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카를로스신부님-피정

제 27 강의 : 미사강론 (2010. 9. 16)루이사의 글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정통성과 권위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Skyblue fiat 2015. 2. 6. 17:50

미사강론 (3)

(2010. 9. 16. 사제 피정)

 

 

27. 미사강론 (3)

 

 이 미사로 우리는 피정을 끝내게 됩니다. 그분의 신성한 뜻의 정신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위대한 선물을 주신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째 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지금 며칠 동안 이렇게 함께하면서 나눈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린 하느님 뜻에 대한 굉장한 것은 전부 제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것은 이렇게 훌륭한 것들에 대해서 제가 이해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려고 노력한 것뿐입니다.

 

 각 장에 나오는 각 가르침은 우리 각자가 이해하는 방법으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루이사의 전체적인 가르침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교회의 가르침 밖으로 나가도 안 됩니다. 하느님 뜻의 위대한 선물은 교회 안에서 흠숭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사는 이 교회에 대한 순명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루이사의 글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정통성과 권위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선물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가 복음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정말 이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께 순명하고 충실하고 열려 있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울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이 복음의 여자의 자세와 같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작은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식과 이 선물을 가지고 우리가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같이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실제적인 자기보다 자기 자신을 훨씬 더 크게 생각합니다. 이 바리사이는 자기 집에서는 그만한 자리를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제들이 당신 뜻이라는 이 보배의 사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한 보배의 소유주가 아니라 제자라는 것을 항상 명확히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받은 소명을 잘 완수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언제나 교회에 대하여 순명하는 성직자의 자세를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이 선물은 예수님께서 루이사를 통해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물은 교회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6권에서 나오는 굉장히 아름다운 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6권 92장 1905년 2월 8일 부분입니다. 스페인어로 된 것인데 제가 먼저 스페인어로 읽고 또 영어로 읽으면 수녀님께서 한국어로 통역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한국말로 정확하게 통역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루이사가 평상시와 같이 계속하고 있는데, 루이사는 예수님께서 안 오셔서 슬퍼하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권 92장 1905년 2월 8일 : 하느님 자녀들의 특징

 

2. “딸아, 내 자녀들의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 교회의 영광에 대한 사랑에 있고, 그것도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자칭 내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하느님과 그 자신을 배반하는 자이다. 너는 그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너 자신 속을 한 번 훑어보아라.”

 

3. 그리고 그분은 사라지셨다.

 

 이 며칠 동안 우리는 하느님 뜻의 굉장한 면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될 이 세 가지 특징을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 교회의 영광을 위한 사랑. 이 세 가지는 꼭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점에 대해서 정말 강조하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떨 때는 유혹이 옵니다.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 뜻이 너무나 무한하고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신성해서 현재 교회의 현실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세 가지 특징으로서 이 큰 빌딩의 초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초석을 4권 1901년 1월 27일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가톨릭 신앙의 견고함은 애덕의 견고함 속에 있다.

왜냐하면 애덕이 마음들을 일치시켜주고 그리고 마음들을 내 안에 살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애덕은 시초부터 하느님 뜻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이고 바탕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전해준 애덕이 없이는 하느님 뜻 안에서 산다는 것은 환타지이다. 환상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애덕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 뜻 안에서 진정하게 살 수가 없다.” 

 

 

4권 51장 1901년 1월 27일 : 예수님께서 가톨릭 신앙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씀하시다.

 

1. “딸아, 가톨릭 신앙의 수립은 전적으로, 마음들을 결합시켜 내 안에서 살게 하는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 산다는 것은 산에 올라가서 그냥 하느님 뜻만 읽고 또 읽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하게 살기를 계속하고, 우리 어머니이신 교회에게 순명하고, 예수님과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의 그 사랑의 친교 안에 사는 것, 이런 것들이 없이는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또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완전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도 함께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요소들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계속해서 식별해야 됩니다. 우리들의 사목활동 안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애덕으로 그것을 완성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을 때 그 모든 작은 것 안에서 작용하시라고 하느님의 뜻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시작하고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면 우리는 이 왕국의 믿을 만한 증거자들이 됩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 애덕과 교회에 대한 충실함과 겸손과 순명이 부족하면 우리들은 사람들을 하느님 뜻으로 인도하는 대신에 오히려 우리가 그 사람들이 이 왕국에 들어가는 데에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마음속에 계시는 성모님을 통하여, 이 왕국의 지상에서의 사도들이 되는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시다.

 

 오늘 축일이신 고르넬리오 교황님과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성인의 전구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생애와 그분들의 순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