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버림받음의 고통과 벌
가톨릭에서는 연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또 이승에 있는 신자가 연옥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이승에 살아 남은 이는 오래지 않아 죽은 이들을 잊어버린다.
물결이 일 때 처음으로 물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벳자타의 못 곁에 중풍 병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저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연옥에 있는 대부분의 영혼들이 바로 그러하다. 자기가 현세에 있는 이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를 도와주는 이가 없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연옥에는 감각의 혹독한 벌과 실각의 무서운 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음'이란 벌도 있는 것이다.
죽은 이는 점점 잊혀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 진다.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교회의 진리도 잊어버린 듯 죽 은 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준주성범>의 저자가 “사람의 눈에서 떠나갈 때에는 생각에서도 또한 떠나간다.”라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비석이 싸늘한 시체를 누르듯이 망각은 죽은 이에 대한 생각을 누른다.”라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은 옳다. 시인 라마르틴은 "망각은 죽은 이의 두 번째 수의(衣)이다.”라고 말했다.
슬프게도 이런 말들은 사실이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이처럼 야박한 인간의 인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미사, 성무일도, 예식, 죽은 이의 기념일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제2의 죽음
죽은 이를 잊어버림은 원죄가 낳은 부끄러운 결과이다. 우리는 사욕이나 세속에 정신을 빼앗겨 쉽사리 죽은 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만다. “괴로워할 때에 위로해 주는 이가 있으면 그 괴로움이 고통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지만, 동정해 주는 이가 없을 때에는 또 다른 괴로움이 겹치는 것이다."라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연옥 영혼은 자신이 잊히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섭섭해 한다. 자기를 구해주기 위해 바친 기도나 선행을 알면 기뻐하듯이 잊히고 있음을 알면 몹시 슬퍼한다. 이 잊힌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제2의 죽음'이다. 즉 물질적 죽음에 정신적 죽음이 더해지는 것이다.
조난당한 사람
"살려 주세요! 사람 살려요!"
배를 타고 가다 난파당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혼자 남은 사람은 지나가는 배를 보면 두 손을 흔들며 이렇게 부르짖는다. 그런데 항해자가 이를 듣고서도 본척만척하고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면 조난자의 심경은 어떠할까!
그러나 여기 이 조난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곧 연옥 영혼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이들은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극히 미소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은 복음에서 사라져 버린듯이 보인다. 연옥 영혼은 탄식한다.
"아아... 앙화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형제들의 마음에서도 죽어있다."
혈연
죽은 이가 이승을 떠나고 몇 주일 후에 하느님께 허락을 구해 그가 생전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 본다면 어떨까? 가족들의 기나긴 대화 중에 자신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못내 서러워 연옥으로 돌아오면서 부르짖는다.
"아아, 모든 이들이 나를 잊었구나. 인간계에 내가 맺어 놓은 인연은 모두 끊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잊어버렸다. 내 이름 을 부르는 사람도 없고 내 무덤에 와 보는 이도 없다. 슬프도다." 죽은 이는 만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겼지만 결국 버림받았음을 알고 탄식한다. "편히 쉬세요. 항상 기도하고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게요…….”
망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약한 마음이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이는 차츰 마음에서도 떠나는 것이다.
은혜를 잊는 일
사실 은혜를 잊는 일은 우리 삶에서 늘상 있는 일이다. 병고침을 받은 열 사람의 나병 환자 중에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죽은 이는 살아 있는 동안 적지 않은 고 생을 했을 것이다. 그가 사는 동안 참아 낸 그 고생으로 주변에서 덕을 본 사람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러나 사는 동안 의리로 교 류했던 사람들마저도 은인이 연옥에서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은인의 죽음은 잊어버리고 현세만을 살아간다. 작은 위로나 짧은 기도조차 해주지 않는다. 육신을 떠난 영혼은 이승에 있을 때보다도 더 깊이 실망하며 탄식한다. 살면서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주 사라져 버린 것에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
"아, 슬프다! 죽은 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불충분하다. 장례 식 종소리가 멈출 때 그들에 대한 생각은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죽은 이와 함께 사는 삶
현세에 살아 있는 사람들하고만 살 수는 없다.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 이전에 죽은 이와 함께 사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을 통해 죽은 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한평생, 끊임없이 죽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또 그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선행, 기도, 애긍, 은사, 영성체, 미사 등으로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죽은 이의 '진실한 형제'가 된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라는 말씀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우리 귀에 울릴 때가 올 것이다.
-연옥실화(정화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곳, 연옥) 제 2장. 연옥에서 받는 고통과 벌
/ 막심 퓌상 지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옮김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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