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노래-십자가의 성요한

제 40 노래

Skyblue fiat 2014. 5. 24. 13:01

 

 

                                  

 

                                                        제 40 노래

 

                                     그 누구도 이를 보지 못하였읍네

                                     <아미나답> 그 마저 어쩔 수 없었읍네

                                     둘러쌌던 무리 잠잠해지고

                                     말을 탄 기사는

                                     물을 보자 물 따라 내려갔읍네

 

 

 

                    해설과 설명

 

     1. 여기서 신부는 자신의 의지와 욕구가 온갖 것에서 풀려나 매우 긴밀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결합되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영혼의 감각적 부분은 그 능력 힘 욕구와 함께 영혼과 영과 일치되어 그 반격은 이미 끝났다. 각 방면으로 오랫동안의 수업이나 영적 투쟁 뒤에 마귀는 패배하고 아주 멀리 내쫓아 버렸다. 영혼은 천상적 부와 은혜 가운데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영혼은 신랑에게 기대어(아가 8, 5) 가득한 기쁨으로 죽음의 황야에서 신랑의 영예로운 옥좌까지 오를 필요한 준비와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 이일을 마쳐 주시기를 희망하고 그분의 마음을 그 쪽으로 움직이려고 모든 것을 이 마지막 노래 안에서 그분께 드러낸다. 그러므로 영혼은 다섯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이제는 영혼이 온갖 피조물에서 이탈하고 관련 없이 되었다는 것 둘째는 마귀는 패배하여 추방되었다는 것 셋째는 욕정은 이미 굴복되어 자연적 욕구는 억제되었다는 것 넷째와 다섯째는 영혼의 감각적 부분 또는 하부는 새롭게 되고 정화되어 영적 부분에 합치되어 이미 영적 보화를 받기에 방해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에 순응한다는 것 왜냐하면 영혼은 이미 자기에게 주어지는 은총에 자기 힘에 맞갖게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를 보지 못하였읍네

 

     2.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저는 높낮음이 어떠하든 온갖 피조적 사물에서 적나하게 되어 이탈하고 고독하게 되어 그것들과는 관련 없는 자가 되어 당신과 함께 지극히 깊은 내적 잠심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어떠한 피조물도 제가 당신 안에 소유한 은밀한 기쁨을 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피조물도 그 상쾌함과 쾌감을 일으킬 수 없고 또한 이 가련함이나 비참으로 저를 불쾌하게도 괴롭히지도 못합니다. 제 영혼은 그런 것에서 무척 멀어졌고 어찌나 깊고 끊임없는 희열 안에 잠겨 있기에 아무런 피조물도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아미나답> 그 마저 어쩔 수 없었읍네

 

     3. 아미나답이란 성서 안에서 마귀의 상징이고 영혼의 원수를 영적으로 표현한다. 마귀는 그의 대포의 수 많은 탄약으로 쉴새없이 영혼을 공격하고 혼란시켜 영혼이 신랑과 함께 내적 잠심의 요새 숨은 집 속에 못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혼은 이미 이 요새 안에 있고 스스로 소유한 덕과 하느님의 포옹의 덕분으로 매우 은혜롭게 튼튼한 자, 승리자가 되었기에 마귀는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을뿐더러 매우 두려워서 아주 멀리 도망쳤으며 모습을 나타낼 용기조차 없다. 영혼은 덕의 실천과 이미 다다른 완덕의 상태로 악마를 완전히 물리치고 극복했기에 마귀는 이젠 영혼 앞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미나답도 영혼이 열망하는 행복을 장해할 어떤 권리를 갖고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러쌌던 무리 잠잠해지고

              (일어역 :포위를 풀렸습니다.)

 

     4. 들러쌌다 함은 욕정과 자연적 욕구를 뜻한다. 그것들은 극복되지 않고 약화되지 않는 한 사방팔방에서 영혼을 둘러싸고 공격하므로 둘러쌌다고 한다. 이 포위는 풀렸다. 함은 영혼의 욕정은 이성에 굴복되어 그 욕구는 억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이므로 영혼은 신랑에게 자기가 그분께 청하는 은혜를 주시지 않을 리 없고 방해하기 위한 욕정의 포위는 이미 거기는 없으므로 라고 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네 가지 욕정이 하느님을 따라 길들여지고 욕구가 억제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영혼은 하느님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말을 탄 기사는

               물을 보자 물 따라 내려갔읍네

 

     5. 물이란 여기서는 영혼이 이 경지에서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즐기는 영적 보화나 기쁨을 뜻한다. 기사들이란 감각적 부분의 내,외적 육체적 감각이다. 말하자면 이것들은 자기 안에 그 대상의 환상이나 영상을 갖고 있기에 말이다. 이 감각들이 이 단계에서 영적 물을 보고 내려갔다고 신부가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적 혼인의 경지에서는 영혼의 감각적 낮은 부분은 정화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靈化) 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도 그 감각적 능력이나 자연적 힘과 함께 하느님께서 영의 깊숙한 곳에서 영혼에게 통교하시는 영적 위대한 사정을 그 몫에 맞갖게 즐기고 또한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 내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그 안에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 83, 3)

 

     6. 여기서 신부는 기사들이 물을 마시려 내려 갔다곤 하지 않고 물을 보자 내려갔다고 하는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것은 감각적 부분과 그 모든 능력이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영적 보화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참된 뜻으로 맛 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적 부분과 그 모든 능력이란 영의 어떤 유의 넘침에서 위에 말한 영적 보화에서 기쁨, 즐거움을 감각적으로 받을 뿐이다. 이 즐거움으로써 육체적 감각은 내적 집중 - 그 안에서 영혼은 영적 보화의 물을 마신다. - 에 이끌려 그것이 물을 보고 내려갔다고 하였을 뿐 나아간다든지 다른 표현을 안하는 것은 영적 부분과 감각적 부분의 통교에서 앞서 말한 영적 물의 음료를 맛보게 되면 감각적 능력은 그 자연적 활동을 멈추고 영의 내적 집중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7. 신부는 이러한 완전한 마음 준비를 하느님의 아들이신 사랑하는 분 앞에 보여 드린다. 그것은 이 지상에서 전투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드높여 주신 영적 혼인에서부터 승리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혼인에까지 그분을 통해서 옮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부디 충실한 영혼들의 신랑이신 지극히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불러 청하는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예와 영광이 세세에 있어지이다. 아멘

 

 

 

                                     우리 사부 십자가의 성 요한 서거 400주년

                                              (1591년 - 1991년)

                                           7월 20일 성조 엘리야 축일

                                          부산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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