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사
저는 오늘 감사와 고맙게 여기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로 자꾸 자신을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사에 불평하며 울어대고, 자신에 대해 슬퍼하거나, 자기연민으로 인해 자신을 몹시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삶을 바꾸어 줄, 무언가 큰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지요. 실제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삶을 완벽하게 해 줄 큰 것, 대박을 평생동안 기다리며 삶을 허비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희망을 갖지 말라거나 삶이 더 나아지도록 계획하거나 노력하고, 능력을 발휘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창조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으며, 하느님의 일부인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언가 바꾸고 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 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모든 성인들과 복음서가 가르치는 것과 같이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 에 있다고 말합니다.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아내에게 충실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듯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 속해 있고 순종하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할 때에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쉬운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습니까? 어떻게 “누가 거룩하게 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서에 나오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마지막 완전함의 단계였던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부와 계명 모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마지막 한 발을 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성화되고, 완벽해지는 한 발이었지요. 하느님에게로 곧바로 데려다 줄 한 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발을 뗄 수 없어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이렇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묵상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는 것은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더 잘 알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변화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 온 이유이고, 그럼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기쁨과 평화를 찾기 위한 걸 겁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되기 위한 길은 하나뿐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그것입니다.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은 매우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그런 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미소만 지어 주어도 감사해 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의 삶 안에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기분이 좋지 않아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전히 신경 써주며 더욱 무언가 주려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마워하는 것은 사랑의 기본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까? 진심으로 말입니다. 살면서 몇 번이나,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가를 깨닫고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까? 우리는 기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귀중한 삶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크리스천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마. 이 시간은 곧 지나갈 거야. 중요한 건 나중에 오는 거야. 그걸 걱정해야 해. 이 삶의 마지막에 올 것을 걱정해야 해. 아직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거야.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올 중요한 것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야. 인간으로서 완전한 삶은 아직 오지 않았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야.”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 큰 어른이 어머니의 모태로 돌아갑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을 알았고 하느님을 알았으며, 성서를 통해 신학을 이해했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이제 우리가 감사할 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은 (성)령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생명을 가졌으므로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기적, 삶의 기적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큰 은총이 주어졌음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풍요롭지 않다 하더라도, 삶이 대단할 것이 없다 해도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이라는 것을요.
전반적으로 삶은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영혼들을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모든 영혼 하나하나를 절대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특이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을 바라보고 부러워하거나,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 바깥에 있는 그 누구처럼 되고 싶고, 누구를 닮고 싶다고 하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그것이 첫 번째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롤 모델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고, 닮아야 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따를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아라. 바리사이파들은 종교에 대해 말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설교는 완벽하게 하면서 행동은 잘못합니다.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온 힘을 다해 하느님께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적이 있으십니까? 살아가며 얼마나 많이 자신에 대해 울어대고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고 버려졌다고 느끼고, 거절당하고 굴욕을 당했다고, 욕을 먹었다고, 우울해하였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러한 일들이 삶에서 일어났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자신에 대해 슬퍼하며 ‘언제나 모든 것이 바뀔까? 언제나 나는 사는 것처럼 살게 될까? 지금의 나는 사는게 사는게 아냐... 모든 것이 엉망이야. 내가 하는 것마다 엉망이 되 버려.’ 하고 말하였습니까?
자신을 맨 처음으로 되돌려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그 큰 은총에 비해 다른 것들은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생명을 큰 선물로 주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들은 세월이 지나서야 좋은 자녀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집을 떠나고,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좋은 아들 딸로서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제 경우에는 나이가 먹을 때까지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몰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 아들을 가지고 나서야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지요. 비로소 부모가 어떤 것인지, 부모의 노력과 책임, 어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로서 가지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맞고서야 비로소 아들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창조주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깨닫기 시작한 채, 평생을 지난다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생에 마지막에라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좋겠지요. 연옥에 있는 참으로 많은 영혼들이 그제서야 아버지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은총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사랑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무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 많은 영혼들이 지상의 삶에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산 것이죠.
여러분의 마음을 잘 성찰해 본다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이 일시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 가까운 친구, 그리고 특히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마치 가축들과 다름없이, 혹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지요.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길에 서 있다고 할 때, 스쳐 지나가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근처의 건물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존재합니까? 그들은 실제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마음 안에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남아 있습니까? 그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옆을 지나가는 그들을 염려하고, 그들의 영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나중에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연옥의 상태 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그것이 연옥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빈자리를 정화하여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죠. 연옥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확인해 보십시오. 신실하게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자신이 그 모든 것이 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오직 사랑, 진실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가운데도 진실한 사랑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주위를 돌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이 앉아 있습니다. 아는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으로 다시 보지 않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불러 오셨지요. 성령이 우리를 이곳에 불러 모은 것입니다. 우리 혼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겁니다. 우리 마음 안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살아있습니까? 이 방에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이 방을 나가기를 바라고 염려합니까? 진실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길 바라나요?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그들의 삶을 더 깊게 이해하기를 염려합니까? 더 책임감을 가지고 더 잘 인식하고 더욱 사랑하고 용서하며 더 잘 인내하고 동정심을 갖기를 염려합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순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며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꼼짝 못하고 멈추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다면, 자신이 평생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꼼짝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연옥에 와서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제가 연옥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면 영혼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대죄로 인해 하느님을 거스르고 지옥의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은 완전히 세상을 잃어 버리고 어둠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두움으로 걸어가 지옥의 상태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 죽게 된다면 어두움의 영역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혹시라도 대죄 상태에 있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 사람이 다시 은총 안에 있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이곳에 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단 한 영혼도 하느님과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교회를 살찌우고,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며, 하느님께로 다가온 그 영혼의 구원의 경제안에 우리가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전하고, 용서하고, 나누고, 하느님께로 데려오는 사람들 가운데 빛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수천 배로 주십니다. 그만큼 너그러우십니다. 오늘 누군가가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굉장한 일이겠지요. 이곳의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으나, 어쩌면 미지근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쩌면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나온다면, 하느님을 향해 오른편으로 나온다면, 왼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오른편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아버지의 오른편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오른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 오른편으로 향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회개가 매일 끊임없이 노력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뒤돌아 보았을 때, 자신이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십니까? 여전히 이기적이고 용서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해 믿음과 희망을 잃고, 작은 어려움을 가지고 혼란을 겪고, 화를 내고, 안간힘을 쓰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죠. 하느님의 자녀란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갖고, 용서하며,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힘든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해가 지기까지 화를 품고 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통의 인간인 우리는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때로 용서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참지 못할 때도 있지요. 노력해도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계속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채로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됩니다. 화를 내고 용서 못하여 마음에 상처를 가진 채로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됩니다. 왠지 아십니까? 사탄은 여러분이 자는 동안 그 용서하지 못하고 화내는 마음 안에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여러분의 상태는 더 안 좋아 지지요. 그러면 굳어진 마음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탄이 이미 여러분을 어두움 안으로 몰아 넣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끔찍한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 상태로 오래 있을 수록 마음은 더욱 굳어져서 바윗돌처럼 될 겁니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지요. 우리는 가끔 세상적이고 죄에 가득 찬 삶을 살며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전혀요…. 그들은 자아도취되어 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기회를 엿보지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느끼지 못하므로 자신의 것을 성취하기 위해 남을 짓밟습니다. 메말라 있기 때문에, 원하는 어느 곳이나 가서 원하는 무엇이라도 가지는 것, 그것이 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용기가 있다고 느끼므로 매우 과감하게 사람들에게 내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가서 끔찍한 일들을 세상에 내어 보이고, 그것을 설교합니까? 세상에 많은 철학과, 끔찍한 무브먼트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들은 거리를 활보하며 행렬을 합니다. 집집마다 다니며 문을 두드리며 새로운 것들을 부어주고 (영혼이) 약한 사람, 길을 잃은 사람들을 망쳐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사와 고마운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향해 높은 곳에서 기쁨으로 하느님의 크심을 소리쳐 외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사실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크리스천은 가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걱정하지마. 이미 모든 것을 갖게 되 있어. 알렐루야!” 모든 사람들이 알렐루야를 외쳐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크리스천은 거친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지키며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상이 우리를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미워하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여러분이 믿음을 새로이 하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나누려 할 때,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면전에서 외면할 것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여러분은 매우 불편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조건 중에 가장 큰 것은 얼마나 맛없는 빵이 되어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모든 누룩과 양념을 빼버린 맛없는 빵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빵만이 생명의 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정말로 변화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갈 것입니다. 친지들마저도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고 변화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한번은 저의 친구가 저의 증언에 대한 책을 한 사제에게 주었습니다. 저의 조국인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사제는 3년동안 침대 옆 테이블에 그 책을 놓고 열어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3년 후 제가 그 본당으로 지금처럼 피정강의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사제가 제게 와서, 3년 만에, 그 본당 피정에 저를 부른 이유는 마침내 자신이 그 책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책을 읽고는 필요했지만 두려워하던 것을 마침내 얻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 그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려던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 라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은 내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니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가 들어야 하는 것들을 일깨우도록 당신을 시켜 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책을 펴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하고 있었던 모든 잘못된 일들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 사제는 여러분이 알만한 모든 안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 년 동안 하느님께 거스르는 끔찍한 죄를 짓고 있었고,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는 두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악령이 들린 사람을 그 사제에게 데려오면 그는 도망치듯 “정신병원으로 데려가세요. 사제가 할 일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사탄에게 잡혀 있었으므로, 사탄이 두려웠던 것이죠.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 구마를 할 수 없었고 그것은 가장 두려운 부분인 것이죠. 어떻게 구마를 할 수 있겠으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하는 좋은 예입니다. 가끔 우리는 어떤 것을 들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단계의 책임이 지워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신비로운 일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 쫓아 다니지요. 많은 종교와 관련된 것들을 배우기도 합니다. 신학에 대한 매우 깊은 지식을 배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심한 것을 원하시니까요. 배우고 깨닫고 성장하기 위해 가능한 자신의 체계를 세우는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스포츠나 취미와 같이, 혹은 호기심에 의해 더 알고 싶은 것이며, 자신이 변화되고, 포기할 의사가 없이 잘못된 삶을 계속 살아가려면, 차라리 그러한 것에 손도 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한 많은 지식을 알게 될수록, 하느님 앞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해 주는데, 더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생명의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게 되면 성요한이 명확하게 우리에게 생명의 책에 대해 말하고 있는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는 생명의 책에 관한 것입니다. 고백성사가 얼마나 크고 힘이 있으며 굉장한 은총인지 아십니까? 하느님과의 화해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명의 책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노!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전 생애의 모든 것을 바꾸어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책에 있는 모든 나쁜 행위를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너무도 신비로운 일이죠.
한번은 제가 미국 북부의 작은 본당에 간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백성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옥에 대해 강연을 할 예정이었죠. 한 여성이 고백성사 줄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당신이 지옥에 대해 말할 것이라는 알고 있어요. 그 전에 고백성사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하더군요. (웃음) 그게 더 쉽겠지요. 사실은 그 여성은 낙태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지요. 그때 그녀는 그 일이 있은 후 5년 만에 처음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갈등을 했었음을 알 수 있었지요. 거의 줄에 끌려 가듯 고백소로 갔습니다.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바다물에 다이빙하듯 고백소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가 무엇에 대한 고백성사를 보았는지 모르는 채, 성당 입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빛나는 얼굴로 제게로 와서 말했습니다. “방금 가장 끔찍한 죄를 고백하고 나왔습니다.” 저는 “제게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고 싶지 않은 걸요.” 그러자 그녀는 “알고 싶으실 텐데요. 당신이 그에 대해 증거하실 수 있을 텐데요.” (웃음) 순간 저는 많은 것들을 상상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낙태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고백성사를 볼 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고민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를 하실지, 그뿐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죽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죄를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당에서 낙태반대운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고 합니다. 낙태반대운동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상처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인간을 죽여 버릴 수 있었는지,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성사가 그녀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회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죄의식은 더 이상 갖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희망을 가지고 고백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대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 한순간에 주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치유가 되지요. 안도의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좋은 것은, 어쩌면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은 변화되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좋은 날, 궂은 날, 온갖 다른 날을 맞는 다해도, 우리는 좋은 항해자가 되어 좋은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역경의 바다를 헤쳐나가게 되는 겁니다.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 본적이 있으신지요? 선장이 보트를 방향을 잡아 배를 조정하지요. 실력이 있고 확신에 찬 선장과 함께 항해 한다면, 여러분도 안심하고 승선합니다. 때로 폭풍이 불더라도 선장은 웃으며 이곳 저곳을 다닙니다. 폭풍이 온다고 말도 하지 안구요. 그러나 여러분은 폭풍이 오는 것을 보면 겁이 나 죽을 지경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장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웃으며 왔다 갔다 하면 “당신 뭔가 잘못된 것 아니에요?” 하고 말하지는 않지요. 바로 책임을 지고 있는 선장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이러한 일이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에게 있던 일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지고 있는 선장이 함께 있다는 것을 잊은 겁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의 배를 타고 계신다면,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는 그분만을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계시겠죠? (웃음)
우리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폭풍우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폭풍우를 맞지요. 항상 잔잔한 바다가 아니지요. 잔잔할 때 준비하십시오. 잔잔한 다음에 오는 것이 폭풍우입니다. 우리가 항해 중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잔잔한 바다는 없습니다. 물이 움직이고 있고 우리는 여행 중입니다. 우리는 집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순례중인 것을 느끼시고 잠시 거쳐가는 곳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건강을 줍니다. 감사할 때 건강해 집니다.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 될 겁니다. 일에 대해 감사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며 월급이 적은 것에 상관치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직업에 감사하고 아무리 적게 벌더라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며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요. 사람들 가운데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나 이 직업이 너무 싫어. 빨리 벗어나야 해. 내가 얼마나 적게 받는지 모를 거야. 얼마나 오랫동안 더 나은 직장을 찾고 있는지 몰라.” 라고 듣기 괴로운 노래를 부르듯 불평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겁니다.
얼마를 받든, 아무리 힘든 직장이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일한다면, 삶이 바뀔 것이라는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 감사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빛 안으로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것에 충실한다면 더 큰 것을 맡길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끔찍한 삶 안에서 계속 끔찍하게만 느낀다면, 결코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여정 속에서 힘든 삶이지만 기쁘게 산다면, 하느님에 의해 들려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제가 처음 믿음으로 돌아 왔을 때. 저는 이미 48살이나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을 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데, 왜 찬미가 필요한거야?” 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찬미를 필요로 하다고 생각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것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지를. 겉치레 같았고, 필요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확히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오직 (존재하는) 나다. 너희가 찬미한다면, 존재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찬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존재하는 나이므로 찬미하여라. 너희가 나를 찬미한다면, 존재하는 너희가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너희 안에 있도록 나를 찬미하고 찬미하여라. 너희가 나를 찬미할 때마다 나는 더욱 너희 안에 있다. 그러니 항상 나를 찬미하여라. 너희는 존재하는 나를 찬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찬미를 더욱 중요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우울하고, 외롭고, 절망스러울 때, 삶 속에서 평화를 앗아가는 많은 역경을 만날 때,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걸어 다니면서도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영광 받으소서, 감사합니다. 제 삶의 이 순간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당신을 찬미합니다. 그것에 감사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니 힘을 주십시오. 당신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광 받으소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제가 성령운동가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카리스마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표현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나요? 제 아내는 이미 제가 사랑하는 걸 알고 있는데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랑한다고 말하는 말은 한달 전 사랑한다고 한 말과 같지 않습니다. 오늘 말한 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항상 해야 하는 말입니다. 매 순간 사랑한다고 한 말은 다 같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숨쉬는 매 순간마다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지요. 물고기는 자신이 물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물고기를 물 밖으로 내 놓으면 자신이 물에 있었음을 알겠지요.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바다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우리가 물고기를 보듯이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웃음). “오, 자기들이 하느님의 바다 안에 있는 걸 모르는구나.”
우리가 이 신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존재하며 하느님이 우리 안에 존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현실이고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대죄 중에 있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백사장 위에서 헤엄치려고 하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 밖에서 숨쉬려 하는 그것은 불가능하죠. 대죄상태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음! 죽음!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죄상태에 살면 자신이 죽은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해골을 이끌고 다니지요. 그러나 이미 죽은 몸이에요. 대죄상태로 산다면 모든 것이 죽은 것이고, 무덤에 묻혀버리면 다시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충실한 종의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없다고 쉬거나 꾀를 부리지 않고 충실히 일합니다. 사랑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있을 때만 충실한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일이 잘 될 때만 하느님께 충실한다면, 그것은 충실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있는 한 성령기도 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그룹의 한 리더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 제가 갈 때마다, 그녀는 완전 불이 붙어 있는 것처럼 열렬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그룹원에게 그녀에 대해 물으니, 저 뒤쪽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고 제가 물으니 “하느님께 화가 나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구요? 어떻게 그녀가? 가장 불이 붙어 있던 사람인데... 어떻게 하느님께 화가 날 수 있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십대 아들을 데려 가셨어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화가 나 있다는 거군요. 참 쉽지 않군요. 죽음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울지 아니 어떻게 판단하기 어렵군요.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요. 우리 모두 영원히 살길 바라니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도 죽었지요.” 혹은 “나의 아들이 죽었을 때 저도 죽었어요” 라고 말들을 하곤 하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악몽과도 같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는 사형선고를 받고 살아갑니다. 죽음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든 우리 모두는 죽을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 자신께서 죽음과 영원한 삶과의 다리가 되셨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다리를 건너야 하며, 죽음과 영원한 삶의 문턱을 넘기 위해 우리의 노력하며 딛는 발걸음마다의 벽돌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죽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여성과 같이 놀랄 일이 닥칠 것입니다. 그 여성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이야기할 때 “저를 보세요. 저는 성공적이지 않습니까? 나의 가족은 건강하며 모두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자 더 이상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에서 하느님은 사라진 것이죠. 자, 그것은 탄탄한 영성이 아닌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불이 붙듯 열렬했던 그 여성을 보십시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준비하여야 하고, 매우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자신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삶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제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한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어렸고, 그들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정확히 몇 백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모두 한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방에는 여자 아이들이 다른 방에는 남자 아이들이 다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저에게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혼자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아이들을 입히고 먹일 것을 그리고 약품을 주어야 하는데...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설을 할 순 없어.” 저는 너무도 무력함을 느낄 뿐이었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저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너무도 소중한 얼굴과 미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인도하셨지요. 저는 야외에 테이블을 놓고 아이들을 제 주위에 둘러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들도 역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듣고 싶어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 또한 양식이었습니다.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며,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혼들 역시 단지 육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식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의 사명 중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웃고, 장난치기도 하며 저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두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참된 양식과 같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과 같이 가난한 곳에 먹을 것을 가져다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에 음식과 옷을 가져다 주고, 지붕도 만들어 주고 하지요. 그러나 때로는 사랑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많은 슈퍼스타나 갑부들이 큰 자선을 하곤 할 때, 많은 경우에 세금공제를 위해서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그 자선을 큰 이슈로 만들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그 자선은 부패된 윗선에서 가로채어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이나 음식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으며 하느님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세겨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위기의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혼의 위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 다는 아니지만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왜 제 때에 용서하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상황을 악화시켰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안 좋아질 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내가 가진 것에 얼마나 감사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을까?”
가정생활이나, 사업 혹은 하느님과의 관계나 일반적인 관계에 있어서, 때로 우리의 상황이 나빠진 이유 중 하나가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평을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는 고통스러워, 그만 두어야 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짓고 계시다는 그 핵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짓고 계십니다. 특히, 힘들 때, 바로 그때가 우리를 지으신 옹기장이의 손이 우리를 잡고 있을 때입니다. 옹기장이의 손이 우리를 잡고, 우리를 움직이고 뒤틀리게 하여 우리의 모양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요. 하느님의 손이 우리를 잡고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아주 고통스럽지요.
정말 그대로 입니다. 모양을 바로 잡아 그릇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가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특별한 의무를 주시며 모양을 만드십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각자 다른 유일무이한 악기입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심포니의 각기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심포니입니다. 거룩한 주인은 이 위대한 심포니를 연주하지요. 우리 각자가 할 일은 오직 음을 맞추며 이 악기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심포니를 작곡하고 지휘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창조하신 것에 맞추어 연주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 다른 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과일인 것과 같습니다. 파인애플이 망고가 될 수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옆 사람이 그렇게 되길 바라죠. 이것 봐, 너는 파인애플이야, 너는 망고고.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망고 맛을 낼 수 없어.”
때로 우리는 오렌지 맛을 내는 파인애플을 얻으려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러곤 하지요. 사람들이 결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습니다.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과나무 앞에 서서 오렌지를 바랄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러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기만을 바라죠. 그러기에 결혼이 무너지고 우정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집니다.
하느님에게 화가 나 하느님을 떠나간 여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행히 그녀는 나중에 하느님에게 돌아갔습니다만, 그러한 행동은 좋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죠.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절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느님을 시험하다가 수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여성과 같이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겁니다. 살면서 몇 번이나 하느님을 시험하셨습니까? 분명히 여러 번이었을 겁니다. “무슨 일이야. 언제 이 상황이 바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은 과연 계십니까?” 그와 같은 일이 모든 사람의 삶에 있었을 겁니다. 믿는다는 사람의 삶에서 말입니다.
오래 전 구약시절에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시험하다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휩쓸려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지요.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서 “잘못했습니다. 믿음을 잃었습니다. 당신을 믿지 않고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항상 그곳에 계셨습니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성녀 제이먼 갈가니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수호천사를 항상 보았던 위대한 신비가였습니다. 한번은 사탄에게 심한 유혹을 받습니다. 끔찍한 불결한 생각으로 유혹을 받았지요. 그녀는 황폐해졌습니다. 그녀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던 밤사이의 유혹이 지나가자 성녀는 예수님에게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셨나요? 제가 이토록 힘든 일을 겪도록 두다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도록 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한 유혹을 경멸하도록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바로 네 안에 있던 나다. 그렇지 않았다면 네가 그 유혹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고 있지요. 고통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참고, 용서하고, 견디어 내도록 가르치고 이해하도록 하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무 다급해하지 말아라. 이해하여라.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끔찍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죠.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어려운 시기를 뚫고 끝까지 헤쳐 나가면, 하느님께서 부르는 시간이 왔을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제 자신은 사실 결혼생활을 가장 먼저 떠난 사람입니다. 저의 두 아들을 낳고 곧 몇 년 만에 저는 와이프를 떠났습니다. 세상이 저를 강하게 부르고 있었고, 저는 제 자신밖에 몰랐습니다. 결혼생활이 제 삶에 방해가 된 것이죠. 하느님께로 돌아온 후 회개하고 여러 번 고백성사도 보았지만 아직도 그것을 갚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정의 결합, 용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하라고 말하곤 합니다. 오늘날의 가정들이 너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이기적으로 되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도록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이곳에 부르신 것이 얼마나 은총인지 아십니까? 주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너를 창조하였다.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던, 어떻게 생각하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집으로 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의 어떤 죄도 놀랍지 않다. 그 어떤 죄도 나에게 중하지 않다. 모두 용서할 것이다. 너희는 그저 회개만 하여라. 삶을 고치고 빛 안으로 돌아 오너라. 그것이면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항상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게 믿음을 지킨다면 이 삶에서 어떠한 역경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삶에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결국 이 삶의 마지막에 하느님의 왕국을 받아들일 것이고, 누구던지 이 삶은 아주 빨리 끝날 것입니다.
지난 삶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돌아 보십시오. 꿈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관에 누워있고 영혼은 그 곁에 서 있는 날이 얼마나 빨리 올 것 같습니까? 모든 사람이 관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니야, 나는 여기에 있어.” 하고 말할 날.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할 그 날이 매우 매우 빨리 오고 말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영혼이 어떠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강할까요? 지금 이순간 죽는다면 여러분의 영혼이 하느님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까? 빛으로 채워질 만큼 강할까요? 주변에 있는 사탄들에게 “야~ 저리가. 비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말할 만큼 강할까요? 사탄이 그 말을 듣고 사라질까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날이 오늘 일 수도 있습니다. 몇 명이나 그 순간에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거의 없을 겁니다. 거의 모든 영혼들이 죽음의 순간에 매우 놀랍니다. 죽은 영혼은 영적인 세계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곳은 추락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추락한 세상에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곳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났을 때, 무엇을 처음 보겠습니까? 사탄입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귀양을 왔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육체에서 나왔을 때 주변에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다가 오고, 그들은 사탄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물러가라. 나는 집에 가야 해. 사라져 버려.” 라고 말하고 모든 유혹을 버리고 빛을 향해 갈 만큼 영혼이 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빛으로 채워져 있어 그들이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제 말은 농담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우리모두는 그 순간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나라. 깨어나서 너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아라.” 여러분의 시간이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꿀 만큼 우리는 강하여야 하고 용기를 가져서 실제로 하느님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감사를 더욱 많이 하여야 하고, 감사를 더욱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뻐하는 하느님의 참된 종, 기뻐하는 피조물로서의 하느님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너머 놀라운 집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하느님 안에서 그와 같이 될 때, 우리의 삶이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http://blog.daum.net/sophiay/159
(역: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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