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노래의 설명
1. 애인들은 기묘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다른 어떠한 누구와 함께 있기보다는 모든 피조물에서 떠난 고독 가운데서 단 둘이 함께 있기를 훨씬 즐거워한다. 그들은 둘이 함께 있어도 다른 사람이 끼어 들면 비록 그 사람들과는 아무런 교섭도 말도 안하고 또 그 사람들 편에서도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묵묵히 있어도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만 그들은 생각대로 즐겁질 않다.
그 이유는 사랑이란 둘 만의 일치이고 단 둘만이 사귀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덕도 하느님 안에서 영의 자유로움은 절정에 있기에 감성의 모든 혐오나 반항에서 풀려난 영혼은 그 신랑과 함께 가장 친밀한 사랑의 즐거움, 기쁨에 몰두하는 것 밖에는 생각할 것도 상관해야 할 일도 없다. 거룩한 토비트에 관해 기록한 대로 토비트는 가난과 시련의 어려움을 겪은 뒤 하느님께선 그에게 시력을 돌려주시어 그 다음 그의 생애는 온통 기쁨 중에 지내게 되었다. 이 영혼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 안에서 보는 선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듯 풍요로운 원천이다. 이것은 완전한 업적을 실천한 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완전한 상태에 다다른 영혼에 관하여 이사야가 가르쳐 준다.
2. 이사야는 이 완덕에 다다른 영혼에게 말하기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 야훼가 너를 줄곧 인도하고 메마른 곳에서도 배불리며 뼈 마디마디에 힘을 주리라. 너는 물이 항상 흐르는 동산이요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줄기, 너의 아들들은 허물어진 옛 터전을 재건하고 오래오래 버려 두었던 옛 터를 다시 세우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수축하는 자’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하는 자’라고 불리리라.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말라 안식일은 ‘기쁜 날’ 야훼께 바친 날은 ‘귀한 날’이라 불러라. 그 날을 존중하여 여행도 하지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는 야훼 앞에서 기쁨을 누리리라 내가 너를 이끌어 산등성이를 타고 개선하게 하며 너의 조상 야곱의 유산을 먹고살게 하리라.”(이사 58, 10-14)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이사야의 말이고 야곱의 유산이라 한 것은 하느님 자신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위의 말대로 자기를 기르는 이 양식을 받는 즐거움 밖에는 이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소망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이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노래와 계속되는 노래에서 그는 하느님의 명백한 직관 안에서 이 지복의 양식으로 실컷 배불리 막을 것을 사랑하는 분께 열심히 청한다.
제 36 노래
님하 노사이다
그대 고우심 안에
맑은 물 흐름하는
뫼와 언덕을 보러 가사이다
깊숙이 더 속으로 들어를 가사이다
해 설
3. 이미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완전한 사랑의 일치가 성취되었으므로 영혼은 사랑이 지닌 특성에 몰두하여 그 속에서 활동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서 신랑과 말하는 이는 영혼이고 사랑의 특성인 세 가지를 그분께 청한다. 첫째는 사랑의 즐거움과 맛스러움을 받는 것인데 “사랑하는 님하 노사이다”라고 청한다. 둘째는 사랑하는 분을 닮는 것을 갈망하는데 그것을 “그대 고우심 안에 보러 가사이다”라는 시구로 청한다. 셋째는 사랑하는 분의 사정이나 비밀을 연구하고 알고져 하는 일인데 그것을 “깊숙히 더 속으로 들어들 가사이다.”리고 청한다.
님하 노사이다
4. 이것은 사랑의 감미를 서로 통교 중에 즐기자는 뜻이다. 더구나 오직 둘만의 일상적 일치에서 오는 감미뿐만 아니라 의지로 열심히 사랑의 내적 행위를 하든가 또는 사랑하는 분께 드리는 봉사로 외적 행위를 하든가 아무튼 유효한 현행적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감미로움 속에서 즐기자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앞서 말함과 같이 일단 어느 대상에 고정되기만 하면 사랑에서 오는 기쁨 즐거움을 끊임없이 맛보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간단없이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은 애인을 닮기 위해서이다.
그대 고우심 안에
보러 가사이다
5. 위에서 서술한 사랑의 실천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그대 고우심 안에 서로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제가 당신의 아름다음에서 엄청나게 변화되어 아름다움으로는 당신과 비슷해졌고 우리들은 서로 당신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을 보듯이 저는 이미 당신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 속에 몽땅 흡수되어 이편의 아름다움도 저편의 아름다움도 오직 하나 뿐, 당신의 아름다움만이 되어 우리가 상대를 볼 때 각각 상대 안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저는 당신을 당신의 아름다움을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은 저를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보실 것입니다. 또한 저는 저 자신을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당신 안에서 보고 당신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제 안에서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처럼 보이고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저처럼 보일 것입니다. 저의 아름다움은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의 아름다움은 제 아름다움이기를 그러면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당신이고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은 제 아름다움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고 그들은 성 요한이 기록한 대로 성자 자신이 영원한 성부께 말씀드린 것을 그대로 말할 것이다.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17, 10) 성자는 그 본체로서 본성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고 우리는 참여로서 양자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당신만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당신 신비체 전체를 위해 말씀 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그 승리의 날, 말하자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 때 신랑의 아름다움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여기서 자기와 신랑이 신랑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마주보기 위해 가기를 간청한다.
뫼와 언덕을
6.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퍼낸 하느님의 ‘아침’ 그리고 본질적 인식을 뜻한다. 말씀은 그 숭고함 때문에 이사야가 말했듯이(2, 3) 여기서 산이란 어휘로 상징되어 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도록 격려하면서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2, 3) 라고 한다. 또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두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2, 2) 라고도 한다.
언덕이란 하느님의 저녁의 인식 곧 피조물이나 하느님의 업적이나 그 놀라운 질서 안에 있는 하느님의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아침의 지혜보다 낮은 것이므로 여기서 언덕이란 어휘로 상징된다. 그러나 영혼은 다음 시구에 있듯이 저녁의 지혜를 아침의 지혜와 같이 원한다. 곧 “뫼와 언덕을” 이라고
7. 영혼이 신랑을 향해 “그대 고우심 안에 뫼와 언덕을 보러 가사이다.”라고 함은 신적 지혜의 아름다움에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이고 이 지혜는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이다. 또 언덕으로 라 함은 피조물이나 신비적 하느님의 업적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보다 낮은 지혜의 아름다움에서도 형성되기를 청한다. 이것도 역시 하느님의 아드님의 아름다움이어서 영혼은 거기에서도 비추어지기를 갈망하고 있다.
8. 영혼은 하느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변화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마주 볼 수 없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야말로 영혼은 높은 것 낮은 것을 소유하기에 이른다. 이 산으로 이 언덕으로 다다르기를 원하여 아가의 신부는 “나는 가리라 몰약 산으로 유황의 고개로”(4, 6)라고 했던 것이다. 몰약의 산이란 하느님의 명백한 직관을 뜻하고 유화의 고개는 피조물이 가져오는 하느님의 지식을 뜻한다. 산의 몰약은 고개의 유황보다 한층 고귀하다.
맑은 물 흐름하는
9. 말하자면 하느님의 지식이나 지혜가 이성에게 주는 이 신적 지식을 여기서 맑은 물이라 하는데 그것은 이 지식이 우유적 것도 영상에서도 깨끗해지고 적나하게 되어 무지의 안개도 없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신적 진리를 명백히 순수히 이해하고 싶은 소망을 언제나 품고 있다. 그리고 영혼은 사랑하면 할수록 이 진리 안에 더욱 더 깊이 들어가고 싶고 그 때문에 셋째 것을 청한다.
깊숙이 더 속으로 들어를 가사이다
(일어 역 : 우거진 숲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 가사이다)
10. 이는 당신의 신묘한 업적과 깊은 판단 속으로 들어 가시다란 뜻이다. 하느님의 업적이나 판단은 매우 많고 또한 여러 가지이므로 “우거진 숲 속”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넘칠 듯한 지혜가 있고 갖가지 신비가 충만하므로 “우거진 숲 속”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산은 비옥한 산, 가파른 산이다.”(시편 67, 16) 라고 한 다윗의 말에 따라 “가파른 숲”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우거진 숲은 어찌나 깊고 광대 무변한지 영혼은 그것에 관해서 다소 안다곤 하지만 더욱 더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나 위대하여 그 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도 말했다. “오 하느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정녕 그분의 판단은 헤아려 짐작할 수 없고 그분의 길은 더듬어 찾아낼 수도 없도다”(로마11, 33)고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헤아리기 힘든 하느님의 판단과 길인 숲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영혼은 이 지식 안에 보다 깊이 들어가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므로 그도 그럴 것이 그것들을 아는 것은 온갖 감각을 초월한 참으로 표현할 길 없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것이 지닌 맛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의 판단은 참다우니 모두가 다 옳도다 금보다 순금보다 더 바람직하고 꿀보다 진꿀보다 더욱 달도다. 당신의 종이 그에 마음을 쓰고 지키기에 조심을 다 하나이다.”(시편 18, 10 - 12)
그러므로 영혼은 이 판단들 안에 잠기고 그것들을 보다 깊이 통찰하기를 매우 원한다. 이 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 온갖 고뇌와 노고도 커다란 위로와 기쁨으로 뚫고 나갈 것이다. 또한 이 보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된 모두는 아무리 힘들고 쓰라려도 기쁘게 받을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 안에 보다 깊이 들어가는 데 필요하다면 죽음의 고민이나 위험도 무릎 쓸 것이다.
12. 따라서 영혼이 들어가고 싶은 “우거진 숲”은 영혼이 참아 견디기를 원하는 수 많은 고민이나 박해로 해석함이 매우 적절하다. 고통은 이 영혼에게는 매우 상쾌하고 또한 유익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통이야말로 하느님의 지헤의 깊이에 보다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다. 고통이 순수하면 할수록 거기서 주는 지식은 한층 순수하고 보다 그윽하고 따라서 즐거움은 한층 순수하고 숭고하다.
그것은 매우 그윽한 지식이기에 이 영혼은 어떤 고통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우거진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갑시다.”라 한다.
말하자면 나는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민도 견딜 각오라는 뜻이다. 예언자 욥은 하느님을 뵙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역시 이 고통을 동경하여 소리쳤다. “오, 나의 청을 올릴 수 있어 하느님께서 나의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 주신다면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욥 6, 7-10)
13. 오 만일 사람이 온갖 양상의 고통의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위로와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 무수한 변화로 풍요로운 하느님의 지혜와 부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완전히 깨닫는다면! 오 나의 지혜를 참으로 목말라 하는 영혼은 무엇보다도 몹시도 고통을 목말라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십자가의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러기에 성 바울로는 에페소 사람들에게 환난에서도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용감한 사람되어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권고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기 위해 모든 지식을 훨씬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보게 되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 위함이라고 했다.(3, 18)
하느님의 지혜인 이 보유 속으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이고 이 문은 좁다. 그리고 이 문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적다. 그러나 이 문에서 오는 기쁨에 동경하는 사람의 수효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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