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이 영혼의 풀려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주된 이유는 거기서 얼굴을 맞대고 그리스도를 뵈옵고 그 육화의 헤아릴 길 없는 깊은 길 등 영원한 신비를 뿌리부터 알기 위해서인데 이 지식은 지복의 최소 부분은 아니다. 성 요한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말씀하신 같이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 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 3)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먼 데서 돌아와서 첫 번으로 하는 일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뵌 영혼이 첫째로 하고싶은 일은 말씀의 육화의 깊은 신비의 비밀 또는 그와 관련된 하느님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마주 보고 싶은 소원을 말한 후 곧 이어 다음 노래를 읊는다.
제 37 노래
높다란 바윗굴 속으로
우리 재우쳐 가노라면
그것은 아주 그윽한 굴
그리로 우리는 들어가서
석류의 즙을 맛보사이다
해 설
2. 영혼이 신적 지혜의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 그 아름다움을 더욱 깊숙한 데까지 알려고 열렬히 원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의 온갖 업적 안에서 그 신적 지혜를 최고도로 또한 정겹게 빛내시는 육화의 신비의 지식으로 자신의 지성을 하느님께 일치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부는 이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부가 지혜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때 - 즉 자기가 현제 갖고 있는 영적 혼인의 내실 곧 영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이 신적 지혜에 일치했을 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숭고한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신비는 매우 숭고한 지혜여서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신부와 신랑은 그 지식 안에 들어가 거기에 잠기고 그곳에 숨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지식에서 오는 맛스럼과 기쁨 그리고 이 신비들이 계시하는 하느님의 완덕이나 속성, 가령 정의와 자비, 힘, 사랑 등과 함게 맛 볼 것이라고 알려 준다.
높다란 바윗굴 속으로
우리 재우쳐 가노라면
3. 여기서 말하는 바위란 성 바울로의 말같이 그리스도 자신이시다.(1고린 10, 4) 이 바위의 “높다란 바윗굴”이란 인성과 하느님의 말씀과 일위적(一位的) 결합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지헤의 숭고하고 심원한 신비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 양성의) 일치와 하느님 안에서 인간 상호간의 조화, 인류 구원과 하느님의 판단을 나타내 보여주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도 적합하다.
하느님의 판단은 매우 높고 깊으므로 영혼이 그것을 높다란 바윗굴이라고 부름도 무척 적절하다. “높다란”이라 함은 거기에 내포한 신비의 숭고함인 까닭이다. 굴이라 함은 거기에 간직된 신적 지혜의 깊이 때문이다. 굴은 깊고 숱한 구멍들이 있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하나하나는 보다 깊은 지혜여서 사람의 아들들에 관한 예정과 예견의 숨은 판단이라는 무수한 구멍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혼은 이어서 말한다.
그것은 아주 그윽한 굴
4. 그것들은 어찌나 잘 숨는지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학자들이 제아무리 많은 신비나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도 또 거룩한 영혼들이 그 사정을 아무리 이해 했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것도 아는 것도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파헤쳐 볼 것이 참으로 많이 있다. 그분은 보화를 무수한 구멍을 갖고 있는 풍요로운 광산과도 같다. 아무리 파도 결코 끝까지 팔 수는 없다. 오히려 각 구멍 속에 새로운 부를 숨긴 새 광맥을 여기 저기서 많이 발견할 것이다. 그러기에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께 관해서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골로2, 3)라고 했다. 이 보물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또는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도 이미 말한 대로 영혼은 우선 내적 외적 고통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 인도되는 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다를 수 있는 것마져도 우선 하느님으로부터 미리 여러 지적 감각적 은혜를 받고 영적 수업에 점심하지 않고는 거기까지 다다를 수 없다. 이 은혜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비의 지식 이하의 것이고 모두 거기에 도달하는 준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했을 적에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선을 보여주마(출애 33, 20)라 하셨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모든 선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바윗굴에 넣으셨다. 이 바위란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거기서 당신의 등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비에 관한 지식을 보여 주신 것을 뜻한다.
5. 그러므로 영혼은 사랑하는 분의 품에 감추어져 이 신비들에 관한 지식의 사랑 속에 잠기어 변화되고 취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동굴 속으로 정말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분께서 이 굴 속으로 들어오도록 그를 초대하시기 때문이고 아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그대여, 내 사랑이여, 일어나서 내게로 어서 와 다오, 으슥한 낭떠러지 바위 틈에서 네 얼굴 보여다오.”(2, 13-14) 이 바위 틈이란 지금 우리가 말한 동굴이고 그것에 관해서 영혼은 계속 말한다.
그리로 우리는 들어가서
6. “그리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신비의 지식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신랑은 새삼스러이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나 혼자 들어가리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게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는 들어가서” 곧 나와 애인이 들어갈 것이라 한다. 영혼은 이 행위가 자신의 행위가 아니고 신랑이 영혼과 함께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 더구나 우리가 말하는 이 영적 혼인의 경지에선 하느님과 영혼은 이미 하나가 되었으므로 영혼은 어떠한 행위도 하느님 없이 혼자 행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그리로 우리는 들어가서”라 함은 거기서 우리는 변화 될 것이다란 뜻인데 말하자면 앞서 말한 당신의 신적인 다정한 판단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당신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감미로운 축복을 주시어 준비시키신 의인의 구령의 예정과 악인의 멸망에 관한 하느님의 예지(미리 앎)의 지식을 받아 영혼은 매우 숭고하고 지극히 긴밀한 방법으로 이 지식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온전히 새롭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향하여 매우 정겨운 즐거움 중에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영혼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 찬미의 맛스러움은 무척 예민하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영혼은 다음 시구에서 그것을 말한다.
석류의 즙을 맛보사이다
7. 석류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하느님의 지혜의 판단 또는 이 신비와 판단의 인식으로 하느님 안에서 깨달아 아는 무수한 덕이나 속성을 뜻한다. 석류가 둥근 외형 속에 생긴 많은 작은 알로 지탱되듯이 하느님의 속성이나 신비 그리고 판단이나 덕 등 놀랄만한 무수한 섭리와 감탄할 효과를 내고 그러한 효과에 속한 덕이나 신비 등은 말하자면 둥근 모양 안에 간직되고 지탱되어 있다. 여기서 석류가 원형 또는 구상형(球狀形)임을 유의하자 석류 한 알 한 알은 하느님의 덕이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덕과 속성은 하느님 자신이고 하느님은 원형(原形)이라든가 구상형으로 나타낸다. 하느님께는 처음도 마지막도 없으므로 하느님의 지혜 안에는 이토록 헤아릴 수도 없는 판단이나 신비가 있기에 아가의 신부는 신랑에게 “당신의 가슴은 사파이어에 뒤덮인 미끈한 상아”(2, 14)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지혜는 사파이어로 상징되어 있다. 사파이어는 밝고 맑은 때의 하늘색과 같은 보석이므로
8. 여기서 신부가 자기와 신랑이 함께 맛보리라고 한 석류 주란 석류가 상징하는 신비의 이해와 인식에서 영혼 안에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의 환희와 기쁨이다. 마치 석류를 먹으면 그 많은 알맹이에서 같은 즙이 나오듯 영혼에게 부어 주는 이 모든 신비와 위대함에서 다만 사랑의 하나의 환희 하나의 기쁨이 영혼 안에 넘친다. 이것은 성령의 음료이고 영혼이 그것을 마시면 당장 내 하느님 신랑이신 말씀께 지극한 정겨운 애정을 다해 그것을 바친다.
이 신적 음료는 아가의 신부가 만일 사랑하는 분이 이 숭고한 인식 안으로 그를 인도해 주시면 그분께 바치기로 약속한 것인데 “당신은 거기서 나를 가르칠 것이고 그러면 나는 당신을 모시고 들어가서 향료든 포도주며 석류의 새 술을 당신께 모시고 들어가서 향료 든 포도주며 석류의 새 술을 당신께 바치리라”(8, 2)고 말한다. 그는 이 신적 지식을 자기 것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은 그에게 선물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신적 지식의 즐거움, 기쁨을 사랑의 음료로 하느님께 바친다. 그리고 그것을 “석류의 즙을 맛보사이다.”라는 시구로 표현했다. 신랑은 이 음료를 맛보신 뒤 그것을 맛보도록 신부에게 주고 신부는 그것을 맛보곤 다시 또 그것을 신랑께 드려서 맛보시게 하고 이렇게 그들은 서로 함께 맛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