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강의
(2010. 9. 9. 사제 피정)
10. 하느님 뜻의 선물 (1)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10번째 강의는 하느님 뜻의 선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제 이 선물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제30권에서 나옵니다. 1932년 4월 30일 일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장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문단씩 읽겠습니다. 한 문단씩 읽으면서 뭔가 좀 설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그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가 하느님 뜻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고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내 정신을 사로잡았지만 그러나 언제나 피앗 그 자체가 나를 붙잡아서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피앗이라는 그 아름다움은 그 빛으로 모든 것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진실들이 그 피앗 주위에 큰 군대처럼 그 피앗 주위에 많은 진실들이 피앗처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군대처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다 쫓아버렸습니다.”
첫 번째 설명은, 무엇보다도 루이사의 글에서 디바인 볼리션(Divine Volition), 디바인 윌(Divine Will)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다르게 쓰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말로는 모두 하느님 뜻으로 번역하면 되겠습니다. 한국말로 (Volition 하고 Will,) Volition은 의지, Will은 뜻으로 번역했을 겁니다.
신학에서는 두 가지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Will (뜻)에 대해 얘기할 때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예수님 안에는 두 가지 Will(뜻)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또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의 뜻이 있습니다.
Divine Volition (그것을 의지로 번역했다면) 신성한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는, 말하자면 '행동 중'의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Volition은 행동 중의(in action)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의지의 두 가지를 비교하려 하면, 우리의 마음은 심장의 근육입니다. 근육은 Will에 해당하고 심장의 박동은 Volition입니다. 즉 심장박동은 행동하는 뜻입니다. 루이사의 글들을 보면 루이사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습니다.그러니까 루이사가 어느 날은 Volition이란 말을 쓰고, 어느 날은 Will이란 말을 쓰는데. 루이사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같이 쓰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첫째 문단에서 또 하나 지적할 점은, 20권에서부터 36권으로 숫자가 올라갈수록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선 별로 주의를 안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높은 권수로 올라갈수록 하느님 뜻하고 하느님의 Fiat, Divine Fiat 거기에만 더 신경을 쓰고 중점적으로 말합니다.
첫 번째 책들에서는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신비,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했는데, 이렇게 권수가 올라갈수록 하느님의 뜻 속으로만 잠겨 들어갑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만 많이 이야기합니다. Divine Will과 Divine Volition만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께서 이렇게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루이사가 하느님의 뜻하고 더 친밀해지고 거기에 더 익숙해지기를 원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루이사는 예수님의 인성을 많이 만나고 많이 사랑했고, 첫 번째 책들에서는 그래도 예수님의 인성에 빠져 들어가고 그리워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인성에 집중하고 인성을 찾으니까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내 인성은 언제나 너하고 같이 있다. 일식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일식은 해가 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입니다.
낮 동안에는 우리가 별을 못 봅니다. 그러나 별은 거기 있습니다. 저기에 별이 있긴 하지만 햇빛이 강해서 안 보입니다. “내 인성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내 인성은 있지만 안 보이는 그런 식이 된다. 내 인성은 가장 밝은 빛이다. 그러나 모두가 창조된 것이다. 그러니 나의 신성 앞에서 나의 인성은 아주 작은 빛이다.”
그리고 다른 때는 예수님이 또 이렇게 비교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 인성은 작은 호수라고 하시고 당신의 신성은 한없이 큰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최고 걸작품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작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빛이지만 또 창조된 모든 빛들을 다 품고 있는 빛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최고 걸작품인데도 작은 빛일 뿐이고, 또 우리 하나하나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그 작은 빛 안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작겠는지, 얼마나 작은 빛이겠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계속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행복한 피조물은,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천상적인 분위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천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완전히 행복하고 또 모든 성인들의 평화로 가득 찬 그런 속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하느님 뜻 안에 있는 영혼이 무엇을 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그렇게 거룩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모든 영혼이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는 영혼이 무엇을 원한다면 그 소원은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뜻이 사랑스럽고 거룩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 있는 그 영혼은 모든 이가 자기가 느끼는 행복과 같은 행복을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혼자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살 수 있게 되나? 하느님 뜻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어떻게 피조물들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성인들의 완전한 평화 속에 있는 것이고 이렇게 하느님 뜻 안에 있는 영혼은 모든 성인들의 완전한 평화 속에 있으면서,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 안에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만을 원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다 완전한 행복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내가 하늘에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같이 이렇게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같이 하느님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그래서 루이사는 자기가 하느님의 뜻 안에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모든 피조물들이 이렇게 하느님 뜻 안에서 살 수 있게 되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를 아주 놀라게 하는 설명을 하십니다.
“내 딸아, 너는 얼마나 작으냐? 너는 아주 작다.
그래서 네가 얼마나 작은지를 보는 사람은 어떻게 이 작은 것에게 권리를 주고, 또 이 작은 것을 권능과 무한함과 선과 또 너의 창조주의 그 위대하심 속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작은 네가 그 우리 하느님의 자유로움을 그리고 그 위대함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할 거다. 네가 하도 작은 사람이니까 이 작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모든 걸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불쌍한 작은 것아. 너는 말할 수 없는 우리들의 능력 속에서 길을 잃었다. 또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우리의 신성하고도 무한한 방법들의 무게를 잴 수 있는지, 너는 그런 것을 모른다. 사실이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피조물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내 뜻 안에서 살고 또 내 뜻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마치 네 작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만지려고 그러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에게는 가능하다.”
이 문단은 성서에 있는 구절들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토대가 되는 것으로써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 그리고 나의 길, 나의 방법은 너의 방법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나의 방법과 너의 방법,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은 아주 다르다.”
이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될 겸손의 덕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아주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글을 읽을 때, 우리의 겸손을 여기에다 응용하고 적용해야 됩니다. 이것을 읽을 때는 겸손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주인들이 아닙니다. 진리의 제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 발치에 앉아 있어야 됩니다, 얌전하게. 우리는 겸손을 가지고 이 빛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빛들을 판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빛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 빛이 우리에게 비춰지게끔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루이사야, 네가 옳다. 피조물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무슨 얘기를 하시니까 베드로가 ‘그러면 누가 구원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구원 못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구원, 회개, 은총의 삶, 초자연적 삶, 하느님의 삶의 참여자가 되는 것, 이건 다 선물입니다.
우리의 재주나 우리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냥 공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른 모든 종교들에도, 바빌론, 이집트, 그런 문화 속에도 다 있었고, 지금 뉴에이지 운동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인데, 그노시스(gnosis)입니다. 그노시스(gnosis)는 사람들이 우리가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주의입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안에도 이 정신이 있습니다.그래서 진정한 계시가 아닌 이런 모든 것들, 이런 데서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능력,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상에서는, 구원을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공으로 받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과로 그 사람들은 예수를 부정하는 겁니다.
salvation(살베이션:구원)이라는 말이 그 어원상으로 보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건데 이것은 선물입니다. 이런 사상들에서는 자기들이 다 자기 힘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시된 진리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힘으로 구원되려고 애를 쓸 때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비로 그들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 조건 위에 있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 존재로서 우리 힘으로 그 높은 곳에 도달할 힘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깝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는 전혀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너는 우리들 안에서 산다는 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그걸 꼭 알아야 된다. 우리의 위대함이 피조물들에게 이것을 선물로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선물로 피조물들은 자신이 변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에서 부자로, 약한 자에서 강한 자로, 무지한 자에서 학자로,
그 다음에 악한 열정의 노예에서부터 거룩한 뜻의 자발적인 죄수가 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죄수가 된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죄수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왕도 되고, 신적인 지배를 하게 되고,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게 아주 변한다는 말입니다.
루이사는 피조물들이 이 선물을 어떻게 소유해야 되는지, 소유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위대함이 피조물들에게 이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선물로 피조물들이 아주 완전히 변할 것이다. 그 피조물은 내 뜻의 죄수가 될 거다.
내 뜻의 죄수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왕이 되고,
하느님의 풍요로움의 왕, 여왕이 되고, 그리고 모든 창조된 피조물의 왕이 된다.”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죄수가 이렇게 변합니다.
성경과 교회가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 합니다. 왕들 중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노예의 왕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하느님의 뜻 선물로 하느님 나라의 왕이 되고, 여왕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왕, 여왕이 되게 우리에게 하느님 뜻의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루이사의 시복 재판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시작됐답니다. 그날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대자루를 입고, 문도 없는 동굴 속에서 살고, 그래서 언제나 자기들을 도둑이나 원수들 앞에 드러내놓고 있어요. 문도 없는 곳에 있으니까 언제나 공격을 당합니다. 그리고 또 빵도 없습니다. 배고픔을 채울 빵도 없어서 빵을 구걸해야만 되고, 구걸해야만 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왕이 이 가난뱅이한테 100만 달러를 선물로 줍니다. 큰돈을 선물로 줍니다. 그러면 그 가난뱅이는 운명이 바뀝니다. 이제는 구걸을 안 해도 되고, 궁전의 소유주가 되고, 빌라도 가지고, 좋은 옷도 많이 생기고, 음식도 풍부하고, 또 다른 사람까지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이 가난뱅이가 100만 달러를 받고 얼마나 달라집니까? 이 100만 달러가 그 가난뱅이가 받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가난뱅이입니다. 그러니까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이 가난뱅이입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고, 언제든지 공격당할 수 있는 문도 없는 동굴에서 사니까 하느님이신 이 부자가 이 가난뱅이의 운명을 바꿔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한테 아주 굉장한 선물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난뱅이였던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됩니다. 이 부자가 들어서 돈을 주지 않으면, 이 가난뱅이는 그런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비천한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쓰는 비유는 가난뱅이한테 100만 달러를 주는 것입니다. 그 100만 달러는 너무 많은 것은 아닙니다. 100만 달러를 부자가 가난한 사람한테 주었는데 그게 사실은 너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운명, 사는 방식을 바꿔 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하십니다.
“이제 이 정도의 돈으로, 이 정도의 동전으로 그 불행한 가난뱅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의지의 위대한 선물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선물로 주어진 우리의 의지는 그 불행한 인류들의 불행을 바꾸어 줄 것이다.”
일부러 자기가 자원해서 지금 이 불행한 상태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사람 외에는 이 선물이 모든 사람의 불행한 운명을 바꾸어 줍니다. 또 인간 창조의 시작에 이 선물이 인간에게 주어졌었는데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행함으로써 이 선물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 뜻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거두면서 자기 뜻을 행하느라고 이 뜻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돈을 선물로 주면. 그 돈을 받은 사람의 생활양식, 생활 정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선물로 인간에게 주면 모든 세대의 운명을 바꾼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주님께서 이 선물이 이 지상의 얼굴을 바꿀 거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내가 인간들을 위해서 준비한 그 위대한 선물, 그 위대한 것에 대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아무도 상상 못한다.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여기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주님이 우리 인간의 의지들을 굉장히, 인간 각자의 의지들을 아주 존중하신다는 겁니다.
이 나라는 아무에게나 억지로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선물은 영원한 사랑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언제나 공으로 오는 겁니다. 또 다른 중요한 진실은 주님께서 태초에 이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그 선물을 거부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돌아서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느님 뜻을 거부했습니다.
아담은 탕자입니다. 아담은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고, 나가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 뜻 밖에 사는 게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결과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는 그 아담의 죄의 결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원죄를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버지 집 밖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하고는 다릅니다. 우리의 첫째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불행한 유산입니다.
어떤 부부가 자기들 돈을 전부 증권시장에 투자했어요. 그런데 그 돈이 다 날라 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던 돈을 전부 다 주식시장에 넣었다가 다 날라 갔습니다. 다음날 아이들은 길거리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들은 자녀들한테 아주 끔찍한 짓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식에 투자해서 몽땅 재산을 날려버린 사람의 아들딸이 되는 것 같은 운명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우리의 부모로 모셨기 때문에, 연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세대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식시장에서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그 후손들이 다 이렇게 불쌍하게 삽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죄가 없더라도 그 첫 부모님의 잘못의 결과로 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원죄에 대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죄가 없습니다. 책임이 없습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이나 죄는 없지만, 첫 부모님의 원죄 때문에, 우리가 연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아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는 없으면서 예수님이 획득한 그 모든 공로를 무상으로 물려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휴식 후에 계속할 이야기는 주님께서 주시려는 하느님 뜻의 선물을 받아들일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 장을 계속 읽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뜻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우리 뜻의 선물을, 이 귀중하고 무한한 선물을 어디에다 보관할지 아주 안전하고 좋은 장소를 준비할거다.
그 다음에 피앗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영혼이 이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못 받은 것은 내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임금, 왕처럼 행동한다.
그 왕은 어떤 가족을 자기와 친한 귀족의 지위로 올려놓으려고 한다.
그렇게 귀족 지위로 올려놓기 위해서 거기에 맞게 오늘 못주는 것은 내일 주고 그렇게 한다.
나는 왕처럼 주는데 그것을 받는 사람은 준비를 해야 한다.
받은 선물을 어디에다 어떻게 둘 건지 장소도 잘 준비해야 된다.”
이 문단의 첫째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장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을 선물을 어디에 둘 것인지, 아주 좋은 장소, 새로운 장소, 깨끗한 장소를 잘 준비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이 하느님 뜻의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을 채워야 됩니다. 그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장소를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선물을 받는데 있어서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 위한 준비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건데, 하느님 뜻을 받는 것은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에서 한 단계만 높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나 행하고 나서, 그 다음에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이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 천 단계를 해야 됩니다.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이 준비인데, 준비 단계만으로도 천 단계가 넘습니다. 천 단계를 한 후에 한 단계 더 하느님 뜻을 행했다고 해서 그 다음에 즉시 하느님 뜻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준비해야 됩니다.
하느님 뜻을 사는 것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으로 사는 것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뜻으로 사는 것은 천상의 예루살렘입니다. 천상의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하느님의 뜻을 사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잘 행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 뜻의 나라를, 그 선물을 받을 준비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 준비 단계에서 다른 요소 하나를 또 요구하십니다. 다른 것도 또 준비해야 됩니다. 하느님 뜻에 대한 지식, 피앗에 대한 지식이 그 준비하는 영혼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의 책에 있는 이런 지식들, 피앗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준비시켜주고, 하느님 뜻을 받을 수 있게, 선물을 받을 수 있게 준비시켜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대한 지식, 피앗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왜 도움이 될까요?
이런 지식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잘 준비해 줄 수 있는지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들이 우리한테 하느님 뜻의 선물의 그 가치, 그 효과를 다 가르쳐줍니다. 하느님 뜻의 궁전으로 들어갈 때 일어나는 그 멋진 일들, 그 굉장한 일들에 대해서도 다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나라 안에 말할 수 없이 맛있는 것들이 많은데, 그 맛있는 것을 맛보게 입맛을 돋워줍니다. 그리고 이 지식들, 천상에 대한 이 지식들은 전에는 획득할 수 없던 것들을 획득할 수 있도록 우리들을 준비시켜주고 도와줍니다.
주님께서 또 다른 비유로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왕처럼 행동한다. 어떤 가정을 나의 가족과 친인척이 되게 해가지고
그 가족을 들어 높여주려고 하는 그런 왕처럼 한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합니다.
이 가난뱅이 가족이, 이 평민 가족이 임금님의 가족이 될 길이 없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고, 귀족 타이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가난뱅이 평민 가족이 왕의 친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왕족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가족이 왕족이 되기 위해서는 왕이 무슨 법령을 발표해야 됩니다. 왕 자신이 이 가난뱅이 일반 평민을 왕족으로 만들어 주려는 의도와 그렇게 하겠다는 법령으로 그렇게 정식으로 발표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평민 가족을 자기 가족으로 만들려고 하면 먼저 그 왕이 하는 일은 그 평민 가족의 한 사람을, 한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자기 궁전에 그 여자가 살게 하고, 그 여자를 왕과 함께 먹게 하고, 또 왕이 하는 귀족적인, 왕족적인 방법들에 그 여자가 익숙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여자한테 왕의 비밀도 다 가르쳐주고, 그 여자가 왕의 뜻에 따라서 살기에 마땅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게 그렇게 합니다.
먼저 그 여자를 데려다가 이렇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그 여자가 다시 자기 가족의 가난한 상태로 내려가지 않게끔 그 여자를 잘 돌봅니다. 그리고 왕은 그 여자가 자기 뜻의 선물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 권위 안에서, 자기 권력 안에서 그 여자를 지킵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다른 사람에게 내 의지를 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컴퓨터도 주고, 내 자동차도 주고, 내 신발도 주고, 내 물건들을 줄 수 있지만, 내 뜻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왕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왕이 그 가난뱅이 가족을 왕족처럼 만들기 위해서 그 가난뱅이 가족 안의 식구 하나를 데려다가 먼저 이렇게 함으로써 그 가족 전체를 귀족으로 만들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족 중의 식구 하나를 데려다가 그 왕이 자기하고 가장 친밀하게, 가장 친숙하게, 가장 가깝게 만듭니다. 그래서 왕이 그 가족 한 사람하고 완전한 친교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제 이 가족 한사람을 통해서 가족 전체를 또 그렇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마지막 부분에 있는데, 임금이 데려온 가족 하나를 임금의 뜻대로 살게 합니다. 임금의 뜻을 살게 만듭니다. 다른 것들, 같이 먹고 어쩌고 그런 것들은 다 그 왕의 뜻을 살게 해주는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전에 불러와서 궁전에 살게 하고, 같이 먹고, 또 비밀도 다 이야기하고, 이런 것은 다 데리고 온 가족 구성원 한 사람이 왕의 뜻대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러니까 도입 부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데려온 가족 한 사람을 임금에게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임금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가족 구성원이, 뽑혀온 사람이 임금의 뜻대로 살게 합니다. 임금의 뜻을 살게 합니다.
물론, 궁전에 살 수는 있습니다. 그 궁전에 여자 하나를 데려와 가지고 주방 책임자가 되게 할 수도 있고, 궁전 안에 여러 가지 부서의 책임자가 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여자가, 그 식구가 왕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왕의 뜻대로 살고, 왕과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왕의 뜻을 가지고 왕과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왕과 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왕의 궁전에 살게 되고, 왕의 뜻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내용은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만, 지금 이 강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을 인용하면서 끝맺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베네딕토 16세 회칙 17항을 인용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 이야기는
바로 뜻의 친교, 뜻의 일치가 점점 더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느낌에서 일치가 점점 더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점점 더 하나가 됩니다. 합치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제는 나한테 낯선 것이 아니고,
다른 뜻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명령으로 나한테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나 자신보다도 더 깊이 현존하신다는 그 사실을
내가 깨닫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이제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됩니다.
즉 하느님이 나한테 억지로 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보다도
하느님이 내 안에 더 현존하신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이 내 뜻이 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뜻을 내 위에 덮어씌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내 뜻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느님께 자기를 드리는 게 점점 더 증가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교황님이 루이사의 글을 아십니다. 교회 안에서 루이사에 관한 이런 일들이 생길 동안에 몇 번 교황님 자신이 거기에 관련되셨기 때문에 교황님이 이것을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에서만이 아니라 교황님이 여러 군데서 강의하시고 인터뷰를 하실 때 이 내용이 반복되게 나옵니다.
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회칙 안에서 사랑의 완성에 대해서 교황님이 얘기하실 때 이것을 쓰셨습니다.
‘사랑의 완성은 계명에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아주 가까워지고 이렇게 친해져서,
일치가 되어서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된다.
그런데 그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뜻으로 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또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이렇게 합쳐져서 하나가 될 때,
그때의 기도가 최상의 기도가 된다. 가장 높은 기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대리자, 삼위일체의 대리자가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칠 때,
두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이 말한 두 뜻이 하나로 합쳐진 것, 녹아 들어가서 완전히 하나가 됐다는 것은
여기 천상의 책들 안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이 천상의 책들 안에…….
아멘.
'강의 > 카를로스신부님-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2 강의: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한다는 것 (0) | 2014.06.20 |
---|---|
제 11 강의: 하느님 뜻의 선물 (2) (0) | 2014.06.14 |
제9강의 : 지향의 순결, 순수함 (사제피정) (0) | 2014.06.11 |
제 7-8강의 : 예수님 영혼의 수난 (사제피정) (0) | 2014.06.10 |
제 6강의 : ‘수난의 시간들’ 기도의 효과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약속 (사제피정) (0) | 2014.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