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강의 카를로스 신부님
(2010. 9. 13. 사제 피정)
13. 하느님 뜻 안에서의 성체성사
† 주 우리 하느님,
† 십자성호로
† 저희를 원수들에게서 구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항상 거룩하시고 나누임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느님,
저희는 십자성호로 당신을 청해 모시고
당신의 현존 안에서 이 모임을 시작하나이다.
당신의 축복으로 은총이,
저희의 세례 봉헌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당신의 모상이 되게 하신 은혜 안에 저희를 굳건하게 하시며,
당신 뜻의 생명이 저희 영혼을 다스리시게 하소서.
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저희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강생의 순간에
“보십시오, 아버지,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당신께 저희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자 하나이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음성 안에서 말씀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숨 안에서 숨 쉬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심장 안에서 고동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활동 안에서 활동하소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2010년 9월 13일 오늘 13번째 강의로 이 피정을 계속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성체성사에 집중하면서 어떻게 성체를 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11권의 몇 군데를 읽겠습니다. 처음 읽을 장은 11권에 있는 1915년 11월 13일의 글입니다.
먼저 영어로 읽고 그 다음에 한국말로 읽고 그 다음에 주석으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11권 110장 1915년 11월 13일 일기 : 받아 모신 성체를 가장 잘 봉헌하는 방법.
1 성체를 받아 모신 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이를 어떻게 봉헌해야 할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언제나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네가 나를 기쁘게 하려거든, 바로 내 인성이 했던 것처럼 봉헌하여라. 나는 다른 이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기 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주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의 모든 영성체의 완전한 영광을 아버지께 드리기 위함이었고, 내가 이 성사 안에서 받는 모든 모독과 모욕에 대한 모든 보속을 내 안에 넣어 두기 위함이었다.
3 그런데 내 인성은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시대의 모든 보속을 다 담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영했으므로 합당하게 영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모든 일은 나의 인성에 의해 신성하게 되었으므로 나의 영성체로 그들의 영성체에 도장을 찍어 주고 싶었다.
4 그러지 않았다면 피조물이 어떻게 하느님을 영할 수 있었겠느냐? 나의 인성이 피조물에게 이 문을 열어 주면서 나를 영할 자격을 얻어 주었던 것이다.
5 그러니, 딸아, 너도 내 뜻 안에서 내 인성과 하나 되어 그것을 행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는 모든 것을 내포하게 되고, 나는 네 안에서 모든 이에 대한 보속과 모든 것에 대한 배상 및 나의 보속을 보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또 하나의 나를 네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 작은 장 안에 아주 중요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루이사는 9살에 첫영성체를 한 이후에 일생 동안 매일 영성체를 한 셈입니다. 루이사가 첫영성체로 예수님을 모신 후로 그렇게 예수님과의 친밀한 대화가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벌써 첫영성체 후부터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장에서도 루이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한테 말씀하셨다.”
거의 모든 장들이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중 절반은 묵상 중에, 나머지 절반은 영성체 후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루이사가 받은 모든 가르침들의 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과 영성체, 이 두 가지가 루이사가 배운 모든 말씀의 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제로서, 그리고 또 하느님 뜻의 사도들로서 사람들이 영성체 만찬상으로 오도록 권고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말씀들, 모든 신비들을 묵상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해주고 가르쳐야 됩니다.
루이사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자기 삶의 절정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서 이 두 샘, 말씀과 영성체의 샘들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느님 뜻을 많이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루이사의 글만 읽으면 다됐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말씀과 영성체를 두 개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책만 읽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거 안 될 일입니다. 루이사의 글만 읽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 루이사의 책만 읽으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은 교회의 교리와 교회의 삶과 합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루이사의 삶과도 합치되지 않는 사람들이고, 루이사의 글이나 루이사의 삶에도 합치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36권 중 어떤 장에서도,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너희들이 이제 영성체를 안 해도 된다, 아니면 너희들 나의 말씀 안 읽어도 된다, 복음 안 읽어도 된다, 그런 말씀을 하신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이걸 어떻게 봉헌해야 할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봐도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항상 첫 번째였습니다. 이것이 지향의 순수함, 깨끗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기본입니다. 기초가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열매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입니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려거든 바로 내 인성이 했던 것처럼 봉헌하여라. 영성체를 봉헌하여라.” 이것도 각 장마다 나타나는 한 가지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 또 당신 성부에 대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창조, 구원, 성화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일종의 교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하신 것을 우리가 반복해서 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까지만 읽어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영성체를 했는지, 예수님이 영성체를 했다는 것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복음에 예수님이 영성체 했다던가하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읽기를 중단한다면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 역사상의 모든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영성체를 시켜주기 전에 신부님들이 먼저 영성체를 하십니다. 미사를 드릴 때 사제가 먼저 영성체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나 바오로나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례 사제가 먼저 영성체 하는 것은 베드로에서부터 모든 사도들과 신부님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례자가 먼저 영성체 하는 것에 대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기 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주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의 모든 영성체의 완전한 영광을 아버지께 드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반복하고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이 무엇을 하는 첫째 목적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일들은 다 그 다음입니다. 창조니 구원이니 다른 이야기들은 다 그 다음입니다.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첫째입니다.
지금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의 영성체를 주님께, 그 영성체의 완전한 영광을 아버지께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그리고 “내가 이 성사 안에서 받는 모든 모독과 모욕에 대한 모든 보속을 내 안에 넣어 두기 위함이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아주 완전한 모양으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속하는 진리들 중의 하나는 하느님의 뜻은 아주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아주 무한한 바다와 같아서 하느님 뜻 안의 모든 피조물들,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이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은 하느님의 뜻처럼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보속과 모든 영광과 사랑의 모든 응답과 하느님이 받으셔야 될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합당하게, 가치 있게 받는다. 합당하게 영한다.
그리고 나의 인성으로 모든 피조물들의 일이 다 거룩하게 되었다. 신성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다 신성하게 하셨고 우리의 기도와 고독도 모두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을 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모든 것을 포함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일단 사람이 되시자, 그분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생활, 또 우리 인간 생활의 모든 차원을 다 품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봉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에 대한 완전한 보답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불완전했던 것도 다 완전하게 만드셔서 봉헌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 행동을 다 신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성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가 다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 모실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인간도 하느님을 받아 모실 만큼 합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성체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바로 이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서 주님을 받아 모십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할 만큼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어 주는 것은 누구입니까? 예,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미사에 가서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영성체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도 명예도 다 부족했지만, 그 부족한 것을 예수님의 인성이 다 채워주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인성이 피조물들에게 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나를 영할 자격을 피조물들에게 준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 결론은 실천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딸아, 너도 내 뜻 안에서 내 인성과 하나 되어 그것을 행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는 모든 것을 내포하게 되고, 나는 네 안에서 모든 이에 대한 보속과 모든 것에 대한 배상 및 나의 보속을 보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또 하나의 나를 네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영성체할 때마다 이렇게 하라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인성에 합치시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벌써 전날 배운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 안에서, 이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라고 하십니다.
이 둘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하느님 뜻의 이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일단 알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을 옆으로 제쳐놓게 되는데 이것은 유혹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 학자인 성녀 데레사가 “절대로, 절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옆으로 제쳐놓지 말아라. 네가 관상생활의 제7궁방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옆으로 제쳐놓지 말아라. 예수님의 인성 없이는 아무도 제7궁방에 못 들어간다.”
36권 중 낮은 권에서 높은 권으로 올라갈수록 예수님의 인성이 감추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인성은 항상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성모님도 항상 예수님의 인성과 함께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 안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 자신을 하느님 뜻 안에 녹아들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님 없이는 안 됩니다.
다른 장을 하나 보겠습니다.
11권 130장 1916년 9월 8일 일기 :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이는 이 뜻 안에서 예수님의 인성이 행하신 일을 거듭한다.
1 오늘 아침에는 영성체를 하고 나자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특별한 모양으로 당신 뜻 안에 나를 완전히 빨아들이셨으므로 나는 그 뜻 안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누가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없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영혼이 나의 뜻 안에 있는 한, 그가 땅에서도 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나는 영혼이 내 뜻 안으로 들어와서 이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내 인성이 내 뜻 안에서 행했던 바를 내 뜻 안에서 거듭하는 영혼들을 보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은 것이다.
3 나도 영성체를 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내가 나 자신을 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모든 것을 보속했을 뿐더러, 하느님의 뜻 안에서 무한성을 찾아내고 만물과 만인을 두루 보면서 모든 이를 싸안고 그 모두에게 성체를 주기도 하였다.
4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성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그들이 내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것으로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모두가 영성체를 한 것처럼 보속과 영광을 아버지께 드렸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그 거룩한 생명의 보속과 영광을 드렸던 것이다.
5 너도 내 뜻 안에서 영성체를 하고, 내가 행한 바를 거듭하여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보속할 뿐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이에게 주고자 했듯이 나를 모두에게 주고, 내게는 모든 이가 영성체를 한 것과 같은 영광을 다오.
6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에게 합당한 것을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일개 피조물이, 나의 행동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고 내가 행했던 바를 본받으며 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 행동들을 내게 주는 것을 볼 때에 내 마음에는 감동의 물결이 인다. 그래서 나는 즐거워하면서 그 영혼에게 거듭거듭, ‘잘했다, 딸아! 내가 했던 것과 꼭 같이 했구나!’ 하곤 한다.”
“내 인성이 내 뜻 안에서 했던 것을 내 안에서 거듭하는 영혼들을 보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시면 예수님이 무척 기뻐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 뜻 안에서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죄만 예수님께서 했던 것에 속하지 않았고, 죄만 거기에 해당이 안 됩니다. 죄를 빼고는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뜻 안으로 인도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것이 성덕 중에서도 성덕, 가장 거룩한 것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나 보속 등의 다른 모든 성덕들 중에 제일가는 성덕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나 보속의 성덕 등은 언제나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덕들은 실천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덕 중의 성덕인 이 덕은 언제나 실천할 수 있는 덕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이 성덕을 지속적으로, 계속, 언제나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이 성덕이 예수님에게 모든 인간 세대의 진실이 그 예수님 안에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당신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 안에 모든 인간들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우리가 이미 묵상했던 그 마지막 만찬에 관한 장에서 본 것처럼 주님께서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내 앞에 있고, 내가 그들 하나하나에게 지금 내가 잘라낸 양고기를 준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체 성사를 세우시는 그 순간에 와있습니다.그리고 성체 성사를 세우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들을 다 당신 눈앞에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3 “나도 영성체를 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내가 나 자신을 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모든 것을 보속했을 뿐더러, 하느님의 뜻 안에서 무한성을 찾아내고 만물과 만인을 두루 보면서 모든 이를 싸안고 그 모두에게 성체를 주기도 하였다.
4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성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그들이 내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것으로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모두가 영성체를 한 것처럼 보속과 영광을 아버지께 드렸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그 거룩한 생명의 보속과 영광을 드렸던 것이다.” (천상의 책 11-130,3-4)
영성체는 우리 안에 신성한 생명, 신성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거룩한 생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렇게 성부께 영광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실천해야 할 점이 나옵니다. 무엇을 실천해야 되는지 설명이 있습니다.
5 “너도 내 뜻 안에서 영성체를 하고, 내가 행한 바를 거듭하여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보속할 뿐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이에게 주고자 했듯이
나를 모두에게 주고, 내게는 모든 이가 영성체를 한 것과 같은 영광을 다오.” (천상의 책 11-130,5)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이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되고, 그분과 함께 그분이 하셨던 모든 일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이에게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든 이에게 주고 싶어 해야 합니다. 이런 지향과 뜻을 가지고 모든 이가 영성체한 것처럼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체를 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 안에서, 그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다 보속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부족과 무심함을 다 보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보속이 우리에게 속한 것처럼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그것을 성부께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6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에게 합당한 것을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일개 피조물이, 나의 행동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고 내가 행했던 바를 본받으며 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 행동들을 내게 주는 것을 볼 때에 내 마음에는 감동의 물결이 인다.” (천상의 책 11-130,6)
이것이 예수님을 무척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예수님이 했던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영혼은 예수님께 드려야 합당한 것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예수님께 속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처럼 그렇게 행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피조물이, 나의 행동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고 내가 행했던 바를 본받으며 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 행동들을 내게 주는 것을 볼 때에 내 마음에는 감동의 물결이 인다. 그래서 나는 즐거워하면서 그 영혼에게 거듭거듭, ‘잘했다, 딸아! 내가 했던 것과 꼭 같이 했구나!’ 하곤 한다.”
우리는 이미 11권의 장들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때, 우리 사제들이 먼저 영성체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장에서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된다. 네가 기도를 할 때는 ‘예수님께서 기도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가 기도한다.’ 그런 식으로 하라. 그리고 ‘예수님이 주무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잡수기를 원하신다.’,
또 그렇게 ‘먹고 자는 것도 예수님이 원하셔서 한다.’,
‘영성체 하는 것도 예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한다.’ 나와 함께 먹고, 나와 함께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내 안에서’ 하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영성체를 원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성사의 완전함을 성부께 영광으로 드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하실 모든 모욕을 보속해 드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때때로 주님께서 모독을 받으시는데 그것도 다 보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 신적 생명을 당신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영성체를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먼저 성체를 잡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영성체하신 것을 이제는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하신 모든 것의 공로와 아름다움과 열매를 여러분들에게 주기 위해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11권 130장 1916년 9월 8일 일기 :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이는 이 뜻 안에서 예수님의 인성이 행하신 일을 거듭한다.
7 그런 다음 그분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의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는 극히 단순한 행위이다. 그리고 단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
8 태양의 빛도 그렇다. 단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그러나 태양은 하나일 뿐이다. 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 하나의 행위는, 지극히 단순한 빛과도 같이, 모든 마음과 모든 일과 모든 사람 안에 퍼져 나간다. 그러나 행위는 하나일 뿐이다.
9 나 자신도 그렇다. 지극히 단순한 존재이기에 단 하나의 행위와도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포하는 행위이다. 발이 없어도 모든 이의 발걸음을 이루고, 눈이 없어도 모든 이의 눈과 빛이 된다.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지만 애써 힘들이지 않고 지치는 법 없이 그 모두에게 작용하는 행위를 준다.
10 그러므로 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은 단순해지고, 나와 함께 모든 사람 안에서 그 자신을 불어나게 하여 모두에게 선을 가져다준다.
11 오,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행위이건, 나의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된다면 오죽 좋겠느냐! 그들은 단 하나의 행위도 그들에게서 빠져나가지 않게 할 것이다.
교회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분의 하느님으로서의 핵심, 본질은 굉장히 단순하다. 단 하나의 영원한 행위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과 그 안의 다양한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영원한 행위, 영원한 빛에서부터 온다.’
최후만찬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예수님께서 성부께 가장 귀한 은혜를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삼위일체와 하나 되는 은혜를 청했습니다. 이 지극히 단순하고 영원한 행위 안에서 - 이 행위 안에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풍요로움과 모든 것이 그 단순한 그 행위 안에 있기 때문에 - 우리가 이 신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와의 일치를 위해서 우리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단순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과 합치되기 위해서 우리가 차차 단순해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단순해집니다. 우리 하느님이 단순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점점 더 단순해집니다. 단순해져야 합니다.
원죄 후에 우리가 굉장히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은 다시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가난하고 작아지라고, 작아지고 겸손해지라고 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다시 하나로 일치되는 것, 이 영원한 행위에 합쳐지는 것,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삼위일체와 일치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치 안에 우리를 완성하고, 삼위일체 안으로 녹아 들어가서 하나가 되고, 이 하느님의 일치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치 외에는 다른 어떤 굉장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신 것, 우리가 삼위일체와 하나 되는 것, 그 안에 녹아 들어가서 무엇이든지 없어지고, 무엇이든지 완성되는 것, 이런 하느님 안의 일치가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삼위 위격들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영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단순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 안에서 자신을 불어나게 해서 모든 이에게 선을 가져다줍니다. 무엇을 많이 낳고, 많이 생산하는 그런 풍요로움 또 모든 애덕, 그 모든 것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간단하고 단순해지는 것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단순해지면서 모든 사람을 품는 것입니다.
모든 것, 모든 사람을 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행위이건 나의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그들은 단 하나의 행위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하는 데서 아무것도 안 느낀다면, 이 모든 것을 하고서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그리고 이렇게 굉장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모든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은 신앙 안에서의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단순성 안에서, 단순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행위들의 가치는 무한한 것입니다.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기 위해서 다른 장으로 넘어갑니다.
11권 131장 1916년 10월 2일 일기 : 하느님 뜻 안에서 행하는 영성체의 효과.
1 오늘 아침에는 예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성체를 받아 모셨다. 즉, 그분의 인성과 신성과 뜻과 하나 되어 영성체를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시어 당신 모습을 보여 주시기에 나는 입 맞추며 그분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분께서도 내게 그렇게 해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네가 나의 인성과 신성 및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영성체를 했으니 내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다! 내가 나 자신을 영했을 때에 느낀 모든 흐뭇함을 네가 내 안에서 새로이 했으니 말이다.
3 그리고 네가 입 맞추며 나를 껴안았을 때에도 나의 모든 것이 네 안에 있기에 네가 모든 피조물을 다 포함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모든 피조물의 입맞춤과 포옹을 느꼈다.
4 왜냐하면, 피조물의 모든 사랑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 나 자신을 내주었을 때의 나의 뜻이었듯이 너의 뜻도 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피조물이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들지 않지만 말이다.
5 아버지께서는 내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사랑을 보상하는 사랑을 받으셨고, 나는 네 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보상하는 사랑을 받은 것이다.
6 또한,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사랑하고 내게 보상을 바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사람을 내 뜻 안에서 찾아내었으니 - 왜냐하면 내 뜻 안에는 그가 내게 줄 수 없는 것이 없으니까 - 저들이 나를 모욕할지라도 사랑하고 싶어지고, 더없이 완고한 마음들 주위에도 계속 사랑의 책략을 마련하여 회개시키고 싶어진다.
7 오직 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그런 영혼들의 사랑 때문에 나는 마치 사슬에 묶인 듯 매료되어 더없이 큰 회개의 특은을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주 굉장히 특출한 것은, 그러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우리 각 사람에게 매일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성과 신성 및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영성체를 했으니 내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다! 내가 나 자신을 영했을 때에 느낀 모든 흐뭇함을 네가 내 안에서 새로이 했으니 말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나한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무나 기쁘다. 네가 이렇게 해줘서 내가 너무나 기쁘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나를 영했을 때 느꼈던 흐뭇함, 그 기쁨을 네가 내 안에서 새롭게 했다. 내가 그 맛을 또 보게 해주었으니까 내가 여간 기쁘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의 핵심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이런 기쁨이 실제로 현실이 된다는 것과 예수님 안에 이런 큰 기쁨을 드리려면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신성과 함께 영성체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초대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그냥 반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반복하기를 원하면서 예수님을 초대하면 됩니다. 용기를 가지고, 어렵다고 물러서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그냥 계속해서 시도합니다. 계속해서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든든히 믿고 그렇게 용감하게 겁없이 청하면 예수님이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용감하게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 것을 우리 것으로 취해서 그냥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뺏어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도로 그분께 다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 안에 있는 또 다른 알맹이는 우리가 주님께 모든 세대들의 입맞춤을 드리고, 그 모든 세대들의 사랑을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과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신성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뜻과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인성을 가지고 하나 되어 영성체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의 입맞춤을 가지고 모든 인류의 입맞춤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게 안 되는데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의 뜻으로는 그게 가능합니다.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의 뜻에 합치해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주 중요한 건데,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4 “피조물의 모든 사랑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 나 자신을 내주었을 때의 나의 뜻이었듯이 너의 뜻도 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천상의 책 11-131,4)
‘너의 뜻도 마찬가지’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피조물의 사랑을 성부님께 되돌려 드리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모든 피조물들의 뜻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누구의 뜻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뜻도 잘 못 바꾸는 지경인데 남의 뜻은 당연히 내가 못 바꿉니다. 그러나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그 모든 피조물들의 뜻의 소유자가 아니지만 원할 수는 있습니다. 나의 성부께 모든 사람의 사랑을 드리려고 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굉장히 멋있는 열망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소원, 이 열망, 이것을 예수님의 뜻과 예수님의 열망과 합치시키면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주 기쁘게 해드립니다.
이 장의 결론입니다.
7 “오직 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그런 영혼들의 사랑 때문에 나는 마치 사슬에 묶인 듯 매료되어 그래서 더 없이 큰 회개의 특은을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천상의 책 11-131,7)
영원히 사랑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영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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