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의지, 나를 보고자 열망했기에 마침내 나를 보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 -대화(시에나의 카타리나)

Skyblue fiat 2024. 9. 20. 14:20

 

이승에 태어난 사람치고 육신이나 정신의 고통 없이 생을 통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 종들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을 당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자유롭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의 의지는 내 의지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까닭에 고통이 그들을 짜증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더 심각한) 아픔을 겪는 것은 의지다. 지금까지 너에게 이야기한 자들, 그러니까 이승에서 이미 지옥의 축배를 입에 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당하지만 내 종들이 입에 댄 것은 영원한 생명의 축배다.

너는 축복받은 자들이 누리는 가장 특별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들의 의지가 그들이 열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 그것이다. 그들은 육신의 무게 - 영에 대적하여 싸운 일종의 법칙 - 를 털어버린 까닭에 아무런 저항 없이 나를 열망하며 나를 소유하고 맛본다.(로마 7,23 참조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육신은 그들이 진리를 온전하게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종의 장벽이었다. 그들은 육신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나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의 무게에서 해방된 다음에는 그녀의 의지가 충만해진다. 그녀는 나를 보고자 열망했기에 마침내 나를 보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 그녀는 나를 봄으로써 나를 안다. 또한 나를 앎으로써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함으로써 지고한 영원불멸의 '선'인 나를 향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향유는 그녀의 의지, 나를 보고 또 알고자 하는 열망을 채우고 만족시킨다. 그녀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염원하는가 하면 염원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되, 내가 너에게 말한 대로, 그녀의 염원은 고통을 모르고 그녀의 만족 또한 지루함을 모른다. (묵시 7,16-17 참조 :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알아둘지니, 내 종들의 일차적인 행복은 나를 보고 아는 것이다. 이 보고 아는 지식은 그들의 의지를 충만하게 채운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가 염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그래서 만족을 느낀다. 내가 너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는 기쁨은 의지가 염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데 있다고 각별히 이야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의지의 만족은 나를 보고 아는 데 있음을 알라.(시편 16,15 참조 : “나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을 뵈음으로 흡족하오리다.") 그들이 이승에서까지도 영원한 생명의 축배를 즐기는 것은 그들이 그들에게 만족을 주는 바로 그것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승에서 이런 축배를 맞게 되는가에 대해 너에게 이야기해 주겠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나의 선을 감지하고, 또 그들의 오성이, 그들 영혼의 눈이 나를 통해 밝아지면서 내 진리를 알기에 이른다. (마태 6, 22-23 참조: 나는 occhio dell' intelletto를 문맥과 말의 흐름에 맞추어 '오성의 눈'으로 번역하거나, 때로는 그냥 '마음의 눈'으로 번역했다.) 이 눈의 동공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요, 이 믿음의 빛은 내 '진리', 육화된 '말씀'의 길과 가르침을 식별하고 깨닫고 따를 수 있게 한다. (동공을 실제로 보는 작용을 하는 요소로 간주하던 중세기적 이해에 주목하라. 이 같은 이해는 가타리나의 표상이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이 믿음이라는 동공이 없으면 그들은 눈은 가졌으나 그 눈에 시력을 제공하는 동공을 피막으로 덮어버린 까닭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 점은 오성의 눈도 마찬가지다. 오성의 눈동자는 믿음이지만, 만일 이기적인 사랑이 그것을 불신이라는 피막으로 덮어놓고 있다면 오성은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은 비록 눈의 형체를 갖추고 있지만 불신이 빛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시력을 갖지 못하고 만다. 그러니까 이들 영혼은 나를 봄으로써 알고, 나를 앎으로써 사랑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함으로써 그들의 이기적인 의지는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의지를 제거함으로써 내 의지를 입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 성화 외엔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즉시 다리 아랫길을 버리고 다리로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가시덤불을 통과해도, 그들의 발에 (다시 말해서 그들의 애정에) 내 의지가 신겨져 있기 때문에 결코 상처를 입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그들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할지언정 영적으로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바, 그것은 그들의 육정적 의지 - 영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는 - 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기적인 의지를 지니지 않은 까닭에 더 이상 이런 아픔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만사를 경외심을 가지고 참아 견디면서 나를 위해 고통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가 뜻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성덕을 시험하기 위해서 마귀들의 손에 부쳐 고통받게 하고 심하게 유혹당하게 하더라도, 그들은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내 안에서 그들의 의지를 굳건하게 다지고, 그들 스스로를 낮추어 자신은 영적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고 고통을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을 알고 고통 때문에 안달하지 않으며 생을 기쁘게 살아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나 질병, 가난 또는 세상의 불안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모두가 땅이 죄 때문에 출산한 가시나무들이다. 그들은 이성의 빛과 성스러운 믿음으로 내가 선 자체이며 따라서 결코 선익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확신하기에 이 모든 일들을 참아 견딘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이런 일들을 허락하는 이유도 미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일단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나면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죄악을 감지한다. 그들은 신앙의 빛으로 선은 반드시 보답받고 죄는 처벌된다는 점을 깨우친다. 그들은 제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무한한 '선'을 거슬러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그 죄들과 관련하여 이승에서, 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은전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네 죄를 마음으로부터 통회하고 동시에 완전한 인내로 공로를 쌓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노고는 무한한 행복으로 보답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승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넘어가는 하찮은 것임을 터득한다. 시간은 기껏해야 바늘끝 정도밖에 되지 않고 시간이 넘어가면 고통도 넘어간다. 그러니 고통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인내로 견디어 낸다. 지금 이곳에서 통과하는 가시덤불은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다. 육정적인 사랑에 관한 한 그들의 마음은 자신을 멀리 떠났고, 사랑의 충동으로 나와 굳건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실로 이 영혼들은 심지어 이승에서조차도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보장받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생을 물속에서 잃어버리는 일도 없다. 그들은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행복' 그 자체인 나를 알고 있기에 가시에 찔리는 일이 없고, 또 그 행복도 마땅히 찾아야 할 자리, 즉 내 외아들인 '말씀' 안에서 찾아 얻는다.

 

 

- 시에나의 카타리나 '대화' 145-149p /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