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강의
(2010. 9. 15. 사제 피정)
18. ‘수난의 시간들’에 나타난 성모님의 고통들
항상 거룩하시고 나누임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느님,
저희는 십자성호로 당신을 청해 모시고
당신의 현존 안에서 이 모임을 시작하나이다.
당신의 축복으로 은총이,
저희의 세례 봉헌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당신의 모상이 되게 하신 은혜 안에 저희를 굳건하게 하시며,
당신 뜻의 생명이 저희 영혼을 다스리시게 하소서.
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저희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강생의 순간에
“보십시오, 아버지,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당신께 저희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자 하나이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2010년 9월 15일 지금 18번째 강의입니다.
루이사의 글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겠습니다. 수난의 시간들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통고의 성모님 축일입니다. 성모님 통고 축일에 이 수난의 시간들을 보는 것은 참 적절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수난의 시간들을 읽고, 루이사가 이 수난의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수난의 시간들의 마지막 시간을 읽기 전에,
각 수난의 시간을 할 때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그 준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이 준비를 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하기 전에 언제나 지금부터 우리가 할 것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며칠 동안의 피정에서 우리가 공부했던 모든 것과 연결이 되는 이 지향의 순수함은 하루가 시작될 때부터 하루 종일 계속 적용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선행적(先行的) 행위와 실제의 행위(현행적(現行的) 행위)에 대한 것을 설명하십니다.
선행적(先行的) 행위는 하루가 시작될 때에 하루 전체를 위해서 하는 행위이고, 현행적(現行的) 행위는 하루 종일 우리가 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전체를 위한 선행적(先行的) 행위가 아니라 현행적(現行的)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제적인 기도를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모든 지향을 여기에 집어넣어서 우리가 할 행동과 연결시켜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난의 시간들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각 수난 시간 전에 하는 준비기도입니다. 한 문단씩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준비기도 :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의 거룩하신 현존 안에 엎드려 사랑이 지극하신 성심께 간청하오니,
저로 하여금 당신께서 24시간 동안 겪으신 고난의 묵상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소서.
그 때 당신께서는 저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의 흠숭하올 몸과 지극히 거룩하신 영혼으로
그토록 많은 고난을 받기를 원하셨나이다.”
이 첫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현존 앞에 우리를 놓고 우리 자신이 이 수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 바치는 기도에 대한 해설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어떤 장소에 있을 때, 그냥 자기 자신이 거기에 있으니까 거기에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해서 그곳에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위한 실제 행위가 바로 이 준비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결정을 아주 확고하게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정신을 다해서, 영혼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온몸을 다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행위를 완성하고 완수하겠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원하면서 하는 겁니다. 21권과 22권에서 주님께서는 ‘그것이 내 행위의 영혼이다. 알맹이다. 핵심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놓습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이 묵상 속으로, 그분의 삶의 신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려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을 주님께 청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나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는 그분의 수난입니다. 몸과 영혼으로 받으신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이제 제가 제( )시간을 묵상하는 동안
도움과 은총과 사랑과 깊이 동정하는 마음과
당신 수난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해 주소서.”
이 기도는 주님 앞에서 바치는 아주 깊은 사랑의 행위이고 또 진리의 행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영혼은 아주 겸손합니다. 그래서 영혼 자신 안에 이 묵상을 하기에 필요한 은총과 사랑과 동정과 깨달음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주님께, 그 필요한 모든 사랑과 동정, 은총 이런 것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묵상하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해서는
그 시간들을 묵상하겠다는 의지를 봉헌하오며,
일과에 전념하거나 잠에 빠져드는 모든 시간에도
이 지향으로 그들을 묵상하겠나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영혼은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의 사랑이 품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특별히 그분의 각 수난의 순간이 우리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사랑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지금 자기가 묵상하는 이 수난의 시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 전체를 묵상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 저의 이 사랑 깊은 지향을 받아들이시어,
제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거룩하게 이미 실행한 것처럼
저 자신과 많은 이들에게 유익이 되게 해 주소서.”
영혼은 수난의 시간 한 시간을 바치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삶 전체와 모든 수난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응답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보속 행위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예수 성심께 우리가 해드려야 될 것의 핵심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속의 정신입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중에, “예수 성심의 넘쳐 나오는 물” 이라는 회칙이 있는데, 그 회칙은 성심께 봉헌된 회칙이었습니다. 그 회칙에서 교황님은 보속의 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의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도 않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속의 정신의 한 차원입니다.” 라고 하십니다.
루이사의 이 준비 기도를 보면, 루이사가 얼마나 우리가 설명한 이 정신과 하나가 되어 있었는지, 이 정신으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준비 기도를 반복해서 할 때에는 교회 안에 있는 보속의 정신에 우리를 맞추어서 함께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받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묵상 시간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예수님 수난을 묵상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본분을 수행할 때나 잠잘 때에도 이 묵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제가 질문 종이를 안 가지고 왔습니다만, 질문 중에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항상 묵상하라고 하셨는데, 매일의 본분을 하면서 어떻게 묵상을 또 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한꺼번에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수난 묵상과 본분의 일,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향으로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향이 올바르고 순수하다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서 나한테 아주 특별한 은총을 주셔서 내가 묵상도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신다면 물론 그럴 수가 있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주시면 가르치면서 묵상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굉장히 특별한 은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의 순례자(이름 없는 순례자)라는 책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흥미로운 겁니다.
러시아 순례자가 회개한 사람인데 복음에서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순례자도 신부님들이 질문하신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계속 기도할 수 있나? 가서 잠을 자기도 해야 되고, 일도 해야 되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해야 하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계속해서 항상 기도할 수 있나?"
그래서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제들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못 해주셨습니다.
마침내 중동인지 러시아인지 거기에서 현자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현자가 이 순례자에게 “와라.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현자가 이 순례자에게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나에게 와라.’ 하고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반복하라고 시켰습니다.
이것은 죄인의 기도와 같은 기도입니다.
한 주일 동안 하루에 1000번씩 그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마음과 모든 정신을 다해서 이 기도를 매일 1000번씩 하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하고 난 다음에는 현자 자기에게 와서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를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둘째 주에는 매일 2000번씩 하라고, 셋째 주에는 하루에 3000번씩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는 마귀가 이 순례자를 공격하고 온갖 종류의 유혹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매일 12,000번씩 하던 중에 어느 날, 이 순례자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에 이렇게 반복하면서 기도했던 것, 자기의 온 마음을 다해서 머릿속에서 온 힘을 다해서 기도했던 그 모든 것들이 자기 마음으로 내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순례자의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이 화살기도를 계속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그 화살기도를 계속하는데 정신은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정신은 자기가 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방교회에서 ‘예수기도’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수난을 24시간 계속 묵상하면서 동시에 다른 일과들도 다 행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은총입니다. 루이사의 글에 있는 것들에서 보면, 루이사가 이런 은총을 받은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믿습니다. 이 글 안에 보면 루이사가 항상 수난을 묵상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처음으로 이 수난을 계속 묵상하는 영혼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체 앞에서 내 수난을 묵상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 이 나의 수난을 지속적으로 계속 묵상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교회 안의 평범한 시민인 우리는 우리의 지향으로 이것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향으로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난의 시간들을 계속 묵상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나는 묵상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를 내가 주님께 드립니다.
내 일상 의무를 다하고, 자거나 그럴 때까지도 내가 이 묵상을 하겠다는 이 마음을 봉헌합니다.”
그 다음에 영혼은 주님께 자신의 이런 지향을 받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봉헌하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수난의 기도를 하는 영혼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 수난 묵상의 은혜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오 제 예수님, 기도를 통하여 당신과 결합하도록 저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더욱 더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하여 당신의 생각과 말씀과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제 온 존재가 당신의 뜻과 사랑 안에 녹아들게 하겠나이다.
이제 팔을 벌려 당신을 포옹하며 당신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시작하겠나이다.”
이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기도 전체의 핵심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읽은 많은 장들에서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묵상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안으로 영원히 녹아들어 갑니다.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마음을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저는 이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영혼은 자기 혼자 기도하고 싶지도 않고 자기 힘과 자기 능력으로 기도하고 싶지도 않고 구원만을 기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영혼은 예수님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모방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옷을 입고 예수님 안에 녹아들어가서 예수님이 기도한 것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마음을 루이사 자신이 가지면서, 루이사는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인성 안으로 녹아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뜻 안에 녹아 들어가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기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들을 위한 기도 모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여러 장들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모셔와서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루이사의 글은 저쪽에 있고, 그다음에 루이사의 기도와 마음은 이쪽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글과 기도와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루이사가 한 모든 것, 글, 편지와 다른 모든 활동이 다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였습니다. 루이사는 자기 안에 하느님의 뜻을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 뜻이 루이사의 삶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아주 훌륭한 생각들을 가지고 훌륭한 글들을 썼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루이사의 경우는 생각하고 쓴 것과 삶 자체가 완전히 하나였습니다.
그 다음 제24시간으로 가겠습니다.
지금 말한 것과 똑같은 구조가 이 수난의 시간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통고의 어머니, 이제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희생을, 곧 숨을 거두신 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어야 하는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셨으니, 하늘 뜻에 온전히 맡기시고, 예수님을 동반하셔서 어머니의 손으로 무덤에 안장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다리와 손발을 가지런히 매만져 정돈한 후 작별 인사와 마지막 입맞춤을 하시려고 하는 순간, 심장을 가슴에서 비틀어 뜯어내는 듯한 심한 아픔을 느끼십니다. 사랑이 어머니를 예수님의 지체에 못 박고, 그 사랑과 비통함 때문에, 생명이 없는 아드님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생명도 막 꺼지려고 합니다.”
우리 동정 성모 어머니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무한하고 대단해서 그 사랑이 성모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 안으로 녹아들어 갑니다. 일단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다시 당신의 마음 안으로 가져옵니다. 당신 마음 안에 넣습니다.
불쌍한 어머니는 예수님 없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가엾으신 엄마, 예수님 없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엄마의 생명, 엄마의 모든 것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이 영원하신 분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엄마는 그러니까 뛰어넘을 수 없는 두 개의 힘, 곧 사랑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몸부림치십니다.
사랑은 엄마를 못 박아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게 하고, 하느님의 뜻은 희생을 요구하며 엄마를 내리누르고…
가엾으신 엄마, 어떻게 하시렵니까?”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진실은 성모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성모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삶을 무덤 속에 남겨두겠습니까? 그 시점에서 우리 성모님이 가지셨던 문제는 바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이것의 분리를 원하십니다.
“가엾으신 엄마,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엄마가 너무 애처롭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여, 어서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서 엄마를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엄마마저 돌아가시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숨을 거두신 줄 알았던 엄마의 음성이,
흐느낌 때문에 끊어지곤 하는 떨리는 음성이 제게 들려오니 말입니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네 거룩한 몸의 이 상처들 위에 엎드려 경배하고 입 맞추는 것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위안이었고, 사실 내 고통을 반감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위안마저 내놓아야 하겠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나로서는 그분의 뜻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성모님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상처투성이의 숨도 안 쉬는 예수님의 돌아가신 몸입니다. 그러니까 성모님에게 유일한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예수님, 돌아가신 예수님에게 당신의 삶이 녹아들어가서 합쳐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둘을 갈라놓는 것이었으므로 성모님은 이 하느님의 뜻에 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뜻은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시는데 이것은 내가 알기로는 교회 안에 어떤 신비가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지금 성모님께서 하시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이 순간에 가졌던 문제를 해결하도록 성령께서 성모님을 도와주셨습니다. 사랑은 성모님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게 하고 또 하느님의 뜻은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십니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네 거룩한 몸의 이 상처들 위에 엎드려 경배하고 입맞추는 것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위안이었고,
사실 내 고통을 반감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위안마저 내놓아야 하겠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나로서는 그분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 아들아,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 다오.
그 생각만 해도 힘이 다 빠지고 생명의 숨줄이 끊어지는 것 같다…
오 아들아, 이 쓰라린 이별을 할 수 있는 힘과 생명을 받도록, 부디 내 온 존재를 네 안에 묻고,
나 대신 너의 생명과 고통과 보속과 네 모든 것을 가지게 해 다오.”
지금 읽은 말씀이 이 수난의 시간의 알맹이입니다.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주 잘 요약한 것입니다.
“나의 온 존재가 너와 함께 묻힐 수 있게 해다오.” 라고 하시면서 성모님은 당신의 온 존재가 그 앞에 계시는 예수님 안으로 녹아 들어가서 그 안에 있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 그 대신에 ‘내가 아드님의 생명과 희생 그 모든 것을 내가 가진다.’고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가진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 말씀의 산울림, 메아리입니다.
‘내가 성부님 안에 있고, 성부님이 내 안에 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의 가장 귀한 열매입니다.
‘내 사랑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살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이 내 안에서 산다.’이것이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는 제가 인용을 못하겠습니다. 세 위격이 서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 위격이 서로 다른 위격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로 상호내재(相互內在)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다. 너와 나 사이의 이 생명의 교환만이 너와 헤어지는 희생을 감수할 힘을 내게 줄 수 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던 바를 지금 성취하시기 시작합니다. 성모님께서 이제 예수님의 지체 하나하나를 당신의 지체로 삼습니다. 예수님 몸 안으로 성모님 자신을 녹여 들여보내서 거기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생명을 성모님이 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예수님의 생명과 고통과 모든 것을 동시에 성모님 안으로 가져옵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장들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과 같은 구조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흠숭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 주셨을 때처럼, 그리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만 이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밟는 과정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똑같은 구조입니다.
그리고 또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묘사도 같은 구조입니다.
사랑은 일치 속에서 완성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 안에서 살고,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내가 삽니다. 흠숭의 정신은 나의 영혼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나의 영혼이 예수님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영혼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래서 네가 내 안에 들어와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위들을 네가 계속해서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받는 영혼이 사랑하는 분 안에서 살고, 또 사랑하시는 그분이 그 사랑받는 영혼 안에서 살고, 그렇게 서로 안에서 삽니다. 이것이 시작기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단계, 이렇게 들어가고 소유하고 이런 모든 단계들이 시작기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똑같은 단계들이 성모님에 의해서 완수되는 것을 지금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삶이 예수님의 삶 안에, 예수님의 삶이 성모님의 생명 안에 녹아드는 똑같은 과정이 여기 나왔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흠숭에 대해서 공부할 때에도 성모님이 '진정한 흠숭'의 모델입니다. 성모님이 지금 하신 것이 진정한 흠숭의 모범입니다.
루이사가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에서 성모님이 예수님 당신을 만났을 때, 성모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에도 성모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 똑같이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그대로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인성은 돌아가셨는데 성모님께서는 똑같은 흠숭의 행위를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서 그대로 하십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屍身) 안으로 자신을 합치시키는, 녹아들게 하시는 그 과정들의 한두 단계를 보겠습니다.
“너와 나 사이의 이 생명의 교환만이 너와 헤어지는 희생을 감수할 힘을 내게 줄 수 있다.
괴로움에 싸이신 엄마, 그렇게 결심을 하신 후에도 어머니는 다시 예수님의 지체들을 각각 흠숭하기 시작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의 머리에 엄마의 머리를 대고 입맞추면서 엄마의 생각들을 그분의 머릿속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시들, 그분의 고통들, 그분의 모욕받은 생각들 및 그분께서 거룩하신 머리로 겪으신 모든 것을 엄마의 것으로 가지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 안에 녹아드는 과정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인간적인 의지로 예수님의 몸 가까이 갑니다. 예수님의 시신으로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를 예수님의 머리에 얹어서 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성모님께서 그것을 실제로, 물리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 앞에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에 우리의 머리를 얹지는 못합니다. 막달레나나 사도 요한이나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신이 우리 앞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지향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하느님의 뜻 안에서는 예수님이 죽어서 시신으로 누워있던 순간이 실제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는 실제로 생생하게 그대로 있습니다.
시작기도에서 했듯이 우리가 정말 하느님 뜻 안으로 녹아들어가 있으면, 예수님의 생애와 성모님 생애의 이 순간이 그 뜻 안에 실제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수난의 시간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 앞에 가서 성모님이 하시던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여기에서 지금 하신 것을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시신 앞으로 가서 당신의 머리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쉬게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머리에 대고서 성모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예수님의 몸 안에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예수님의 몸 안에서 성모님이 발견하는 모든 것, 예수님의 가시, 고통받고 모욕받은 그 생각들, 그리고 예수님이 그 거룩하신 머리로 겪으셨던 모든 고난을 성모님께서 가지셔서 자기 자신 안으로 가져옵니다.
“오, 어머니의 지성으로 예수님의 지성에 생기를 불어넣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는지!
그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의 생각과 가시들을 어머니의 정신 속에 넣으셨으므로
벌써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끼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안에 성모님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넣으시고 다시 그 예수님을 당신 안으로 가져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성모님 안에 넣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성모님은 머리로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눈에도 똑같은 것을 하십니다.
“통고의 어머니, 어머니는 예수님의 생기 없는 눈에 입맞추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셨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부서져 내립니다.
어머니를 보시는 이 거룩한 눈으로 하여, 어머니는 얼마나 자주 황홀을 느끼셨으며
죽음에서 삶으로 일으켜지곤 하셨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 어머니를 못 보는 눈이 되었으니,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느낄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예수님의 눈 속에 어머니의 눈을 넣고, 예수님의 눈과 눈물을,
사람들의 죄와 모욕과 배척 앞에서 몹시도 괴로워하시던 그 쓰라린 눈길을 어머니 것으로 삼으십니다.”
지금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지체, 예수님의 모든 부분에 똑같이 하십니다. 머리에 하신 것과 똑같이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당신 자신의 모든 삶을 녹여 부어 넣으십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님 안에 완전히 녹여 부어 넣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님의 모든 고통스러웠던 삶을 당신 자신 안으로 다시 가져오십니다.
지금 이것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루이사가 실제로 했던 것, 그것들을 루이사가 어떻게 했는지 그것을 보겠습니다.
“슬픔에 잠기신 어머니, 제발 저를 홀로 남겨두지 마시고, 어머니와 함께 있도록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나 우선 제 온 존재를 예수님 안에 넣어 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안에 모신 것처럼, 저도 그렇게 예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제게서 모든 것을 치워 주십시오.”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이 수난의 시간들에서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깊은 수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것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이 점에서 분명한 것은 이 수난 묵상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내 눈 앞에 놓고 성모님께서 하셨던 것을 그대로 우리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우리는 무척 슬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삶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을 그분의 죽음과 함께하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그분에게 드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너무 슬퍼서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나에게로 가져 오고 싶은 것입니다.
루이사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의 것을 우리가 취했었습니다. 가져왔었습니다. 티 없으신 성모님께서 이렇게 성모님의 것과 예수님의 것을 이렇게 교환했습니다. 드리고 받아오고, 드리고 가져오고. 그것을 안 하시고는 성모님도 못 사셨는데, 내가 성모님께서 했던 것처럼 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계속 살아가겠습니까?”
루이사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사는 성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성모님이 했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제 정신에 예수님의 생각을 넣어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게 하시고,
제 눈에 예수님의 눈을 넣어 제가 그분을 못 뵙는 일이 없게 하시고,
제 귀에 예수님의 귀를 넣어 언제나 그분 말씀을 들으며
무엇을 하든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제 얼굴에 예수님의 얼굴을 넣어 저에 대한 사랑으로 손상된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사랑과 연민과 보속을 드리게 하시고,
제 혀에 예수님의 혀를 넣어 그분의 혀로 말하고 기도하며 가르치게 하시고,
제 손에 예수님의 손을 넣어 저의 모든 활동과 일이 그분의 업적과 활동에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제 발에 예수님의 발을 넣어 옮기는 걸음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과 구원과 힘과 열성이 되게 해 주십시오.”
(수난의 시간들 271쪽)
그리고 루이사가 계속합니다.
이제 수난의 시간 마지막으로 가겠습니다.
성모님이 하셨던 이 사랑의 교환을 루이사가 이렇게 반복했습니다. 우리도 루이사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도 루이사가 했던 것과 똑같이 해야 됩니다. 루이사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끝을 맺겠습니다.
루이사 자신이 예수님과 했던 이 모든 사랑의 교환을 모든 존재들을 위해서 루이사가 이렇게 봉헌합니다.
“이 쓰디쓴 비탄에 의지하여 비오니, 제가 죽을 때에 어머니께서 오셔서 도와주십시오.
제 영혼이 숱한 근심과 두려움에 싸인 채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혼자 있을 때에,
제가 일생 동안 자주 어머니의 동반자가 된 것처럼, 그때에는 어머니께서 저의 동반자가 되어 주십시오.
오셔서 저를 도와주시고, 제 곁에 계시면서 원수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어머니의 눈물로 제 영혼을 씻어 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감싸 주시며, 예수님의 공로로 옷 입혀 주십시오.
어머니의 비탄과 예수님의 모든 고통과 업적으로 저를 아름답게 꾸며 주십시오.
예수님의 고통과 어머니의 비탄으로 제게서 모든 죄를 몰아내시고 그 모든 죄의 용서를 얻게 하시며,
제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어머니의 팔에 받아 안고 망토로 감싸서 원수들이 못 보게 숨겨 주십시오.
그렇게 저를 안고 천국으로 날아오르시어, 예수님의 팔에 안겨 주십시오.
사랑하올 엄마, 꼭 그렇게 해 주시겠지요?
또 청하오니, 제가 오늘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처럼, 이 순간에 임종 중인 모든 사람과 함께 계셔 주십시오.
그들 모두를 돌보아 주십시오. 이 마지막 순간은 큰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니,
그 누구에게도 어머니의 모성적인 임무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수난의 시간들 276쪽)
이 모든 수난의 시간들은 우리 성모님과 함께 한 수난의 묵상 시간입니다.
끝에 가서는 영혼이 성모님과 함께한 것을 다시 반복합니다. 수난 묵상 시간은 모든 이를 위해서 봉헌됩니다.
이 수난의 묵상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전달의 기도가 됩니다. 특별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큰 도움이 됩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이 수난 묵상이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또 이 수난 묵상이 예수님께 대한 가장 아름다운 흠숭이 되고, 보속이 되고,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한 말할 수 없이 큰 가치를 가진 기도가 됩니다.
주님께서 다른 장들에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수난 묵상을 매일 해라. 절대로 빠트리지 마라.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나의 어머니와 함께 이 수난 묵상은 꼭 해라.”
우리는 다른 묵상들도 하겠지만, 적어도 이 수난 묵상은 꼭 하고 성모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수난 묵상은 매일 꼭 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함으로써 이 수난의 시간들 그리고 수난 전체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셨기를 바랍니다.
질문 : 신부님의 수난 묵상에 대한 체험담을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답 : 이 책이 길기 때문에 전부 다는 못 읽지만 매일 적어도 수난의 한 부분은 꼭 읽습니다.
그리고 수난의 시간들을 실제로 묵상을 못 할 때는 적어도 제 지향으로 이 수난의 시간들 일부를 하는 것으로 합니다. 여러 해 동안 이 수난의 묵상을 적어도 한 시간은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해 동안 내가 24시간을 다 못해도, 준비 기도를 아주 잘하고서 24시간을 다 묵상한다는 그 지향을 가지고 수난의 시간들을 적어도 한 시간은 꼭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될 때에는 수난의 시간들 전체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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