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마리아의 절제의 덕 節德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성]

Skyblue fiat 2024. 9. 4. 03:27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성]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생애

아그레다의 예수의 마리아 수녀 / 박규희 옮김 / 아베마리아출판사

37장. 

마리아의 절제의 節德

 

영혼의 삶에는 두 개의 활동, 즉 감각적 선을 끌어당기는 활동 그리고 악을 멀리하는 활동이 있는데, 이 중 후자가 앞 장에서 말씀드렸던 용기의 덕과 관련이 있습니다. 용덕은 분노를 조절하려는 의지를 굳세게 하여 영혼이 분노에 휘둘리기보다는 이용하고, 최고선을 얻기 위한 도정에서 부딪치는 모든 어려움을 참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반면에 선에 이끌리는 활동은 탐욕의 정을 통제하는 절제의 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추덕의 마지막 덕인 절제의 덕으로 얻어지는 선은 이 덕을 소유한 영혼의 특정한 유익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다른 덕행을 통해 획득되는 선과 비교할 때 그 효과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한편 신학자들은 절제의 덕을 인간이 가진 모든 자연적 욕구와 그 활동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데, 이에 따르면 절덕節德은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선을 추구하고 덕행 일체를 조정하는 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는 것은, 절제의 덕의 일반적인 작용이 아니라 촉각의 욕구를 통제하는 특수한 작용, 그와 비슷하지만 촉각만큼 강하지 않은 다른 탐욕들을 통제하는 절덕의 작용입니다.

 

덕행의 대상에서 볼 때 절제의 대상은 가장 저급한 것이므로 사추덕의 고결함의 서열에서 맨 마지막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절제는 가장 추하고 역겨운 짓을 하지 않도록, 곧 감각적 쾌락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짐승들처럼 되지 않도록 해 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덕입니다. 다윗도 감각적 육체적 쾌락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시편 49,13,21)

무절제는 미성숙함의 악덕이라고 불리는데, 제멋대로 행동하며 혼을 내거나 매를 들기 전까지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절제의 덕은 더러운 육체적 쾌락의 노예상태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무질서한 쾌락이 아니라 고요한 이성에 복종하여 살도록 하는 절덕을 간직한 영혼에게는 모종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이 부여됩니다. 반대로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사는 영혼은 이성 능력이 없는 동물의 삶과 다르지 않기에,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짐승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절제의 덕에는 미각을 통제하는 금식과 술을 적당히 마시는 절주가 포함됩니다. 단식은 금식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은 생명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이기에 탐욕의 일차적인 대상이며, 따라서 탐욕의 정을 통제하는 절덕에서는 금식과 절주가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합니다.
탐욕의 이차적인 대상은 인류의 종種의 번식과 보존의 욕구와 관련이 있는데, 생식과 관련한 탐욕의 정을 통제하는 절제의 덕에는 정결,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내적 감각인 수치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악습은 욕정의 무절제입니다. 정결과 수치심에는 본성상 동정(virginitas)과 자기 지배(continentia)가 수반됩니다. 이상 네 가지는 촉각과 미각의 탐욕을 조절하는 절제의 덕이며, 그 중요성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을 절제하는 덕들보다 큽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과 후각은 욕정과 쾌락의 강도로 볼 때 촉각과 미각에는 미치지 못하고, 보다 강한 욕구일수록 그 욕구를 통제하는 절제의 덕도 강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조절하며 영혼이 공정한 보복을 할 때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지 않고 사나운 맹수처럼 포악하게 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덕인 너그러움과 온유함은 덕행의 대상으로 볼 때는 절제의 덕에 속한다고 할 수 없지만, 대상과 관계하는 방식의 유사성 때문에 절제의 덕으로 간주됩니다.

중용(modestia)도 독특한 절제의 덕이라 할 수 있는데, 중용은 네 가지 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으로서,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엄함을 추구하는 악습인 교만과 대립됩니다. 둘째는 배움에의 열정(studiositas)인데, 지적인 허영을 추구하는 악습인 단순한 호기심과 대립됩니다. 셋째는 절약 또는 검소함(moderatio)으로, 이에 반대되는 악습은 사치와 방탕입니다. 넷째는 여가생활과 유희, 대화할 때의 행동과 태도의 절제와 관련된 덕입니다. 이 덕을 가리키는 명칭은 따로 없는데, 간단히 정숙함이라 불러도 되겠습니다. 정숙함은 절제의 덕들 중에서 매우 필수적인 덕이기에 예의범절 또는 넓은 의미에서의 절제의 덕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학자들의 덕론(德論)에 근거하여 하늘의 여왕이시며 완덕의 여왕이신 마리아의 성덕을 설명한다는 것이 제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덕에 관해 우리네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완전무결하게 창조된 마리아가 아니라 우리처럼 불완전하고 평범한 이들을 설명하는 데에만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불가피하게 세상의 학문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써야 하지만, 설명과 실제의 마리아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의 거룩함은 성인들의 거룩함보다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더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덕이 완전하다고 할 때 다른 성인들의 완전함에 비교하여 말하면 안 되고, 하느님이 완전하다고 할 때의 그 완전함에 비교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피조물이지만 하늘 여왕은 덕의 탁월함과 거룩함에서 성인들보다는 하느님과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거룩함 사이에 무한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늘 여왕의 거룩함도 성인들의 거룩함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와 똑같은 죄와 허물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인 성인들의 완덕과,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인간인 성모님의 완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절제하는 영혼의 탁월함을 설명하기에는 어떠한 언어도 적합하지 않다고 했습니다.(집회 26,20 참조) 그렇다면 완덕의 여왕이며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인 마리아의 절제의 덕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잠언에는 “강인한 여인이 살림하는 집에 사는 이들은 모두 옷을 두 벌씩 껴입고 있기에 한겨울 추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잠언 31, 21 ' 온 식구를 두둑히 입혀서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 참조)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마리아 영혼의 모든 능력이 두 가지의 완전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두 벌의 옷이란 모든 욕구가 이성과 은총의 힘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본래적 정의, 모든 행위에 참된 완전함과 숭고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은혜로운 덕, 이 두 가지를 뜻합니다. 

 

절제의 덕으로 빛났던 성인들은 모두 욕망을 이성으로 조절하거나 억누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에 복종했더라면 쾌락이 지나간 후 당연히 직면했을 슬픔이나 마음의 공허함이나 절망과 같은 악을 처음부터 차단했던 것입니다. 성인들은 극기와 자기 절제를 극한까지 몰고 갈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육욕을 절제하려는 원의와는 대립된 다른 원의, 또는 의지하는 바가 온전하게 실현되지 못하게 막는 어떤 내적인 장애가 자기 안에 있어 절제의 덕행을 본질적으로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도 성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그러했듯이 모든 성인들도 죽음에 빠진 육신이 숙명적으로 메고 가야 하는 이 비참한 멍에를 두고 하느님께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로마 7,24)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말한 영혼 안의 대립과 갈등은 마리아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탐욕은 마리아의 의지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었고, 이성의 명령에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의 모든 행위는 조화와 질서를 이루었고 전열을 갖추어 늘어선 군대와 같이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습니다.(아가 6, 3.) 마리아는 비뚤어지고 고집 센 욕망과 싸울 필요가 없었기에 절제의 덕행은 오히려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려는 탐욕적인 표상과 상념들이 아예 마음속에 떠오르는 일조차 없도록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하는 일은 그 거룩함과 완전함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행위는 영원한 시작이며 샘이신 그분께로부터 흘러나와 최종 목표이며 모든 덕행의 완성이신 그분께로 다시 돌아가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금식과 절주의 덕은 천사들에게는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지극히 자연적인 욕구에 직면해서 전 우주의 여왕이라는 존귀함과 품위에 걸맞은 귀한 음식을 구한 적이 없을 뿐더러 - 그런 음식이 과연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혀에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는 맛있는 음식을 일절 찾은 적이 없습니다. 양으로 보면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고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먹었고, 음식을 먹는 때로 보면 식욕을 느꼈을 때가 아니라 허기와 갈증을 참을 만큼 참고 몸의 신진대사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되어서야 비로소 음식을 섭취했습니다. 과도하게 먹거나 마신 적이 없으므로 그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은 당연히 없었지만, 부족하게 먹었다고 해서 신체가 손상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도 결식해야 했을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손수 은총으로 마리아를 붙드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하느님 덕분이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총으로 살 수 있다면 분명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아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 필요 없도록 섭리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전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절제의 덕의 모범이 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우리에게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본보기로 세우시길 원하셨지 않습니까. 성모님은 당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육류는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배필이신 성 요셉과 함께 사셨을 때와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셨을 때만 예외였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는 동안에는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성모님이 거룩한 주님의 생활양식에 맞추어 사시면서도 절제의 덕을 실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동정녀 가운데에 으뜸가는 동정녀인 마리아의 정결함과 수치심의 덕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세라핌 천사들조차도 감히 말할 자격이 못 됩니다. 세라핌 천사들은 본성상 이 두 개의 덕을 그 자체로 소유하고 있는데도 천사들의 모후이신 마리아는 지존하신 분의 은총과 전능으로 그마저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이미 본성상 더는 깨끗해질 수가 없을 정도로 정결한 존재인데, 마리아가 천사들보다 더 맑고 깨끗하다면 마리아의 정결함이 어떠한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하늘 여왕의 정결함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정결이라는 빛이 마리아의 영혼 은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데, 이미 육신 때문에 어두워져 있는 우리 영혼의 눈이 마리아의 영혼 안의 정결함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 수가 있을까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지위가 마리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존귀함이 아니었더라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지위가 마리아의 정결함의 원인이 아니었더라면": 영어번역) 정결이 부여하는 존귀함이 아마 마리아에게서는 으뜸가는 것이었을 정도로 정결의 덕은 그 품위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덕입니다. 마리아의 정결함을 마리아가 받은 존귀함과 마리아가 들려 올려진 존귀함에 따라 보게 되면, 마리아의 동정 육신과 영혼의 탁월함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된 당시에 받은 정결과 동정의 덕을, 태어난 후에도 그랬지만, 이미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심혈을 기울여 보존하였습니다. 아주 미소한 몸짓 하나에도 아주 사소한 생각 하나에도 자칫하면 이 덕은 그 청정함을 모조리 상실할 수 있기 때문에, 마리아는 정결을 간직하기 위해 한 치의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생각과 말과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면 어떠한 남자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남자든 여자든 얼굴을 쳐다보는 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사람과의 교제에서 이토록 극도로 조심하셨던 것은 혹시라도 죄의 위험에 빠질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덕행의 공로를 쌓고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지혜와 사랑과 현명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솔로몬은 마리아의 너그러움과 온유의 덕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의 법이 그 입술에 배어 있다.” 154)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입에 올려 주신 말이 아니면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바와 같이, 우아함을 머금은 마리아의 입술은 하느님께서 영원히 강복하신 입술이기 때문입니다. (시편45,3.) 온유함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너그러움은 벌이나 보복을 가할 때에 그 강도를 완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 장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용덕으로 사탄과 죄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일만이 예외적으로 허용되었고, 그 외에는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하늘 여왕에게는 잠재워야 할 분노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죄지은 인간을 벌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화를 낼 일도 없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마리아를 화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고요한 영혼은 언제나 평정을 유지했고 그 온화한 얼굴에 띤 미소는 변함이 없어서 마치 영원한 것 같았습니다. 그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미소는 마리아가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조건에 분노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면, 마리아가 불쾌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은 것은 화를 참아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화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너그러움과 온유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온유함으로 취하셨고 마리아를 당신 자비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자애가 하느님의 자애를 닮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하신 모든 업적을 곰곰이 헤아려보고 또 죄인들에게 어떤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자애로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의로움의 회복은 마리아에게서는 징벌이 아니라 권고와 훈계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간청과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유일무이한 피조물을 당신 자비의 샘으로 정하시면서 자비의 법까지도 마리아에게 위임하셨기에 자비의 청원은 마리아의 소명이자 권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딸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물 창고인 마리아에게서 너그러움과 온유함과 다른 모든 덕들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이나 청빈과 같이 엄격한 삶의 양식과 관련한 중용의 덕이 복되신 동정녀에게서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말하려면 천사들의 언어로도 무수히 많은 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어머니의 이승에서의 삶 전체를 비추는 빛과도 같기에 어머니의 생애에 관한 이 책 전체로써 설명되어야 하며, 여기서 별도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성모님의 겸손의 덕이 얼마나 드높고 위대한지를 제가 헤아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여기서 몇 줄 또는 몇 장의 글로 성모님의 겸손함에 대해 서술한다면, 가뜩이나 제한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어머니의 겸손의 덕을 더욱더 축소하고 은폐하는 결과만 낳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겸손은 당신 안에 무한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 만큼 무한하였으니, 불완전한 몇 마디의 말로써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를 붙잡으려는 시도가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성인들이 설령 겸손의 완덕을 닦는다 하여도 그 겸손과 조금이라도 같은 것을 마리아에게서 찾아볼 수 없고, 천사들조차도 하늘 여왕의 겸손의 위대함을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성인이나 천사가 과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영원하신 아버지와 마리아를 제외하고 세상에 어느 누가 사람이 되신 거룩한 말씀을 아드님이라 부를 자격을 받았습니까? 하늘과 땅 위에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당신의 말씀을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데, 피조물 가운데 감히 그런 권한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그는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한 존귀함으로 들어 높여진 유일한 피조물이며 가장 고귀한 피조물일 터인데, 정작 그 여인은 스스로를 모든 조물 중에 가장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니 그 겸손함이 어느 정도인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왕 중의 왕이신 분을 잉태하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그렇게 처신했다면, 마리아의 겸손이 나르드가 피우는 향기처럼 얼마나 감미로웠겠으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아가 1,12 참조) 

하느님의 꾸지람에 천사들이 놀라고 그분의 엄위하심에 하늘의 기둥들이 뒤흔들리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욥기 26,11)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늘 나라에서 내쫓긴 형제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땅 아래로 추락해 버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자신들이 지복과 영광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하느님을 선택한 결과이며 지존하신 분의 은혜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만물의 질서에 따르면, 더 거룩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자신을 멸시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기고 가장 낮은 피조물에게 봉사하는 것조차도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스스로 낮춥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고(로마 3,23), 어느 누구도 제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을 만큼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덕도 필요치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도 없고, 하느님의 눈에 아무것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맑은 사람도 없습니다. 설령 모든 점에서 완벽하고 완전무결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모든 점에서 모든 이를 능가할 수는 없으며 인류 전체에 부어지는 최소한의 은총 없이도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예외적인 존재이며 마리아의 겸손의 덕은 어느 누구의 겸덕과도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마리아는 은총으로 어둠을 비추는 새벽빛, 피조물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선의 원천이자 으뜸가는 피조물,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존재, 하느님 사랑으로 고동치는 심장, 하느님의 완전함과 거룩함이 집약되어 있는 오묘한 기적이며 하느님 전능의 살아 있는 증인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아들이라 불렀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시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자신이 누린 은총의 지위와 존귀함은 한낱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그것의 최대한이었음에도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존엄조차도 자신에게는 과하다고 여겼습니다. 마리아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설 자격조차 없고 음식을 먹거나 숨을 쉬는 것마저도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 감사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는지 마리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모든 이들이 - 만약 우리가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 마리아를 정말 그런 기본적인 것들조차도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우리들의 겸손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제 스스로의 공로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은총 지위를 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으며 자기는 그것에 조금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리 대단한 겸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론 그런 영혼을 어여삐 여기시고 그런 겸허한 마음가짐에 커다란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제 본래의 처지에 맞게 처신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위엄과 영광을 받기에 참으로 합당한 존재가 그러한 존귀함을 원하지도 찾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맨 끝에 자리하고자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귀하게 여기며 끊임없는 자기 부정으로써 겸손을 실천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이 점을 당신 정의에 따라 드높은 공로로 인정하시어 마침내는 마리아를 전 우주의 여왕으로 삼아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중용의 나머지 덕들도 마리아에게서는 겸손과 같은 탁월함을 드러냅니다. 배움에의 열정은, 필요 이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겸손이나 사랑의 결핍에 의한 욕구이기에 더 이상 덕행으로 간주되지도 않거니와 덕을 행하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의 경우는, 쓸데없는 호기심은 악을 자초할 뿐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도 드러내려고 도시로 갔는데, 이 행위는 디나에게 아무런 영적 유익도 주지 못했고 도리어 혼인할 여자로서의 품위를 상실하고 상처만 주었습니다. (창세 34,1-2) 필요 이상의 소비와 사치, 과한 화장과 몸치장, 조신하지 않은 행동거지는 허영과 감각적 쾌락에 기여하는데, 교만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영혼의 경박함은 정숙하지 않은 몸가짐과 방탕으로 나타나는데, 집회서의 저자가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사람은 옷차림과 큰 웃음과 걸음걸이로 그 인품을 드러낸다.”(집회 19,30)
마리아는 이 같은 악습들에 반대되는 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검소함과 정숙함의 덕은 겸손과 애덕과 정결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마리아의 천상적 기원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배움의 열정은 호기심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이미 케루빔 천사들을 능가했는데도 여전히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또 은혜로이 받은 영적인 지식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르고자 할 때마다, 그 배움의 노력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가장 먼저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 그 앞의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도록 지극히 현명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청빈의 덕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일까 합니다. 마리아는 피조물의 여왕으로서 부족한 것이나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지만 성자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모든 소유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이며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손에 모든 것을 내어 주셨고(요한 13,3), 성자께서는 당신이 받으신 것을 사랑하는 어머니께 아낌없이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아드님께 받으신 전부를 성부와 성자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셨는데, 이렇게 하여 성모님은 청빈의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느님을 완전하게 본받으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과 행동과 몸가짐이 얼마나 탁월하게 단정했는지는 복된 디오니시우스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리아가 인간이라고 신앙이 교시하지만 않았던들 아마 우리는 마리아를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천상 모후이신 성모님의 가르침 

 

“내 딸아, 이 장에서 너는 나의 절덕에 관해서만 썼을 뿐이지만 사실 절제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덕이니, 너희들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그 가치와 덕행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한처음에 저지른 죄의 대가로 모든 인류는 이성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탐욕과 열정이 더 이상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 지경에, 이성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그분의 계명을 짓밟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이 영혼 안에 올바른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탐욕의 정에 고삐와 재갈을 물리는 절제의 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절제의 덕은 인간이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중도를 살 수 있도록 가르친다. 인간 존재의 존귀함을 하느님 신성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다시 들어 높일 수 있으려면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성이 아닌 육체적 쾌락에 따라 산다면 인간의 존엄은 짐승의 품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절제의 덕이 아니고서는 태초의 남자와 여자가 더럽혀 놓은 인간 본성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 하느님의 은총과 지혜를 다시 받기란 불가능하다.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기”(지혜1,4) 때문이다. 탐욕을 절제하고 감각적 쾌락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 이는 누구든지 아가서에서 노래하는 축복을 받을지니, 임금님께서 그 영혼을 친히 당신 향포도주의 창고 안으로, 하늘 나라 지혜와 은총의 보물창고 안으로 데려가시는 축복이 바로 그것이다.(아가 2,4)  “그런데 절제의 덕 그 자체가 이미 감미로운 완덕들을 온통 모아 놓은 임금님의 보물창고란다.

 

너는 절제에 관하여 네가 말한 것들을 다 갖추어야 한다. 절제의 덕 중에서 네 영혼에 빠진 것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그윽한 향기를 내는 덕인 정결함, 영혼을 강인하게 해 주는 덕인 금식과 절주, 단정한 품행에 관한 덕,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청빈의 덕행을 실천하는 데에 힘써라. 이로써 너는 영혼에 하느님의 빛과 참평화가 깃들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영혼의 능력들이 참된 자유를 획득하면 그만큼 너는 육신의 정념들을 순조롭게 지배할 수 있게 된단다. 네 영혼은 무수히 많은 은혜와 하느님의 빛으로 찬란히 빛나게 되고, 동물과도 같은 감각적인 삶에서 참인간의 삶을 살게 되며 마침내는 천사의 삶으로까지 변모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네가 천사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너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그리 살기를 원하지 않느냐. 그러니 사랑하는 내 딸아, 네 모든 행함의 원동력이 육체의 욕구가 아니라 은총이 되게 하며,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쾌락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 수행되도록 하여라. 먹거나 마실 때나, 잠을 자거나 깨어 있을 때나, 옷을 입거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들을 때나, 가르치거나 기도할 때나, 매사에 그리고 만사에 너 자신이 아닌 주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네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마음에 두어라.

절제의 덕과 반대되는 악습에 빠져 사는 세상이 하느님과 성인들의 눈에는 얼마나 추악하고 역겨운지를 네가 받은 빛으로 한번 보려무나. 그러면 절제의 덕의 감미로움에 한층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배부르고 취할 때까지 먹고 마시며 놀이로 시간을 허비하고 욕정으로 몸을 달구고, 감각적 허영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은 몰지각한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삶은 아니다. 지각없는 영혼들은 현재의 쾌락을 구하고, 언제나 현재의 행복만을 쫓는다. 그리하여 저세상에서 약속된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참행복을 영원히 타오르는 고통과 맞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