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산길_ 십자가의 성 요한 _ 최민순 신부님 옮김
8장. 대체로 어떤 피조물이든,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지식이든,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직접 수단일 수 없음을 들어서 말함
1. 이 장에서는 우선 그 줄거리만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가서 이성이 안과 밖의 감각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가지가지 인식들, 그리고 합일의 독자적 방법인 믿음이 아닌 이러한 인식에서 받을 수 있는 손해와 폐단을 개별적으로 다루어나가겠다.
2. 모든 방법은 그 목적에 비례해야 된다는 것이 철학의 원칙이다. 그 목적에 대한 적응성과 상사성을 가져야 된다는 뜻으로, 겨냥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알맞고 넉넉해야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가 어느 마을로 간다 하자. 그러면 그 마을에 닿을 수 있는 길로 가야 할
것이다.
3. 다윗이 "하느님, 당신의 길은 거룩하나이다, 하느님처럼 위대한 신이 누가 또 있나이까?" (시편 76, 14)라고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하느님, 당신께 가는 길은 거룩한 길, 즉 믿음의 깨끗함입니다. 아무리 본질이 숭고한 천사, 영광이 드높은
성인이라도, 당신께 나아가고 알맞고 넉넉한 길은 아니오니 "하느님처럼 위대한 신이 누가 또 있나이까?"
다윗은 천상과 지상의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선 높으시어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시는도다." (시편 137, 6)라 하셨으니, 풀어 이르면 그 본질이 아득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높으신 본질에 비겨 낮고낮은 이 세상 것을 보시고, "교만한 자"들인 천상의 피조물들이 당신의 본질에서 멀리 있음을 보고 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통틀어 피조물은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에, 이성의 방법으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4.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상상력이 상상할 수 있고 이성이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자연적으로 말한다면, 이성이란 아무튼 육체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형상이나 이미지가 아니면 무엇을 인식할 수 없는데, 이런 영상들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방법일 수가 없으니 자연적 인식이 도움이 될 수 없다. 한편 이승에서 가능한 초자연적 인식으로 말하더라도 보통 능력으로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성이 하느님께 대한 밝은 지식으로 얻을 만한 힘이나 차비가 없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이승 것이 아닌만큼 가지면 죽어야 하고, 살려면 가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세가 하느님께 이런 밝은 지식을 구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볼 수 없다고 대답하시면서 이르시기를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출애 33, 20)고 하셨던 것이다. 성 요한도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요한 1,18)고 말하는가 하면,
성바오로는 이사야 (64,3)와 같이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 (1고린
2,9)이라 하였다. 사도행전 (7,32)에 말이 있듯이, 하느님께서 가시덤불에 나타나셨을 때 모세가 무서워서 감히 알아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그는 자기가 하느님께 대하여 느끼는 그만큼 자기의 이성이 하느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사부
엘리야에 대해서도, 산에서 하느님 앞에 얼굴을 가렸다 (1열왕 19,13) 하였는데, 이는 이성의 눈을 감았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그같이 한
것은, 그때까지 생각하고 똑똑히 알고 있던 모든 것이 하느님과는 너무나 같지 않고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 비천한 손을 그렇듯 높은
일에다 댈 수 없다고 느낀 까닭이다.
5. 이성으로 인식하고 의지로 맛보고 상상으로 그려보는 모든 것이 (위에서 말했듯이) 하느님과 비길 수 없고,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를 놀랍게도 저 권위스런 말로 표현했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대장장이가 부어 만든 우상, 은장이가 금박을 입히고 부어 만든 은사슬을 걸친 우상과 같다는 말이냐?" (40,18-19)
여기 대장장이는 이성을 뜻하니, 영상과 이미지의 쇠를 닦아서 인식을 만드는 것이 이성의 일이다. 은장이란 의지로서, 사랑의 금이 빚어낸
즐거움의 형과 상을 받을 능력이 있다. 은장이가 은사슬로 하느님을 만들지 못한다 함은 상상을 지닌 기억으로서, 이것이 꾸며내는 지식과 상상이
마치 은사슬과 같다 함은 ... 이성이 그 인식을 가지고 하느님과 비슷한 무엇도 알 수가 없고, 의지도 하느님의 낙과 맛에 견줄 만한 것을 맛볼
수 없고, 기억도 역시 하느님스런 어떠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상상 안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닿으려면 알고 싶어하기보다 차라리 알지 못하면서 가야 하고, 하느님의 빛에 바짝 다가서려면 눈을 뜨기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6. 예언자 바룩도 이를 가리켜 "지식의 길을 탐구하는 사람도 지혜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생각해내지도 못하였다." (3,23) 하였다.
따라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이성이 갈 수 있는 모든 길 앞에 스스로 장님이 되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박쥐의
눈이 태양 앞에서 온통 깜깜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이성도 하느님의 엄청난 빛 앞에서 온통 어둠이 되어버린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하느님께 대한
일들은 그 자체가 지극히 높고 밝을수록 우리에게는 그만치 알 수 없고 깜깜한 것이라 하였다. 바울로 사도도 이를 인정하여 "하느님 앞에서는 이
세상 지혜가 어리석음" (1고린 3,19)이라 하였다.
7. 일체의 피조물이나 인식할 수 있는 어느 것이나 이성이, 높으신 하느님께 오르기 위한 사다리가 못 된다는 것을 성서 말씀과 이치로
증명하려면 한이 없을 것이다. 이보다도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은, 만약에 이성이 이런 모든 것, 아니면 그 중의 몇 가지를 합일의
직접 방법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이것들이 장애가 될 뿐더러, 이 산을 오르는 데에 크게 속고 속이는 연유가 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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