 계속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내가 딴사람들한테 얘기를 해주게 되면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똑같은 진리를 가지게 됩니다.
나한테 있는 진리가 하나도 줄지 않고, 많은 사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똑같은 진리를 다 알게 됩니다.
불어나는 것, 이게 영적인 사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영적인 사물이 자꾸 불어나고 많아지고 그러는데, 이런 영적인 사물들의 산 꼭대기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고, 하느님의 뜻이 그 모든 것을 일치시킵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내가 하느님의 뜻으로 영적인 것을 행하면 그 효과가 아주 무한한 것입니다. 하느님 존재, 빛과 같은 그런 효과를 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안에서 나의 기도는 한 사람을 위해서 바쳐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바쳐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도 효과를 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효과를 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나 기도는 그 완전함을 다 소유하게 됩니다. 하느님 뜻의 무한함을 다 소유합니다. 그 뜻 안에서 행해진 행위가 하느님 뜻의 무한함을 다 소유하게 되고 그 자질을 가지게 됩니다.
내 기도나 내 전달의 그 효과를 받게 되는 모든 사람은 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효과가 모든 사람에게 다 가는데 그 기도의 효과를 받는 사람의 성향, 준비된 정도에 따라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의 효과의 은혜를 받는 것은 그 기도를 받는 대상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얼마만큼 열려 있느냐 그것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하는 기도, 내 쪽에서 하는 기도의 양이 아니라 효과를 받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내 영성체 은혜도 그렇고 내 수난의 은혜도 그렇다.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수난이나 영성체 이런 것도 예수님께서 그 효과가 모든 이에게 주어지도록 그렇게 수난하시고 그렇게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는 태양과 같은 겁니다. 태양의 빛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태양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참여하는 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강제로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선물입니다. 자유로 받아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내가 이제 어떤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면 내 기도가 그 형제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가 읽었던 그 장에서 보았듯이, 이 하느님 뜻 안에서 하는 행동은 하느님을 너무너무 기쁘게 해드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한 그 행위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모든 은총을 전부 다 주셨습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고 또 받는 사람의 영혼 쪽에서는 제대로 된 열린 자세, 받을 만한 준비된 자세, 그런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 뜻 안에서의 행동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가치 있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나 사람들에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이 준비되게 해주시는 사랑의 힘이 있습니다.
11권 142장 1917년 1월 10일 일기 : 작은 일에 소홀하면 성덕에 이르지 못한다.
1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성덕은 작은 일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은 일에 소홀한 사람은 거룩해질 수 없다.
2 그것은 밀알 몇 개쯤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과 같다.
그런 것을 많이 모아야 곡식 낟가리를 이룰 만큼 쌓아 올릴 수 있는데 말이다.
이를 등한히 하는 사람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일용 양식의 결핍 사태를 초래한다.
3 이와 마찬가지로, 작은 행위들을 많이 모으는 일에 소홀한 사람은 성덕의 양식 결핍을 초래한다.
사람이 양식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작은 행위들이라는 양식이 없고서는 성덕의 참 모습을 갖추지 못할 뿐더러, 성덕을 이루기에 족한 높이로 쌓을 거리도 부족한 것이다.”
다른 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모든 작은 것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그 효과는 대단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덕, 거룩함의 비밀은 작은 것들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그런 작은 것들 안에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순교가 생각같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꼭 순교하라고 부르실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일들이 더욱 중요한 겁니다. 이 매일의 사소한 것들, 또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뜻 안에서 행해진 이 모든 작은 사소한 일들, 이런 모든 것들이 커다란 성덕을 만들어 냅니다. 거룩함, 성덕을 만들어 냅니다.
큰 주교좌성당도 작은 돌들을 쌓아올려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덕이 또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진짜 성덕이 우리 가까이에 있고, 즉시 성덕을 완성할 것 같은데, 근데 우리가 그런 것들을 찾지를 않고 추구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먼 데만 보고 큰 것만 봅니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고, 큰 도전에 맞서려고 하고, 매일 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작은 일들이, 그게 아주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작은 일들, 사소한 일들, 일상의 일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학자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했던 그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작은 것들, 작은 것들입니다.
다시 다음 일기를 읽겠습니다.
11권 122장 1916년 5월 3일 일기 :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은 예수님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모든 이의 모든 죄를 아버지 대전에서 보속한다.
1 기도 중에 있는데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곁에 자리하셨다. 그분께서도 기도하시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후 그분은, “딸아, 기도하여라. 그러나 내가 기도하는 것처럼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2 “다시 말하자면, 내 뜻 안에 너 자신 전체를 쏟아 부어라. 그러면 네가 이 뜻 안에서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것을 너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마치 한 사람의 것인 양 하느님께 바쳐라. 하느님의 의지가 그 모두의 주인이시니 말이다.
3 그런 다음 너는 하느님의 발치에 선행들을 두어 그분께 영예를 드리고,
악행들을 두어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느님 뜻의 거룩함과 능력과 무한성으로 그것들을 보속하여라.
이렇게 한 것이 내 인성의 지상 생활이었다.
4 내 인성의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이 하느님의 의지가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께 완전한 보속을 드림으로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세대를,
동시에 그들의 모든 행위와 생각과 말 따위를 현행 중인 것처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그리하여 나는 이 거룩한 뜻 안에서 인간의 모든 생각을 나의 정신 속에 담고
그 중 하나도 나를 피해 달아나지 못하게 한 채, 지존하신 하느님 대전으로 나가서
이 생각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보속을 바쳤다.
6 또한 나는 바로 이 뜻 안에서 피조물 각자의 정신 속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이해력을 돕기 위하여 내가 얻어 낸 선을 주기도 하였다.
7 그러니 나의 눈길 안에 모든 사람의 눈을 담고,
나의 음성 안에 그들의 말을, 나의 동작 안에 그들의 동작을,
나의 손 안에 그들의 일을, 나의 마음 안에 그들의 애정과 갈망을,
나의 발 안에 그들의 발걸음을 담았다.
8 나의 인성이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의지 안에서 나의 것으로 삼고,
아버지께는 보속을 드리고 가련한 피조물에게는 구원을 확보해 주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이 보속을 받아들이시고 흐뭇해하셨다.
9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거룩하신 의지이시기 때문에 나를 물리치실 수 없으셨다.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물리치실 수 있었겠느냐?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셨다!
10 더군다나 아버지께서는 나의 이 행위들 안에서 완전한 거룩함,
가까이 하기 어려운 황홀한 아름다움, 지고한 사랑, 무한하고 영원한 행위들 및 무적의 힘을 보셨던 것이다.
11 이것이 잉태의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내 인성의 지상 생활이었고, 그 후에도 하늘과 복된 성사 안에서 연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12 너도 그렇게 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말이다.
13 나와 하나 되어, 나의 뜻 안에서,
너의 생각 안에 모든 사람의 생각을 담고,
너의 눈 안에 모든 사람의 눈길을 담고,
너의 말과 동작과 애정과 갈망 안에 네 형제자매들의 그 모든 것을 담아,
지존하신 하느님 대전으로 가져가거라.
그 모든 행위들을 보속하면서 그들에게 빛과 은총과 사랑을 얻어 주기 위함이다.
14 너는 나의 뜻 안에서 내 안과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너를 보게 되리니,
나의 삶을 살면서 나와 함께 기도할 것이다.
그러면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천국의 모든 주민들은, ‘누가 땅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 거룩하신 뜻을 우리 모두와 아울러 자기 안에 싸안고자 하는 이가 대체 누구일까?’ 하고 말할 것이다.
15 그러니 땅이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 위에 내려오게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선을 얻게 되겠느냐!”
또 다시 또 다시 또 다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행동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뜻으로 이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첫 단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인성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의 한없이 무한한 뜻 안으로 우리 자신을 집어넣는 것,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이사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내가 당신의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가 당신의 뜻 안으로 나를 부어 넣습니다. 녹여 넣습니다. 합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존하는 모든 것의 그 신비한 뜻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 가게에 가서 온 세상의 모든 카메라를 다 봤듯이 우리가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면, 주님 뜻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카메라 한두 개가 아니라 각 층이 카메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행위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내 것은 다 너의 것이다.”
“내 아들아, 나한테 속한 것, 나의 것은 다 너의 것이다. 너한테 속한 것이다.”
복음은 더 길게 말을 안 하지만 아마 그 복음의 아버지는 “이 바보야, 너는 이런 것도 모르느냐?” 그런 말을 계속하고 싶어 하실 건데 복음에서는 그런 것이 안 쓰여 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보고 “이 바보야, 그 살찐 송아지만 아까우냐? 살찐 송아지 말고 여기 있는 모든 가축이 다 너의 것인데 뭘 그러느냐? 이 바보야.” 큰 아들보고 그러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 가정 안에 마음의 일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큰아들이 자기가 진짜 아버지의 진정한 큰아들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 아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 뜻 안으로 사랑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분 뜻 안의 모든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한 겁니다. 우리 소유입니다. 우리가 일단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의 모든 것들을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피조물인 것처럼 그것을 우리가 성부께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주님께서 당신이 인성으로 이 세상에 사실 때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 일일이 다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이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성부님께 모든 영광과 찬양과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일단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 소유로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형제자매들에게로 갑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것을 소유해서 그것을 다 성부님께 드리고, 그리고는 형제자매들에게로 갑니다. 하느님께서 내 형제자매들과 나누고 싶어 하셨던 모든 것을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주러 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속한 게 다 내 것이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걸 내가 내 형제자매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확실한 사실이니까,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나누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이렇게 하도록 불림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꼭 이렇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의 기도는 아주 아름답고 아주 기가 막힌 기도 그리고 아주 열매가 풍성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받으셔야 할 모든 영광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고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그렇게 합니다. 우리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린 다음에는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우리 주님께서 그 형제자매들에게 주고 싶어 하신 것을 우리는 줄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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