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Dilecti Amici) / 교황요한바오로2세

Skyblue fiat 2012. 12. 20. 23:04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Parati Semper[Dilecti Amici]

 

 교황 요한바오로2세   발표시기 : 1985-03-31

 


 

국제 청소년의 해에 즈음하여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차  례
    국제 청소년의 해에 전하는 소원
    그리스도께서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음은 특별한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
    도덕과 양심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
    "나를 따라라"
    인생 계획과 그리스도교 성소
    혼인의 위대한 성사
    유산
    역량과 과업
    자아 교육과 위협
    "성장"으로서의 젊음
    미래의 거대한 도전 
    마지막 메시지
    젊은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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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벗들이여



국제 청소년의 해에 전하는 소원

 

    1.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1)
    이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본인의 권고입니다. 국제연합(UN)은 1985년을 국제 청소년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 자신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연령층의 사람, 개인, 공동체, 사회 전체에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근본 진리와 가치의 수호자이며, 동시에 인간과 위대한 인류 가족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지니고 있는 영원한 운명에 대한 봉사자인 교회에도, 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교회가 날마다 따라 걸어야 하는 근본적인 길이므로,2) 교회가 모든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인 청소년기에 대하여 특별한 중대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들은 그러한 청춘을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국가와 사회의 젊음이며 모든 가정과 온 인류의 젊음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교회의 청춘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분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모두 다시 젊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젊음은 여러분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유나 한 세대만의 자산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청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거쳐가는 모든 영역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별한 소유입니다. 젊음이란 바로 인류 자체의 소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미래에 속해 있고, 미래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로 이어지는 까닭에, 희망은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입니다.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덕(德)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저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와 이어져 있습니다.3) 또한 이러한 희망은, 그리스도교적이고도 인간적인 덕행으로서, 섭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휘하여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래는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치 그 미래가 한 때는 이제 어른들이 되어 버린 자들의 세대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어른들과 더불어 미래가 오늘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 그 현실의 모습과 여러 형태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성 세대에 있습니다. 아직은 미래에 놓여 있으나, 어느 날엔가 여러분 자신들과 더불어 현실로 다가설 무언가에 대한 책임은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미래가 여러분에게 속해 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인생 무상의 범주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 여정입니다. 미래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책임의 요구에 따라 윤리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책임은 우리가 인간 개인에게, 그리고 그 개인으로 구성되는 공동체와 사회에 대하여, 인간적인 행위, 결의, 약속과 지향의 근본 가치를 부여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은 또한 그리스도교적이고 인간적인 희망이 지니는 고유한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에서, 젊은이들에게 바쳐진 올해에 교회가 본인의 입술을 빌리어 젊은이 여러분에게 전하는 가장 첫째가는 바람은 바로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4)


그리스도께서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 언젠가 베드로 사도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5)를 묵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성서 본문들 가운데서, 이 이야기는 특별히 이러한 관점에서 상기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런 물음으로 대답하십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6) 이러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에서 주요 계명들을 그 질문자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젊은이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7)
    바로 이 순간에, 그 만남의 분위기는 돌변하고 맙니다. 복음사가는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8)고 적어 놓았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만나는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도 있기는 합니다. 특히 야이로의 딸9)과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10)을 죽음에서 살려 내신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 대화가 가장 완벽하고도 내용이 풍부한 만남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이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세대와 세기를 넘어 지속적이고도 일관된 유익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년 소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대화는 세계 도처에서 여러 나라, 인종, 그리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동시에, 그 만남을 묘사하는 모든 요소와 그 대화에서 오고 간 모든 말씀은 매우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특별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에 관한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참으로 중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교서에서 주로 복음서의 이 대목에 나오는 이 만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자신의 대화, 곧 젊은이들에게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그리스도와 나누는 대화를 전개해 나가기가 더욱 수월해질 것입니다.


젊음은 특별한 보화입니다

 

    3. 복음서의 이 대목 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그 젊은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재산이 많았다는 이 표현은 분명히 그 젊은이가 소유하고 있거나 상속받은 물질적 재산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처지이지 전형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사가의 말씀은 그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곧, 어떠한 물질 재화와도 관계 없이, 젊음 그 자체가 인간의 보화이며, 젊은 남녀들이 특별한 보화라는 사실에 대한 물음입니다. 흔히, 젊은 사람들은 특별한 보화로서 젊음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자주 이러한 말씀을 드렸지만, 언제나 똑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젊음을 보화로서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따로 이야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인생의 이 특별한 시기에 체험하는 귀중한 보화로서, 젊음을 생각하여야 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객관적인 이유들입니다. 젊음이란 유년 시기와 분명히 구별되는 시기이며, 정확하게 말해서 유년 시절을 벗어난 때이며, 또한 완전히 성숙한 시기와도 구별되는 것입니다. 젊음의 시기는 특별히 인간 “나”에 대한 강렬한 발견의 시간이며, 인간 “나”에 관한 고유한 속성과 능력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젊은 남녀들의 인격 발달을 깊이 응시해 보면, 저 독특하고도 유일무이한 구체적인 인간성의 가능태가 단계적으로 차츰차츰 보입니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미래의 인생 계획 전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그러한 계획의 성취, 곧 “자기 완성”으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연히 여러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젊음이라는 보화 자체는 바로 이러한 형태와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음은 발견하는 보화입니다. 동시에 계획하고 선택하고 앞을 내다보며 최초의 결단을 내리는 보화입니다. 그 결단은, 엄밀히 말해 인간 실존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단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결단들은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가 바로 이러한 실존의 국면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 젊은이가 묻는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이를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요를 뜻하는 “거대한 소유”는 바로 젊음 그 자체인 보화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젊음의 보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입니까? 복음사가는 분명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오히려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결심은 분명히 그 젊은이가 소유하였던 외적인 부요(“재산”)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는 점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 젊은이였다는 사실, 곧 젊음 안에 감추어진 내적인 보화가 그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보화가 또한 인생 전체의 계획에 가장 분명하게 관련되는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도록 그를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나의 인생이 완전한 가치와 온전한 의미를 지니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들이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젊음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 드러나는 보화입니다. 인간은 자기 일생을 통하여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을 특히 절박하게 참으로 집요하게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물음들은 인격의 역동적인 발달을 보여 주고, 여러분의 나이에 적합한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물음들을 흔히 성급하게 자문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졸속하거나 피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무게를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인생 전체에 관한 답변, 인간 실존의 전부를 포용하는 답변을 요구하는 물음이 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들은 여러분의 세대에서 유년 시절 이래 고통에 짓눌려 살아온 젊은이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체적인 결함이나 장애 또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사회적인 처지로, 고통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정신이 정상적으로 발달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물음은 더욱더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또한 바로 그 첫머리부터 실존의 고통으로 점철된 물음인 까닭에, 매우 비극적인 물음이 됩니다. 전세계 도처의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러한 젊은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 나라와 사회와 수많은 가정에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떤 낙인이 찍혀, 어려서부터 특수 교육 기관이나 병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젊음 또한 하나의 내적인 보화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까? 그들은 이러한 근본 문제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물어 보아야 할 적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그분을 대신할 수 없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 젊은이가 무엇을 물었던가는 우리가 이미 들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나의 삶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젊은이의 물음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답변은 이런 뜻이라 하겠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가치의 궁극적인 토대이시다. 그분께서만 우리 인간 실존에 대한 궁극의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시다는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가치는 그 최초의 원천과 궁극의 완성이 오직 하느님 한 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11)이십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가치의 정통성과 그 최종 확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하느님을 언급하지 않고는-창조된 가치의 세계 전체는 ‘절대 공허’에 머물고 맙니다. 그 세계는 또한 그 의미와 명료성을 잃게 됩니다. 악이 선인 것처럼 제시되고, 선 그 자체는 배척을 당합니다. 가치 판단과 인식과 행동의 한계 밖으로 하느님을 쫓아 내 버린 곳에서, 바로 이 시대의 체험으로, 우리는 이를 보고 겪어 오지 않았습니까? 


    왜 하느님만 선하신 분이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무엇보다도 당신의 일생과 죽음의 증거로써,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12)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13) 때문에 바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야기해 온 대로, 삶의 가치,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젊음이 지니는 독특한 보화 일부를 형성합니다. 이는 책임을 지고 성취시켜야 할 인생 계획과 관련된, 젊음의 풍요와 고뇌 바로 그 한가운데서 나오는 물음입니다. 젊음이 개인적인 고통으로 시험을 당할 때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온갖 죄악을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을 받을 때, 결국 죄의 신비, 인류 죄악의 신비14)(mysterium in iquitatis)에 직면하게 될 때에, 삶에 관한 물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이시다. 이 말씀은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확고하고도 진실한 대답입니다. 결정적인 해답을 그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나의 젊은 벗들이여, 여러분이 가능한 한 가장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적인 길을 찾아, 이를 받아들이고 성취하게 되도록 본인은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와 대화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그분께서는 묻습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사실, 내가 선하다는 것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까닭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15) 스승이요 친구이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16)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이,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의 젊음에 뿌리박고 있는 보화를 통하여, 그분께 묻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의 근본 요지입니다. 여러분의 젊음은 여러분 앞에 여러 가지 전망을 펼쳐 놓습니다. 하나의 과업으로서, 여러분에게 인생 전체에 대한 계획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가치에 관한 물음이 나옵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 진리와 선악에 관한 물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하시는 당신의 답변에서 이 모든 물음을 하느님께 여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동시에 여러분 안에 있는 그 물음의 원천과 토대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바로 창조 행위를 통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습이 된 까닭입니다.17) 하느님을 닮은 바로 이러한 모습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물음들을 제기하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인간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기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이러한 물음들이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전부에게 이를 깨우치시고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인간에 관한 진리의 이 근본 차원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고’18)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19)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

 

    5. 내가 무엇을 해야 나의 인생이 가치를 지니고 의미를 갖겠습니까? 이 진지한 물음은 복음서가 전하는 젊은이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현대인들이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실존의 지평이 세계와 현세의 진보로 꽉 들어차 있는 세대가 아닙니까? 우리는 주로 지상의 범주 속에서 생각합니다. 또한 지구상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는 우주 비행선을 발진시키고, 다른 혹성들에 신호를 전하고, 그 별들을 향해 우주선을 보내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문명의 내용이 되어 왔습니다. 과학 기술은 물질에 관한 인간의 가능성들을 무수히 발견해 왔으며 또한 인간의 사상과 역량, 풍조와 열망 등 내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젊음의 물음들을 털어놓을 친구가 될 때에, 우리는 그 젊은이와 다른 물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그 외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충분하고도 본질적인 것이 못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삶의 길을 보여 주는 오로지 “선하신 선생님”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느님 안에서 지니는 인간의 궁극 운명에 대한 증거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입으로 선포하신 복음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20) 당신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인도할 능력이 없는 모든 계획 앞에서 끊임없이 “반대를 받는 표적”21)이 되어 오셨습니다. 참으로 이 죽음의 경계에서, 그러한 계획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인간의 모든 물음을 침묵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계획, 여러 가지 세계관, 여러 가지 이념들을 앞에 두고,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2)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께서 증언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편으로 “세상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23)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은 이 “세상”을 꾸미고 있는 매혹적인 현실과 그 모든 풍요에 대하여 내적인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겠다고 결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24)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매여 있습니다. 가시적인 세상의 차원에서, 인간은 죽는 날을 바라보며 태어납니다. 동시에, 그 실존의 내적 근거가 자신을 초월하게 되는 인간은 또한 그 자신 안에 세상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비록 세상에 뿌리박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그 모든 것은 태초부터 인간성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통하여 설명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초월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정당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물음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역만이 아니라 그 밖에서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자문해 왔던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처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전망으로부터, 곧 영원한 생명의 전망으로부터 현세적 실존을 이해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모든 면에서 아무리 부요하고 고도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현세 실존이란 결국 피치 못할 죽음의 필연성 외에는 아무것도 인간에게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제, 젊음과 죽음은 정반대가 됩니다. 죽음이란 젊음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또 그렇습니다. 그러나 젊음이란 인생 전체의 계획을 뜻하는 것이므로, 의미와 가치의 판단 기준에 따라 세워지는 계획이므로, 젊은 시절에 또한 종말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성서의 말씀처럼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25)이라는 똑같은 말을 합니다. 영감을 받은 그 성서 저자는 덧붙여 말합니다.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2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7) 복음서의 그 젊은이처럼, 그리스도께 물으십시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도덕과 양심에 관하여

 

    6.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고 대답하시며, 십계명 중에 있는 계명들을 열거하십니다. 모세는 어느 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계약을 맺으시던 순간에,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28)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날이 지켜 가야 하는 일상 생활의 지침이었습니다.29) 그리스도께 말씀드리던 그 젊은이는 당연히 그 십계명을 환히 외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3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시는 대화에서,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느냐?”고 하시는 똑같은 질문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야 합니다. 계명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질문은 틀림없이 거듭될 것입니다. 계명은 행동의 근본 토대를 규정하며, 인간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계명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하는 인간의 소명과 본질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명확한 도덕 법전은 하느님 계시의 말씀 안에 새겨져 있으며, 시나이 산의 십계명 판에 그 요지가 담겨 있고, 복음서 안에서 곧 산상 설교31)와 사랑의 계명32)에서 그 정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도덕 법전은 또 다른 형태로 새겨져 있습니다. 도덕률은 인간의 양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명을 모르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계시하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들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합니다.”33)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던 성 바오로 사도는 즉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율법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증인이 됩니다.”34) 


    여기서 우리는 여러분의 젊음과 그 젊음으로부터 떠오르는 인생 계획에서 극히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 계획은 이를 세우는 진실된 행동을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받아들입니다. 이 진실된 행동은 도덕률의 이중 제시, 곧 모세의 십계명 판과 복음서에 새겨진 도덕률 그리고 인간의 양심 안에 새겨진 도덕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양심은 도덕률에 대한 “증인으로서 자신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양심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대로,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하는”35) “투쟁하는 이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말씀들이 우리의 내적 실재에 얼마나 밀접하게 일치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부터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에서,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고 한 계명들을 예수님께서 열거하실 때에,36) 올바른 양심은 인간의 대응 행위에 대하여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하는 내적인 반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률의 근본 원리는 어떤 종류의 상대주의나 실리주의 때문에 불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젊은 벗들이여!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의 그 질문자에게 하셨던 대답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도덕적 의식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양심 상태를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핵심적인 근본 물음입니다. 바로 젊은 시절에 형성되어야 하는 인생 계획 전체를 중시하는 사람들, 젊은이 여러분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전 인생 계획의 가치는 여러분 각자와 도덕적 선악의 관계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여러분 양심의 올바름과 올곧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양심의 감수성에 달려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여기 극히 중대한 순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 고유의 차원에서 순간 순간마다 그리고 영원히 만나게 되는 중대한 계기입니다. 인간 고유의 차원이란 바로 양심의 차원이며 도덕 가치의 차원입니다. 양심은 시간과 역사의 극히 중대한 차원입니다. 역사란 어떤 의미에서 “외부로부터” 일어난 사건들만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내부로부터” 기록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류 양심의 역사이며 도덕적 승패의 역사입니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위대성은 여기서 그 근거를, 곧 진정한 인간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이는 내적인 보화입니다. 인간은 이로써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선악의 증거인 양심의 보화를 지니고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거룩함 그 자체이신 분 앞에서, “그 뒤에 심판을 받게 되는”37) 인생 전체에 관한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양심 안에서, 곧 인간 행동의 내적인 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로, 거기에는 언제나 영원한 생명의 차원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양심은, 도덕 가치를 통하여, 모든 세대의 인생 위에 그리고 인간의 환경, 사회, 국가 모든 인류의 문화와 역사 위에 가장 분명한 검인을 찍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

 

    7.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를 계속 고찰해 볼 때, 우리는 이제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새롭고도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그 시점까지 그가 걸어온 인생 여정 전체에 일치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모두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 여정이 그리스도의 대답과 일치하는 것이기를, 본인은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본인은 여러분의 젊음이 여러분에게 확고한 원칙의 건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이 젊은 시절에 성숙한 혜안을 얻어, 여러분 모두 일생 동안 언제나 ‘양심의 인간’, ‘원칙의 인간’,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인간’ 다시 말해서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형성된 도덕적 인격으로, 여러분은 공동체 생활, 가정, 사회, 직업 활동에 중대한 공헌을 할 수 있고, 또한 문화적·정치적 활동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극히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으며, 여러분이 이미 관련되어 있거나 언젠가 연관을 가지게 될 모든 영역에서 막중한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인간의 온전하고도 심오한 정통성에 관한 문제가 되며, 또한 인간의 진정한 인격 발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러한 인격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모습으로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고, 또한 그 인격은, 동시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정과 더불어 시작되는 다양한 환경의 공동체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모로든,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공동체의 풍요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인격적” 보화인 젊음이 나아가는 방향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곧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의 고유한 내면 세계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존재의 구체적인 영역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십계명과 복음의 계명들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며, 특히 사랑의 계명은 인간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게 해 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38) 완덕의 끈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형제애는 더욱 충만한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며,39)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랑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40)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감싸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젊음이 나아가는 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여러분이 그분 앞에서 여러분 양심의 증언으로써 이러한 복음의 도덕률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고귀한 정신을 지녔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도덕률의 가치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섰던 것입니다.
    인류의 온 역사를 통하여 내려온 이러한 사실들의 확인을 여기서 예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 양심의 명령이 모든 인간을 객관적인 도덕 규범으로 이끌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 도덕 규범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원칙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41)
    우리는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도덕을 이미 깨닫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도덕은 “마음 속에 새겨져 있고” 또한 “양심이 그(도덕의) 증인이 됩니다.” 하고 선언하십니다.42) 그리스도인은 창조하시는 말씀이 모든 인간을 비추어 주시는 그 빛을 기꺼이 도덕 안에 받아들입니다.43) 또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므로, 더욱 높은 복음의 율법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복음의 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의 계명 안에서, 남이 자기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 모든 선을 이웃에게 해 주어야 하는 의무를 명백하게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내면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확인합니다.
    이는 또한 본인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젊음과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평생의 계획에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통찰한 뒤에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는 복음 말씀의 의미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와 같은 시선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시선으로 여러분을 유심히 바라보시는 그 진실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복음은 그 모든 단계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시선”은 기쁜 소식 전체의 요약이며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의 기원을 찾으려면, 우리는 창세기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44)고 한 순간이 바로 그 시선의 기원입니다. 창조주의 그 최초의 시선은 복음서의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시던 그리스도의 시선에서 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 희생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이 시선을 확인하고 보증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 구원의 희생을 통하여, 그 “시선”은 각별한 사랑의 깊이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자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45)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또한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시선을 발견하고 또 그 시선을 깊이깊이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시선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러한 체험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고통 속에서, 또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의 경우처럼 순수한 양심의 증언과 더불어, 아니면 그 정반대의 상황에서 양심의 가책과 죄 의식과 더불어, 이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을 때, 그 타락의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46)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시선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 영원히 사랑을 받고 있다47)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시선으로서 한평생 인간과 함께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모욕을 당하고 짓밟힐 때,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우리의 인간성이 말살된 것으로 보일 때, 그 시련과 굴욕과 박해와 좌절의 순간에, 아마도 이 영원한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 아들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은 우리 인간의 전 실존을 받쳐 주는 견고한 지주가 됩니다. 만사가 우리를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불신하게 할 때에, 그리스도의 이러한 시선, 곧 어떠한 죄악이나 파멸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이 그분 안에서 입증된 사랑의 깨달음, 바로 이러한 의식이 우리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여러분을 위한 본인의 소망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 젊은이가 체험하였던 것을 여러분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시었다.” 



“나를 따라라”

 

    8. 복음서의 본문을 살펴볼 때,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고 하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왔다는 젊은이의 그 순간까지의 인생 증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동시에, 이 “사랑의 시선”은 그 대화의 결론 국면으로 들어서는 도입부였습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그 결론의 단계로 들어서는 사람이 바로 젊은이 자신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그 때까지의 모든 생활에서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인격적인 충실성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는 새로운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48)
    이 물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도덕적인 양심, 나아가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바로 젊은이의 도덕적인 양심 안에, “그 이상의 무엇”에 대한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열망은 여러 가지로 드러나며, 우리는 또한 우리의 종교와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교, 특히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영적인 인간들”이 있었으며, 물질적인 것의 허상을 초월하는 절대자를 찾아 청빈하고 청정하게 살고자 흔히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있어 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완전한 해방의 경지에 이르고자 분투하였으며, 사랑과 신뢰를 지니고 하느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감추어진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정신 속에서 들리는 신비스러운 내면의 소리에 재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반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49) 그분의 말씀은 또 더욱 위대하고 영속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인도합니다.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50) 사회의 찰나적이고 때로는 모호한 가치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의 우월성을 바로 행동으로써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고행을 하고 온 힘을 다해 목적을 추구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의 삶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은총으로 승화시키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표양이 되고, 그들이 살아가는 
    그러나 “그 이상의 것”, 완전함에 대한 열망의 명확한 언급은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십계명 판을 중심으로 한 모든 도덕률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계명들에 새롭고도 복음적인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계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은총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모든 계명이 모아집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51)
    이 새로운 맥락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가 시작되는 여덟 가지 참 행복52)의 강령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 도덕률의 근본을 이루는 계명들은 일련의 복음적인 권고들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 권고들은 완전함 곧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특별한 방법으로 표명하여 줍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그 이상의 것”을 묻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서, 성령의 손길에 의하여, 계명을 따르는 삶으로부터 은총을 깨닫는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시는 사랑의 시선은 이러한 내적 “전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53)
    사랑하는 나의 젊은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차원은 계명으로 알려진 단순한 도덕적 의무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차원일 뿐만 아니라, “더욱 깊은” 차원이며 더욱 근본적인 차원입니다. 이는 우리가 젊은 시절에 세우기 시작하는 인생 계획에 관하여 더욱 완전한 표현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차원은 또한 모든 인간의 성숙한 면모를 만들어 주고, 나중에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소를 창조합니다.
    여기서, 본인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젊은이에게 하셨던 말씀의 특별한 의미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서 모든 세대의 젊은 질문자들 중 그 일부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본인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성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직무 사제직에 봉사하도록 부름 받는 모든 소명의 발단에서 “나를 따라라.”5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 사제직은 동시에, 라틴 전례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의식적이고도 자유로운 독신의 선택과 이어집니다. 교회는 또한 수도 성소의 시작에서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똑같은 말씀을 발견합니다. 수도 성소에서 한 남자나 한 여자는, 복음적인 권고(정결, 청빈, 순명)의 서약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지상에서 살아가신 그리스도의 삶55)을 자신의 인생 계획으로 인식합니다. 수도 서약을 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특별히 증언하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에 대한 소명을 증언하는 데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에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를 예외적으로 증언하여야 하는 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고 수많은 기회에56) 더 완벽하게 제시되었으므로, 까닭에, 본인이 여기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 교서에서 본인은 이를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치고자 합니다. 본인이 여기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 안에서 그러한 성소 특히 복음적인 청빈의 문제가 극히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외적이고도 카리스마적인 의미에서,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젊은 시절에 때로는 어린 시절에 들리는 까닭에, 본인이 여기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본인은 한 남자나 한 여자로서 인격 발달의 중요한 국면에 처해 있는 모든 젊은이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한 부르심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다가설 때에, 그 부르심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부르심을 성숙한 성소로 발전시키십시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고 기도하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고,”57) 또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사제들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회와 세계는 온 삶을 오롯이 하느님께 바치는 증거자들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현존하게 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더욱 가까이 가져오는, 그리스도 자신의 배우자적인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이제 본인에게 추수할 것이 많다는 데 대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저 다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복음의 추수, 이 구원의 추수는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적습니다!” 이는 아마도 오늘날 특히 일부 국가에서 과거보다는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으며, 또한 봉헌 생활을 하는 일부 수도회나 그와 유사한 단체에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58)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특별히 우리 시대에, 더욱 많은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를 위한 기도와 행동 계획이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교회가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도 또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러한 교회의 기도가 열매를 맺으려 할 때에, 스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를 따라라.”


인생 계획과 그리스도교 성소

 

    9. 복음서의 이 말씀은 분명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은 우리가 더욱 광범하고도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소의 문제를 한층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 줍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 각자가 젊은 시절에 그려 내는 인생 계획과 어느 정도 동일시되는 “삶”의 성소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계획” 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인생 계획에서, 내 자신이 바로 그 계획을 세우는 주체이며, 이는 여러분 각자의 실재적인 인격에 한층 더 부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 요소들이 그 계획 안에서 자각되는 한, 이러한 “계획”은 하나의 “성소”입니다. 이 요인들은 대개 특별한 가치 질서(또한 “가치 체계”라고도 한다.)를 형성하며,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끌어들이는 이상,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소”는 하나의 “계획”이 되고, 그 계획은 또한 하나의 성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서 있고 또 그리스도와 젊은이의 대화에 나오는 젊음에 관한 묵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삶의 성소”에 대한 “인생 계획”의 그러한 관계는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의 피조물이며,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젊은 시절에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 특히 자기 부모들과 교사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또한 자신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도 그러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익히게 되는, 내면의 특별한 영역에 속하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 물음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께 묻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인생을 위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창조적이고도 아버지다운 계획은?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 나는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그 “계획”은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의 과업으로 부여하시는 그 무엇으로서, “삶의 성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젊은이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은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그들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의도를 깨닫고자 열망합니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과업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에 맡겨져 있고 또한 동시에 내부와 외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찰한 다음, 젊은이들과 소년 소녀들은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세우며,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성소로서 이러한 계획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교서를 보내는 모든 젊은이 여러분에게, 하느님 앞에서 각자의 삶의 성소를 발견하는 일과 관련된, 이 놀라운 과업을 위탁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신명나는 과업입니다. 그것은 매혹적인 내면의 사업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면서, 여러분의 인간성은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며, 또한 여러분의 젊은 인격이 더욱 큰 내적 성숙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다른 사람들을 위하여-하느님을 위하여, 여러분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성소”를 발견하는 과정과 병행하여, 이러한 삶의 성소가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성소”가 되는 방법이 점진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소”의 개념이 무엇보다 먼저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경우에 한하여 젊은이들에게 “나를 따라라.”는 복음적인 권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공의회는 사물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 안에서 그 독특한 특성과 성사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쇄신된 의식, 곧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tria munera)인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보편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은, 또한 성화 성소의 보편성59)에 대한 의식으로서, 모든 인간의 삶의 성소는 그리스도인의 성소로서 복음적인 부르심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따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느님이신 구원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여러 길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종말론적인 진리와 사랑의 나라를 증거함으로써, 또한 그뿐만 아니라 복음 정신에 따라 현세의 모든 현실을 변혁시키고자 분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습니다.60) 여기가 바로 그리스도인 성소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는, 평신도 사도직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이는 여러분 젊음의 근본적인 역동성에 부합되는 인생 계획에 서 극히 중대한 전제가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채울 삶의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의 그 젊은이에게 하셨던 말씀에 비추어, 인생 계획을 검토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세례와 견진성사의 의미를 매우 깊이 있게 거듭 숙고하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성사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소의 근본 유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성체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되는 충만한 성사적 은총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교회의 영성적인 풍요는 모두 이 사랑의 성사 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한, 언제나 성체성사와의 관계 안에서, 고해성사를 묵상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 형성에서, 고해성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특히 내적 생활의 체계적인 교육인 영성 지도와 관련될 때에 그러합니다.
    교회의 성사들이 젊음과 젊은이들에 대하여 해야 할 분명하고도 독특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간결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주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 특히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는 사목자들이 듣도록 위임하는 바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교회 그 자체가 “하나의 성사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에 대한 표지입니다.”61) 모든 삶의 성소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소인 한, 교회의 성사성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성소는 우리 신앙의 성사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사들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향하여, 우리가 어려서부터 우리의 인간적인 “나”를 개방할 수 있게 합니다. 성사들은 우리가 참으로 인간적인 삶을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여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인간적인 삶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고, 동시에 그 삶은 그리스도인의 원형에 이르게 됩니다. 복음이 인간에게 부여한 요구들에 대한 의식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은총에 대한 인식과 어우러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네가 알았더라면”6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의 위대한 성사

 

    10. 젊은이 여러분의 인생 계획이 그리스도인의 성소 관념 관련하여 얻게 되는 이토록 방대한 배경에도, 본인은 이 교서를 보내는 젊은이 여러분과 더불어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 모든 젊은이의 가슴 속에 있는 문제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핵심적인 물음인 동시에 창조성과 문화라는 주요 성찰 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서의 주요 성찰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본인이 개인적으로 수없이 성찰해 보고 분석하였던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인류 역사 안에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에서 완전한 평등성과 더불어 독특한 “이중성”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남성과 여성에 관련된 본성과 속성과 과업을 구분하는 문제에서, 놀라운 보완성과 더불어 이중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여러분 각자의 인격적인 “자기” 안에 필연적으로 새겨져 있는 주제입니다. 젊음이란 이토록 거대한 주제들이 경험적이고도 창조적인 방법으로 모든 젊은 남녀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 모든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인격적인 “자아”에 대한 근본 발견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양심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젊은 가슴의 지평에서 새로운 체험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사랑의 체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창조하고 형성하는 인생 계획 안에 맨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사랑의 체험입니다.
    각기 개별적인 경우에서, 이 모든 체험은 둘도 없는 그 자신만의 주관적인 표현과 풍요한 감정과 참으로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모든 것 안에는, 이러한 표현을 왜곡하지 말고, 이러한 보화를 파괴시키지 말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일그러뜨리지 말라는 강력한 권고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름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을 바로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습니다. 그러한 체험이 그 단순함과 순수함을 지키고 있다면, 이러한 부름은 복음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젊은 양심의 소리 안에서 들리게 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63) 그렇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사랑을 통하여,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 계획 전체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랍니다만, 여러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64)
    그러므로 본인은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여러분 젊음의 이 중차대한 국면에서 그리스도와 여러분의 대화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그 대화에 더욱더 투신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분의 부르심은 “나는 너를 전혀 다른 사랑으로 부른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흔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라.” 교회의 신랑인 나를 따르라. 교회는 나의 신부이다. 오너라, 너 또한 네 신부의 신랑이 되어라. 너 또한 네 배우자의 신부가 되어라. 너희 두 사람은 모두 그 신비, 그 성사의 참여자가 되어라.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말하는 대로, 혼인성사는 위대한 그 무엇,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주는”65) 위대한 성사입니다.
    이러한 길에서도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사건으로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는 그 일, 여러분 안에만 여러분 사이에만 존재하는 그러한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그 궁극의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를 믿고 확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 신성의 절대적인 일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적인 친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간적인 “위대한 신비”가 창조주이신 하느님 안에서 그 기원을 가지며, 배우자로서 “자신을 내어 주신”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고 또 확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남편과 아내에게 각기 자신의 인간 존엄성을 전적으로 온전히 내어 주는 “자기 헌신”의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혼인의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혼인 성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해가 바뀔수록 부부의 사랑, 몸과 마음을 다하는 그 사랑을 배우겠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66)
    여러분의 혼인 생활의 미래가 평생의 “시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에,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시험은 혼인을 통하여 여러분이 인생 계획 안에 포함시키고자 의도하는 성소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본인은, 젊은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생애에서 많은 시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젊은이들의 이러한 사랑에 더욱 가까이서 동반하는 것이 본인의 임무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에 힘입어, 본인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가를 그리고 얼마나 중요하고도 위대한 것인가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미래는 그 대부분이 이러한 사랑의 길을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여러분과 그 여인이, 여러분과 그 남자가 젊음의 길에서 발견하는 젊음이 넘치는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위대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또한 거대한 과업입니다.
    오늘날,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도덕 원리는 여러 집단들 안에서 왜곡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것으로 자처하는 모델을 주변 환경과 심지어 사회 전체에 강요하려는 시도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이 인간 존재를, 특히 여성을 주체로부터 객체로 뒤바꾸어 그 유별난 날조의 객체로 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또한 위대한 사랑의 내용 그 전체가 “환락”으로 격하되고 있습니다. 양당사자가 모두 그 기쁨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낳은 결실이요 새로운 육화인 자녀는 갈수록 “귀찮은 부수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문명이 부부애와 부성애와 모성애의 이 놀라운 복합체 전체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문명은 태초부터 신적인 표지와 그 반영으로 충만해 있는 사랑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벗겨 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 벗들이여! 여러분은 이러한 보화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계획 안에는 비틀리고 메마르고 거짓된 내용을 새기지 마십시오. 사랑은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찾아 나서십시오. 그 진리는 반드시 발견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여론이나 선전 구호의 흐름을 거슬러 가겠다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사람들에게 분명한 요구들을 부여하는 사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의 끊임없는 가르침 속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요구들은 바로 여러분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게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특별히 여기에서, 본인은 이 교서의 첫머리에서 표명하였던 간절한 소원을 거듭 되풀이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인류는 혼인과 가정과 미래의 토대인 그 사랑의 실재를 여러분에게 위탁합니다. 교회와 인류는 여러분이 그 사랑의 재생을 가져오리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랑을 아름답게 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하리라고.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방법으로 성숙되고 책임지는 위대한 사랑을 이루리라고 믿습니다. 


유산

 

    11. 젊은 시절에 세우는 인생 계획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광범위한 영역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계속하여 고찰해 봅시다. 우리의 인격적인 “자아”가 혼인 서약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으로 개방되는 그 주요한 시점은 성서의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발견됩니다.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된다.”67)
    “떠나라.” 하시는 이 말씀에 특별히 유의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 기원에서부터 가정을 통하여 이어져 왔으며, 또한 종말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한 인간은 그 어버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입고 태어남으로써 가정 안에 들어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사랑하며 살아왔던 이 최초의 환경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남”으로써, 동시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의미에서, 여러분 안에서 어버이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버이 안에 그 가정 안에 직접적인 기원과 원천을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유산을 떠맡습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은 어버이를 떠날지라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버이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유산은 여러분에게 이를 전해 준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들과 여러분을 영구히 이어 줍니다. 그리고 그 개인, 그 남자와 그 여자는 계속적으로 그 동일한 유산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십계명 중의 네 번째 계명은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여라.”68)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된 존재의 유산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유산이, 더욱 자세하게 정해지는 개인적·사회적 처지입니다. 여기서는 부모를 육체적으로 닮는 것까지도 그 유산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날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그 중심이 되는 문화 유산 전체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유대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는 말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유대는 가정 그 자체보다는 광범위하지만 주어진 환경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적어도 여러분이 태어난 부족이나, 흔히는 민족이나 국가의 한계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가정의 유산은 한층 광범위하게 넓혀집니다. 여러분이 가정 안에서 자라나는 동안, 여러분은 줄곧 독특한 문화에 참여하며, 또한 여러분의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 안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유대는 동시에 가정보다는 광범위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적인 동질성의 토대를 뜻합니다. 가정이 여러분 각자의 최초의 스승이라면, 여러분은 동시에, 그 가정을 통하여, 문화, 언어, 역사의 일치로써 연결되어 있는 부족과 민족 또는 국가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그러한 유산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소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회의 문화와 여러분 국가의 역사를 형성하는 요소들과 가치 그리고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개인적인 인간성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와 가정을 통하여 그리고 또한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재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유산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직 패배주의자가 아닌 한, 달란트의 비유69)에 나오는 마지막 종이 그러했듯이,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인 유산을 받아들여, 이를 확인하고, 유지하고, 증대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회에서, 이것은 중요한 과업입니다. 특별히 그 독립적인 실존의 초기에 놓여 있는 사회이거나, 외부의 파괴 위협과 내부의 파멸 위험으로부터 그 국가의 본질적인 동질성과 실존 그 자체를 수호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중대한 과업입니다.
    젊은이 여러분에게 이 교서를 쓰면서, 본인은 우리 세계의 부족들과 민족들과 국가들이 처해 있는 복합적이고도 분열되어 있는 상황들을 내 마음 속에 그려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젊음, 그리고 젊은 시절에 여러분 모두가 세우는 인생 계획은 그 맨 처음부터 이들 다양한 사회의 역사의 일부가 되며, 이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주로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는 가정적인 의식의 문제가 되고 결국엔 국가적인 의식의 문제가 됩니다. 곧, 마음의 문제이고 양심의 문제입니다. “가정”에 관한 개념에 이어, 즉시 “조국”에 대한 개념이 전개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의 유대보다는 광범위한 이 사회적 유대를 점차적으로 체험하면서,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 각자의 지상 “조국”인 그 폭넓은 가정의 공동선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고대이든 현대이든, 국가 역사의 탁월한 모습은 또한 여러분의 젊음을 인도해 주고, 흔히 “조국애”라고 하는 사회적 사랑의 발전을 강화시켜 줍니다. 


역량과 과업

 

    12. 여러분의 조국 사회와 가정의 이러한 맥락은 차츰 달란트의 비유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주제를 내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재능”과 “역량”을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여러분은 그 역량을 증대시키기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역량, 그 가능한 방향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한 것입니까! 본인은 여기서 이를 예거하는 것마저도 삼가겠습니다. 본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빠뜨려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수많은 방향과 그 모든 다양성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젊음이 가져다 주는 수많은 발견의 풍요로움을 보여 줍니다. 복음서를 인용하며, 우리는 젊음이란 달란트를 분별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젊음은 또한 한 인간이 모든 인간 활동과 노동 그리고 창의력이 발달하고 또 그 발달이 지속되는 수많은 길로 들어서는 시간입니다.
    본인은 여러분 모두 이러한 길을 따라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관심과 근면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그러한 길로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노동, 모든 노동은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70) 그리고 이러한 고된 노동의 체험은 여러분 모두 어려서부터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은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을 형성시키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창조합니다. 그러기에 노동은 언제나 창조적인 노력의 문제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연구나 지적인 정신 노동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보통의 육체 노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젊음의 시기를 특정짓는 노동은 무엇보다 성인의 노동을 위한 준비이며, 그러기에 그 노동은 학교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젊은이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며, 여러분의 지적 발달의 단계와 여러분의 취향에 따라,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높아지는 차원에서 여러분 젊은이들의 생활이 여러 해 동안 관련되어 있는, 전세계의 모든 학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또한 여러분의 정신과 성격의 안내자요 여러분의 스승이요 지도자이며, 나의 형제 자매들인 모든 어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과업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들의 책무는 얼마나 독특한 것입니까! 그들의 공헌은 또 얼마나 지대합니까!
    끝으로 본인은, 특별히 어떠한 사회와 환경 속에서 흔히 기본적인 차원에서부터,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젊은이들, 여러분과 한 동아리인 그 젊은 무리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교육의 책임을 진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도전이 되어 왔으며, 그러한 사태는 적절히 개선되어야만 합니다. 교육은 인간 문명의 기본적인 혜택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교육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회 전체의 미래는 대부분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 연구, 학문, 학교 등을 말할 때, 인간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가 부각됩니다. 이것은 진리의 문제입니다. 진리는 인간 지성의 빛입니다. 지성인들이 젊은 시절부터 줄곧 다양한 차원의 실재 파악을 탐구하고 있다면, 이는 진리를 소유하고자 곧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구조가 그러합니다. 진리에 대한 굶주림은 인간 정신의 근본적인 표현이자 열망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71) 복음서의 말씀들 중에서, 이는 분명코 가장 중요한 말씀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그 전체성 안에서 언급하는 까닭입니다. 인간 고유의 존엄과 위대함이, 그 내부로부터 인간 정신의 차원에서 무엇을 바탕으로 세워져 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지식은 한갓 교육에만, 더구나 대학의 정규 교육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문맹자도 역시 그러한 지식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육은 곧 실재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은 인간의 존엄성에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진리에 봉사하여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봉사는 또한 여러분이 교육 과정을 다 마친 뒤에 수행하도록 부름 받을 그 노동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여러분은 그 교육 과정을 다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여러분이 거대한 노동 세계에서 유익하게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지성적, 기술적, 실천적인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학교가 여러분에게 육체 노동을 포함하여 노동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노동 그 자체가 위대하고도 중대한 가치들을 가르쳐 주는 학교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 문화에 확실하게 공헌하고 있는 노동 그 자체의 웅변입니다.
    그러나 교육과 노동의 관계에서,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그러한 관계에서는, 실제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특별히 실업의 문제, 더욱 일반적으로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는, 일터가 부족한 문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문제는 학창 시절부터 여러분의 장래에 불확실성의 그림자를 던져 주고 있는 또 다른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사회는 나를 필요로 하는가? 나 역시 나를 자립하게 해 주는 노동을 발견할 수 있는가? 품위 있는 생활 여건을 갖추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내 자신의 집에서 나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사회가 나의 공헌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진정 사실인가?
    이 진지한 물음들은 본인에게 모든 정부를 향하여 그리고 국가 발전과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거듭 촉구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곧 노동은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세심한 보호를 확실하게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특히 오늘날에 흔히 실업의 희생자들이 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충분한 고용 창출의 확보에 경제 정책을 집중시켜, 노동을 보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확신하고 있습니다. “노동이 인간에게, 인간의 인간성에 좋다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 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72) 


자아 교육과 위협

 

    13. 관심사는 하나의 제도이며 환경인 학교가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앞서 인용하였던 진리에 관한 그리스도의 웅변적인 말씀이 바로 젊은이들에게 관계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정이 교육을 하고 또 학교가 가르치고 교육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 젊은이들 각자가 자신에 대한 자아 교육의 노고를 떠맡지 않는 한, 가정과 학교의 교육은 모두 불완전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와 학교에서의 교육은 여러분에게 자아 교육의 노력을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만을 제공해 줄 뿐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러한 영역에서 근본적인 강령이 됩니다. 젊은이들이 천부의 “진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유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자유를 향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활용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자유롭다는 말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자유는 그 자체 안에 진리의 규준과 진리의 기강을 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참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말씀드리자면,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올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이 되고,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남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 특히 우리가 자아 교육이라고 하는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 교육의 핵심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러한 내적 구조가 다만 “외부로부터”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각 개인은 이러한 구조를 “내부로부터” 세워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만, 인내와 끈기와 노력으로써 이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자아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조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를 두고 말씀하시며, 오직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73) 하고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것”, 이것은 자아 교육의 결실입니다.
    이 모든 말씀 안에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먼 훗날에야 성취되는 인생 계획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과 교육, 특히 자아 교육을 통하여, 계속적인 인격 발달의 토대를 세워 가며 우리가 삶 그 자체를 창조하고 있다면, 인생 계획은 이미 젊은 시절에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젊음이란 “전 인생의 모습을 빚어 내는 조각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젊음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인간성에 부여하는 그 모습은 평생을 두고 굳어 갑니다.
    이는 중요한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중요한 부정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위협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눈을 감아 버릴 수 없습니다. 이 위협들은 여러분의 전 생애에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그 예로서 신랄한 냉소주의나 회의주의의 유혹을 들고자 합니다. 신랄한 냉소주의는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 모든 것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전통적인 가치들을 문제삼는 회의주의는, 노동과 직업, 심지어는 혼인에 관한 문제들에 부딪힐 때, 일종의 극단적인 냉소주의로 쉽게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더욱 풍요롭게 사는 나라들에서, 삶에 대한 진지한 투신으로부터 사람들을 이간시키고, 피동성과 이기심 그리고 자아 고립을 조장하는 향락 산업의 성장으로 야기되고 있는 유혹들을, 어떻게 하면 조용히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광고 기술의 악용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광고는 노력을 회피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을 이용하고 모든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소비주의는 또 특별히 물질 재화의 향유 안에서 인간은 자기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매혹적인 거짓 환상에 사로잡혀, 무절제한 본능의 힘에 자신을 내맡기고, 대망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참으로 인간적인 전망이 전혀 없는 그러한 길로 무모하게 들어서고 있습니까?

    본인이 바로 여러분에게 보냈던 금년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드린 말씀을 거듭 되풀이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알콜과 약물의 환각 세계에서, 혼인과 가정에 대한 서약이 없는 일시적인 성관계에서, 무관심에서, 냉소주의에서, 심지어는 폭력 속에서,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과 의미를 찾는 여러분의 열정과 역량을 오도하고 착취하려는 세상의 거짓에 대항하여, 여러분 자신을 지키십시오.”74)
    여러분에 대한 본인의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이 모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한다면, 이러한 희망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온갖 환상과 유혹을 내뻗쳐 여러분의 젊음을 파괴시키려 하는 그 모든 사람에게, 본인은 그리스도의 무서운 말씀을 상기시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죄의 유혹과 이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75)
    두려운 말씀입니다! 사랑을 보여 주러 오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이기에 더 더욱 지엄합니다. 복음서의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 덕행과 죄악 사이의 대치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반드시 느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젊음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는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이토록 무섭고도 지엄하신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젊은이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또한, 이 서한에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를 어렴풋이나마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장”으로서의 젊음

 

    14. 나자렛 예수님의 젊은 시절에 관하여 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을 상기하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비록 간략하지만, 마리아와 목수 요셉과 더불어 가정에서 지내셨던 삼십 년의 시기 모두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사가 루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76)
    젊음은 “성장”입니다. 이러한 주제에 관하여 그토록 많이 이야기해 왔던 모든 것에 비추어, 복음서의 이 대목은 극히 풍부하고도 종합적인 말씀으로 그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몸”의 성장은 한 개인이 시간과 갖는 자연적인 관계를 말하며, 이러한 성장은 말하자면 한 개인이 인생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상승” 단계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인간 개성을 형성하는 모든 힘의 성장, 곧 심리적 발달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는 지혜와 은총의 “성장”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젊은 벗들이여, 본인은 여러분 모두 그러한 “성장”을 하기 바랍니다. 젊음은 바로 성장을 통한 젊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젊음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성장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 성장은 이렇게 하여 여러분의 개인적인 체험은 물론 공동체적인 체험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가치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됩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성장은 또한 젊은 시절을 지난 어른들의 체험 안에서, 곧 “상승” 단계에서 “하향” 단계로 옮겨 가며, 전체적인 생활 방식을 갖추어 가는 어른들의 체험 속에서 굳어집니다.
    젊음은 모든 진선미의 점진적인 축적을 가져오는 “성장”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장이 “외부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고통에 이어지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겪고 있는 죄악의 모든 체험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젊음은 그러하여야 합니다.
    젊음은 “성장”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눈에 볼 수 있는 세계인 자연과의 접촉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젊은 시절에 가시적인 세계와 갖는 이러한 관계는 “책에서 얻은” 세계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간을 풍요하게 합니다. 그러한 관계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자연과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간 실존 안에 바로 창조의 신비를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의 신비는 가시적인 존재들의 형언할 수 없는 풍요와 다양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스스로를 계시하며, 또한 동시에 감추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여 오라고 언제나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습니다. 영감을 받은 책들77)에서 그리고 무수히 빛나는 정신의 증언에서 나오는 지혜는 여러 가지로 “세계의 명료성”을 제시해 주는 듯합니다. 사람들이 이 굉장한 책,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펼쳐져 있는 “자연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젊은이들의 마음과 정신이 이 자연의 책에서 깨닫는 것은 지혜를 얻으라는 권고와 더불어 완전한 조화일 것 같습니다. “지혜를 얻고 슬기를 깨쳐라.……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 지혜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슬기를 사랑하여라. 그 슬기가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78)


    오늘날의 인간은, 특히 고도로 발달된 산업 기술 문명의 상황 속에서, 거대한 규모로 자연을 개발해 왔으며, 또 흔히는 실리주의적으로 자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의 그 무한한 보화와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지상 실존의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마치 세계의 거대한 거울처럼, 우러러보고 명상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자연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계약을 반영합니다. 그 피조물의 중심에는, 태초부터 창조주의 “모습으로” 직접 창조된 인간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하기에 본인은 여러분 젊은이들의 “몸과 지혜의 성장”이 자연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자연을 놓치지 마십시오. 또한 이러한 만남에 흔히 따르게 되는 노고와 노력을 받아들이십시오. 특히 우리가 도전하는 어떤 목적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노고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한 노고는 창조적인 것이며 학업과 노동만큼이나 필요한 건전한 휴식의 요인이 됩니다.
    이러한 노고와 노력은 성서 안에서 그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전 인생을 운동 경기장의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79)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노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신체를 단련시킬 뿐 아니라 전 인격이 자기 극복의 기쁨을 체험하고 장애와 난관을 넘어서는 승리의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젊음을 특징짓는 “성장”의 한 요소입니다.
    본인은 또한 이러한 “성장”이 인류가 이룩해 온 위업과 접촉을 통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풍요와 다양성은 얼마나 지대한 것입니까! 젊은이들은 인류의 업적 안에 내포되어 있는 진선미에 대하여 특별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다양한 여러 문화, 수많은 예술과 학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에 관한 진리를 배웁니다. 시편 8에도 극히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 진리는 우리 각자의 인간성을 세워 주고,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을 배웁니다. 젊음은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여러분의 “지혜가 자라게” 합니다. 젊음이란 한 가정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때, 새로운 만남을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 앞에는 광범위한 체험의 영역이 펼쳐져 있습니다. 체험은 지식만이 아니라 교육과 윤리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젊은 시절의 이러한 체험은 모두 여러분에게 비판적인 판단 능력을 부여하고 무엇보다 모든 인간사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다 주는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젊음에 찬 체험은 축복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체험으로부터 점차 인간에 관한 근본 진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과 자기 자신에 관한 근본 진리는, ‘사목 헌장’의 그 유명한 귀절에서 이렇게 요약되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80)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다른 인간들을 아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더 완전한 인간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관한 이러한 진리, 이러한 인간학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안에서 그 지고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는” 여러분의 젊은 시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본인의 소망은 또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그와 같은 “성장”입니다. 자연과의 접촉과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간접적으로 도와 줄 수 있지만, 하느님과 만나는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자신보다 여러분을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양심을 열어제치십시오. 그분과 대화를 하십시오! 성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깨치십시오.
    이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과 만나는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오고 가는 상호 관계임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또한 “자신을 거저 내어 주시는 선물”로써 응답하십니다. 이 지고의 선물을 성서의 언어로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도록 분투하십시오!


    본인이 그 주요한 면만을 지적하고자 했던, 이 “성장”의 주제는 대단히 광범위하므로, 그 모든 면면마다 더욱더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여러분의 집단과 젊은이들 사회에서, 여러 나라와 대륙들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운동체와 조직들 안에서, 그 나름의 정신 노동과 사도직 활동을 하는 모든 단체에서, 저마다 이러한 “성장”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교회 사목자들의 협력과 더불어 이러한 사도직 단체들의 지향은, 어떤 의미에서 젊음에 대한 복음적인 정의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성장”의 길을 젊은이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거대한 도전

 

    15.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보다 교회는 특별한 방법으로 젊은이들 안에서 그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집단으로서의 여러분 젊은이들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교회는 그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창립에서부터 사도 시대 이래로 늘 그러해 왔습니다. 성 요한 사도가 그 첫째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이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어린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81)
    사도 요한의 말씀은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에 연결될 수 있으며, 그 말씀은 세세대대를 이어 내려오며 분명하게 소리높여 거듭거듭 되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 제이천년대 말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세대에서도, 교회는 계속하여 젊은이들 안에서 그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보게 됩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 이를 특별히 증언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82)인 하나의 성사로서 그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해서 불어나는 거대한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관계 안에서 그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그 자신을 봅니다. 일치의 길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고 또 분명히 현대의 긴급한 과제인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그 길에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또한 비그리스도교인들과의 대화 안에서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대화 안에서 자신을 봅니다. 이러한 대화는 구원의 대화입니다. 그 대화는 또한 세계 평화와 인간 정의의 대의에 봉사할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은 바로 이런 식으로 교회가 그 자신과 자신의 세계 내 사명을 보고 있는 교회의 희망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명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표현이 1985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였습니다. “평화의 길은 또한 젊은이들의 길이다.”(평화는 젊은이와 함께 나아간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여러분에게 그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호소인 동시에 참여입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문제가 되며,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이러한 희망은 근본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에 관한 희망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위는 차차 넓혀져야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생활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분은 스스로 여러분과 그 사람들을 묶어 주는 공동체의 윤곽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는 거의 언제나 어느 정도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공동체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에서 인식하고 선언한 그러한 방법으로, 분화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여러분은 종교적 신앙의 관점으로 보아 획일적인 환경에서 젊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종교가 다양한 환경이나 신앙과 무신앙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후자의 환경은 여러가지로 표현되고 있는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수없이 다양한 젊은이들의 공동체는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는 극히 유사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이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젊은이들의 공동체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공통된 자세를 취하여 모두 일치되는 것 같습니다. 곧, 수만 수억의 인간들이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으며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도, 한편으로는 핵무기 생산에 막대한 자원을 소모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인류의 자멸을 불러 올 수 있는 양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태도는 모두 한결같습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긴장과 위협은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거대한 규모로 커 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금년의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거듭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 이후 제이천년대 말에 인류 가족을 이루고 있는 수십억 인간 생명의 지평은 정말 세말의 전조라고 할 재난과 재앙의 가능성들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들에게 마땅히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왜 온 세계 모든 인류가 파멸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 눈앞에 맞닥뜨리는 불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가? 여러 나라의 국경선을 넘는 수천만의 난민들은 또 왜 그토록 많은가? 인간의 기본 권리들은 왜 그토록 수없이 짓밟히고 있는가? 형무소와 강제 수용소는 또 왜 그리 많은가? 무죄한 사람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과 살해는 왜 그토록 수없이 많은가? 인간의 착취는 또 왜 그토록 많은가? 인간의 신체와 양심을 유린하는 고문은 또 왜 그리 많은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경우에는 또, 오직 조직적인 폭력을 통한 그러한 길만이 세계를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념을 젊은이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양심에 수없이 많은 무죄한 희생자들을 안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듭 물어야 합니다. 왜?
    젊은이 여러분은 이 모든 물음을 물을 수 있고 또 참으로 물어야 합니다. 이 세계는 바로 오늘 여러분이 살고 있고 또 늙은 세대가 떠나 버린 내일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도 견줄 수 없도록 인류가 이룩해 놓은 과학 기술의 발달이 왜 인류를 거역하는가? 물질 세계를 정복해 온 인간의 발전이 왜 그토록 수많은 방법으로 인류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가? 내면의 예감을 갖고,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물으십시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는가? 이를 변혁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변혁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이를 똑바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세대가 직면해 있는 근본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느 날 복음서에서 시작되었던, 여러분과 그리스도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방법입니다. 그 젊은이는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여러분은 그와 똑같은 물음을 여러분 젊은이들의 차례인 이 시대의 언어로 묻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인류 가족의 번영된 생활이 핵 죽음의 무덤으로 전락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얻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전세계적인 불의의 죄악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 권리들을 천명한 수많은 인권 선언들이 있음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모독하는 자들의 죄악을 제거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우리는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제1세대 젊은이들에게 답변하신 것과 같이, 요한 사도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어린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83) 거의 이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말씀은 또한 오늘날을 위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안에 세상의 죄악에 대한 승리를 증언하고 있는 간결하고도 강력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8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 사도들의 체험, 사도들을 따랐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이 지니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 안에서 복음 전체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 속에 내포된 진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교서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을 위한 확증이요 도전인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이는 역시 하나의 답변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분열도 갈등도 차별도 없는 모든 사람의 순수한 형제애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은 형제애의 열망과 광대한 연대 의식의 증거자들입니다. 분명코, 여러분은 어떠한 형태이든 인간 서로서로의 갈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형제애를 향한 이러한 열망, 모두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고 서로서로 모두 형제 자매가 되는 형제애를 향한 열망이,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아버지가 있는 곳에 형제 자매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버지가 있는 그 곳에서 사람들은 형제 자매가 됩니다.
    여러분이 형제애를 향한 열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바로 그 “기쁜 소식”을 지니고 삽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입술 위에나 적어도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는 아버지를 계시해 주는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서로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그 기도의 핵심 전체는 어떠한 형태이든 인간 사이의 갈등을 바탕으로 한 모든 일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적개심과 증오, 폭력과 테러, 차별로부터, 곧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으로부터 인간 정신을 멀리 끌어 내십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 있고 주님의 기도 안에 요약되어 있는 가르침, 하느님의 그 가르침을 믿는 힘이 강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느님의 가르침 안에서 강하고, 이러한 기도 안에서 강합니다. 생명, 인간 존엄, 양심, 신념, 인권 등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 선의가 여러분 안으로 스며들고 있기에,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다면 인간에 대한 형제애의 힘을 지니고 있어,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투쟁을 하기 때문에 강합니다. 복음의 근본에서 동떨어진 어떤 이념이나 책략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거슬러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거슬러 투쟁하기에, 여러분은 강합니다. 진정한 죄악을 거슬러, 하느님께 범죄하는 모든 것을 거슬러, 모든 불의와 착취를 거슬러, 모든 거짓과 기만을 거슬러, 인간성을 굴욕적으로 모욕하는 모든 것을 거슬러, 인간 사회와 인간 관계를 모독하는 모든 것을 거슬러, 생명에 대한 모든 범죄를 거슬러, 모든 죄를 거슬러 투쟁하기에, 여러분은 강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악마를 이겨 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죄악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셨듯이, 인류와 우주의 역사 안에서 죄와 악의 기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악을 범한 최초의 행위자의 이름을 악마라 부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악마가 사용해 왔고 또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전략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태초부터 악마가 심어 놓은 죄악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체제로부터, 개인간의 관계와 계층간 국가간의 관계로부터 자라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또한 “개인적”인 죄와는 전혀 다른 “구조적”인 죄악이 되게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전보다 더욱 깊은 죄악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은 강합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죄악의 원천과 그 은밀한 공작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세계의 변화에 그 변혁에 성공하여, 더욱 인간적이고 형제적인 세계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께 더욱 맞갖은 세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세계와 하느님을 분리시킬 수는 없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거슬러 세계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떼어 놓을 수 없으며, 인간은 하느님을 거슬러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며, 모든 실재를 이루고 있는 근본 진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85) 위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 말씀은 결코 그 타당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메시지

 

    16. 나의 젊은 벗들이여, 복음서의 젊은이와 그리스도의 대화로 이루어지고 또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에서 나온, 여기 이 교서를 여러분에게 전해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제이천년대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지금, 국제 청소년의 해에, 본인은 여러분에게 이 교서를 보냅니다. 본인은 젊은이들을 “교회의 희망”86)이라고 불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20주년에, 여러분에게 이 교서를 전해 드립니다. 공의회는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오늘날과 모든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폐막 메시지”에서 교회를 세계의 참 청춘으로 묘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청소년들의 힘과 아름다움이 이룩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시작한 일을 기뻐하는 능력과 그것을 나누어 줄 아량과 늘 새로워지고 새것을 찾으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87) 본인은 이 곳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수많은 순례자 여러분을 만나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이 교서를 드립니다. 바로 오늘, 로마의 주교는 전세계의 모든 젊은이를 위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기를”,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미래가 속해 있는 까닭에, 지나온 천 년대의 마지막과 새로운 천 년대의 시작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책임을 적극 떠맡으십시오. 현대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책임을 지십시오! 이러한 지향을 두고, 세계 도처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여러분과 더불어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전세계 모든 교회, 보편 교회의 젊은이들이 모인 이 거대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하시던 그 자리에, 마리아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계셨습니다. 갈릴래아의 가나에서, 마리아께서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신혼 부부를 위하여 전구하십니다.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는 그 잔치에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88) 그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본인은 천주의 성모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되풀이하여, 젊은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리스도께서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로마의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7년
1985년 3월 3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1베드 3,15.
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4항:AAS 71(1979년), 284-285면 참조.
3. 로마 8,9.21; 에페 4,4; 필립 3,10-11; 디도 3,7; 히브 7,19; 1베드 1,13 참조.
4. 1베드 3,15.
5. 마르 10,17-22; 마태 19,16-22; 루가 18.18-23 참조.
6. 마르 10,17-19.
7. 마르 10,20-21.
8. 마르 10,22.
9. 루가 8,49-56 참조.
10. 루가 7,11-17 참조.
11. 묵시 21,6.
12. 요한 3,16.
13. 1요한 4,8.16.
14. 2데살 2,7 참조.
15. 요한 14,9.
16. 히브 13,8 참조.
17. 창세 1,26 참조.
18. 요한 3,19; 1,9 참조.
19. 요한 1,5.
20. 로마 6,9.
21. 루가 2,34.
22. 요한 11,25.
23. 요한 3,16.
24. 1고린 7,31.
25. 히브 9,27.
26. 히브 9,27.
27. 요한 11,25-26.
28. 출애 34,1; 신명 9,10; 2고린 3,3 참조.
29. 신명 4,5-9 참조.
30. 마르 10,20.
31. 마태 5-7장 참조.
32. 마태 22,37-40; 마르 12,29-31; 루가 10,27 참조.
33. 로마 2,14.
34. 로마 2,15.
35. 로마 2,15.
36. 마르 10,19.
37. 히브 9,27.
38. 골로 3,14.
39. 1고린 13,13 참조.
40. 마태 22,38 참조.
41.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나니…… 충서는 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다. 나에게 베풀어짐을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子曰, “道不遠人……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中庸, 道論 2-3). 고대의 한 일본인(덴교 다이시 또는 사이코라 불린다. A.D.767-822)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자기를 잊고, 남에게 선을 행하여라. 이는 최고의 우정이요 동정이다.”(W.T.De Bary,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뉴욕 1958, Vol. I, 127면 참조). 또한 누구든 마하트마 간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디는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천부의 원동력으로 비폭력으로 쟁취하는 “진리의 힘”(Satyagraha)을 가르쳤다.

42. 로마 2,15 참조.
43. 요한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 2항 참조.
44. 창세 1,31.
45. 요한 2,25 참조.
46. 루가 22,61 참조.
47. 에페 1,4 참조.
48. 마태 19,20.
49. 1고린 7,31.
50. 골로 3,1.
51. 로마 5,5 참조.
52. 마태 5,3-12 참조.
53. 마태 19,21.
54. 마르 10,21; 요한 1,43; 21,29 참조.
55. 마태 19,12 참조.
56. 예컨대, 요한 바오로 2세, 권고 「구원의 은총」(Redmptionis Donum):AAS 76(1984년), 513-546면 참조.
57. 마태 9,37.
58. 마태 9,38.
5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39-42항 참조.
6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 43-44항 참조.
61. 교회 헌장, 1항.
62. 요한 4,10.
63. 마태 5,8.
64. 1요한 4,8.16 참조.
65. 에페 5,32.
66. 1고린 13,4.5.6.7 참조.
67. 창세 2,24; 마태 19,5 참조.
68. 출애 20,12; 신명 5,16; 마태 15,4.
69. 마태 25,14-30; 루가 19,12-26 참조.
70. 창세 3,19.
71. 요한 8,32.
7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9항:AAS 73(1981년), 599-560면.
73. 루가 21,19.
74. 1985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 3항:AAS 77(1985년), 163면.
75. 루가 17,1-2.
76. 루가 2,52.
77. 예컨대, 시편 [103];[18]; 지혜 13,1-9; 7,15-20 참조.
78. 잠언 4,5-6.
79. 1고린 9,24-27 참조.
80. 사목 헌장, 24항.
81. 1요한 2,13-14.
82. 교회 헌장, 1항.
83. 1요한 2,13-14.
84. 1요한 5,4.
85.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s) I, 1:CSEL 33, 1면 참조.
8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2항.
87. AAS 58(1966년), 18면 참조.
88. 요한 2,5.



젊은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6,17

    시편 8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시편 19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사옵니다.
    야훼의 법은 이지러짐이 없어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야훼의 법도는 변함이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야훼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야훼의 계명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야훼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야훼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욱 달다.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받고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그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 주소서.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편 104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야훼, 나의 하느님,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물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깊은 물로 땅을 입히셨더니
    산꼭대기까지 덮은 물결은
    꾸짖으시는 일간에 움찔 물러나고
    천둥소리, 당신 목소리에 줄행랑을 칩니다.
    물들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내려가
    당신께서 정하신 그 자리로 흘렀습니다.
    당신께서는 금을 그어 넘지 못하게 하시고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계곡마다 샘물을 터뜨리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나귀들도 목을 축입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가까운 곳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높은 궁궐에서 산 위에 물을 쏟으시니
    온 땅이 손수 내신 열매로 한껏 배부릅니다.
    짐승들이 먹을 풀을 기르시고
    사람이 농사지어 땅에서 양식을 얻도록
    곡식을 또한 가꾸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도 내시고
    얼굴에 윤기 내는 기름도 내시고
    힘을 돋구워 주는 양식도 내셨습니다.
    야훼의 나무들은 배부르게 마시니,
    손수 심으신 레바논의 송백은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고
    그 꼭대기엔 황새가 집을 짓사옵니다.
    높은 산은 산양들의 차지,
    바위틈은 오소리의 피신처.
    때를 가늠하도록 달을 만드시고
    해에게는 그 질 곳을 일러 주셨습니다.
    어둠을 드리우시니 그것이 밤,
    숲 속의 온갖 짐승들이 움직이는 때,
    사자들은 하느님께 먹이를 달라고
    소리지르며 사냥을 하다가도
    해가 돋으면 스스로 물러가
    제자리로 돌아 가 잠자리 찾고
    사람은 일하러 나와서
    저물도록 수고합니다.
    야훼여,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이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먹으니,받아먹으니,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야훼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손수 만드신 것 야훼의 기쁨 되소서.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뿜는구나.
    나는 한평생 야훼를 노래하리라.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나의 이 노래가 그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나의 야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구나!
    죄인들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라!
    내 영혼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알렐루야.

 

    잠언 4,5-13
    “지혜를 얻고 슬기를 깨쳐라.
    내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잊지 말고
    그 말을 어기지 말아라.
    지혜를 저버리지 말아라.
    그 지혜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슬기를 사랑하여라.
    그 슬기가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혜를 얻어라.
    있는 것 다 주고라도 슬기를 얻어라.
    지혜를 단단히 붙들어라.
    그 지혜가 너를 높여 줄 것이다.
    슬기를 품 속에 간직하여라.
    그 슬기가 너를 존귀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이 네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씌워 주고
    화려한 관을 안겨 줄 것이다.”
    아들아 들어라,
    내 말을 들으면 오래 살리라.
    나는 너에게 지혜로운 길을 가르쳐 주었고
    너를 곧은 길로 이끌었다.
    네가 걸어가도 앞길이 막히지 않고
    뛰어가도 넘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교훈을 흘려 버리지 말고 굳게 잡아라.
    그것이 네 목숨이니 잘 지켜라.

 

    지혜서 7,15-21
    내가 올바로 깨닫고 그대로
    말할 수 있게 해 주시며
    지혜가 가르쳐 준 대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빈다.
    하느님은 바로 지혜의 인도자이시며
    현자들의 지도자이시다.
    우리와 우리말이
    다 그분의 손에 달렸으며
    모든 현명함과 생활의 지혜
    또한 그분께 달려 있다.
    그분은 나에게
    만물에 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구성요소의 힘을
    알게 해 주셨고
    시대의 시작과 끝과 중간,
    동지, 하지의 구분과 계절의 변화를
    알게 해 주셨으며
    해가 바뀌는 것과 별들의 자리를
    알게 해 주셨고
    동물들의 성질과 야수들의 본능,
    그리고 요귀들의 힘과 인간의 생각,
    또 각종 식물들과 그 뿌리의 특성을
    알게 해 주셨다.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는 드러나 있는 것은 물론
    감추어진 모든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지혜서 13,1-9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어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보고도
    존재 하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업적을 보고도 그것을 이룩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또는 별의 회전, 혹은 도도하게 흐르는 물,
    하늘에서 빛나는 것들을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로 여겼다.
    만일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것들의 주님이 얼마나 더 훌륭하신가를
    알아야 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아름다움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이런 것들의 능력과 힘에 놀랐다면
    마땅히 이런 것들을 만드신 분의
    힘이 얼마나 더 큰가를
    깨달아야 했을 터이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크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아마 하느님을 찾으려고
    열렬히 노력하다가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하느님의 업적 가운데에서 살면서
    열심히 모색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서
    그 겉모양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세계를 탐지할 수 있는
    지식을 쌓을 능력이 있다면
    어찌하여 세계를 만드신 분을 일찌기 찾아 내지 못했는가.

 

    마태오의 복음서 5,1-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다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의 복음서 9,35-37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마태오의 복음서 22,35-40
    그들 중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게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10,17-22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 갔다.

 

    루가의 복음서 2,52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3,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의 복음서 8,31-32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1-5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 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3,10-15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자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3장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라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17-22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5,29-33
    도대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기르고 보살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기르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3,12-17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은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27-28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 3,13-17
    여러분이 선한 일에 열성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만을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

    요한의 첫째 편지 2,14
    어린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된 사람들이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며
    악마를 이겨 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5,3-5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