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9강의 : 지향의 순결, 순수함 (사제피정)

Skyblue fiat 2014. 6. 11. 16:09

 

제 9 강의

2010. 9. 9. 사제 피정)

9. 지향의 순결, 순수함

 

   † 주 우리 하느님,

   † 십자성호로

   † 저희를 원수들에게서 구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항상 거룩하시고 나누임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느님,

   저희는 십자성호로 당신을 청해 모시고

   당신의 현존 안에서 이 모임을 시작하나이다.

   당신의 축복으로 은총이,

   저희의 세례 봉헌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당신의 모상이 되게 하신 은혜 안에 저희를 굳건하게 하시며,

   당신 뜻의 생명이 저희 영혼을 다스리시게 하소서.

   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저희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강생의 순간에

   “보십시오, 아버지,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당신께 저희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자 하나이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음성 안에서 말씀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숨 안에서 숨 쉬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심장 안에서 고동치소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이시여, 오셔서 저의 활동 안에서 활동하소서.

 

   성모송

 

오늘 9월 9일 첫째 강의는 순수한 지향을 위해서 봉헌합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주신 것들 중의 하나는 지향의 순수성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사의 글들을 보겠습니다.

 

 지금 2권에 들어가는데 2권의 첫째 장, 날짜가 있습니다.

제1권은 루이사의 자서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날짜가 없는데 2권부터 날짜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권은 언제 썼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책을 완성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루이사의 책 2권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날짜가 나옵니다.

1899년 2월 28일부터 날짜를 적으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에서 루이사는 자기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순명으로 이 글을 쓰는데 순명으로 글 쓰는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루이사가 자기 고해 신부님에 대한 비전을 환시로 보게 됩니다.

루이사가 예수님이 자기 고해 신부님한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루이사의 고해 신부님에게

10 “언제나 위를 향해 눈길을 들어 올려라. 너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니, 하늘을 위하여 일하여라.(천상의 책 2-1,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권 1899년 2월 28일 :

이 말씀을 하신 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분께서 고해사제 옆에 계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9 보아라,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늘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걸음과 말과 활동이 내 대전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순수하다면,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하여 행해진다면, 나는 그 속에서 더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얻는다.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너를 기억하게 하는 숱한 전령(傳令)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반대로, 그것이 천박하고 속된 것들이라면 내 마음을 언짢게 한다.”

10 그리고 고해사제의 두 손을 잡아 하늘 쪽으로 들어 올리시며 다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위를 향해 눈길을 들어 올려라. 너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니, 하늘을 위하여 일하여라.”

11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고해사제를 보고 있노라니, 만일 (고해사제가 예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면 마치 사람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 가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물건들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그 집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처소에 이를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행업들을 보낸 다음,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도 그리로 갈 것이다. 오! 그러면 우리의 행업들이 얼마나 멋지게 우리를 호위해 주겠는가!

(천상의 책 2-1,9-11)

 

 주님께서 루이사가 글을 쓰게 하시기 시작하셨는데, 지향의 순수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물론 루이사가 희생 제물로 사는 삶이 첫 권에도 있습니다. 첫 권은 성탄 준비 9일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진짜 36권의 시작 부분입니다. 성탄에 관한 9개의 묵상으로 된 9일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강생의 신비가 36권의 진짜 시작입니다. 아주 깊은, 심오한 묵상입니다.

그 성탄 준비 9일 기도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그 36권 전체하고 아주 깊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공부한 그분의 수난에 관한 것, 수난의 신비에 관한 것이, 그러니까 루이사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첫 권의 성탄 준비 9일 기도 안에,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그 첫 권은 루이사의 자서전인데, 성탄에 대한 묵상 9일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성탄에 대한 9일 기도 중 2개의 묵상이 첫 부분에 있고, 나머지 7개 묵상은 책의 끝 부분에 있습니다. 루이사의 생애, 루이사의 소명은 성탄 준비 9일기도를 통해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묵상들은 씨앗과 같습니다.

 

 제2권에서 처음으로 날짜를 쓰고, 날짜가 기록 된 장은 이 장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날짜를 쓰고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지향의 순수성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짜 쓰고 처음으로 쓴 것이 지향의 순수성에 대한 말씀으로 아주 긴 장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느님 신성, 그 대단한 신비에 대한 것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지향의 순수성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 안으로 인도하시는 가르침의 시작입니다.

 

9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늘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걸음과 말과 활동이 내 대전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순수하다면,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하여 행해진다면, 나는 그 속에서 더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얻는다.” (천상의 책 2-1,9)

 

 그러면 그 지향의 순수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향의 순수성의 첫째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사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만을 위해서 하는 것 이것이 기초가 됩니다. 

성 바오로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네가 무엇을 먹거나 마시거나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지향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되고 이중 지향도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의, 매일의 생활의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게, 또 모든 영적인 일들도 순수한 지향으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님께서 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것은 성경 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메신저, 전령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다 하늘로 갑니다. 그런 많은 메시지들이, 전령들이 올라가서, 주님이 우리를 기억하도록 해줍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갈 때,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을 데리고 하늘로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우리가 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하늘로 갈 때, 우리가 외롭게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행동들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 생애가 다 하늘에 있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의 심정이, 우리의 마음이 현재에 묶여 있기 때문에 보통은 이 현재의 ‘나’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라고 하면 나의 모든 인생이 지금의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만이 내가 아니라 과거가 다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모든 행위, 나의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늘에 있게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을 보면, 어떤 종교를 믿던 사람이든지, 무엇을 하고 살던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러니까 죽음과 삶 사이의 체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한 순간에 자신의 전 생애를 봤다고, 한 순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어제 읽었던 장들하고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주님 대전에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우리 생애의 작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책 안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모든 것들이 살아 있습니다. 작은 책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그리고는 루이사가 영감이라고 할까, 직감한 것이 있습니다.

 

11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고해사제를 보고 있노라니, 만일 (고해사제가 예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면 마치 사람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 가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사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물건들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그 집으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처소에 이를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행업들을 보낸 다음,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자신도 그리로 갈 것이다. 오! 그러면 우리의 행업들이 얼마나 멋지게 우리를 호위해 주겠는가!

(천상의 책 2-1,9-11)

 

 다른 장들에서 보면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들은 옷과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입게 될 옷과 같은 것입니다. 더 순결하고, 더 사랑스럽고, 더 애덕을 가지고 또 더 잘했으면 하느님 앞에서 더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옷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 뜻이라는 빛의 옷을 입게 된다는 것을.

 

어느날 루이사가 보았습니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다 빛 정도가 아니라 태양인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태양이었습니다.

 

루이사의 행위들은 다만 순수한 지향만으로 행한 인간의 행동일 뿐만이 아니라,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뜻이 그 루이사의 인간적인 행동들 안에 다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지향의 순수함을 가르치신 다음에 즉시 ‘믿음은 곧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믿음이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서 그 하느님의 선물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느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열려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면서 또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외부의 빛내부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외부의 어떤 빛의 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태양, 촛불, 전등 같은 그런 빛이 필요하고, 그 빛이 우리가 보는 물건에 형태도 주고 빛깔도 주고, 그래서 그 빛들 때문에 그 물건이 그렇게 형태와 빛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내부의 빛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러려면 건강한 눈을 가져야 됩니다. 이 두 가지, 밖의 빛과 안의 빛 사이에서,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거나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눈은 건강한데 밖이 아주 캄캄하면, 해도 없고 촛불도 없고 전등도 없어서 밖이 캄캄하면 눈이 아무리 건강해도 못 봅니다.

그다음에 이제는 햇빛도 있고 전등도 있고 초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님이면 혹은 눈을 감고 있으면 못 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다른 선물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상황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체 안에 계십니다. 그다음에는 말씀 안에, 성경 안에 계십니다. 성사들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복음 안에 예수님이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이런 사실들 모두는 밖에 있는 빛입니다. 태양 빛, 전등, 촛불과 같은 밖의 빛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는 영적 시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빛이 또 필요합니다. 다른 시각이,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을 가져야만 그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선물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감각, 영적인 감각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감각이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초자연적 차원에서도 언제든지 이 두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신비의 반영과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 둘입니다. 성부와 성자 둘이 있는데, 성령은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겁니다. 눈의 예를 볼 때, 눈은 태양과 같습니다. 하느님 성부는 빛입니다. 그 다음에 보는 능력, 시각은 성령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능력은 이 둘을 하느님께 반사해 주는 성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본다는 작용은 삼위일체 신비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질문 : 성자는 무엇입니까? 성부는 빛이고, 시각은 성령이고, 그렇다면 성자는?

답 : 성부는 빛의 샘과 같습니다.

이 예에서는 성부는 빛의 샘으로서 성자를 낳고, 성자는 낳음을 받는 쪽이고, 성령은 그 둘을 합쳐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삼위일체 작용은 모든 분야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고, 우리가 보는 작용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지향의 순수함으로 돌아갈까요?

 

4권 1900년 11월 20일 일기 :

모든 것 속에서의 순결. (사랑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혹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그 무엇에 있어서나 순결의 결핍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반사되어 흠집을 낸다. 그러므로 나는 순결이, 해 뜰 무렵 꽃송이들 위에 앉은 이슬처럼 빛나기 바란다. 빛살이 그 작은 이슬방울들을 비추면서 그만큼 많은 수의 값진 진주로 바꾸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만일 너의 활동과 생각과 말과 맥박과 애정과 욕구와 경향이 죄다 천상 이슬 같은 순결로 치장된다면, 사람들의 눈뿐만 아니라 모든 천상 주민들의 눈에도 황홀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어제 읽은 장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기록된 작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리의 의지 안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의지 속에 다 기록이 되기 때문에, 우리 행위가 좋지 않으면 우리 의지 안에 흠집을 냅니다. 주님께서 이 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순수의 덕, 우리가 해야 할 모든 덕 안에서, 순수한 지향으로 살라는 그 부르심, 그 초대는 미사 참례할 때, 영성체할 때, 초자연적인 것을 할 때만 순수한 지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를 할 때, 다 지향이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활동과 생각과 말과 맥박과 애정과 욕구와 경향, 모두 다 순수한 지향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가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초자연적인 것도 아닌 먹는 것 마시는 것, 그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수한 지향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만 순수한 지향으로 살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일 즉, 먹는 것, 마시는 일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려고 연습을 해야 하고 그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먼저 잘해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산다는 것은 이렇게 천상의 책들을 읽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천상의 책들을 몽땅 다 외우고 있다고 해도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은 이렇게 단순한 것,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들어있는 아주 굉장히 중요하고 짧은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만약 그것들이 나를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면, 나를 위해서.”

 

미사의 감사기도에서 끝부분에 영어로 이렇게 합니다.

For Him, With Him, In Him.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이 세 가지.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올라가야 될 계단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2000년 동안 교회가 가르쳐 온 것입니다. 모든 영성 신학, 모든 영성이 다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것을 하고 주님을 위해서 저것을 하라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를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에도 ‘나를 위해서’ 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차차 ‘나와 함께’ 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루이사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초대해라.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와서 너와 함께 이것을 하겠다. 너와 함께 무엇, 무엇을 한다. 이렇게 나를 불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다음에 루이사가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무엇을 하는데 훈련이 아주 잘 되었을 무렵이 되어서는 주님께서 ‘이제는 내 안에서 하라.’고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 안에서 해라.”

이게 바로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분의 법에, 그분의 계명에 순명하는 겁니다. 여기서 루이사의 글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처음에 하던 순명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다가, 더 깊이 들어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도록 그렇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7권 1906년 9월 11일 일기 :

주님께서 계속해서 지향의 순수성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딸아, 인간의 모든 일과 말과 생각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 이 날인이 없는 모든 것은 우중충해서, 더러워진 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듯하거나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고작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제 자신으로부터 어둡고 혐오스러운 것만을 끄집어낼 뿐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활동하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창조된 목적을 벗어나기 때문에 흡사 하느님과 헤어진 것처럼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홀로 하느님만이 빛이시기에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간의 행위가 가치를 얻게 된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지 않음으로 인해 인간 자신의 어둠에 묻혀 있게 되고 자신의 노고에서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득은커녕) 빚이나 잔뜩 지게 되지 않겠느냐?”

 

  우리 자신만으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창조자 또 성부 성자 성령과 연결이 끊어지면 우리는 창조된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하느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가르침들은 모두 다 영원히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일치되도록, 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그래서 이냐시오 로욜라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람들한테 이 점을 잘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면, 그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무 가치 없는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한테 요점을 아주 잘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까지도 큰 가치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이제 신앙이 없는 사람들, 외인들이 가난한 사람 누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그런 것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모든 것은 우리의 초자연적인 목표, 그것을 뚜렷이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안에는 초자연적인 우리의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이런 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그냥 인류의 선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제9권 1910년 3월 8일 일기 :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오늘 아침에는 복되신 예수님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그것이 영혼을 빛으로 변화시켜 신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게 한다. 영혼은 어두컴컴한 방에 불과하지만, 올바른 지향이 태양과도 같이 빛살을 보내어 방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올바른 활동은 모든 것을 빛으로 바꾸는 반면, 태양은 방의 벽까지 빛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몇 십 번이나 이 문제로, 이 지향의 문제로 되돌아오십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는 지향, 신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그녀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신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을 모두 품어서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냥 이 눈물의 골짜기에 다 남겨두려고, 그냥 거기 같이 살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데려가려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원 성소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상이 된다, 그분과 닮는다는 것은 그분 식으로, 하느님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 영성 신학들은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비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여주셔서, 감동시켜주셔서 우리가 행동을 하면 우리의 행동이 신적인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 신학은 사람을 두 시기로 구별합니다. 영혼이 가는 길에서 수덕적인 부분과 신비적인 부분을 갈라서 이야기합니다.

 

  수덕적인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 힘으로 일을 행합니다.

 영혼이 신비적 단계에 도달하면 성령이 당신의 선물을 통해서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자신의 선물을 가지고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말할 수 없이 존중하시지만 성령이 영혼 안에서 주 활동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신비적인 단계에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원해서 행동하는 것을, 그래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감동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신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거라고 영성 신학은  말합니다.

 

 내가 돌리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신부님이 주신 아름다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수덕적인 단계는 작은 배, 노를 저어가는 작은 배입니다. 영혼은 아주 힘들게 자기 힘으로 노를 저어서 갑니다. 수덕적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언제나 은총이 가르쳐 주는 대로 힘들게 노를 저어갑니다. 신비적 단계에서는 작은 배가 있는데, 돛단배입니다. 성령이 바람을 불어줘서 돛단배가 돛을 달아서 갑니다. 그러면 영혼은 그렇게 할 일이 많지가 않습니다. 바람을 불어서 배를 몰아가는 것은 주로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교회와 영성 신학은 지금까지는 이 상태를 하느님 뜻대로, 그것이 신비적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또 지향에 대해서 20권 어디에선가 말씀하십니다.

“지향이 없는 행동은 시체와 같다. 시체이다.”

왜, 이것을 하는지 목적도 없이, 지향도 없이 무슨 행동을 하면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지향이 우리 행위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행위들 안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 목적에 따라서 우리 행위에 여러 가지 다른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목적이면, 내가 인간적인 목적으로 일하면 그 목적에 주는 영혼은 인간적입니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행동을 하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행동에게는 우리가 거기에 맞는 영혼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지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아침에 봉헌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수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향을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기도 생활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가 끝나면서 그날 하루 잘못한 것을 용서하고, 감사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침에 바로 그날 할 모든 걸 봉헌하면서, 그날 하루 자기가 할 일 안에, 할 일들에게 지향을 주어야 됩니다. 

 평신도들이 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침에 봉헌하는 것을 평신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상생활, 보통의 생활, 보통의 일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 하느님의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됩니다. 그렇게 아침에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평신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수준으로 신비적인 수준으로 들어 높여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미 벌써 아침에 미사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드리고, 기도 바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이미 다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따로 들어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나 성무일도나 이런 것은 다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는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일들을 잘못하면 자연적인 수준으로 내려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평신도도 성직자도 다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자기들의 모든 것을 영적인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되고, 사제들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낮춰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교회 안의 두 부분에, 두 가지 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곳으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향의 순수함이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를 분명히 모른다면, 만약 우리가 순수한 지향이나,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올바른 의식이 없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제들의 중요한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자기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을 초자연 수준으로 들어 올리는 것, 그렇게 하도록 도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 안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에게 보배를 주십니다. 또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독서(1코린 8, 1ㄷ-7. 11-13)에서는 지향의 순수함만 가지고도 넉넉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애덕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코린토 전서의 이 부분에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식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성 바오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또 다른 것, 무엇을 더 하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양심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지향은 순수하지만 그 순수한 지향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가 언제나 순수한 지향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하고, 또 동시에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도록 청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식에서 점점 더 자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여기서 성 바오로의 말씀으로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들은 다 아무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그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것을 먹을 수도 있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형제자매들의 약함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자기는 해를 입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먹으면 다른 약한 형제자매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충실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의 순수한 지향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을 생각해주었습니다.

 

 여기 시편 응송(시편 139(138),1-3.13-14ㄴ.23-24(◎ 24ㄴ))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의 길이 삐뚤어진 길이 아닌지를 알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복음(루카 6, 27-38)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복음의 새로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방인들의 세상에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도와줍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나를 반대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쇄신하기 위해서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이런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초대받았고, 우리가 원래 이런 목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라고 초대를 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항상 하느님 자신입니다. 사랑 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영원한 신적인 존재이고 그것에 항상 충실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신성하십니다. 하느님은 태양 같습니다. 빛이고 열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태양처럼 주님은 언제나 삶을 주시고 열을 주십니다.태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달렸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서, 그 정도에 따라서 태양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을 모방하는 것을, 닮는 것을 배웁니다. 닮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아들들이요 딸들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구약에서 했던 대로 한다면, 구약에서처럼 우리 형제자매만 사랑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때 구약에서는 그게 탈리온 법이었답니다.

나한테 좋은 것만 내가 좋아한다면, 또 나한테 나쁜 말을 하는 사람한테 내가 나쁜 마음으로 대응한다면, 그 좋은 말을 한 사람이나 나쁜 말을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사람한테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매이는 노예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성덕이나 내 인품은 그 사람들이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 따라서 내 인품이나 성덕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주님께로부터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빛과 열을 주십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 통제받습니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이 사랑이니까 사랑, 사랑으로 행동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하느님의 신성하심을 같이 소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인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삶의 그 두 가지 차원이 드러나 있습니다. 자연적인 차원, 즉 탈리온 법, 구약의 법에 의해서 행동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적인 차원이 있고, 하느님의 아들딸들로서의  초자연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느님처럼 행동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모두 다 사랑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도록,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동정 마리아 어머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지향의 순수함을 청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 신성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을 주시기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삶의 기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