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강의
(2010. 9. 9. 사제 피정)
11. 하느님 뜻의 선물 (2)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이 11번째 강의는 30권에 있는 이야기로 계속하겠습니다.
10번째 강의 끝날 때 우리가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뜻과 내 뜻, 두 가지가 녹아들어가서 합쳐지는 것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끝맺었습니다.
나는 교황님이 언제, 어디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
제 생각에는 교황님 되시기 전에 하신 말씀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하나가 되기 전에는 이 세상이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회칙이나 제가 지금 인용한 교황님의 강의나 교황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교황님께서는 이 두 뜻의 일치를 아주 정확히 잘 이해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30권에 있는 이 장을 읽으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할 수 있다.
나의 뜻을 피조물에게 선물로 줌으로써 나의 뜻을 그 양쪽에 있게 한다.
그러니까 나의 뜻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또 피조물이 가지게 한다.
왕은 그것을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왕이 가족에서 한 사람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왕족을 만들려고 하는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왕이 그녀에게 자기 눈을 고정시키고 언제나 그녀를 아름답게 꾸미고, 귀한 옷을 입히고 또 자기 자신이 꾸민 것처럼 그녀도 아름답게 꾸미고 예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그렇게 같이 지내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그녀를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묶어 버립니다. 마지막 결혼의 유대로 묶어 버립니다.
그런 식으로, 왕과 그녀가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양쪽 둘이 다 다스리는 권리를 가지게 되고 또 그 가족도 왕과 친척이 되고, 그녀가 자기 자신을 왕인 자기에게 주었기 때문에 왕은 자기 부인이 된 그녀에게 대한 사랑으로 그 왕도 자기 자신을 그녀에게 주고, 그녀의 가족들을 왕의 궁전에서 살라고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 여자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 가족들에게도 줍니다.
이 장에서도 그렇고 또 루이사의 모든 글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주님께서 루이사를 부르시고 루이사한테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을 다 가르쳐 주신 목적은 루이사한테만 특별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선택한 그 가족을 다 들어높여 왕족이 되게 하고 싶어서 한 사람을 먼저 준비시킨 것처럼, 여러분과 나도 하느님 뜻 안에서 살게 하고 싶어서 루이사한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거나 간에 딱 한 사람을 위해서 완성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의 모든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성경 안에서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셔서 형성하셨습니다.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는데 그것은 모든 인류를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온 세상으로 파견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를 다 사랑하시고 또 온 인류를 다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한 사람을 불러서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본 임금처럼 주님은 결혼으로 루이사를 당신 자신에게 묶으십니다.
결혼을 함으로써 결혼한 여자, 말하자면 루이사나 그 비유에서 나온 그 여자를 통해서
온 가족이 다 그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친척이 되는 선물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했다. 먼저 우리는 인간 가족 안에서 하나를 불렀다.
우리 뜻의 왕궁에서 살 수 있도록 인간 가족 중에서 하나를 불렀다.
그리고 차차 그가 우리의 가장 귀한 비밀을 알게 하고,
우리 지식의 선물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면서, 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체험했다.
우리는 피조물 하나가 우리 뜻 안에서 사는 게 얼마나 좋고 달콤한지를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녀를 우리의 전능하신 피앗의 선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녀가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미 우리들의 능력 안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 안에, 우리의 신성한 뜻 안에 이미 있고,
또 하느님의 뜻은 그녀에게, 그 피조물에게 명예를 주고 또 그녀를 안전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자매인 루이사가 이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선물을 받을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선물이기는 하지만 루이사 덕분에, 루이사가 한 일 덕분에 우리도 그 선물을 가질 권리가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시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피앗의 선물을 인류가족의 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선물의 권리를 가지게 되고 이 선물을 획득했다.
우리는 절대로 선물을 한 사람에게만 주지 않고
우리는 선물을 주거나 선물을 주는 일을 할 때, 언제나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준다.
그래서 이 선물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그들이 원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이 모든 선물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받는 사람들이 받기를 원하고 받을 준비를 했을 때,
선물은 그들에게 주기 위해서 다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가족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하느님의 풍성함과 선함의 선물을 받을 권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받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받을 만하게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서 합당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다른 경우에서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이 선물의 위대함을 설명하십니다. 루이사가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피조물이 이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해야 된다. 그걸 원해야 된다. 받기를 원해야 된다.
둘째는 그 선물에 대해서 알기를 원해야 된다. 그 선물에 대해서 알기를 원해야 한다.
셋째로는 그 선물 받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 선물에 감사해야 된다.”
그래서 주님이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또 다시 우리 세 가지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을 원해야 된다.’ 우리 의지로, 우리 뜻으로 선물을 원해야 됩니다.
그다음 ‘이 선물,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된다.’ 우리의 지능으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선물에 대해서 너희 마음과 너의 기억으로 올바로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기억으로, 이 말은, 이 선물은 인간 전체에게, 우리의 전 존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선물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전 존재로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의지, 그 셋 중에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전 존재로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첫째 계명, ‘너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된다.’
“그러므로 내 뜻 안에 사는 것은 피조물의 소유가 아니다.
또 피조물의 능력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뜻 안에 사는 것은 선물이다.
나는 이 선물을 내가 원할 때, 또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시간에 준다.
이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우리의 큰 아량과 우리의 꺼지지 않는 사랑으로 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음으로써 인간 가족은 자신들이 자기의 창조주와 묶여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인간 가족은 이제는 더 이상 창조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가족이 될 것이고 창조주와 함께 그분의 왕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선물로 인류 가족은 자기가 아주 부자가 된 것으로 느끼고
또 이제는 더 이상 비참함을 느끼지 않고, 약함도 느끼지 않고, 떠들썩한 열정도 더 느끼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평화롭고 강력하고 은총의 풍부함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선물을 알아봄으로써 이 선물을 받은 이 인간 가족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한테 이제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나에게 이제 부족한 것이 없다.
내가 받은 선물 덕택에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 이런 얘길 하시면서 정말 이것은 선물이라는 것을 또다시 강조하시는 겁니다. 선물이라고.
이것은 누가 덕이 많거나 덕행을 실천하거나 보속을 계속하거나 공로를 많이 쌓거나 해서 획득하고 얻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에 삼일씩 재를 지켜도 안 되는 것이고, 이 선물을 받을 만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주님이 원하실 때 주시는 선물,
주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
주님이 주고 싶을 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이 선물을 성 프란치스코나, 아빌라의 데레사나,
시에나의 카타리나 같은 성인 성녀들이 받지 못했는지 이상하다. 어째서 그러하냐?’ 합니다.
그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확실히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이 우리보다 더 거룩했을 겁니다. 더 완전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훌륭했지만 예수님을 볼 행운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볼 행운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볼 때, 그때는 타당한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언자와 모세와 아브라함,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우리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원했지만 못 본 것을, 지금 살면서 우리는 보고 듣습니다. 우리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원했던 것을 그들은 원해도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행운입니까?
우리가 그분들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룩해서 이런 행운을 가진 건 아닙니다. 교향악을 보면 각 장이 있습니다. 몇 장 몇 장 서곡이 있고, 시작이 있고, 일 장, 이 장, 그 다음에 마지막 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심포니의 마지막 장의 제일 클라이맥스(climax)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어떻게 나눌 건지 결정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교향악의 마지막 장에서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한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마태 20,23)
우리는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성부께서 우리를 지금 이 시대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누가 압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주시는 것을 얼른 받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라고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고맙다고 하고 얼른 받읍시다.
여기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 하나는,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왕의 궁전. 시편 45장 기억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여왕이 나오고 정배가 있습니다.
여왕이 왕의 오른편에 있습니다. 시편 45장의 그 여왕이 얼마나 잘 차리고 있는지 영어로는 잘 차려입은 묘사를 잘 못하겠습니다. 정배들이 같이 따라오는 왕녀들과 함께 옵니다. 그들이 모두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여기서 같은 말을 씁니다. “왕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초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선물로, 선물을 받은 이는 아주 부유한 부자라고 느낄 것이고, 그 선물을 가진 인간 가족은 비참이나 약함이나 떠들썩한 열정이나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 또 피앗 볼룬따스의 시대,
그리고 인간 가족이 하느님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시대.
이 시대에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비참한 것들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이 사라질 거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이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 있는 비참함, 악함, 더러움, 이런 것들이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 가족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고 인간 가족은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선물 덕택에 우리가 모든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주님께서 계속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위대한 사랑의 결과로, 또 우리의 큰 도량의 결과로 이 선물을 준다.
만약 이 선물이 그런 것이 아니었고 또는 우리가 이 선물을 공로가 있는 사람 또는
그 사람이 희생을 했기 때문에 준다고 그런다면 이건 선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만 그 공로나 희생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지 선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물은 피조물들이 한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그랬다면 우리의 선물은 보수로 주는 것이 되었을 텐데 우리의 선물은 그렇지 않고,
우리의 선물은 노예에게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선물은 자유로운 것, 그냥 공으로 주는 것이다.”
하느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요한복음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사랑은 어떤 누구에게도 어떤 것으로든 조건 지워지지 않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사람이 있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하늘과 태양과 바람과 바다와 꽃으로 가득 찬 땅과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이 이런 모든 것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있느냐?
이 위대한 것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만들면서, 우리는 사람에게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한 선물을 주었다.
즉 우리의 전능한 피앗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선물을 주는 일을 단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주려고 했던 그 선물, 거부당한 그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다.
그 아버지가 거부했던 그 선물을 그의 자녀들에게 주려고 보존하고 있고
선물 주는 것을 도무지 단념할 수가 없다. 단념하지 않았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다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신 것입니다.
사랑! 진정한 사랑은 먼저 사랑합니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태양과 온 우주를 만드셨고 그분 사랑의 또 다른 그 좋은 것,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자체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아주 영원토록 당신의 뜻을 피조물과 나누려고 아주 결심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첫 조상이 그것을 거부했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첫 부모가 당신의 선물을 거부했는데도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그 자녀들에게 주려고 그 선물을 보관하고 계십니다. 지금 모든 게 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선물은 우리의 사랑이 넘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이 사랑은 계산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선물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대단해서 계산할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계산을 하지 않고 뭐든지 상관없이 이 사랑을 주려고 하십니다.
1925년에 루이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에서, 주님께서 루이사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도무지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도무지 너하고 계산을 할 수는 없다. 계산은 안하겠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너의 뜻이다.
네가 만약 나한테 너의 뜻을 준다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다 지워 버리겠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주님은 조건을 붙이실 줄 모릅니다. 붙일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뜻이 그분의 뜻에 자유롭게 무조건적으로 응답해드려야 합니다.
겸손으로, 신뢰로, 주님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한테 주려고 하시는 것을 원합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우리 하느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자유로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의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피조물의 응답, 피조물과 상호 통신하기를 원하고
또 피조물의 감사와 피조물의 조그만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입니다.
이 선물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모든 죄를, 더러운 것을 다 덮어버립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우리는 작고,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측량 도구로는 하느님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으로 그분의 선물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길은 그분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방법은 그분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분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도, 그래도 우리는 피조물의 상호 통신,
그 피조물이 우리에게 응답하기를 원하고 그의 감사와 그의 작은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이 무한한 선물 앞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그냥 이것을 이해하려고, 야단을 하고 또 의심도 품어보고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단순하게,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는지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감사를, 또 우리의 응답을, 우리의 작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뜻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질문 : 조금 전에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창조되었다고 그렇게 표현을 하셨나요?
답 : 물론 그렇게 말했습니다.
질문 : 그렇다면 살아계신 예수님은 인성으로 봤을 때 창조된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답 : 그분의 인성은 창조되었고, 그분의 몸도 마음도 그러니 그분은 창조된 인간입니다. 확실합니다.
질문 :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 한 사람이 더 늘어났는지?
답 : 물론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가족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머리이십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들도 인간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 성부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들까지도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인간 존재이신 예수님이 온 우주의 존재 이유이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For Him, To Him, In Him) 창조되었습니다. 이 인간 존재에게 하느님께서 모든 걸 주셨기 때문에, 이 인간 존재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신성까지 주셨습니다. 인간인 하느님입니다. 그분의 인성에게 하느님의 모든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의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아래에 있고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이 무엇을 더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을 만들어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 자신을 완전히 다 주셨습니다.
루이사에게 말하는 다른 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너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이 없고 커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우리가 창조한 것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우리가 창조한 것들을 우리 안에 또 다시 집어넣는다. 품는다.”
이것은 강생의 신비이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이 완전히 들어갔다가 다시 모든 피조물에게 가니까, 강생과 승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모든 것을 주고 그 안에 들어갑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된 다음에 그 사랑의 대상을 다시 가져와서 자기 안에 완전히 들어오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 :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네요.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피조물이시다?
답 : 네, 물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시고 피조물이시며 신격 안의 한 사람입니다. 다른 면에서 말하면 분명한 것은 그분 안에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 본성의 혼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본성이 완전합니다.
창조되지 않고 신성한 하느님 본질, 그 자체 본성은 완전히 그대로 있고, 그 다음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본성, 말하자면 그분의 인성, 인간적인 본성은 완전히 창조된 인성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혼란이 없습니다.
질문 : 인간이신 예수님은 영혼, 육신이 있지요. 영혼과 육신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쉬웠습니까? 어려웠습니까?
답 : 어렵기도 했고 쉽기도 했습니다.
그분의 영혼과 그분의 뜻은 티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습니다.
완전하고 티가 없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 안에 우리 모두를 다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던 인간의 의지가 순명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다 품고 있으면서,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 인간들의 의지에도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인간들의 의지를 존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우리 인간의 의지를 품고 계시면서 이 의지를 존중하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던 인간의 의지들 때문에 저항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인간들의 의지로 인한 저항을 이겨내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어느 시간인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의지가 예수님 안에서 막 심하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영혼에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피를 주시면서 인간의 의지가 주는 죽음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불복종하는 그 죽음에 여러 번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인간 의지의 저항을 이겨내기 위해서 피를 주시고 당신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안 당하기도 하셨는데 당신 자신의 완전한 의지는 하느님 뜻에 온전히 순명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오는 고통, 예수님께서는 당신 마음 안에서 모든 죄들의 신비의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질문 : 방금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굉장히 심오한 것 같습니다.
답 : 내가 말한 것과 같은 이런 빛,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정도로 이해한 사람은 오늘날까지 없었습니다. 루이사의 글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이것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제
가 어제도 말했는데, 예수님의 겟세마니 수난을 설교하는 신부님들의 가르침을 보면 예수님이 내일 당할 고통 때문에 겁이 났고, 괴로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루이사에게 설명해주신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들의 눈으로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는 것은, 예수님의 진실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신비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으로, 우리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우리 인간적인 면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위대하고 깊은 신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시대까지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가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그분(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7-8)
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2-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내적 삶의 바다로 너희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새로운 천년 기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예언적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 전체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라. 깊은 물속으로 저어 가라.”
이것은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교우에게 하신 말씀인데,
“지금까지 우리는 조개를 가지고 해변에서, 얕은 물가에서만 놀았다.
그런데 이제는 바다 깊은 쪽으로 들어오너라. 저어 오너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내 내적 고통은 그토록 크고 종류도 가지가지였기 때문에,
정작 수난 고통은 이 내적 고통에 주어지는 위안이요 입맞춤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고 하셨습니다.
즉 외적 고통은 해변가에서 조개를 가지고 놀 때처럼, 얕은 물에서 노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내적 고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야 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지금은 더 깊이 들어가게 해주시는 때, 성령께서 새로이 인도해 주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고 그 실수로 영혼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말로 끝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얕은 데 있으면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엇을 하는지 배우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배우는 것이고 그것도 다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때 그 당시에는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얕은 물에 있을 때 성령께서 선물도 주시고,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주셨는데 그것은 그때에는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얕은 물에서 성령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성령의 선물로 사는 것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완전하고 좋은 것입니다. 불평하거나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아직도 얕은 물속에 있으면서 열심히 일하고 자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야 될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때에 있고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더 깊은 물속으로 인도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것들을 필요로 하니까 옛날 사람들이 몰랐던 것에 대해서 흉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의 복음에서였는지, 제1독서에서였는지, 우리가 굉장히 섬세하고 지혜로워야 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다 우리와 같은 이러한 삶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특별히 가르쳐주시는 것을 형제들에게 가르쳐줄 때 우리는 굉장히 겸손하게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지나간 모든 과정들, 옛날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전부 존중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주 감미롭게 다정하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조금씩 조금씩 깊은 물속으로 인도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거나 문제를 만들거나 막 강제로 하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아멘.
두 신학자가 긍정적인 판결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판결이 내린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학자들의 판결이 몇 년 전에 나오지 않고 지금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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