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산길_ 십자가의 성 요한 _ 최민순 신부님 옮김
십자가의 성요한은 1542년 가난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563년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여 살라망카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567년 사제가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깊이 몰입하면서 더욱 엄격한 수도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아빌라 데레사에게 설득되어 데레사의 개혁을 가르멜 남자 수도회에 소개하고 두루엘로의 첫 개혁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뒤 가르멜회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으나 1577년 개혁을 원하지 않던 수도원장에 의해 9개월 동안이나 투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에 요한이 칼바비오로 떠남으로써 가르멜 수도회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와 이전의 가르멜회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성 요한의 신비적 영성은 많은 수도자들에게 관상의 길로 들어서는 등불이 되고 있다.
제2권. 영성의 능동적 밤
4장. 믿음으로 최고의 관상까지 잘 인도되려면 영혼도 스스로 어둠 속에 있어야 함을 대충 들어서 말함
즉 피조물 및 시간적인 것과 관련된 감각적이고도 저열한 영역에 전혀 깜깜할 뿐 아니라, 하느님 및 영성에 관련되는 이성적 그리고 고차적인 영역에도 전혀 깜깜한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경처럼 캄캄한 속에 항상 있어야 한다. 다만 의지할 곳은 어두운 믿음 뿐, 이를 빛으로 길잡이로 삼으면서 자기 자신이 알고 맛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그런 것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영혼을 그르치는 암흑인 까닭이니, 믿음은 알고 맛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다. 만일에 영혼이 저런 것들에 소경이 아니 되고 온통 캄캄한 속에 있지 아니하면, 훨씬 높은 것, 즉 믿음이 가르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소경이 아닌 소경은 길잡이의 인도를 싫어한다. 오히려 약간 볼 수 있다는 것을 기회로, 보이는 쪽으로 가기만 하면 잘 가는 줄 생각하니, 더 좋은 길을 모르는 탓이다. 어디 그뿐이랴? 자기보다 더 잘 보고 이끄는 길잡이를 당황하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길잡이더러 이래라 저래라 명령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영혼도 하느님께 대한 자기 나름의 지식이나 무슨 맛이나 느낌에다 등을 대면, 아무리 그게 대단하다 할지라도 이 길을 가는 데는 하찮은 것이고, 하느님의 실상에서는 너무나 엉뚱한 것이니, 하잘것없이 비쓱거리고 주저않을 것이다. 참다운 길잡이인 “믿음” 안에 소경으로 있기를 싫어한 까닭이다.
이사야(64,3)와 성바오로는 말하였다.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두셨도다.” (1 고린 2,9)
과연 이승에서 은총과 사랑으로 완전히 하느님과 결합하려면, 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상상력으로 그려볼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영혼을 뜻하는 마음으로 깨칠 수 있는 모든 것 아예 깜깜해야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결합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는, 영혼이 어느 지식, 감정, 상상, 의견, 의사, 제 버릇, 제 것, 남의 것에 얽매여 그 일체를 떨치고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위에서도 말이 있었듯이, 영혼이 도달하려 드는 바는 제아무리 높다는 지식과 격조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니, 일체를 넘어서 무지의 경(境)에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연적 또는 영적으로 알거나 깨달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밀쳐두고, 이승에서는 알 수도 없고 생심도 할 수 없는 것에로 가기를 열렬하게 바라야 한다. 이승에서 시간적으로 영성적으로 맛보고 느끼고 그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모든 감성과 맛을 초월하는 당신께 가기를 열망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영혼이 매인 데 없이 자유롭고 비어 있으려면, 마음 안에 들어오는 영성적 및 감성적인 모든 것에 사로잡힘이 없이(이 점에 대해선 개별적으로 다음에 다루겠음) 일체를 하찮게 보아넘겨야 한다. 알고 즐기고 그려보는 것이 영성계의 것이든 아니든, 대단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것은 최고선에서 영혼을 멀게 하여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길에 있어선 인간의 모든 능력이 캄캄해져야 비로소 빛을 보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9,39) 우리는 이 말씀 그대로를 영성의 길에다 적용시켜야 한다. 즉 영혼이 자연적인 제 빛을 모두 다 잃고 캄캄하게 되면 초자연적으로 보리라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조금이라도 제 빛에 의뢰하면 할수록 그만치 더 깜깜해지고 합일의 길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5장. 영혼의 하느님과의 합일이란 무엇인가를 밝힘. 비유 하나를 듦.
따라서 영혼이 하느님 의지와 상반되고 맞지 않는 것을 온전히 끊어버리면,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 하느님 의지와 상반된다 함은, 의식적인 행위뿐 아니라 잠재적 습성, 즉 마음 바탕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니, 고의적으로 하느님 의지를 범하는 불완전한 행위뿐 아니라 어떠한 결점의 습성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지 않고 당신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내던진 다음에야, 하느님의 뜻 아닌 것이 그 안에 있지 않아서 비로소 하느님을 닮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 변화되는 것이다.
일찍이 성 요한이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요한 1,13)라고 한 말은 이를 알아들으라는 것이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권리를, 즉 하느님 안에서 변화할 힘을 주셨는데, “혈통”즉 자연적 소질이나 조직에서 난 사람에게 주신 게 아니고, “육욕” 즉 자연적 기량이나 수용성을 발휘하는 자이거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사람에게 주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표현에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는 모든 방법과 종류가 포함되었다).
바꾸어말하면 이들은 우선 묵은 인간의 모든 것에 죽고 은총으로 새로나면서 자기를 초극하여 초자연에로 치오르는 것이니, 이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의 사고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재생과 아들되는 권을 받는 것이다.
또한 성요한은 “물과 영으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 3,5)라고 했는데, 이는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완덕의 상태인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리라는 말이다.
햇살이 창유리에 비친다 하자. 유리가 때 끼었고 흐려 있으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유리처럼 태양빛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히 비치는 몸이 될 수 없다. 때와 흐림을 덜 벗으면 덜 벗을수록 그만치 덜 비쳐지고, 맑으면 맑을수록 그만치 더 많이 비쳐지는 것이니, 이것은 햇살 탓이 아니라 유리 탓이다. 그러므로 유리가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면 유리 전체가 햇빛처럼 되고 밝아져서, 햇빛과 같이 보이고 햇빛과 같은 빛을 내쏠 것이다.
영혼이 이와 같이 자리를 비워드리면, 즉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말끔히 벗어버리는 일이므로, 피조물의 가리개와 때를 떨어버려 하느님과 온전히 뜻을 같이 하면, 그 순간 영혼이 밝아지고 하느님 안에서 변화한다.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인식, 맛, 감정, 상상, 그 밖의 어느 것을 가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결”과 “사랑”뿐, 즉 주님 하나를 위하여 일체를 온전히 버리고 벗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해요주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피조물이든, 그 어떤 지식이든,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직접 수단일 수 없음- 십자가의 성요한(가르멜의 산길) (0) | 2016.12.14 |
---|---|
향주삼덕 - 십자가의 성 요한(가르멜의 산길) (0) | 2016.12.14 |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성화의 의미(축일 12월 12일) (0) | 2016.12.13 |
호세 마리얀갓 신부님의 말씀과 치유 미사(2016.12.8) -남양성모성지 (0) | 2016.12.10 |
시편 제111편 1, 할렐루야!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에서, 집회에서 (0) | 2016.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