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용서는 신적사랑〕용서하겠다는 결정을 내려라

Skyblue fiat 2015. 2. 6. 10:33

 

 

용서의 다섯째 계명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용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가장 극적인 실례들은 「치유 사목 입문」이라는 제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트리니다드에 사는 베네딕도회 폴 수녀님은 이렇게 체험담을 증거합니다.

 

이틀 전에 저는 수년간 병석에 있으며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는 어느 부인과 함께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수술을 받았으며 그 당시 의사로부터 가능한 한 반듯이 누워 있어야 한다는 엄한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심각한 가정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등을 대고 반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앉아 보려고 했지만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다시 누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가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저는 심리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많은 일에 대한 분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를 학대한 남편과 자녀들을 용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긴 했지만, 창조적인 상상력을 사용하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도 똑같이 하기로 초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한 다음에 마침내 그녀는 용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의 말이 나오자 몸을 덜덜 떨며 있는 대로 이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머리에 통증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녀를 용서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항을 하면 할수록 더 심하게 몸을 떨고 이를 맞부딪치며 머리가 아프다고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그녀가 적개심과 용서하지 않으려는 영으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하였는데 10분쯤 뒤에 그녀가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니 당신을 용서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즉시 매우 조용해지면서 잠에 빠졌습니다. 저는 그녀가 치유를 받아 몸이 온전해지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평화를 그녀에게 가득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몇 분 후에 그녀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머리와 척추와 무릎에 있던 통증이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마실 것을 대접하고 자기도 마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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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에서 사목 상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통하여 주님께서 그녀 안에서 이루신 일을 성취하려면 20~25시간이나 상담을 했어야 할 거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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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다섯째 계명이란 단지 용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 결정이야말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용서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용서는 의지의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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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또 상당한 기간 동안 등이 아팠던 서인도제도의 한 부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상기해 봅니다. 이 부인과 함께 기도를 했는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가족 중 한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고백성사를 통하여 제가 사죄경을 염했을 때 통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사해 주는 바로 그 순간에 즉시 고통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일을 보면 용서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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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고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생각은 용서할 마음을 표시함으로써 그 상황을 개선하려는 결정을 제단에서 내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서 구절에서 글자 그대로 성당을 나온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이라면 성당이 텅 비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설교한다면 사람들이 즉시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할 것이며 성당은 텅 빌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 상황을 개선할 결정을 합리적으로 내리자마자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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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서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예배가 대단히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희생제물 바치기 위해 일 년에도 몇 번씩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매우 인격적인 그들에게는 매우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서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잘못해서 계약의 궤를 만졌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사건마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복음 말씀으로써 이들 엄격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전에 있을 때, 연중 가장 신성한 때에, 형제를 거스르는 일이 있거든, 당나귀에 올라타고 다시 언덕을 내려가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서 말씀은,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용서의 정도에 달려 있으니 용서를 베푸는 것이 그들이 제단에서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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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용서하려는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도 상당히 큽니다. 살아 있는 사람치고 어떤 시기에서든 부모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란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처가 의도적이 아니라 한다손 치더라도 온갖 삶의 현장에는 약간의 긴장과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용서할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은 특히 열한 살에서 열일곱 살까지 너무나 큰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기 때문에 이 연령에 부모를 용서해야 할 필요성은 지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억눌린다고 느끼는 까닭입니다. 흔히 젊은이들은 훈련에 대한 압력을 느끼는 고로 이것이 반항을 일으킵니다. 자녀들에게 용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일과, 그들의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를 용서하는 것 혹은 용서할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일은 부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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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기를 원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사람을 용서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네, 저에게 상처를 준 이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의도적인 의지의 행위를 하는 것만을 요청하십니다. 의심없이 상처와 고통을 느끼는 강한 감정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의지의 행위와 감정의 행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월요일에 일하러 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비록 그들의 “감정”은 따스한 잠자리의 포근함을 떠나야 하는 것에 반발할지라도 억지로라도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봐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폭언을 퍼붓고 한 대 치고 싶을 때라도,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을 치지 않으려는 “의지”의 행동을 합니다. “의지”가 “감정”을 다스리며 몸의 타부분도 다스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순수한 의지력만으로 용서할 때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의지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부입니다. 감정이 거세게 동요하더라도, 용서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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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는 신적 사랑 / 로버트 드그란디스 / 성요셉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