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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듣는 곳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86-188항, 198항

Skyblue fiat 2025. 3. 3. 08:57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듣는 곳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86-188항, 198항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염려와 배려는, 스스로 가난하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언제나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모든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온갖 불평등에서 해방하고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그들이 아무런 차별 없이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명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을 펼쳐 읽어보면,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려왔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탈출 3,7-8.10) 또한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간청에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셨다.” (판관 3,15)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어야 하는 하느님의 도구이면서도 그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가난한 이가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 (신명 15,9)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모른 척하는 행위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이 “비참한 삶 속에서 너를 저주하면 그를 만드신 분께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 (집회 4,6)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옛날 요한이 제기한 물음을 늘 되새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요한 3,17) 억압받는 이들의 외침과 관련하여 야고보 사도가 강조한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야고 5,4)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들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듣는 것은 몇몇 그리스도인에게 국한된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의를 갈망하는 이들의 외침을 듣고 온 힘을 다해 그 외침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37)

궁극적으로 가난의 구조적 요인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이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적인 빈곤 앞에서 단순하면서도 날마다 반복되는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대'라는 말은 다소 진부하게 들리고 때로는 잘못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실천하는 관대한 행위보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가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몇몇 사람을 위한 부와 행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를 지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교회에게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또는 철학적 범주 이전에 신학적 범주에 속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의 우선적인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호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필리 2,5) 간직하라고 부르심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호의에 고무된 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교회의 전통이 증명하듯이 그리스도교의 사랑 실천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특별한 형태의 선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고자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가 바라는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신앙 감각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그들의 실존에서 구원의 힘을 재발견하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에 세우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 앞장서 목소리를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교황 즉위 첫 강론집) / 바오로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