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애타는 갈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각고(苦), 즉 감각의 벌이 혹독하기는 하지만 실고(苦), 즉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벌의 고통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사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일은 선인의 위안이기는 하나, 보속을 못다한 까닭에 다시 얼마 동안 더 떨어져 있어야만 할 때 영혼이 느끼는 열망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 외에는 원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겐 고통이 되는 것이다. 영혼은 채워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사랑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 하느님을 염원하고 있기에 그 외의 것으로는 그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말했다.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때에는 마음속에 불길이 타오르고 영혼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어머니한테서 억지로 떼어 낸 아이는 한사코 어머니를 부른다." "자석은 쇠붙이를 당긴다." 따위의 비유는 연옥 영혼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에 한없이 부족하다. 사랑이 완전하면 할수록 이를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욱 심하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그분을 향해 두 손을 들지만 보속을 다 하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 계셔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는 천만 번 죽어야 한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한동안 연옥에서 고통받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감동적인 부르짖음으로 성인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사심판 때에 성인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보았더라면 그의 마음은 아마도 사랑으로 녹아내렸을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타오르는 갈망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인간은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다. 현세의 불완전하고 하찮은 아름다움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로 인해 입맛을 잃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종종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런 인간의 아름다움에도 위와 같은 힘이 있다면 온갖 '미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어떠할까? 그것은 도저히 현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은 자진하여 연옥으로 간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보속을 해야 하는 영혼을 하느님께서 연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흠 없으심과 제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서 스스로 온전히 깨끗해지려고 슬퍼하면서도 제 발로 달갑게 연옥에 가는 것이다. 더러운 그대로 천국에 있기보다 연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는 훌륭한 방에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서있느니 그 방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희생된 카롤리나 클레망은 1880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28년 전 나는 환상을 보았고 그것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죽어서 사심판을 받았다.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내 앞에 서 계셨다. 그러면서도 크나큰 선하심과 어지심을 지니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나를 맞아주는 주님의 두 팔에 뛰어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은밀한 데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눈초리가 있었다. 사함을 받기는 했으나 보속을 못다한 죄의 더러움이 내 눈앞에 나타났고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고통스러웠다. 아주 잠시 그 앞에 서 있기도 몹시 부끄러웠다. 만일 그 옆에 지옥이라도 있었다면 주저 없이 지옥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때 보속을 다 못하고 하느님 대전에 있기보다는 연옥에서 고통받는 편이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방자
연옥 영혼은 고아이다. 하느님과 성모님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천국에서 추방된 자이다.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 형제, 벗을 만나기를 몹시 원하고 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하느님을 뵈올 수 없는 괴로움은 상상 이상이다. 연옥 영혼은 하느님 곁에 살고 싶지만 그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 갈망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이러한 고통을 깨닫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흉내 낼 수 없는 미소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성모님께서 루르드에서 성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났을 때 있었던 일이다. 두 사람의 무신론자가 '그 헛된 믿음을 깨뜨려 주려고' 루르드에 갔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동굴 앞에 이르러 두 사람은 성녀 베르나데트의 얼굴을 보았다. 성녀의 얼굴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신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 대해 프랑스의 부르사이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코트레 온천장에 있었을 무렵, 사람들은 한창 루르드의 성모 발현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당시 나는 방탕했으며 또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그 발현을 믿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신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 신문에서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에게 미소를 지어 주셨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내가 그 미소짓는 가면을 벗겨 주리라고 생각하며 직접 베 르나데트의 집을 찾아갔다. 베르나데트는 입구 계단에서 검은 양말을 손질하고 있었다. 내 눈에 그녀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 는 평범한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용모가 여위기는 했을망정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소박하고 꾸밈없이 들려준 성모님의 발현 이야기에 나는 무척 감동했다. 끝으로 나는 물었다.
'그럼 그 귀부인은 어떤 모양으로 미소 지으셨소?
이 시골 소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말했다.
'아이 참, 그런 미소를 천국에 사시는 분이 아니고는 누가 흉내낼 수 있겠어요??
'어떻게 좀 내게 그 미소를 보여 줄 수 없겠소? 나는 의심 많은 무신론자라서 그 발현을 안 믿으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엄하게 힐문했다.
'당신은 제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 말을 듣자 나의 허세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어찌 이소녀가 거짓말쟁이일 수 있으랴.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사과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자 베르나데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죄인이니 성모님의 미소를 흉내 내어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조용히 일어서서 두 손을 모으고 천국에 계시는 분의 미소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미소 짓고 있는 동안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나는 성모님의 미소도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소녀가 보여 준 티없는 미소를 마음에 새겼고 이를 상상할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아내와 두 딸을 잃었지만 내가 홀로 외롭게 이 세상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성모님의 미소와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은 성모님을 보셨나요
베르나데트는 그 후 마리 베르나르도라 불리는 수녀가 되었다. 그녀가 수도원 병실에서 천식증 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다른 수녀의 네 살난 조카딸이 문병을 왔다. 아이는 성당에 들어온 것처럼 얌전하게 까치발을 하고 가만히 침대 가까이 가더니 베르나데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녀님, 수녀님은 성모님을 보셨나요?"
“그래, 성모님을 뵈었어요."
“성모님은 아주 예쁘죠?"
이 말을 들은 베르나데트의 얼굴은 즉시 달라졌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또 뵙고 싶어서 죽고 싶을 정도야.."
아이는 수녀의 두터운 신앙과 사랑에 감동해서 말했다.
"수녀님, 엄마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기도하겠어요. 아기도 나를 위해 기도해 줘요."
집에 갈 시간이 되었지만 아이는 성모님을 본 이 수녀를 떠나 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수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아쉬운 마음으로 느릿느릿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갔다.
성모님의 아름다움
리옹 시의 유명한 조각가가 루르드의 발현 동굴에 안치하기 위해 베르나데트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확인하여 살아계신 듯한 성모님을 조각하였다. 자기가 가진 재능과 믿음, 그리고 성모님을 향한 사랑까지 모두 쏟아 정성을 다해 빚은 원죄 없으신 성모상이었다. 이 성모상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명작이라고 칭찬했다. 베르나데트도 성모상을 보았다. 그러나 성모상의 모습은 그녀의 기대와 너무 달라서 그녀는 두 번 다시 보기 꺼렸다. 베르나데트는 성모님께 용서를 청하며 말했다.
"어머니, 어찌 이다지도 당신을 못난이로 만들었을까요? 성모 상을 만든 조각가가 실제로 당신을 뵙는다면 정말 깜짝 놀랄 거 예요."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우십니까?"
"그럼요. 한번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결론
성모님의 미소를 떠올리는 베르나데트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것일까? 피조물이신 성모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우시다면 온갖 선함과 아름다 움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싶은 갈망에 괴로워하고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연옥실화(정화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곳, 연옥) 제 2장. 연옥에서 받는 고통과 벌
/ 막심 퓌상 지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옮김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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