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을 특별히 여기 오게 한 것은 너희들이 내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 두 사람이 겪은 첫 번째 시험이 끝난 다음에 너희들을 부른 것은, 일을 하는 내 제자들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너희들을 지도하고 또 내가 내 후계자로 너희들에게 주는 사람들에 대한 너희들의 첫 번 반응이 어떠했는지 듣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묵상기도에서 정신과 마음에 새로운 힘을 가지고 나온 사도들의 영혼을 내 기도로 지원하였다. 그 힘은 공부에서 오는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는 데에서 오는 힘이다.
가장 많이 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잊은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목소리를 제일 높이 내는 추억은 나 자신에 대한 추억이다.
나와 나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자기의 기원을 기억하는 영혼에서 오는 영적인 나가 있다. 자기의 수많은 요구와 열정에 집념하는 육체의 열등(劣等)한 나가 있다. 이 요구와 열정에서는 합창을 이루는 많은 목소리가 나와서, 만일 영이 매우 튼튼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고귀함을 기억하는 영의 외로운 목소리를 제압한다. 그러므로 – 항상 더 불러일으키고 되살아 나게 하고 강화해야 할 이 거룩한 추억을 제외하고는 – 제자로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인간적인 나에 대한 모든 추억과 요구와 염려하는 생각에 관한 한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할 것이다.
내 열 두 제자에 대한 첫 번 시험에서 가장 많이 준 사람들은 자기를 가장 많이 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과거뿐 아니라, 그들의 한정된 개성까지도 잊은 사람들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그들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혼합되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조심성이 많으냐? 그것은 그들이 늘 가졌던 소심함과 그들이 항상 고려하던 것과 그들이 언제나 가졌던 편견들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간결한 표현을 썼느냐? 그것은 그들이 교리에 대한 그들의 무능을 기억하였기 때문이고, 자기가 초라하게 보이거나 나를 초라하게 보이게 할까 봐 겁을 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눈에 띄게 과시하였느냐? 이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교만과 각광을 받고, 갈채를 받고, 남보다 뛰어나고,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란 그들의 욕망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어떤 사람들은 왜 자신만만하고 설득력이 있고 화려하고 당당한 연설로 뜻밖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느냐? 그것은 그들이, 또 그들만이 하느님을 기억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또 겸손하여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들이 받았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이 될 까봐 겁이 나서 쓰려고 하지 않던 수위권을 알맞은 때에 갑자기 맡을 줄 안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은 열등한 나를 기억하였다. 넷째 부류의 사람들은 고등의 나를 기억하였고, 겁을 내지 않았다. 오! 하느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거룩한 대담성!
그런데 너희 사도들, 너희 제자들, 잘 들어라. 너희 사도들은 이 말들을 벌써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희 제자들은 이 말을 듣지 못하였거나 단편적으로 들었다. 이 말들을 너희들 마음 속에 잘 새겨두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양떼가 끊임없이 불어나므로 내가 너희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겠기 때문이고, 목자인 나와 내 양떼를 해치려는 늑대의 수가 점점 늘어남으로 세상이 너희들을 점점 더 공격하겠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와 내 양떼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너희들의 손에 들려 주고자 한다. 양떼에게는 충분한 것이 어린 목자들인 너희들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양들은 피를 쓰게 하고 욕정을 자극하는 풀을 뜯어먹어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너희들에게는 같은 잘못을 저질러 많은 양떼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상숭배자인 목자가 있는 곳에서는 양들이 독초에 중독되거나 늑대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여라.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사명을 소홀히 하면, 너희들은 싱거워서 쓸 데 없는 소금이 될 것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들에게 맛을 주실 수가 없었으면, 그리고 너희들이 맛의 선물을 받은 다음 그것을 인간성의 싱겁고 더럽혀진 물로 희석하고, 관능의 타락한 단 맛으로 달게 하고, 하느님의 순수한 소금에 찌꺼기를, 즉 교만과 갈망과 탐욕과 음란과 분노와 게으름의 찌꺼기를 섞음으로써 각 죄종(罪宗)의 일곱번씩 일곱번의 알맹이에 대하여 소금 한 알맹이가 들어가게 하여 소금의 맛을 잃게 하였으면, 아무것도 너희들에게 소금맛을 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의 소금은 보잘 것 없는 소금 알맹이가 어디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돌부스러기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아서 이에 씹혀 갈리는 소리가 나고, 입 안에 흙냄새가 남게 되고 음식이 메스껍고, 기분 나쁘게 된다. 그런 소금은 하등의 용도에도 쓰이지 못하게 된다.
칠죄종(七罪宗)으로 반죽이 된 지식은 인간적인 사명에까지도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소금이 버려져서 사람들의 무관심한 발에 짓밟히는 소용밖에는 닿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의 사람들을 짓밟을 수 있겠느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백성에게 그들을 짓밟을 수 있게 하겠기 때문이고, 그들이 이제는 고상한 천상의 것의 맛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리로 향하여 달려오는 양식이 아니고, 다만 찌꺼기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너희들은 햇빛을 맨 마지막으로 잃고 은빛 같은 달빛을 제일 먼저 받은 이 산꼭대기와 같다. 높은 데에 있는 사람은 빛나서 사람들이 보게 된다. 아무리 방심한 눈이라도 어쩌다 높은 곳을 바라다보기 때문이다. 영혼의 거울이라고들 말하는 물질적인 눈이 영혼의 갈망을 반영한다고 나는 말하겠다. 흔히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이 마귀가 아닌 한 항상 살아 있는 갈망, 높은 곳에 대한 갈망, 이성이 본능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분을 그곳에 모셔 두는 높은 곳에 대한 갈망을 말이다. 그리고 하늘을 찾으면서 사람은 일생 동안에 적어도 몇 번은 눈을 들어 높은 곳을 쳐다본다.
우리 모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회상하기 바란다. 눈길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냐? 성전의 대리석과 금의 대표작이 우뚝 솟아 있는 모리아산이 아니냐? 그리고 우리가 성전 경내에 들어갔을 때에는? 우리는 햇빛에 반짝이는 값진 둥근 지붕을 쳐다본다. 거룩한 경내에는 안뜰과 회랑과 안마당들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이 산재해 있느냐! 그러나 눈은 높은 곳을 올려다본다. 우리들의 여행도 회상하기를 부탁한다. 먼 길이나 단조로움이나 피로와 더위나 진흙탕을 잊으려는 듯이 우리의 눈이 가는 곳이 어디냐? 산꼭대기를 향한다. 별로 높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결같이 평평한 평야에 있을 때 산꼭대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우리의 피로가 풀리느냐! 아래에 진흙탕이 있지만, 위에는 깨끗함이 있다. 아래에는 숨막히는 더위가 있지만, 저 위에는 시원함이 있다. 아래에는 지평선이 한정되어 있지만, 저 위에는 지평선이 한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날씨가 덜 더울 것 같고, 진흙이 덜 끈적거리는 것 같고, 걸음이 덜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어떤 도시가 산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으면 그것을 감탄하며 바라보지 않는 눈이 없다. 중요하지 않은 마을도 그것을 거의 공중에 매달리다시피하게 어떤 산꼭대기에 갖다 놓으면 아름답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 종교와 거짓 종교들에서 할 수 있을 때마다 신전을 높은 곳에 세웠고, 언덕이나 산이 없을 때에는 많은 노동력을 들여 그 위에 신전을 지을 평평한 곳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받침을 만들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사람들이 신전을 보고, 신전을 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또한 너희들이 빛이라고도 말하였다. 저녁에 집안에 등잔에 불을 켜는 사람은 그것을 어디에 놓느냐? 구멍 속이나 화덕 밑에 놓느냐? 지하 저장고로 쓰이는 굴 속에 놓느냐? 혹은 궤 속에 넣어 두느냐? 그러지 않고 등잔을 까치발 달린 탁자 위에나 벽에 붙은 등잔걸이에 걸어, 높이 놓여 있기 때문에 방 전체와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게 한다. 그러나 높은 곳에 놓는 것은 하느님을 상기시키고 빛을 줄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참 하느님을 상기시켜야 하는 너희들은 그러기에 너희들 안에 일곱 가지 요소가 있는 이교를 가지지 말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이러저러한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숲을 가진 세속적인 높은 곳이 되어, 너희들을 하느님의 성전처럼 쳐다보는 사람들을 너희들의 이교로 끌어들일 것이다. 너희들은 하느님의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러운 등잔, 기름이 없는 등잔은 연기가 나고 빛을 내지 못하며, 역한 냄새가 나고 밝히지는 못한다. 더러운 석영(石英)관 뒤에 감추어진 등불은 우아한 광채를 내지 못하고, 깨끗한 광물판 위에빛나는 빛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금강석 같은 등 피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검은 연기의 막 뒤에서 활기를 잃어간다.
하느님의 빛은 피할 수 없는 접촉과 반응과 실망을 동반하는 일 자체에서 생기는 찌꺼기를 날마다 없애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의지가 있는 곳에서 빛난다. 하느님의 빛은 등잔에 기도와 사랑의 풍부한 기름이 들어 있을 때에 찬란히 빛난다. 하느님의 빛은 하느님의 완전들이 거기에 있을 때 무한한 광채로 불어난다. 하느님의 완전은 각각 성인 안에 덕행 하나를 일으키는데, 이 덕행은 하느님의 종이 그의 영혼의 수정(水晶)을 몽롱한 모든 나쁜 열정의 검은 연기를 막아서 공략될 수 없게 지키면 영웅적으로 단련된다. 공략될 수 없는 수정. 공략될 수 없는!(예수께서는 이 결론을 내리실 때 우뢰 같은 목소리로말씀하셔서, 그 목소리가 원형 경기장 같은 자연 안에 울려퍼진다.) 하느님만이 이 수정에 금을 긋고, 당신의 의지라는 금강석으로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을 거기에 써놓을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 때에는 이 이름이 대단히 깨끗한 수정 위에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결정면(結晶面)을 증가시키는 장식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어리석은 종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고, 또 전적으로 그리고 순전히 초자연적인 그의 임무를 보지 못하게 되어 이 수정에 거짓 장식의 흔적이 남게 하거나, 조각이 아닌 스친 자국에 남게 하거나, 사탄의 불발톱으로 그린 알 없는 사탄의 숫자(數字)의 흔적이 남게 하면, 그 때에는 그 훌륭한 등불이 그찬란하고 항상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잃게 되고, 금이 가고 못 쓰게 되어 부숴진 수정 조각으로 불꽃을 꺼지게 하거나, 균열이 생기지 않더라도, 분명한 성질의 여러가지 표가 생기고, 그 위에 그을음이 앉고 스며들어서 불꽃을 약화시킨다.
불행하다! 사랑을 잃고, 그도 날마다 더 높이 올라가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행을 기다려서 올라가려고 하는 양떼를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목자들은 세 번 불행하다. 나는 그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하고 그들의 모든 연기를 끔으로써 그들을 벌하겠다.
불행하다! 참 지혜를 배척하고 흔히는 지혜와 반대되고, 또 항상 교만하고, 또 때로는 그들을 그들의 인간성으로만 몰아넣기 때문에 악마적이기도 한 지식을 가득 쌓는 선생들은 세 번 불행하다. 왜냐하면 – 잘 듣고 잘 기억해 두어라 – 어떤 사람이든 모두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을 만드는 성화(聖化)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되어야 하지만, 선생, 즉 사제는 이 세상에서부터 그 모습을,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유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 즉 사제는 순전히 영혼이고 순전히 완전인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하느님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초인간적인 가르침을 베풀 책임이 있는 선생들이 인간적인 지식의 우상이 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불행하다! 내 사제들 중에서 정신이 죽고, 싱겁게 된 사람들, 그들의 육체가 병적인 미온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의 잠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만 빼놓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환각을 일으키는 유령이 가득한 사람들, 마음과 하느님의 부(富)를 늘리겠다는 초자연적인 욕망만 빼놓고는 모든 종류의 계산이 가득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일곱 번 불행하다. 그들은 그들의 인간성에 파묻혀 비속하고 둔하게 살면서, 그들이 ‘생명’인 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그들의 썩은 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내 작은 양떼, 사랑하는 내 양떼를 타락시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 주님의 약해진 종들아, 나는 너희들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너희들에게 설명을 요구하겠으며 허비한 모든 시간, 모든 세월에 대하여, 그로 인하여 뜻밖에 올 수 있었거나 그 결과로 일어난 모든 악에 대하여 너희들을 벌할 것이다.
이 말들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산꼭대기로 올라갈 터이니 너희들은 자거라. 내일은 목자가 양떼에게 진리의 목장 문을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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