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강의
(2010. 9. 8. 사제 피정)
7. 예수님 영혼의 수난 (1)
✞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하신 설명과 그 효과에 대한 설명을 이번 강의에 계속하겠습니다.
이 장은 13권 1921년 10월 21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먼저 영어로 이 장 전체를 읽은 다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고 그 다음 설명을 하겠습니다.
1 다정하신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니 그분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영혼이 내 수난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겪은 것을 기억하거나 나를 측은히 여길 때마다 내 고통이 그 영혼에게 새로이 적용된다. 내 피가 솟아나서 그를 잠그고, 내 상처들이 그를 치유하거나 단장한다. 그가 상처를 입고 있으면 치유해 주고 건강하면 아름답게 단장해 주는 것이니, 내 모든 공로가 그를 부유하게 한다.
3 그러니까 영혼은 매우 놀라운 장사를 하는 셈이다. 내가 행했고 겪었던 모든 것을 판매대에 놓아 이윤을 갑절로 남기니 말이다. 사실, 내가 행하고 겪었던 모든 것은, 태양이 지구에 빛과 열을 끊임없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지속적으로 사람에게 베풀어지고 있다. 나의 업적은 고갈되는 법이 없다. 영혼이 원하기만 하면 원할 때마다 내 생명의 열매를 받는다. 그러므로 내 수난을 스무 번, 백 번, 천 번 기억하면, 그만큼 더 많은 효과를 누리게 된다.
4 그러나 이를 소중한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내 수난의 모든 선익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영혼들과 소경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들을 −민망스럽도록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영혼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수난이 잊혀 가고 있기 때문이다.
5 내 고통과 상처와 피는 허약함을 없애는 힘이요,
소경에게 시력을 주는 빛이며, 혀를 풀고 청각을 열어 주는 혀이고,
절름발이를 똑바로 걷게 하는 수단이며,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생명이다.
온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치료제가 내 생애와 수난 안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약을 무시하고 이 치료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구원 사업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치의 폐병에 걸리기나 한 듯 죽어 가는 인간의 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6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비통하게 하는 것은, 교의나 신학 이론이나 역사 따위의 탐구에 매진하는 교인들이 정작 내 수난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수난은 번번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사제들의 입에서 추방당하곤 한다. 사제들의 말에 빛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니, 그들의 말을 들은 이들은 전보다 더 굶주린 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1) 인간의 세 가지 능력으로 수난의 묵상을 할 때 이윤을 두 배로 받는 장사를 하는 것
우리 이 장의 시작에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이 첫 장에서 인간의 세 가지의 능력과 그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할 때마다(지성), 예수님이 겪은 것을 기억할 때마다(기억), 예수님을 불쌍하게 측은히 여길 때마다(의지) 예수님의 일들이 그 영혼에게 새로이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이 영혼이 당신의 수난에 온통 다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영혼이 당신의 수난으로 들어가면 그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그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로와 당신의 피와 당신의 고통이 그 영혼을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게 꾸며 줄 것인가를 이야기 하십니다. 그래서 영혼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이 장사를 잘하게 됩니다. 영혼이 큰 이윤을 내는 장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하는 영혼은 주님의 모든 수난과 공로를 은행에다 집어넣고 이윤을 두 배로 받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옵니다.
"나는 내가 행하고 겪었던 모든 것을 계속해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태양에 비교하십니다. 태양은 지구에게 빛과 열을 계속해서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처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주님의 영에게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원히 계속해서 효과를 내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 번 하신 것이 그전에도 행해졌었고 지금 또 행해지고 앞으로도 영원히 행해집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인류의 온 역사를 감싸고 온 우주를 감쌉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열려 있는 상태가 계속되게 만듭니다.
"나의 일은 끝나는 법이 없다. 나의 업적은 고갈되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영혼이 수난을 여러 번 기억하면 그 만큼의 효과가 나옵니다.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태양은 모든 사람에게 빛을 줍니다. 모두에게 속합니다. 누가 태양의 빛과 그 따뜻함을 즐기고 싶으면 누구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효과가 나옵니다.
태양은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에 아주 유용했습니다. 태양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빛과 따뜻함을 주어서 유용했고, 인류의 마지막 인간에게도 똑같이 빛과 따뜻함을 주어서 유용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태양의 이미지를, 태양을 비유해서 이야기하신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당신의 뜻과 비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태양은 창조된 태양이고, 주님은 창조되지 않은 태양입니다. 태양을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주님과 우리가 보는 창조된 태양을 자주 비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태양을 창조하실 때, 태양에게 너무나 많은 빛과 열과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창조된 태양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빛과 열을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삼위일체께서도 온 인류를 위한 모든 선을 다 가지고 계시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 삼위일체 전체가 예수님의 인성 안에 거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의의 태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빛을 주는 태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성부님께서 인류 전체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 앞에 서면 항상 그 모든 효과를 다 받는 것입니다. 태양이 주는 열과 빛과 모든 것을 다 받습니다. 그런데도 이 소중한 보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내 수난의 모든 선익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영혼들과 소경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들이 있다.
민망스럽도록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영혼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내 수난이 잊혔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나의 수난을 뒤로 제쳐놓기 때문에, 지금도 슬픈 상황인데
이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후에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모든 치료제들은 다 내 생애와 내 수난 안에 있다."
우리 사제들 자신과 사제들이 사목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우리 사제들에게 그 자신과 가족을 맡긴 사람들, 우리 사제들에게 맡겨진 공동체, 우리 사제들에게 맡겨진 나라와 교회와 온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은총은, 보배들은 다 예수님의 수난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수난 속으로 잠겨 들어가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획득할 수 있습니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보배들을, 은총들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하시는 약속은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수난 덕분에 얻어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수난 속으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다른 장의 다른 문단에서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나와 같은 뜻으로 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발음하는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주겠다.”
그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읽고 묵상한 것 덕분에 연옥에 있는 영혼 하나가 하늘나라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할 위험이 있는 영혼 하나가 회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 수난을 묵상할 때 거기 있는 단어 하나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는 힘든 영혼들을 구해 준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단어 하나에 영혼 하나를 구해 준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장에서 루이사가 주님께 이 수난 묵상에 대사(大赦)가 주어지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의 대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가치의 부를 지닌 한 움큼의 사랑을 준다.”
대사(大赦)의 경우에, 어떤 대사(大赦)라고 하면 거기에 약속된 은혜를 하나 받습니다.
"그러나 내 수난을 묵상하면, 네 영혼에게 한주먹 풍성하게 입맞춤을 주겠다.
그리고 아주 영원토록 유용한 것을 주겠다."
대사(大赦)는 아주 중요한 은총인데, 우리 빚을 갚아주는 그 은총을 교회가 줍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대사(大赦)에 붙어있는 은총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그리고 대사(大赦)는 교회가 어떤 조건을 지워주고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하면 그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주는 그런 대사(大赦)들과 함께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이 대단한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다른 장에서 또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내 수난을 묵상할 때마다 나의 인성이 빛인데, 그 빛이 나와서 너를 입혀주고 감싸준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시는데, 이 옷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필요한 옷입니다.
예수님을 입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빛이신 예수님을 입어야 됩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고 있었다고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내 의지, 내 뜻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발가벗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부활했을 때의 나의 인성처럼 그렇게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질, 헝겊으로 된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빛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지었을 때 그들이 그 빛으로 된 옷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빛으로 된 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발가벗게 된 것이고 그래서 수치를 느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부입니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읽으면 더 많은 약속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난에 대한 이런 구절들을 다 읽고, 사람들한테 이걸 가르쳐주어서 사람들이 이것을 묵상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한테 이 수난 묵상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신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수난 묵상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이해하면,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전부 재현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되고 알게 해야 됩니다.
수난 묵상은 예수님이 하셨던 그것과 같은 효과와 힘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난 묵상은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악을 쳐부수기 위한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리고 아주 강력한 구마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수난은 단순히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구마가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의지와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이 수난을 묵상하고,
사람들을 정화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아주 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은총을 얻어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성체를 현시해 놓고 이 수난 묵상을 하면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수난 묵상을 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 본당 안에, 그 공동체 안에 굉장한 효과가 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13권 1921년 10월 9일 일기를 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수난 묵상의 풍요로움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수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와 다음 강의에서 이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예수님의 영혼의 수난입니다.
영혼이라는 말을 핵심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수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매맞으시고 가시관을 쓰고, 못에 박히셨습니다. 그렇게 외적으로, 육체적으로 수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외적 수난만 압니다. 그런데 그 외적으로 당한 수난,
매맞으시고 가시관 쓰시고 못 박히신 모든 것은 예수님 수난의 가장 작은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진짜 수난은 예수님의 영혼이 받은 수난입니다.
예수님의 내적 수난이 바로 예수님 영혼의 수난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수난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영어로 다 읽고 통역자가 한국어로 읽겠습니다.
13권 1921년 10월 9일 : 22장
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 만찬 중에 하신 일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사랑하올 그분께서 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눌 때 나는 다만 그 제자들만이 아니고 온 인류 가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그들 모두와 함께 있었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알고 있었으며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또 너도 불렀다. 너에게 나와 요한 사이의 영예로운 자리를 주어, 내 뜻의 작은 비서로 세웠던 것이다.
3 그리고 구운 어린양을 잘라 내 사도들에게 주면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각각으로 주었다. 피를 뽑아내고 구워 토막을 낸 그 어린양은 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생명의 상징이었다. 내가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어떻게 될지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4 나는 또한 내 수난을 상징하는 그 어린양을 모든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주고자 하였다. 내가 행하고 말하고 겪은 모든 것이 내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위한 음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5 내가 왜 모든 사람을 불러 그것을 주었는지 그 까닭을 알겠느냐? 왜냐하면 나도 그들에게서 음식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과 일과 말을, 곧 그들의 모든 것을 내 음식으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6 “제 사랑이시여, 저희의 일이 어떻게 주님을 위한 음식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해 주셨다.
7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내 뜻이 살 힘을 주는 모든 것으로 산다.
빵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내가 그렇게 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8 피조물의 모든 일도 그의 뜻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음식이 되게 하겠다는 뜻으로 일하면 그 결과 내 음식이 되는 것이다.
내게 사랑을 주고자 하는 뜻으로 일하면 사랑이 되고, 보속하고자 하면 보속이 된다.
마찬가지로 나를 모욕하려는 뜻으로 일하면 그 일이 내게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 나를 죽이기까지 하는 칼이 된다.”
9 그분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뜻은 사람을 자기 창조주와 더욱 닮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사람의 뜻 안에 내 무한성과 능력의 일부를 담아 주었고, 그것에 영예로운 위치를 부여하여
사람의 전 존재를 지배하는 여왕이 되게 함으로써 사람의 일을 전부 맡아 간직하게 했기 때문이다.
10 사람이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금고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영혼도 자기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이 안에 스스로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안전하게 보존한다.
11 단 하나의 생각도 잃지 않는다. 눈과 입과 행위로 할 수 없는 것이라도 자기의 뜻으로 행할 수 있다.
한 순간에 수없이 많은 선을 원하거나 수없이 많은 악을 원할 수도 있다.
뜻이 그 영혼의 생각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할 수 있고, 더없이 멀고 깊은 나락의 심연에 빠뜨릴 수도 있다.
12 활동하고 보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자기의 뜻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가 행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신의 뜻 안에 보존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13 오, 그러니 이 뜻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펼쳐질 수 있겠느냐!
얼마나 많은 선과 얼마나 많은 악을 내포할 수 있겠느냐!
14 이 때문에 내가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뜻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을 가진 셈이 되고, 견고한 성채를 정복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굉장하고도 특이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루이사가 예수님 안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루이사가 자기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루이사의 묵상의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루이사한테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루이사가 영성체를 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생각할 때라든지,
아니면 루이사가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루이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한테도 굉장히 중요하고, 사람들한테도 가르쳐줘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루이사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 안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에만 우리한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그렇습니다. 복음에서도 기적들을 행하실 때, 언제든지 "믿느냐?" 고 물으시고, 사람들이 믿을 때, 그것을 조건으로 기적을 행해 주셨습니다. 이 미덕, 즉 예수님께 매력을 느끼고 예수님께 끌리고 이렇게 되는 것은 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열려있고 은총을 받아드릴 성향, 열림이 있어야지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 안에 이런 성향, 받아들일 지향이 준비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영혼 앞에서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한테 오지 못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특별히 하늘에 계신 성부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끌리게 되도록 성부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토양이 좋아야 되는데, 사제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좋은 토양을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시작 부분 기도에서 우리가 이것을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우리의 성부님께 우리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예수님의 신비를 우리 마음속에 열어 보여주시기를 우리가 성부께 청합니다.
그렇게 예수님한테 끌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22장의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
2 “딸아,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눌 때 나는 다만 그 제자들 하고만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인류 가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있었고 그 모든 피조물들을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알고 있었고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식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머리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도 생각해야 됩니다. 하느님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첫째이시며 머리이시고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티 없으신 분이시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넉넉하지가 않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체험은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내 인간적인 경험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공부할 때, 예수님을 설명할 때 흔히 우리의 조그만 인간 경험을 가지고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은 예수님을 조그만 인간으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은 그냥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성모님은 여자 중의 여자,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여자, 영어에 The 정관사 같은 완전한 여자입니다. 최대로 가능한 정도로 완전히 완전한 분입니다. 죄가 없고 마음과 정신과 의지에서 절대적으로 순결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려면, 너무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비유로써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도 우리의 빈약한 경험으로만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신비를 다 이해하려면 우리가 인간적인 능력으로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상상이 안 되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보여 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열어보여 주셔야지 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읽었던 이 짧은 문장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 우리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게끔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예를 들면 최후 만찬 때, "모든 세대의 온 인류가 최후 만찬 때 나와 함께 있었다. 내 앞에 있었다." 라고 하십니다. 그 모든 인류가 최후만찬 때 당신과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이 "내가 그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고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그 이름으로 불렀다." 예수님 자신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십니다. 지금 성사를 세우시는 그 순간이 아니라 마지막 만찬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고 양고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3 “구운 어린양을 잘라 내 사도들에게 주면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각각으로 주었다.
피를 뽑아내고 구워 토막을 낸 그 어린양은 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생명의 상징이었다.
내가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어떻게 될지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4 나는 또한 내 수난을 상징하는 그 어린양을 모든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주고자 하였다.
내가 행하고 말하고 겪은 모든 것이 내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위한 음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책 13-22,3-4)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양고기를 제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셨는데,
그것은 실제로 당신 자신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각 사람들이 먹을 음식으로 변하게 했는데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는, 사랑은 하느님이 먼저 사랑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하나씩 다 주시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겁니다. 당신 사랑으로 양고기를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켜서 주신 겁니다.
그분의 모든 삶이 음식으로 변했습니다.
5 “내가 왜 모든 사람을 불러 그것을 주었는지 그 까닭을 알겠느냐?
왜냐하면 나도 그들에게서 음식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과 일과 말을, 곧 그들의 모든 것을 내 음식으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천상의 책 13-22,5)
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예수님을 음식으로 바꾸어 주었다면
사랑이 우리를 또 예수님을 위한 음식으로 바꿔줘야 합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즉시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6 “제 사랑이시여, 저희의 일이 어떻게 주님을 위한 음식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해 주셨다.
7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내 뜻이 살 힘을 주는 모든 것으로 산다.
빵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내가 그렇게 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천상의 책 13-22,6-7)
그 다음에 영양분을 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이 덕을 줍니다.
8 피조물의 모든 일도 그의 뜻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음식이 되게 하겠다는 뜻으로 일하면 그 결과 내 음식이 되는 것이다.
내게 사랑을 주고자 하는 뜻으로 일하면 사랑이 되고, 보속하고자 하면 보속이 된다.
마찬가지로 나를 모욕하려는 뜻으로 일하면 그 일이 내게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 나를 죽이기까지 하는 칼이 된다.” (천상의 책 13-22,8)
내 심장 박동이 뛸 때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
그 심장 박동이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즉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인간 존재 안에서 왕이나 여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제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우리 눈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아름다움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온 몸의 조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과 가장 닮은 것을 찾아내려면 그 사람의 의지로 가면 됩니다. 그 사람의 의지가 하느님을 제일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9 “사람의 뜻은 사람을 자기 창조주와 더욱 닮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사람의 뜻 안에 내 무한성과 능력의 일부를 담아 주었고,
그것에 영예로운 위치를 부여하여 사람의 전 존재를 지배하는 여왕이 되게 함으로써
사람의 일을 전부 맡아 간직하게 했기 때문이다.” (천상의 책 13-22,9)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그가 하는 그 모든 일이 그 사람의 의지 안에 예금처럼 맡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가 금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의지는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의지가 원하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사랑, 보속, 경배, 사랑에 대한 응답, 우리 의지가 무엇을 하든지 원하는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가 그만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음식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음식으로 바꿀 수 있고 바꾸어야 됩니다. 영적 음식입니다. 이것이 한 면입니다.
다른 면은 우리의 의지는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을 담아 두는 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단 한 가지 생각도 딴 데로 흘러가서 잃어버리지 않고 전부 우리 의지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하십니다. 눈으로 또 입으로, 또 일로 할 수 있었던 것을 그 의지는 한 순간에 다 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는 작은 책입니다. 세말(世末)에 가서 열어보아야 될 책입니다.
아주 큰 책 앞에서 열어보게 될 작은 책입니다. 생명의 책 앞에서 열리는 작은 책입니다.
묵시록에 보면, 세말에 우리는 어떤 한 시점에 도달하게 되고 우리 앞에 아주 큰 책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많은 작은 책들이 있는데 만약 큰 책에 있는 것이 이 작은 책에 없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끝부분에 가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의지의 이 작은 책이 펼쳐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그 작은 책 안에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책에 기록된 것이 그 큰 책에 기록된 것과 같지 않으면, 그 책을 다시 쓰기 위해서 연옥으로 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 작은 책이 큰 책과 완전히 같아질 때까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작은 책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서,
'아, 그게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었고,' 라고 아무리 변명을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오, 모든 죄, 이것은 어떻게 되나?' 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게 되면 모든 죄가 다 용서되고, 하느님의 자비가 그 끔찍했던 죄를 대신하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가 죄가 있던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됩니다. 그것을 다 바꿔놓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모든 피조물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모든 사람들의 삶을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질렀던 나쁜 일들은, 만일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미안해하고 후회하면, 그리고 우리가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없애주십니다.
그 대신에 당신이 하신 걸로 그 자리를 메워 주십니다. 아멘.
제 8 강의 (2010. 9. 8. 사제 피정)
8. 예수님 영혼의 수난 (2)
✞ 주님의 기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희에게 아드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오니,
아버지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시어
아버지 뜻의 무한성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면 아버지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아닌 것은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아버지 뜻의 나라를 청하나이다.
성모송
천주의 성모님, 저희는 당신의 보호 아래 피신하오니
이 가련한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오,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영광송
성모님 생일의 세 번째 강의는 14권 1922년 8월 19일 일기를 읽겠습니다.
1 평소와 같이 있노라니,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각 사람을 위해 겪으신 당신의 고통들과 죽음들 일부를 겪게 하셨다. 그 일부를 통해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고 치명적인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나의 고통은 인간 본성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내적 고통에 비하면 내 수난의 고통은 내적 고통의 그림자 내지 비유에 지나지 않았다.
3 내 내적 고통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어서 힘줄 한 가닥도 그분의 타격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 수난 고통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은 인간이 끼친 고통이어서 그들이 원한 대로 내 힘줄 하나하나까지 사무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4 내 내적 고통은 내 인성 안에 육화되었다. 그러므로 내 인성 자체가 못과 가시와 채찍과 상처로, 순교적 고통으로 변화되었다. 너무나 잔혹한 고통이어서 이것이 내게 계속적인 죽음들을 주면서 나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이 되었다.
5 반면에 내 수난 고통은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가시며 못이 내부로 파고들었지만 결국은 뽑혀 나갈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 아픔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6 하지만 내적 고통은 바로 나 자신의 살이 되어 있었으므로, 뽑혀 나간다거나 가시와 못이 꿰찌르는 격통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없는 것이었다.
7 내 내적 고통은 그토록 크고 종류도 가지가지였기 때문에, 정작 수난 고통은 이 내적 고통에 주어지는 위안이요 입맞춤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두 가지 고통이 한데 뭉쳐,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내 크고 넘치는 사랑의 최종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8 내 외적 고통은 따라서 내적 고통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내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9 그러므로 너도 네가 받게 된 내 내적 고통의 일부를 통하여 어느덧 내 고통의 지속적인 강도를 깨닫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라. 나를 이리로 몰아대고 있는 것은 사랑이니 말이다.”
(1) 예수님 수난의 핵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줌
이 장은 보통 때처럼 루이사가 이런 묵상을 하고 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장들에서처럼 영성체로 예수님을 모신 다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루이사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루이사는 예수님의 고통과 예수님의 죽음에 일부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사의 생애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그 강도가 점점 더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희생 제물로서 예수님의 외적 수난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더 내적 수난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고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를 좀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이사가 이 정도이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얼마나 깨닫겠습니까? 루이사는 그 고통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조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통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고난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루이사보다 훨씬 더 적게 깨닫고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그 고통의 신비로 들어갈 수 있게끔 도와주시는 것입니다.이 장은 예수님 수난의 핵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우리를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 “나의 고통은 인간 본성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주 영적으로 높은 수준의 영들까지도 내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수난의 외적인 고통은 내 내적 고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천상의 책 14-52,2)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하신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외적인 고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또 사제들이 수난에 대해서 설명할 때, 예수님께서 그 동산에서 하신 말씀이 그 다음날 그분의 인성이 겪어야 할 고통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외적 고통은 그림자이고 미소이고 입맞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 수난의 진짜 알맹이는 예수님께서 내적으로 당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적 고통은 외적으로 생긴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더 심하고 무섭고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즉시 왜 내적 고통이 외적 고통보다 그렇게 큰 것이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3 “내 내적 고통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어서 힘줄 한 가닥도 그분의 타격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 수난 고통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은 인간이 끼친 고통이어서 그들이 원한 대로 내 힘줄 하나하나까지 사무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천상의 책 14-52,3)
물론 사람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의 심적 고통의 하나하나까지는 다 사무치지는 못합니다.
4 “내 내적 고통은 내 인성 안에 육화되었다. 그러므로 내 인성 자체가 못과 가시와 채찍과 상처로, 순교적 고통으로 변화되었다. 너무나 잔혹한 고통이어서 이것이 내게 계속적인 죽음들을 주면서 나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이 되었다.”
(천상의 책 14-52,4)
그렇게 예수님의 내적 고통은 예수님 안에서 육화되었으며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 고통들은 나한테서 떨어져 나가지도 않고, 이 고통들이 내 생명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내적 고통, 수난은 예수님께서 강생하실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수난은 그분의 전 생애인 것입니다. 너무너무 크고 한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온 인류의 역사를 다 감싸 안는 그런 고통입니다.
각 피조물의 생명은, 아담에서부터 맨 마지막에 태어날 인간까지 다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그분의 수난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한두 시간 짊어지고 갔던 십자가는 입맞춤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십자가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키스와 같은 십자가였습니다.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성부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는, 모든 세기를 다 포함할 만큼 긴 것이고, 모든 세대를 포함할 만큼 넓은 것이었다.”
성부께서 예수님께 주신 십자가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다 넣어도 그 안을 다 채울 수 없을 정도로 그 길이와 너비가 큰 십자가였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이 십자가를 지고 이 십자가를 산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성부님께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 그 고통은, 지금 이 큰 십자가, 그러니까 모든 시간과 공간도 그 안을 다 채울 수가 없는 그런 큰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무한히 큰 십자가의 모든 작은 부분들은, 우리 모든 피조물들, 우리 모든 영혼들의 죄, 잘못, 고통,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많고 많은 작은 십자가들이 그 큰 십자가 안에 박혀있었는데, 그것들은 어느 것도 빼낼 수 없는 것, 제거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들이 예수님을 가시로 찌르고, 못처럼 박히는데, 그 못이나 가시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인 고통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내적 고통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목소리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구원이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 수난의 진정한 차원, 진정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외적 수난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었고 힘이 있는 것이었다면, 주님의 그런 상처와 피 흘림과 그 채찍질 같은 것으로 우리가 구원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내적 고통은 우리에게는 하느님 뜻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외적 고통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외적 고통으로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내적 고통은 하느님 뜻의 나라를 우리들 안에 재건하는 그런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적 고통과 외적 고통은 다 함께 하나로 묶여지고, 또 이 둘을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 수난도 아주 중요합니다.
외적 고통은 내적 고통에 비해서 너무나 작고 조그만 것이지만, 이 예수님의 외적 고통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내적 고통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게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에, 외적 고통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외적 고통은 예수님의 내적 고통의 무한한 바다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난 묵상 책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적 수난을 읽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내적 고통인 무한한 바다 속으로 인도해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외적 수난은 우리에게는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외적 차원을 우리는 이 2000년 동안 묵상하고 축하하고 거행했습니다.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묵상도 하고 전례로도 지내왔습니다. 2000년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 외적 수난을 가지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내적 고통도 우리가 유산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유산의 첫 부분은 잘 압니다. 즉 우리가 잘 아는 첫 부분은 예수님의 외적 수난이고 그것은 잘 압니다.
예수님 수난의 다른 차원인 예수님의 내적 수난, 내적 고통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 수난의 샘, 나의 외적 고통의 샘에서 나오는 모든 은총으로 교회와 세상과 인류를 쇄신했다면,
이제 나는 내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적고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세상과 교회를 새롭게 쇄신하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시작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 즉 예수님의 외적 고통과 내적 고통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외적 수난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도 쓰여 있고 교회에서도 가르쳐주기 때문에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수난에 대해서는 누가 말도 해주지 않았고 설명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우리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루이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8 “세 번째 쇄신이 있을 것이다.
9 두 번째 쇄신에서 나는 내 인성이 행한 일과 겪은 고난을 나타내 보이면서 내 신성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별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이제 세 번째 쇄신에서는 우선 땅이 정화되고 현 세대의 대부분이 멸한 다음 내가 피조물에게 한층 더 관대해질 것이고, 나의 신성이 나의 인성 안에서 행한 일을 드러냄으로써 이 쇄신을 완성할 작정이다.”(천상의 책 12-80,8-9).
그래서 루이사의 글들은 전부 이 인성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무엇을 하셨는지,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지 외적으로 당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은, 불꽃처럼 잠깐 동안 조금 밖에 안보여줍니다.
그런데 루이사의 이 글들에서는 예수님이 내적 차원, 신적인 차원의 모든 바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약 이 글들이 모든 민족들 속으로 퍼져 들어간다면 온 세상의 얼굴을 새롭게 할 것이다, 쇄신할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랑과 빛의 보배를,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정말 굉장한 장으로 가겠습니다. 13권 34장 1921년 11월 19일
1 겟세마니에서 고뇌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따뜻한 동정심을 표현하면서 그분을 가슴에 붙안고 그 치명적인 식은땀을 애써 닦아내고 있었는데, 고통에 잠기신 그분께서 숨을 거두시려는 듯 쇠잔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이 정원에서 겪은 고뇌는 여간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십자가 위에서의 임종 고통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십자가 고통은 모든 것을 이루고 이긴 것인 반면, 여기 정원에서는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고, 고통은 원래 그 끝 무렵보다 시작될 때 더 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3 그 가운데서도 가장 뼈아픈 고통의 순간은 모든 죄들이 차례차례 내 앞으로 오고 있을 때였다. 내 인성이 그 모든 죄의 극단적인 흉악성을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었으니, 각각의 죄가 ‘하느님에게 죽음을!’이라는 각인을 지니고 있었고 저마다 칼로 무장한 채 나를 죽이려고 드는 것이었다.
4 하느님의 신성 앞에 있는 죄는 소름 끼치도록 혐오스러운 것이기에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하게 보였던 것이다. 죄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렇게 절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실제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5 아버지께 울부짖었지만 그분은 내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내가 죽지 않도록 도와줄 사람도 거기에는 없었다. 큰 소리로 모든 피조물을 부르며 나를 측은히 여겨 달라고 외쳤으나 허탕이었다. 그러므로 내 인성은 기력이 쇠하여 막 마지막 치명타를 받아들일 판이었다.
6 그러나 누가 그 처형을 막아 내 인성을 죽음에서 지켜 주었는지 알겠느냐? 우선은 내 엄마,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엄마가 계셨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곁으로 날아오셔서 나를 지탱해 주신 것이다. 나는 그분께 내 오른팔을 기댔다. 거의 죽어가면서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 안에 내 뜻의 무한이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있었고, 나의 뜻과 그분의 뜻 사이에는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었다.
7 내 뜻은 생명이다. 아버지의 뜻이 확고부동해서 죽음이 피조물로부터 내게 닥쳐오고 있었지만, 내 뜻의 생명을 지닌 또 다른 피조물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던 것이다. 이 피조물이 내 엄마이시니, 내 뜻의 놀라운 기적으로 나를 잉태하여 시간 속에 낳아 주신 그분께서 여기서도 내게 두 번째로 생명을 주시어 구원 사업을 완수하게 하신 것이다.
8 그런 다음 나는 내 왼쪽에 있는 ‘내 뜻의 작은 딸’을 보았다. 너를 선두로 내 뜻의 다른 딸들이 뒤를 잇고 있었다.
9 내가 바란 것은 내 엄마를 나와 함께 자비의 첫 고리가 되시게 하여 이를 통해 우리가 모든 피조물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내 오른팔을 그분께 기대고자 하였다. 그리고 너를 내 정의의 첫 고리로 삼아 모든 피조물이 받아 마땅한 징벌을 만류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왼팔을 너에게 기대고자 하였다. 네가 나와 함께 정의의 팔을 떠받치고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10 이 두 지주로 하여 나는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았던 것처럼 꿋꿋한 걸음으로 내 원수들을 만나러 갔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이 당신이 겟세마니 정원에서 당한 고통의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류의 죄가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의 끔직한 죄들이 하나하나 예수님 앞으로 왔는데, 예수님은 그 모든 죄들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대답을 하라는 요구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이렇게 당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가, 죄가 그 세 시간 동안에 집중되어서 예수님 앞에 들어 온 것입니다.
모든 죄들, 그리고 죄의 모든 결과들, 모든 피조물들의 죽음, 모든 병, 모든 비극들, 그 모든 것이 세 시간 동안에 예수님 앞에 다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피조물도 이런 걸 이해할 수는 없다. 하늘에 있는 피조물도 이해 못한다. 하늘나라에 있는 영들, 케루빔과 세라핌도 이것은 이해를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난의 가장 힘든 부분은 예수님께서 죄가 뭔지를 바로 알아들었던 것, 그게 제일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파악하고 알아들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를 알아들은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은 그 깊이를 모릅니다. 인간은 죄가 얼마나 끔찍한 건지를, 알기는 아는데 그렇게 깊게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죄를 이해한 것은 하느님으로서 죄를 이해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죄들을 인간 수준의 차원에서 파악하고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서 이 죄를 파악하고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것에서 오는 고통은 인간적인 고통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적인 신적인 고통, 하느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이것을 다 견디셨는데, 사람이시면서 아까 말한 신적인 고통을 견뎌내야 되니까 그 극심함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4 “나는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실제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5 아버지께 울부짖었지만 그분은 내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내가 죽지 않도록 도와줄 사람도 거기에는 없었다. 큰 소리로 모든 피조물을 부르며 나를 측은히 여겨 달라고 외쳤으나 허탕이었다. 그러므로 내 인성은 기력이 쇠하여 막 마지막 치명타를 받아들일 판이었다.”(천상의 책 13-34,4-5)
예수님의 인성은 죽을 지경이었지만 죽지 않고 계속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모든 죄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죄들 앞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6 “누가 그 처형을 막아 내 인성을 죽음에서 지켜 주었는지 알겠느냐? 우선은 내 엄마,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엄마가 계셨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곁으로 날아오셔서 나를 지탱해 주신 것이다.” (천상의 책 13-34,6a)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오른팔을 어머니에게 기댔습니다.
어떻게 성모님이 예수님을 지탱해 드리고 도와드리고 견뎌낼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6 “거의 죽어가면서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 안에 내 뜻의 무한이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있었고, 나의 뜻과 그분의 뜻 사이에는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었다.”
(천상의 책 13-34,6b)
하느님의 뜻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 동정 마리아 어머니께서 그 생명, 그 주님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명을 다시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께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뜻의 놀라운 기적으로 나를 잉태하여 시간 속에 낳아 주신 그분께서 여기서도 내게 두 번째로 생명을 주시어 구원 사업을 완수하게 하신 것이다.” (천상의 책 13-34,7b)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성모님이 공동 구속자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공동구속자이십니다.
물론 성모님은 우리 구원의 주된 원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 생명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하여 시간 속에 낳아주셨고, 겟세마니에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께 이 생명을 두 번째로 주셔서 구원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함께하시며 지탱해주셨습니다.
멜 깁슨이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 ‘예수님의 수난’) 안에 바로 이 점이, 성모님의 이 모습, 이 역할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장면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여러 번 마지막 지경에까지, 완전히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모님이 곁에 계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 시선의 교환이 있고 그렇게 보이지 않게 예수님께 새로운 생명을 주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두 번째 쓰러지시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 순간 성모님도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사도 요한이 도와드렸습니다. 거의 쓰러지셨던 어머니가 요한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머니께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에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니,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듭니다.”(묵시 21, 5참고)
이렇게 성모님과 만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할 수 없이 특별한, 새로운 힘으로 벌떡 일어서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주 놀랐습니다. 아주 신비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놀란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저 여자가 누군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람이 “나자렛 사람의 어머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런 식의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성모님의 이런 도움 덕분에 예수님은 그 구원 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모님이 인간적으로 도와 드린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 안에서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초대입니다.
성모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루이사를 따라가라고, 루이사처럼 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루이사가 예수님의 왼쪽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루이사가 예수님의 왼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루이사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 “나는 내 왼쪽에 있는 ‘내 뜻의 작은 딸’을 보았다. 너를 선두로 내 뜻의 다른 딸들이 뒤를 잇고 있었다.” (천상의 책 13-34,8)
그러니까 루이사 뒤에 딸들을 봤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모든 아들딸들이 예수님의 그 수난 장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사가 왼쪽에 있었는데 거기 우리도 모두 다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는 아들딸들이 거기 다 있었던 겁니다.
묵시록에 보면 이 두 지주, 왼쪽과 오른쪽에서 예수님을 받쳐 주었던 이 두 지주에 대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말렉 민족과 싸울 때, 모세가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론과 후르가 옆에서 받쳐주었기 때문에 모세가 팔을 쳐들고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지금 예수님의 먼저 모습, 선형입니다.
묵시록에 보면 두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두 증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예수님의 오른쪽 왼쪽에 있습니다.
모든 이런 글들을 읽고 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겠는데, 이 장에서 예수님이 설명하는 마리아와 루이사가 있었다는, 마리아와 루이사가 성경 안의 그런 모든 구절들 안에 이미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다 읽으시면 그런 일들은 다 신비스럽습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루이사의 글들을 다 읽고 나면 성경의 그런 구절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동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반자로서의 도움, 받쳐드리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지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장을 끝내겠습니다.
10 “이 두 지주로 하여 나는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았던 것처럼 꿋꿋한 걸음으로 내 원수들을 만나러 갔다.” (천상의 책 13-34,10)
루이사는 그렇게 이 장을 끝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는데 아주 굉장히 신비스러운 도움입니다.
질문 : 예수님의 내적 고통으로 하느님 뜻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건설할 수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고통 때문에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답 :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이런 말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내적 고통과 외적 고통, 그 모든 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하느님 뜻의 나라를 얻어 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부는 창조, 성자는 구원, 성령은 성화사업을 하신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삼위일체는 하나이시고, 삼위께서 전부 하나의 하느님으로서 이 모든 일을 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예수님의 피 한 방울만 가지고도 온 인류를 다 구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의 외적 고통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학적,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외적 수난이 온 인류를 구원했다고 하는데, 사실을 보면 예수님의 이 외적 수난은 내적 수난의 그림자이고, 미소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입맞춤이라고 아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고통의 바다는, 대양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하느님 뜻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내적 고통이 필요했습니다. 구원에는 외적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 뜻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내적 고통까지 필요했던 것입니다.
질문 : 그런 것을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지? 그 이유,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 : 구원이라는 것은 피조물하고 관련된 것입니다. 피조물이 구원되죠.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면 피조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외적 고통과 관련된 것은 또 우리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에 관련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의 나라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천상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 자신의 생명이고 아주 무한한 실체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삶이고 하느님 뜻의 나라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외적 고통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 뜻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피조물들과 관련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하느님 뜻의 나라는 하느님께 속한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과 하느님 뜻의 나라는 너무너무 다른 것이고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루이사의 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 모든 글들은, 나는 이제는 더 이상 너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과 여기에 관계 되는 나의 생명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성경도 있고, 성사도 있고, 교회도 있다. 그런 것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 다 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루이사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나, 피조물이나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국에 대해서,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들이 그렇게 중요하고 위대한 겁니다.
질문 :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들이 배울 때, ‘하느님의 생명에 인간 생명이 참여하는 것이다.’ 라는 그것과 지금 설명하신 것을 조화 있게 설명해 주십시오.
답 : 하느님 뜻의 선물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생명 안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의 활동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만 되었을 때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하느님 뜻에서 오는 은총의 힘을 받아서 이 모든 것과 여기에 관계되는 나의 생명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활동합니다.
그러니까 질문하신 신부님의 인간적 의지가 하느님 의지에 응답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 의지가 만나서 소통을(communicate)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실하고 충실하면, 삶의 끝에 가서 죽을 때, 그때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도록 받아들여집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다스리시는 하느님 뜻의 선물은 하늘을, 우리가 죽기 전에 이 지상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기 전에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는 것이고 구원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가 죽으면 그때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 새 시대에는, 피조물들이 죽을 때 일어날 그 일들이 지금 여기 땅 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 안에 하느님 뜻의 나라가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만 이야기하는 경우, 즉 아까같이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는 경우는 사람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작용을 안 합니다.
질문 :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도 그렇습니까?
답 : 죽으면, 그때 가서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은 질문하신 신부님이 말하는 구원이고, 지금 새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이 벌써 지금 우리 안에서 작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런 식으로 구원된 피조물들 안에서는, 그러니까 하느님 뜻의 나라의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영혼 안에서는 작용도 못하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질문 : 아니 다시 언제 구원이?
답 : 구원만 이야기할 때는, 하느님 뜻의 그 모든 것이 영혼 안에서 살아 있지 않습니다.
질문 : 아니 천국에 가서도?
답 : 천국에 가서는 합쳐진다고 아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새 시대에는 죽을 때 일어날 일이 지금 이 세상에서 지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지금 강의하고 있는 모든 것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석 안에는 면이 많습니다. 금강석 안에 여러 면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여러 면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신부님의 질문은 구원과 하느님 뜻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페이지의 글들에서는 주님께서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이야기하십니다.
“마지막 시기의 하나는 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 한가지이고, 나의 뜻 안에 사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즉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는 나의 뜻을 사는 것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데 하늘에서 순명하듯이 지금 순명하는 것입니다.
질문 : 그 차이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구원과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 땅 위에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건데. 땅 위에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질문 :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은 구원이지요?
답 : 아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 뜻의 나라가 그 영혼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죄했던 아담과 원죄를 지은 아담과 같은 그 차이입니다. 그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원죄를 지은 후에 용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나머지 생애 동안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합니다.
아담은 울면서 살았습니다. 하느님 뜻의 나라에서 그는 발가벗었었고 빛의 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강의 > 카를로스신부님-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0강의: 하느님 뜻의 선물 (1) (0) | 2014.06.14 |
---|---|
제9강의 : 지향의 순결, 순수함 (사제피정) (0) | 2014.06.11 |
제 6강의 : ‘수난의 시간들’ 기도의 효과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약속 (사제피정) (0) | 2014.06.09 |
제 4-5강의: 사제와 희생 제물(사제피정) (0) | 2014.06.05 |
제 3강의: 루이사 피카레타의 삶과 사명, 루이사가 쓴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사제피정) (0) | 20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