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38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03

 

 

 

 

 

             다음 노래의 설명

 

     1. 앞의 두 노래 안에서 신부는 영원한 지복에서 신랑께서 주실 저 갖가지 선물 노래 불렀다. 사실 신랑은 만들어진 지혜와 만들어지지 않은 아름다움 안에서 실제로 그를 변화시킬 참이시다. 또 그분은 말씀과 인성의 일치의 아름다움 안에서도 그를 변화시킬 것이다. 이 일치에서 그는 그분을 뒤에서 보는 동시에 그분의 얼굴도 바라보고 그분을 알 것이다.

     다음 노래에서 그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사파이어 또는 석류 즙을 맛보는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말하고 둘째는 신랑 앞에서 예정에 따라 그분이 주실 영광을 말해 준다. 그리고 영혼이 부분적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드리는 이 선들은 오직 하나의 본질적 영광을 이루는 것임을 유의하라

 

 

 

                                제 38 노래

 

                    거기 그대는 나에게 내 영혼이

                    몹시 바라던 그것을 보이시고

                    그리고 내 생명 그대여 거기 그대는

                    언젠가 내게 주시었던 그것을

                    당장 내게 주시오리니

 

 

 

               해 설

 

     2. 영혼이 이 동굴에 들어가기를 원한 것은 그가 늘 동경했던 신적 사랑의 완성에 다다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자기가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는 것과 같은 깨끗함과 완전한 가운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하느님께 보답드릴 수 있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그는 신랑에게 이 노래 안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와 수업을 통해 끊임없이 지향했던 것은 신랑 자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완전함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그곳에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는 거기서 그분이 영혼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은 신랑이 영원으로부터 신부에게 예정하신 본질적 영광인 것이다.

 

 

 

 

                거기 그대는 나에게 내 영혼이

                몹시 바라던 그것을 보이시고

 

     3. 영혼의 이 소원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동등성이며 이것을 영혼은 자연적으로도 초자연적으로도 끊임없이 애타게 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가 사랑 받고 있는 것만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혼은 이 세상에서 한껏 다다를 수 있는 한도에서 하느님 안에서 변화되었더라도 그리고 비록 그 사랑이 아무리 큰 것이어도 하느님한테서 받은 사랑과 같은 완전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동등성에 다다를 수 있는 영광의 명백한 변화를 갈망한다. 이 지상에서 영혼이 드높여진 숭고한 경지에서 의지의 참 일치가 이루어졌음은 사실이지만 이 일치는 영광 안에서 힘찬 일치로 갖게 될 사랑의 완전함과 힘에는 마칠 수도 없다. 영광에 들어갈 때 성 바울로가 말하듯이 영혼은 하느님을 하느님이 영혼을 아시듯 알게 될 것이다. (1고린 13, 12) 따라서 영혼은 하느님께 사랑 받음 같이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 때 영혼의 지성은 하느님의 지성이고 영혼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사랑도 하느님이 사랑이다. 그러기에 영혼의 의지는 아직 존속하겠지만 그것은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의지의 힘과 매우 힘차게 일치되었으므로 두 의지는 오직 하나의 의지 단 하나의 사랑이 되어 영혼은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는 같은 힘과 완전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은 하느님의 의지와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것은 영혼이 하느님한테서 받은 사랑과 같은 사랑의 힘 그 자체에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 힘은 성령 안에 있고 영혼은 그 때 성령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영은 사랑하는 힘을 돕기로 영혼에게 주신 것이기에 영광 중에 변화하기 위해 영혼에게 모자란 것을 보충해 주신다.

     영혼이 이 세상에서 다다른 이 영적 혼인의 완전한 변화 안에서도 온갖 은혜로 채워지고 이 변화의 효력으로 이룰 수 있는 한도에서 성령을 통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다음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여기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 사랑을 실제로 주심에도 불구하고 주신다고는 하지 않고 -(영혼은 단지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해 주실 거라고 하듯이 보이므로)- 오직 자기가 소망한 완전함으로써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지를 하느님께서 알려 주실 거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내세에서 하느님은 영혼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고 이 사랑으로 영혼에게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음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은 거기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깨끗이 자유로이 무사 무욕하게 사랑하는 것을 영혼에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영혼을 당신의 사랑에 변화시키시고 영혼에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힘을 주시어 당신이 영혼을 사랑하시는 같은 힘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흡사 그의 손에 악기를 쥐어 주시어 그와 함께 그것을 연주하시면서 영혼에게 연주법을 가르치시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영혼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시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 만일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했다면 영혼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도 영혼은 만일 성 토마스가 “지복에 관한 소론” 안에서 말한 대로 자기가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는 것만큼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영적 혼인의 경지에서 사랑은 영광 안에서 완전함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생생히 닮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그것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내 생명 그대여 거기 그대는

                언젠가 내게 주시었던 그것을

                당장 내게 주시오리니

 

     5. 여기서 영혼이 당장 주실 것이라고 한 것은 본질적 영광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본체를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설명하기 전에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본질적 영광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어서 사랑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영혼은 여기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본질적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에 대한 소원을 노래 첫 자리에 두고 그 뒤에 마치 그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기나 하듯이 본질적 영광의 소원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는 거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온갖 것의 목적은 사랑이고 사랑은 의지에 존속되었고 의지의 특성은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영혼은 사랑에 취해 있기에 하느님께서 주실 영광은 바라보지도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 따위는 추호도 헤아리지 않으며 진실한 사랑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에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첫째 소원 안에 당연히 둘째 소원이 내포되어 있는데 앞의 노래에서 이미 비쳤던 것이다. 사랑에 다다를 수고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의문의 요점은 첫째 이유에서 풀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혼은 사랑으로 하느님께 대한 빛을 갚기는 고사하고 지성으로서는 하느님께 받기 때문이다.

 

     6. 그럼 본체의 설명에 들어가서 여기서 영혼이 말하는 “언젠가”라 함은 어느 날을 말하는가 그 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영혼이 훗날 영광 중에 즐기기 위해 소원하는 “그것”이란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이 “언젠가”란 하느님의 영원한 날을 말하고 그것은 현세의 날과는 틀린 다른 날이다. 이 영원한 날에 하느님은 영혼을 영광으로 예정하시어 이 날 영혼에게 주실 영광을 정하시어 영혼을 창조하시기 전 영원으로부터 자유로이 그것을 영혼에게 주셨다. 그 때부터 이미 ‘그것’(영광)은 절대적으로 영혼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어떠한 사건이나 크고 작은 방해가 어떻든 영혼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가기에는 영구히 불가능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주신 “그것을” 끝도 없이 소유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언젠가” 그에게 주셨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도 지금 영광 안에서 뚜렷이 보고 싶다는 “그것”이다. 그럼 그 때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주신 “그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로의 말대로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1고린 2, 9) 것이다. 또 이사야 에언자도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일입니다. 일찍이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일 일찍이 아무도 보지 못한 일입니다.”(64, 3)라고 했다. 그것을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서 영혼은 여기서 “그것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을 뵙는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는 것은 영혼에게 “그것” 이라고 하는 수밖에 달리 말할 재간이 없다.

 

     7. 그렇다고 “그것”에 관해서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 요한 묵시록 가운데 여러 표현이나 말이나 비유로 일곱 번씩이나 그것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기로 하자. “그것을” 한 마디로 나 한 번에 말할 수는 없고 성 요한의 설명도 그것을 모두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선 “승리하는 이에게는 내가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에서 먹을 것을 따 주겠다.”(2, 7)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것을 ”잘 설명하지 못했으므로 곧 이어서 또 “너는 죽기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네게 주겠다.”(2, 10)고 하지만 이 말씀도 아직 그것을 밝혀주지 못하므로 다른 알기 어렵지만 보다 설명적인 말씀을 하신다. “승리하는 이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겠고 또 그에게 흰 돌을 주겠다.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것을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2, 17)라고 이것도 아직 “그것을”말하기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하느님의 아들은 큰 환희와 권능을 풍기는 다른 말씀을 하신다. “승리하는 사람, 그리고 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 그에게 나는 이방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겠다. 그는 마치 질그릇을 부수듯이 쇠지팡이로 그들을 거느려 다스릴 것이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듯이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2, 26-28)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그것을” 설명하시기에는 이 말씀으로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시어 또 다시 계속하여 “승리하는 이는 이와같이 흰옷을 차려 입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3, 5-6)라 하셨다.

 

 

     8. 그러나 위의 모든 서술로는 부족하므로 다시 그 뒤에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인용하시는데 그 말씀들 안에는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엄과 위대함이 감추어져 있다. “나는 승리하는 이를 내 하느님의 성전 기둥으로 삼아서 그가 다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다시 곧 하늘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써 두겠다.”(3, 12) 그리고 이어서 “그것을” 일곱 번째의 설명을 하신다. “승리하는 이는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해 주겠다.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옥좌에 앉은 것 같이 말이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3, 21-22) 여기까지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느님의 아드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들은 “그것”에 매우 완전히 합치하고 있다곤 하지만 명백히 밝혀 주었다곤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정이란 것은 모두 뛰어나게 숭고하고 존엄한 말씀이 그것에 잘 알맞긴 하지만 그런 말마디는 어느 것이나 또한 전부 합쳐도 그것들을 설명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9. 그럼 우리는 지금 다윗이 “그것을” 무어라고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시편 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주여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갊아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30, 20) 또 다른 데서는 “그것을” 기쁨의 분류라고 하면서 “당신의 집 기름기로 그들은 흐믓하며 당신 진미의 강물을 마시우시나니”(35, 9)라고 했다. 그리고 다윗도 또한 이런 표현이 불충분한 것을 인정하고 다른 데서 그것을 “상서로운 축복으로 그를 맞아들이시고”(20, 4)라 했다.

결국 영혼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을 위해 예정하신 지복일 수밖에 없는 “그것을” 정확히 맞출 말마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사용하는 “그것을”이란 표현으로 만족하고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다.

     제게 이미 주신 “그것”이란 오! 나의 님이여, 당신께서 저를 만드시려고 결정하신 당신의 영원한 날에 제게 예정하셨던 영광의 무게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저와 당신의 약혼 그리고 혼인의 날 제 마음의 기쁨의 날에 당장 제게 주실 것입니다. 저를 육체의 굴레에서 풀어 주시어 님의 혼인 방인 숭고한 바윗굴로 저를 이끌어 들이시고 영광 속에서 제가 당신으로 변화되어 감미로운 석류의 과주를 서로 마실 그 때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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