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영적 혼인의 경지에 드높여진 영혼은 “그것을” 조금 알고 있다. 하느님 안에서 변화되었기에 이것을 약간 체험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미 그 미리 맛봄과 보증이 포함 된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예언자 욥의 말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인네”(4, 2) 그러므로 이 영혼은 다음 노래에서 지복직관 안에서 즐길 저 기쁨을 어떤 것인지 저 피안에 있을 “그것을” 설명하여 밝히려고 한다.
제 39 노래
바람의 입김이 올씁니다
낭란한 밤꾀꼬리의 노래 올씁니다
잔수풀이며 그 아름다움이 올씁니다
고요한 밤에 올씁니다
태우며도 싫증을 아니주는 불꽃이 올씁니다
해 설
2. 이 노래 가운데서 영혼은 지복적 변화를 통해서 신랑이 주실 예정인 “그것을”말하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다섯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첫째는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영혼에게 역사 하심이고 또 영혼에게서 하느님께 가는 성령의 입김(직역:흡인.吸引) 이라고 한다. 둘째는 하느님을 즐기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환희, 셋째는 피조물과 피조물 서로 간에 있는 질서의 지식, 넷째는 하느님의 본질의 순수하고 밝은 관상, 다섯째는 비할 데 없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한 변화, 그러므로 다음 시구를 계속한다.
바람의 입김이 올씁니다. (직역 : 바람의 흡인)
3. 이 바람의 흡인은 영혼의 하나의 능력이어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저곳에서 성령의 통교를 통해 자신에게 주실 것이라고 한다. 성령은 이 신적 흡인으로써 영혼을 매우 높이 끌어올리시고 이것을 형성하시고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일으킨 사랑의 흡인, 바로 성령인 이 흡인을 일으키기에 가능하게 해 주신다. 이 변화 안에서 신적 영은 영혼을 성부와 성자 안에 흡인하시어 당신과 일치시켜 주신다. 사실 만일 영혼이 뚜렷이 명백하게 성 삼위일체의 세 위격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영혼의 변화는 참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성령의 흡인은 - 그것으로써 하느님께서 영혼을 당신으로 변화시키셨는데 - 영혼에게는 어찌나 숭고하고 예민한 깊은 희열이어서 그것은 사람의 말로 나타낼 방법도 없고 인간 이성으로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상에서 이 변화 안에서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이루어지는 통교에 관해서 조차 말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으로 변화된 영혼은 하느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흡인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으로 변화된 영혼을 당신 안에서 흡인하실 경우와 같은 신적 흡인이다.
4. 이승에서 영혼이 체험하는 이 변화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영혼에게, 영혼에게서 하느님께로 옮겨지는 흡인은 내세에서처럼 명백한 양식은 아닐지라도 영혼에게 사랑의 보다 숭고한 기쁨을 맛보이면서 매우 자주 행해진다. 성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려 한다. “과연 여러분은 아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 - 곧 아버지’ 라고 외칩니다.”(갈라 4, 6) 이것은 내세에 계신 복된 분들 가운데서 또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영혼 안에서 앞서 말한 양식으로 실현된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흡인하심 같이 영혼도 참여의 양식으로 하느님 안에서 흡인할 만큼 숭고한 통교가 이루어지기에 불가능하다고 볼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하느님은 영혼을 삼위일체께 일치시켜 주시어 이 일치로 영혼은 신화되고 참여로 하느님이 되었으므로! 영혼도 또한 이해와 지식과 사랑의 행위를 행하면서 바꾸어 말하면 성 삼위 안에서 성 삼위와 함께 성 삼위처럼 행동하는 것이 왜 믿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통교와 참여의 양식으로 이루어지고 영혼 안에 그것을 행하시는 이는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세 위격 권능, 지혜,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닮은 것이고 또한 바로 여기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야말로 하느님은 영혼을 당신의 모습, 당신을 닮은 자로 창조하신 것이다.
5. 그것이 어떤 것이지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다만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를 이 높은 경지까지 이렇게 올려 주셨으며 성 요한의 말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이 숭고한 영예를 우리를 위해 어떻게 얻어 주셨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 요한 복음서에 있음 같이 주님 친히 성부께 이 청을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 원하옵건대 제가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그들 또한 저와 함께 있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저의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여 주소서”(17, 24) 말하자면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아드님께 대한 것과 같은 사랑의 통교를 하게 하신 이것은 그들의 본성상의 권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일치와 변화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드님은 성인들이 성부와 성자와 같이 본질상 또는 본성상 하나인 것과는 달리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의 한 성(性) 안에서 하나인 석처럼 사랑의 일치 안에서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6. 그러므로 영혼들은 성자께서 본성상 소유하시고 계신 것과 같은 보화를 참여로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들은 참여로 진실히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과 동등하고 하느님의 반려이다. 그렇기에 성 베드로는 말한다.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를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께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분의 신령한 권능은 생명과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으니 곧 자신의 영광과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분 자신을 알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영광과 능력으로 가장 값지고 위대한 약속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2베드 1, 2-4) 성 베드로의 위의 말은 영혼이 하느님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곧 영혼과 하느님과 실체적 일치의 결과 성 삼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업적을 앞서 말한 양식으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우쳐 준다. 이 일치는 내세에서만 비로소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완덕의 단계에 다다른 영혼은 지상에서도 이미 그 풍요로운 맛을 미리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 더욱이 이 즐거움은 앞서 말했듯이 도저히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7. 오! 이토록 위대한 것을 위해 청조되고 또 불림을 받은 영혼들이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원하는 바는 천박하고 여러분의 소유도 비참할 뿐이다. 여러분의 영혼의 가련한 앞 못 봄이여 이토록 세찬 빛에 대하여 소경 됨과 이처럼 큰 소리에도 귀먹어 듣지 못하다니 세상의 위대함이나 영광을 찾으면서 여러분은 가련하고 비천하며 이 엄청난 보화 앞에 스스로 무지한 자, 부당한 자로 자처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니다. 다음은 영혼이 “그것을” 설명하려는 둘째 것이다.
낭랑한 밤꾀꼬리의 노래 올씁니다.
8. 저 산들바람이 영혼 안에 일으키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다정한 음성이다. 그리고 영혼은 정겨운 기쁨으로 그것에 응답한다. 이 이중 멜로디를 영혼은 “밤꾀꼬리의 노래”라고 한다. 밤꾀꼬리란 꾀꼬리를 말하는데 이 새는 추위나 비 그 밖의 겨울의 불순한 기후가 끝난 봄에 그 노래 소리를 들려준다. 이 새는 귀에 상쾌하게 울리고 정신을 쉬어준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신부가 이미 즐기는 이 사랑의 통교와 사랑의 변화 가운데서 신부는 온갖 혼란이나 현세적 변천에서 보호받아 자유로워지고 감각에서도 영으로서도 불완전함이나 노고나 혼돈된 애매한 상태에서 해방되고 정화되어 영의 자유로움, 너그러움 그리고 기쁨 중에 새 봄을 느낀다. 그 때 신부의 감미로운 밤꾀꼬리인 신랑의 다정한 음성은 듣는다. 이 음성으로 영혼의 실체는 새롭게 되어 신선하게 된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 잘 준비된 영혼을 신랑은 다정하게 감미롭게 부르시어 영혼은 이 감미로운 음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아름다운 그대여, 내 사랑이여, 일어나서 내게로 어서 와 다오 겨울은 이미 가고 비도 멎어 버리고 땅에는 꽃이 피고 노래 철 다가와서 산비둘기 노래 소리 이 고장에 들리잖나”(아가 2, 10-12)
9. 영혼 깊숙이 말을 건네시는 신랑의 목소리에 신부는 온갖 재앙은 끝나고 모든 선이 시작됨을 예감한다. 이 상쾌함, 편안함, 다정한 느낌 가운데서 신부도 다정한 밤꾀꼬리처럼 이 음성을 내어 자기를 초대해 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환희에 넘쳐 새 노래를 부른다. 신랑이 그 목소리를 신부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신부도 신랑과 음성을 합하여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바치기 위해서이다. 사실 신랑은 이 영혼이 그 영적 환희의 음성을 하느님께로 올리는 것을 뜨겁게 원하신다.
아가에서 같은 신랑은 영혼에게 그것을 바라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름다운 그대여, 내 사랑이여, 일어나서 내게로 어서 와 다오. 으슥한 낭떠러지 바위 틈에서 네 얼굴을 보여다오” (2, 13-14) 라고
하느님의 귀라 함은 영혼이 안전한 기쁜 목소리로 당신께 외치는 것을 듣고 싶다는 하느님의 원의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신랑은 영혼이 바윗굴, 곧 앞서 말한 그리스도 신비의 변화 안에서 그것을 울려주기를 바라신다. 이 일치 안에서 영혼은 사랑에 관해서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에 이 찬미는 매우 완전하고 하느님께는 상쾌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완덕에 있는 영혼은 매우 완전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환희의 목소리는 하느님께도 영혼에게도 감미롭다. 바로 그 때문에 신랑은 “부드러운 네 소리”(아가 2, 14)라 하셨다. 이는 곧 네게 뿐만 아니라 내게도 부드럽다. 너는 나와 하나되어 나를 위해 또 나와 함께 부드러운 밤꾀고리 노래를 부르기에 라는 뜻이다.
10. 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변화의 상태에서 부르는 영혼의 노래란 이런 것이다. 이 노래의 감미로움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영광의 생명 안에서 부르는 새 노래 만큼 완전하지는 못하므로 이 노래의 숭고함 안에서 그것과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훨씬 뛰어난 영광의 노래를 예감하면서 즐기는 영혼은 그 생각을 영광의 생명에 드리고 자기에게 주실 “그것을” 다정한 밤꾀꼬리 노래 소리라고 한다.
잔수풀이며 그 아름다움이 올씁니다
11. 신부가 말하는 바는 신랑이 신부에게 줄 셋째 은총이다. 수풀은 그 안에서 많은 식물이나 동물을 키운다는 데서 여기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에 존재를 주시고 당신 안에 생명과 근원을 발견케 하는 하느님을 뜻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창조주로써 당신을 영혼에게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것이다. 영혼이 내세를 위해 신랑에게 여기서 청하는 수풀의 아름다움이란 지상의 그리고 천상의 피조물 하나 하나가 하느님한테서 받은 은혜, 지혜, 아름다움 뿐 아니라 하급 피조물 서로가 상급 피조물 서로가 또는 상, 하급 피조물 사이에 있는 현명하고도 질서 있고 아름답고 정다운 관계에서 생기는 아름다움도 청하고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영혼에게 대단한 우아함과 기쁨을 준다. 여기서 넷째 것으로 이어진다.
고요한 밤에 올씁니다
12. 이 밤이란 영혼이 이것들을 그 안에서 보고 싶다고 원하는 관상을 말한다. 이것을 밤이라 함은 관상은 어두운 것이므로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신학이란 이름을 붙였다. 결국 이것은 그윽한 숨은 하느님의 지혜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은 말의 소란도 없고 육체적 또는 영적 아무런 감각의 도움도 없이 침묵과 고요 속에서 그리고 감각적이고 자연적 모든 어둠 속에서 매우 은밀하게 숨어서 영혼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영혼 자신도 어떻게 배우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영적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철학자들이 능동적 지성이라고 부르는 지성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수동적 지성이라고 하는 지성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 능동적 지성이라는 것은 육체적 모든 능력에서 오는 형체나 영상이나 지각에서 움직이는데 수동적 지성은 형체 등은 없고 아무런 능동적 행위나 움직임도 없이 영상을 벗어버린 실체적 인식을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다.
13. 그러므로 영혼은 이 관상을 “밤”이라 부르고 이 밤 속에서 영혼은 이 세상에서 이미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를 통해서 이 신적 수풀과 그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제아무리 숭고한 것이어도 여기서 영혼이 소원하는 지복의 관상에 견주어 보면 그것은 역시 어둔 밤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밝은 관상을 소원하면서 이 수풀과 그 아름다움 그리고 여기서 말한 그 밖의 향락이 이미 투명해진 고요한 밤 즉 지복의 밝은 관상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한다. 말하자면 영혼은 이 지상의 어둔 관상이 내세의 신성의 밝고 고요한 관상으로 변화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관상의 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둠이나마 나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나를 휘감는다.”(시편 138, 11) 이것은 말하자면 하느님을 본체적으로 보는 기쁨 속에 들어갈 적에 이미 관상의 밤은 밝아 나의 지성의 날과 빛이 되리라는 뜻이다. 다음은 다섯째 것이 이어진다.
태우며도
싫증을 아니주는 불꽃이 올씁니다.
14. 불꽃이란 여기서는 성령의 사랑을 말한다. 태우다 함은 마치고 완성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 노래 안에서 말한 온갖 것을 사랑하는 분께서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 하면서 자기는 완성된 완전한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소유할 것이라 하는데 그것은 모두 고통 없는 완전한 사랑 안에 흡수되고 영혼 자신도 마찬가지로 이 사랑 안에 흡수된다고 하면서 영혼은 이 부족함이 없는 사랑의 완전성을 밝히려고 한다.
사랑은 완전하기 위해 두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한다. 곧 영혼을 불태우고 하느님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고 이 사랑의 불꽃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불사름과 변화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복의 상태에서만 있는 것이다. 그 곳에서는 이미 불꽃은 상쾌한 사랑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불꽃이 영혼에게 행하는 변화를 통해서 양자 사이에는 조화와 일치와 지복적 만족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영혼이 완전한 사랑을 소유할 자격에 도달하기 전과 같이 많든 적든 고통을 주지 않는다. 완전한 사랑에 다다른 이 영혼은 사랑의 감미로움 가운데서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했기에 모세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태우는 불이라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렇질 않다. 지금은 완성하는 불, 끊임없이 새로 보충하는 불이다. 영광 안의 변화는 영혼이 이 세상에서의 경험한 변화와는 매우 다르다. 이 세상에서 변화는 사랑을 통해서 무척 완전하고 완성 되었다곤 하지만 영혼을 얼마간 소모하고 상처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불이 빨간 숯을 태울 때와 같아서 슻은 변화되어 불처럼 되고 변화 전에 뿜던 연기는 이제 나오지 않지만 불은 숯을 태우면서 이것을 소모하고 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지상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변화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것이다. 영혼은 아무리 신적 볼과 일치해 있어도 어떤 유의 고뇌나 상처로 괴로워한다. 우선 지복직관에 대한 필요성이 항상 영혼에게 느껴진다. 다음은 약하고 없어질 감각은 이처럼 뜨겁고 높은 사랑에 필연적으로 압도된다.
사실 온갖 뛰어난 것은 우리의 가냘픈 천성을 압도하고 괴롭힌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 누르고”(지혜 9, 15)라고 씌여진 대로다. 그러나 내세의 지복의 생명 안에서는 지식은 매우 심오하고 사랑은 헤아릴 길 없을 만큼 크더라도 압도나 고통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지식에는 필요한 능력을 사랑에는 힘을 주시고 말하자면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 의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15. 신부는 앞의 노래와 지금 우리가 설명하는 노래 안에서 매우 넓은 신적 통교와 지식을 청했다. 이 통교와 지식의 위대함과 숭고함에 순응한 사랑으로 사랑하기에 대단히 강하고 무척 숭고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신부는 여기서 완성된 완전한 강한 사랑 안에서 통교나 지식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