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 12 강의: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한다는 것

Skyblue fiat 2014. 6. 20. 19:08

  제 12 강의

 (2010. 9. 10. 사제 피정)

 

12.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한다는 것

 

 † 주 우리 하느님,

 † 십자성호로

 † 저희를 원수들에게서 구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항상 거룩하시고 나누임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느님,

    저는 모든 이를 대신하여, 모든 마음들 안에서,

    당신을 깊이 흠숭하고 열렬히 사랑하며

    영원토록 감사드리나이다.(제4권,1902,1,14)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오늘 이 강의는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다른 장들을 읽으면서 그 동안 지향의 순수함에 대해서는 벌써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에도 그렇고 교회 가르침에서도 그렇고 우리는 그 동안에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이제 오늘 이 장을 읽으면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은 넉넉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증인들이 되겠습니다. 이 가르침들에 대한 증인이 되겠습니다.

 

강생의 신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같이 우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새로운 강생은 육신으로 강생했던 것 이상으로 신비적인 강생입니다. 우리의 합의, 우리의 동의가 없이는 이 새로운 신비적 강생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동의 없이 강생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가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다시 자신에게로 데려와서 자신 안에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완전히 하나 되는 것임을 어제 이야기했습니다.

 

이 전체 과정에서 첫 단계로 여기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는 피조물이고 창조되었으며 여기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이 진실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다음 단계는 하느님과 우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이렇게 하나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성부님께 청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있습니다.

 

둘째 단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셔서 나의 작음과 나의 미소함 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그걸 다 함께 나누십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와 같이 되십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나한테 오시면서 나를 열고 나를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하자고 청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해 주셨는데, 내가 창조된 나의 인간성으로 어떻게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지, 떻게 그분의 목적대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둘째 단계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변해서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면,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그분과 하나 되어 하면 그분이 나를, 리를 그분 안으로 완전히 데려가십니다.

그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게 되려면, 그 선물, 은혜를 받으려면, 말하자면 그분의 왕궁에 들어가서 그분과 함께 살려면, 처음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미 지향의 순수함, 애덕, 그런 걸로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하는 일들을 배웠고 그 이야기들은 이미 다 했습니다.

이제는 둘째 단계로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하는지를 배워야 되겠습니다.

 

 이 둘째 단계에서는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한없으신 하느님이 아주 작아지고 죽는 존재가 되고, 한정된 존재가 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작아지고 죽는 존재가 되고 한정적인 존재가 되면서도 그래도 그분은 하느님이시기를 계속하십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 다리를 가지고, 그 두 다리로 걸으셨습니다. 하느님 위격이시면서도 인간의 눈으로 보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수난당하시고 고통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모든 인간성, 인간의 모든 것을 다 가지시고 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 신성화하시고 하느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똑같이 되심으로써 그분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개인적인 인성을 취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 안에 모든 인류를 다 품으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다 자신의 인성 안에 품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그분은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인성 안에 품으신 모든 것을 다 신성화 하시고 하느님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당신 안에  품으신 그 모든 것을 신적인 방법으로 다시 행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인간의 모든 행위, 모든 생각, 이 모든 것을 다시 행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고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모든 인류가 원죄가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들이 아주 티없이 깨끗하고 완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생의 주목적, 첫째 목적은 모든 창조물과 온 우주의 모든 것의 이름으로 주님께 영광을 완전하게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성부님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고 모든 것이 성취되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된 것을 보십니다.

 

성 바오로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우리의 삶이 감추어져 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장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다시 하셔서 완전하게 된 것을 성모님이 나중에 예수님 안에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어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하시는 그 단계를 이 장, 이 책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 성부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 각자의 삶을 다시 사셨습니다.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주 완전하게 다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 완전하게 만드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부님께서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인성 안에 있는 입니다.

 

그런데 성부님께서는 완전하게 행해진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만 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인성 안에서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 안에서 완전한 것을 보려고 그러시는 것이 예수님의 수난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가 완전한 것을 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우리 각자는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즉 머리는 완전한데 그 머리에 있는 완전함이 그 지체들에게는 아직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 몸의 지체가 완전하게 되는 것은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성령이 머리 안에 있는 완전함을 모든 지체들에게로까지 가져가서 이루는 것이 성령이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나에게 속한 것을 모두 가져다가, 내 안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너희들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마지막으로 완수해야 될 일은 하느님 뜻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마지막으로 완수해야 될 일입니다.

 

하느님 뜻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모든 좋은 것과 신성한 것들의 샘입니다. 전에 내가 말한 대로 하느님 뜻은 예수성심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성령이 하신 모든 일의 면류관, 성령이 하신 모든 일의 절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성심의 알맹이, 핵심인 심장, 그 다음에 또 티 없으신 성심의 핵심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마지막 일입니다. 거룩하신 성심과 티 없으신 성심의 알맹이는 모두 다 하느님의 뜻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릴 때 맨 마지막 붓질, 맨 마지막으로 한 획을 그으면서 그림이 완성되는 것, 마지막 한 획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성심과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마지막 승리입니다. 예수성심의 마지막 승리이고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마지막 승리입니다.

 

그러면 한 문단씩 읽겠습니다.

11권 28장 1912년 8월 14일 일기 : 자기 망각에 이르는 방법.

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숨은 생활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성화 · 신화 하셨다.

 

 1 여느 때와 같이 있노라니 언제나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영혼이 자기를 잊으려면 그가 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마치 내가 그 영혼 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3 만약 기도하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할 일이다.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기도한다. 일을 해야 할 때에도 ‘예수님께서 일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하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식사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다.’ 등 삶 속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일이다.

 4  이와 같이 할 때라야 비로소 영혼이 자기 망각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기 때문에 하고, 또한 나 자신이 그것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 그것이 바로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중심이 아니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갖기를 원한다면 - 원죄 이후의 인간의 문제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원죄 이후에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느님까지도 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우주의 달과 별과 그런 것들과 같이 하느님까지도 우리를 중심으로 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한다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400년 전에 코페르니쿠스가 벌써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말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다.” 리고 우리 인간들은 그 혁명, 코페르니쿠스가 가지고 온 그 혁명 때문에 400년 동안 고통받고 있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아듣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더 나아가기 위해서, 실재와 좀 더 우리가 가까워지려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기를 그렇게 원하십니다.말하자면 어떤 영혼이 기도를 하고 싶으면, ‘아, 주님께서 기도하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렇게 말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다만 한 몸의 한 지체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해하고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몸에게는 머리가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만약 우리가 몸의 지체라면, 만약 지체인 내가 자고 싶고, 먹고 싶고, 걷고 싶다면, 실제로 먹고 자고 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것이고, 지체는 그렇게 못합니다. 머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고 싶다,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이런 것은 다 팔다리 같은 지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팔다리 같은 지체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믿기가 힘듭니다. 머리가 다 한다는 것을 믿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중심인 것 같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다 하는 것같이 느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좋은 열망과 좋은 생각과 훌륭한 아이디어 이런 것들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 우리한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님한테서 모든 좋은 것들이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 모든 좋은 것은 다 머리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진리에 일치되기를, 진리와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방법으로만 영원히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순명하기 위해서만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영성 신학에서는 우리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저기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 어좌에 앉아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주님께 아주 착한 군인처럼 ‘예’ 하고 복종하고 실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복종하고 실천합니다.

순명 잘하는 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합니다. 주인을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려고 하는 충실한 종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것은 동반자입니다. 같이 할 사람을 원하십니다. 사람이 주님께 순명하는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모든 것을 완수하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이것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네가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그때, 아,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생각해라.

그리고 나에게 말해라. ‘예수님 오세요. 제게 오세요. 예수님 제게 오세요. 저와 함께 기도하세요. 저는 당신과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께 제자리를, 주님이 차지하신 원래 자리를 제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머리의 자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즐기는 것까지도 이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1권 28장 1912년 8월 14일 일기 :

 5 어느 날 일을 하다 보니 혼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동안 내 안의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또한 그분께서 이 일을 하시고 싶어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6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 자신이 - 나의 손가락이 너의 손가락 안에서 일하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내 딸아,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나 자신을 낮추어 목재 작업이나 망치로 못을 박으면서 내 양부 요셉을 도왔던 내가 아니냐?

 7 그 일을 하면서 바로 그 손과 손가락으로 영혼들을 창조하는 한편 다른 영혼들은 저승 삶에로 도로 불러가기도 했던 것이다.

 8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신성하게 하였다. 모든 행동을 성화하면서 각각의 행동에 신적인 공로를 부여하였다. 내 손가락의 동작으로 네 손가락의 모든 동작들과  다른 사람들의 모든 동작들을 차례차례 불렀다.

 9 그들이 나를 위해서 행동하거나 내가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들 안에서 나의 나자렛 생활을 계속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내 숨은 생활의 희생과 수모에 대한 위로를 받는 듯 느끼면서 바로 내 생활의 공로를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10  딸아, 내가 나자렛에서 영위했던 숨은 생활을 사람들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은 실상 나의 수난을 제외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베풀 수 있었던 가장 큰 선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루이사도 그랬습니다. "내가 일하는 동안 내 안의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또한 그분께서 이 일을 하시고 싶어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 자신이, 나의 손가락이 너의 손가락 안에서 일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지상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 안에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의 모든 행동들, 자연적인 행동이든지 초자연적인 행동이든지 모든 것을 그분의 행동과 하나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분의 행동과 하나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다른 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는 이름으로 불렀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머리카락 하나하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바다에 물이 몇 방울이나 되는지도 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우리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도 아십니다.

 

1. 평소와 같이 있다가 내 수호천사와 함께 (성체)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순례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그 중 한 교회에서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2. 사랑의 수인(囚人)이시여, 당신께서 여기에 홀로 버려져 계시니 제가 함께 있으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동안 당신을 모욕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제가 사랑을 드리고, 당신을 멸시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찬미를, 당신께서 은총을 부어 주셔도 감사의 예물로 답례하지 않는 이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당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대신하여 위로를,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보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요컨대 저는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 계신 당신을 위하여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모든 것을 하고자 하오며, 이를 바다의 모든 물방울과 물고기와 모래알의 수효만큼 거듭거듭 하려고 합니다.”

3.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을 때에, 바다란 바다의 모든 물이 마음 속에 나타나 보였다. 나는 속으로 “내 시력으로는 바다의 광대한 넓이 전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어마어마한 물의 깊이와 무게를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수효와 무게와 크기를 다 알고 계신다.” 하였다. 그러면서 신기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복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너는 정말이지 어리석기도 하다. 어째서 그토록 신기해하는 거냐? 사람에게는 어렵고 불가능한 것이 창조주에게는 쉽고 가능하며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억만 개의 주화를 본 사람이 이건 수도 없이 많아. 대관절 누가 셀 수 있겠어?  하듯이 혼잣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그 주화를 그 장소에 쌓아둔 이는 한마디로 모든 말을 하는 이다. 즉 어마어마한 수효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나가게, 어마어마한 무게로 거기에 있으라고 한 것이다. 딸아, 나는 내가 바다에 넣어둔 물방울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도 단 한 방울이라도 흩어 없앨 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세어 무게와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그런즉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니겠느냐?” (천상의 책 6-62,1-4 / 1904년 8월 10일)

 

예수님은 자신의 온 생애를, 그것도 나자렛에서 아주 일상적인 인간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사실 때도 벌써 모든 인간의 삶을 당신의 나자렛 삶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나자렛에서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러 타이베이(에프라임)에 가셨습니다. 나자렛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인간의 모든 삶을 다 나자렛의 당신 삶 안으로 불러 들여서 그것을 다 재현해서 올바르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나자렛의 삶은 굉장한 활동이었고, 모든 인간 행동들을 불러서 그것을 성화시켰고 그런 모든 행동 안에 신성한 공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손가락을 움직이면 나의 손가락 움직임도 예수님의 손가락 움직임 안으로 불러들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 움직임도 불러들였습니다.

 

이 문단의 결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행동하거나 내가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들 안에서 나의 나자렛 생활을 계속하곤 하였다.”

 

 예수님의 인간 생활을 우리가 청하면,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 방도 청소해주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나자렛에서의 삶을 계속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조건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나자렛 삶을 계속하시도록 우리가 예수님을 초대해야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초대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방 청소도 해주시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지향의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

이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둘째 조건은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그 모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이 두 조건을 채우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자렛 생활이든지, 당신의 수난이든지, 당신의 모든 삶을 내 안에서 사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 의해 내 숨은 생활의 희생과 수모에 대한 위로를 받는 듯 느끼면서 바로 내 생활의 공로를 그들에게 주었던 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를, 우리들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 세 가지 방법으로, 첫째, 나 카를로스 신부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읽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고, 둘째 방법은 벨틀라 수녀님의 통역을 통해서 여러분이 듣게 하시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예수님 오십시오. 당신의 뜻과 함께, 성부님의 뜻과 함께 우리에게 오십시오.

우리들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십시오.

하느님 뜻의 나라가 오시고 우리 모든 형제자매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서 오십시오.

그리고 또 우리 성모님도 항상 예수님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과 함께 계시니까 당신이 오시면 자연히 성모님도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모님도 오십시오.

그래서 우리 주님과 함께 이 장을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11권 28장 1912년 8월 14일 일기 :

10 딸아, 내가 나자렛에서 영위했던 숨은 생활을 사람들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은 실상 나의 수난을 제외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베풀 수 있었던 가장 큰 선이었다.

11 사람이 일상생활 중에 하는 모든 행위들, 이를테면 먹고 자고 마시고 일하고 불을 켜고 잠을 자는 등 누구든지 행하는 모든 사소한 행위로 나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들의 손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신성한 주화 한 닢을 쥐어 준 것이다.

 

12 나의 수난이 사람들을 구속(救贖)했다면, 나의 숨은 생활그들의 모든 행위에, 극히 사소한 행위들에도, 신적인 공로와 무한한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상생활 안의 모든 것에 그분의 신성한 삶, 신적인 삶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특별히 그분의 수난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죄를 없애고 우리를 악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수난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보통의 일상생활은,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소한 일상생활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우리들의 일상의 것을 신성한 차원으로 높여주기 위해서 사신 것입니다. 나의 숨은 생활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극히 사소한 행위들에도 신적인 공로와 무한한 가치를 주었다.” 

나와 여러분 각자를 위해서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그 풍요로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의 부유함을 누리려면, 다이아몬드를 가졌으니까 부자라는 것을 누리려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이아몬드인지를 모르면 어떻게 우리가 그 다이아몬드가 주는 부를 누리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한국어를 모르면 한국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즐기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에게는 천상의 음악 같이 아름답게 들리는 말이라도 나에게는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단순한 소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한국어로 내 생애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더라도, 내 온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말씀을 여러분이 나한테 해주더라도 한국말로 해주면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리스도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또 여러분이 신앙이 없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그 효과를 하나도 못 누립니다.

영혼 안에 예수님께서 보배를 넣어주시는 것은 신비입니다.일반적으로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보배의 가치를 모르면 그걸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이 있는 겁니다. 온 세상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예수님 신비의 귀한 보물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가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 만들어진 좋은 것이나 좋은 열매 같은 것은 알려져야 됩니다. 알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숨은 생활도 그렇고, 공생활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생활은 모든 구원과 또 모든 보배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공적 생활은 그 숨은 생활과 수난을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과 그 모든 것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적혀 있는 이 글 속에 있는 보배들, 루이사의 숨은 생활 속에서 쓰여진 이 글들은, 이 글이 모든 민족들 속으로 퍼져 들어가기 전에는 그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사소한 조그만 행동 하나하나에도 모두 신성한 공로와 한없는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부족한 것은 다만 연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게 문제입니다. 나의 삶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시키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이 그런 신성한 공로, 그런 영원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나의 걸음걸이와 그분의 걸음걸이, 나의 발자국과 그분의 발자국이 합쳐지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합쳐져야 됩니다.

그분은 자유로우신 분, 그분은 자유 자체입니다. 그리고 나도 자유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에, 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과 합쳐지는 것은 자발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유이고 나도 자유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의지로 행해져야 됩니다. 창조주로서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정배와 친구로서, 형제로서 우리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심장 박동의 문에서 우리를 두드리고, 우리 걸음걸이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고,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든 행동 하나하나 앞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들어오기 위해서, 우리의 허락을 청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리면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저녁을 잡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됩니다.

 

11권 1912년 8월 14일 일기 :

13 이제 알겠느냐? 네가 일하는 동안, 즉, 내가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네가 일하는 동안, 나의 손가락들이 너의 손가락들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서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내 창조적인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로 불러가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성화하고 바로잡아 주며 책벌하는 등의 일을 하겠느냐?

14 그러니 너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창조하고 부르며 바로잡아 주는 등의 일을 하게 된다. 네가 혼자서 일하지 않는 것과 같이 나 역시 혼자서 일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이보다 더 큰 영예를 안겨 줄 수 있겠느냐?”​

 

앞에서 본 문단에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강생으로 사람이 되셔서 나자렛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은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일하시면서도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부르고 또 사람들을 영원한 삶으로 불러 가셨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다시 구속하고 또 치료해주고 그러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느님 구원자로서 이런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 모든 책들과 이 모든 장 안에서, 그분은 당신이 누군지, 당신의 위대함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분의 존재 안에 초대하십니다. 그분 안에 우리가 같이 있고 또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가 함께하도록 우리들을 그렇게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숨은 생활과 그분의 수난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행동들을 신성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너의 그 작은 일들을 함께하자고 초대하면,

너의 모든 행동들을 나의 행동의 그 신성한 공로와 영원한 가치,

이런 것들을 너의 행동에게도 합쳐주겠다. 는 내가 하는 일을 함께하자고 너를 초대한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창조하고 있다. 또 나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른다. 나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성화시켜준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일을 내가 할 때, 내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이 모든 일을 한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겠느냐?”

우리가 만약 작은 일들을 같이 하자고 주님을 초대하면, 말하자면 시장에 가는 것 그리고 성무일도를 기도하자고 주님을 부르면, 자러 갈 때도 나하고 같이 주무시자고 주님을 초대하면, 먹는 것도 같이 먹자고 초대하면 그분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조하자고 구원하자고, 하느님으로서 하시는 당신의 모든 일, 구원하는 그런 일까지도 우리보고 같이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같이 창조하고 같이 구원하자고 하십니다.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런 창조와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부님, 당신이 나에게 주신 그 같은 영광을 저들에게도 주십시오. 나는 이들이, 이 사람들이 나와 함께 당신 오른편에 앉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신성, 그분의 능력,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원하신 것입니다.

이 장은 아주 아름다운 말로 끝납니다.

 

11권 1912년 8월 14일 일기 :

15 그러나, 내가 이해한 것, 곧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을 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익을 베풀 수 있다는 것, 이를 누가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정신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니 이쯤에서 그치겠다.

 

 그래서 우리도 루이사와 함께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하면서 계속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