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영광을위한삶

마더 에우제니아에 대한 카이요 주교의 증언

Skyblue fiat 2014. 1. 2. 14:00


 

교회법에 의거하여

마더 에우제니아에 관한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보고서가 나온 이후,

그리노블 교구의 알렉상드로 카이요 주교가 공지한 증언

 

 

그르노블 교구의 주교인 본인이 마더 에우제니아의 일을 조사에 붙이기로 결정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충분한 자료를 입수한 이제, 본 주교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1. 마더 에우제니아의 견실한 덕행들

 

이 조사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히 드러난 확실성은 견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마더 에우제니아의 덕행들이었습니다.

 

에우제니아 수녀는 수도 생활 초기부터 깊은 신심과 순명과 겸손으로 장상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련을 받던 시기에 특별한 성질의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난처하게 여긴 장상들이 수녀원에서 내보낼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수녀가 워낙 모범적으로 처신했으므로 결국 그 계획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에우제니아 수녀는 큰 인내와 더할 수 없는 유순함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의학적 테스트를 할 때마다 아무 불평 없이 순종했고, 의학적인 조사와 의학적인 조사를 담당한 위원들이 흔히 던지곤 하는 장황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모든 질문에 응답하면서 어떤 반박이나 시험도 묵묵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조사위원 전원이 수녀와 그 놀라운 단순함을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녀로 하여금 영웅적이라고 할 만한 덕행을 실현하게 한 계제들도 있었는데, 신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1934년 6월에 오귀스트 발랑생 신부의 조사를 받는 동안 그녀가 보인 순종과, 비통한 날이었던 1934년 12월 20일에 보인 겸손이야말로 그녀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수녀가 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 임무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것이었으니 만큼 분명히 더 힘들어 보였지만, 수녀는 영혼들과 그녀의 수도회와 교회에 대한 큰 사랑으로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그녀를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은, 본 주교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직면하는 그 강한 정신력에 깊은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본인은 이 수녀의 덕행뿐만 아니라 그녀가 권한을 행사할 때 드러나는 그 탁월한 자질에도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비교적 교육을 받지 못한 편인 그녀가 수도회의 최고 장상으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여기에 벌써 비상한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본 주교의 총대리인 몬시뇰 게리가 수도회 총장 선출일에 관해서 조사를 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겠습니다.

 

모든 참사원들 곧 (각 지역 수녀원) 원장들과 여러 선교단체 대표들의 대답에 의하면, 그들은 마더 에우제니아의 연소한 나이라든지, 통상 그 임명이 기각될 수 있는 교회법상의 저촉 사항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판단력과 균형잡힌 기질과 힘찬 정력 및 굳건한 품성을 보고 원장으로 선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에우제니아 수녀는 그녀를 총장으로 선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총장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 총장 수녀에게서 특히 눈여겨 본 점은 그 명석하고 기운차고 통찰력이 있는 지성이었습니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로서 어쩔 수 없는 외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도 집안 살림을 맡아야 했으니 학교에는 결석하기 일쑤였으며,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도 수년 동안 베짜는 직공으로 일하며 고된 나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이 기본적인 결함 -그 결과가 그녀의 문제나 철자에 드러나지만- 에도 불구하고, 마더 에우제니아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수많은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주목할 만한 것은 총장 자신이 수도회의 회람을 작성했으며, ‘사도들의 성모회’ 수녀들에게 맡겨진 구호기관 설립을 위하여 시(市)당국이나 지방 행정 위원회와의 접촉에 필요한 서류도 직접 작성했고, 긴 지침서를 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마더 에우제니아는 모든 상황을 마치 양심의 문제인 것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보았으며, 올곧고 명확하고 실제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1,400명에 이르는 수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다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적성과 덕행들도 알고 있었기에, 각종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수녀님들을 적재적소에 선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수도회의 요구 사항들과 재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고, 각 분원의 형편도 알고 있었으며, 선교 본부들을 빠짐없이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마더 에우제니아에 대해 또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선견지명이 있는 그녀의 정신입니다. 자질이 있는 수녀들을 구호소나 학교에 있게 하고 그들이 생활하면서 진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얻어 주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특히 흥미있는 것은 그처럼 과단성 있는 정신을 지닌 그녀는 또한 현실 감각 및 창조적인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함을 주목하는 일일 것입니다. 6년 동안 무려 67개소나 되는 분원을 세웠고, 수도회 전체에 유익한 개선(改善)책을 강구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와 같이 에우제니아 수녀의 지성과 판단력과 의지와 관리 능력의 특징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그런 특성이 본인으로 하여금 환각증, 망상, 강신술, 히스테리 혹은 정신 착란에 대한 모든 가정(가정)을 결정적으로 배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에우제니아 수녀를 조사하는 동안 이 모든 증상에 대한 검진이 있었지만, 그 무엇으로도 그녀의 이 엄연한 특성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뿐입니다.

 

그녀의 생활은 정신적인 면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볼 때도 항구한 안정성을 드러내고 있어서 관찰자의 눈에는 이 안정성이 오히려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가정들, 이를테면 그녀가 암시에 걸리거나 조종당하기 쉬운 기질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결국, 모든 영향과 암시를 다반사하는 다면적인 거울처럼 매우 감수성이 강한 그녀의 기질을 그런 가정하에서 다룰 수 있겠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그녀의 일상 생활을 보더라도 그런 가정들은 배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더 에우제니아는 민감한 기질과 감성을 타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편애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결코 없었고,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는커녕, 홀로 그 자신의 계획과 활동을 정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과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평가보다도 이를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실이있으니, 그것은 그녀가 총장으로 선출된 다음 날에 일어난 일입니다. 총장은 이날 하원장들을 선출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 전날 자기에게 표를 던져 준 원장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저없이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원장은 수녀원이 있는 에집트에 도착하자마자 항공편으로 날아온 경질(更迭) 통지서를 받았던 것입니다.

 

 

2.  사명의 목적

 

마더 에우제니아에게 맡겨진 것으로 보이는 사명의 목적은 분명하고, 교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정당하고 시기 적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명의 분명한 목적이란 주로, 하느님 아버지를 기념하는 특별한 축일을 교회가 제정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알고 흠숭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조사위원회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아버지를 기념하는 전례적 축일을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병행하여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사 성제 때 바치는 기도와 성부께 대한 전례적 봉헌에 나타나 있듯이,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올리는 가톨릭 기도의 전통적인 취지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아버지를 기념하는 특별한 축일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삼위 한 분 한 분이 같은 정도로 흠숭 받으셔야 마땅한데, ‘말씀’과 ‘성령’께서는 그 사명과 외적 현현(현현)에 의해서 흠숭을 받으시지만 유독 ‘성부’께 대해서만은 그리스도인들의 주의를 그분의 위격으로 끌 수 있는 고유의 축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당히 광범위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과 심지어 사제나 수도자들까지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그분께 기도하거나 감사를 드리는 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조사는 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와 소원(疎遠)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은 아버지를 무시무시한 심판자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뜻밖의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지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에, 아버지의 진노에서 자기들을 보호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이들도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축일을 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이 가르침들로 돌아오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요한16,2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6,9)


하느님 성부께 바치는 축일은 또한, 성 야고보 사도가 ‘모든 선물이 그분께로부터 오는, 빛의 아버지’(야고1,17) 라고 표현한 분께 우리의 눈길을 들어올리는 효과도 있을 것이니, 영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과부성적인 섭리를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섭리는 바로 성삼위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화인 무한하신 자비를 베푸시는 것 역시 하느님의 세 위격에 공통적인 신성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기야, 첫눈에는 아버지를 흠숭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당신 아들을 보내신 분은 바로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외적으로 현현하시는 성자와 성령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지극히 옳은 일이라면, 미사예식서 중 ‘감사송’에 나와 있는 대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 역시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 특별한 축일의 진정한 목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흠숭하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아드님을 보내주신 아버지를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마더 에우제니아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메시지에 언명되어 있듯이, 아버지를 우리의 구속주로 찬양하고,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음(요한3,16)에 감사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모여 이 아드님과 함께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교설과 무신론과 현대 철학으로 어지러운 세상이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이 축일이 제정된다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아버지를,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아버지를,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아버지를 알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요한4,23)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겠습니까?

 

죽음과도 같은 전쟁으로 분열된 세계가 뭇민족을 더욱 긴밀히 일치시킬 굳건한 원칙을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는 이때에, 이 축일은 큰 빛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같은 천상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주시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끄시어, 그분 신비체의 지체로서 같은 ‘사랑의 영’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재난 때문에 지치고 무기력해진 때이니 만큼, 당연히 깊은 영성 생활에 굶주리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은 그들을 초대하여, 숨어 계신 아버지(마태6,18)를 ‘마음으로부터’ 예배하게 하고, 그들 안에 성삼위의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아버지께 자녀로서의 아낌없는 마음으로 그들 자신을 봉헌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또 영혼들의 초자연 생명을 활성화시켜서 자연스럽게 영적 어린이가 되도록 하고, 신뢰를 통해 아버지와 함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며, 하느님의 뜻에 그들 자신을 내맡기고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인 이유와는 별도로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는 한 보잘것없는 젊은 수녀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메시지가 교리상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짓 선견자의 글은 빈약하고 열매가 없으며 일관성이 없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더 에우제니아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셨다고 하는 메시지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의 요소가 조화롭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 메시지의 진정성을 굳히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의심스러운 혁신도 제시하지 않고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것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관하여 이미 계시하신 모든 것, 곧 복음서에 수록된 모든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점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 위대한 진리, 곧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다시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며 체험할 필요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 점입니다.

 

혼자서는 그러한 교리를 발견할 수 없었을 전달 도구의 약함과 전달된 메시지의 심오함 사이의 이 불균형이야말로, 이 메시지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원인의 개입에 의하여 그 도구가 된 수녀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인간 이성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 수녀가 발견한 생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사를 진행한 신학자들도 그 생각과 독창성과 풍요성을 점차적으로 깨달아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보기에 똑같이 의미심장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즉, 에우제니아 수녀가 아버지의 발현들을 보았다고 하자, 조사를 맡은 신학자들은 아버지의 발현이란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역사상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라고 반박한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는 그러한 반박 앞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을 따름입니다. ;

 

“아버지께서 제게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아들인 신학자들에게 자세히 찾아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수녀는 자기의 증언을 결코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한결같은 진술만 할 뿐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을 1934년 1월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의 반박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데, 바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글 속에서였습니다.

 

이 위대한 교회박사의 해답은 발현과 사명 사이의 구분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그것이 조사자들을 깨우쳐 주었고, 조사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던 장애를 제거해 주었습니다. 박식한 신학자들의 도전을 받은 이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수녀가 결국 옳았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인간 이성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이 경우에도 우리가 어떻게 수녀의 통찰력과 지혜와 인내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만일 거짓 선견자였다면 신학자들의 설명에 자기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에우제니아 수녀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증언을 진실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어쨌든, 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점은 이 사건의 기적적인 면에 대한 마더 에우제니아의 신중한 태도입니다. 거짓 환시자는 특별한 현상을  무엇보다 앞세우며 오직 그것만 보는데 반해, 그녀는 그러한 현상을 부차적인 증거나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가 아니라, 균형잡힌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호감이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학자들의 조사에 대해서 몇 마디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알베르 신부와 오귀스트 발랑생 신부는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자로서, 또 영성 생활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매우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와 유사한 다른 사건들의 조사에도 관여하도록 위촉을 받곤 하였고, 아주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며 조사에 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맡아 주도록 특별히 의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본인은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헌신적이고 성실한 협력에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에우제니아 수녀와 그녀에게 일어난 현상 전체에 대한 초자연적인 해석을 인정하는 그들의 증언은, 오랫동안 판단을 지연시킨 끝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판단을 보류한 것은 이 일에 대해서 처음에는 반감과 의심을 품었고 나중에는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수녀에게 갖가지 반박을 제기하면서 고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 일의 진정성을 서서히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 결언

 

본인은 영혼과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더없이 강한 책임감을 의식하면서, 본건(本件)은 오로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개입으로써만 만족스럽고 조리 있게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공포하는 바입니다.

 

본건을 모든 주변적인 특징과 따로 떼어 놓고 볼 때 가장 주요한 사실은, 한 보잘것없는 수녀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고 교회가 전례 안에 소중히 간직해 온 대로, 영혼들을 성부께 대한 참된 신심에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이 보기에 숭고하고 고결하며 초자연적인 풍성함을 지닌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경계해야 할 것이 조금도 없으며, 혼들림 없는 교리와 일치하는, 매우 큰 단순함이 있을 뿐입니다.

 

이 메시지에 수반된 기적 현상들은 주된 사실과 분리시켜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의미는 온전히 그대로 보존될 것입니다. 특별한 축일 제정에 대해서는 교회가 교리의 이유로, 수녀와 연결된 본건과 따로 떼어 고려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여부를 공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명의 진정성에 대한 기본적인 증거는 메시지의 훌륭한 가르침을 수녀 자신의 생활로 실천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는 분명 그 가르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도록 예정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인은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조처라고 생각합니다. 관련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10년 동안의 조사와 숙고와 기도 끝에, 이토록 감동적인 사랑을 드러내 주실 장소로 본인의 교구를 택해 주신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 프랑스 그르노블 교구 ; 알렉상드르 카이요 주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삶, 지은이 마더 에우제니아, 옮긴이 정진석 니꼴라오 추기경, 펴낸곳 가톨릭출판사,
취급처 불모임 교재 연구실,  
1999년 10월 15일 교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