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 -서문

Skyblue fiat 2016. 11. 18. 14:47

 

가톨릭출판사 (catholicbook.kr)

 

제자들가운데계신예수님

가톨릭출판사 | Catholic Book

www.catholicbook.kr:443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출처: catholicone.wordpress.com (글을 이곳에서 옮겨왔습니다.)

 

머릿말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전환기에 고향인 뮌스터 지방 전역에서 가장 놀라운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비단 고향에서만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1774년 9월 8일에 코에스펠트 부근의 농촌인 플람쉐에서 가난하지만 신앙심 깊은 부모의 아홉 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고, 1824년 2월 9일에 뒬멘에서 작고했다. 그녀의 유골은, 1975년 2월 7일에 이장된 이래 뒬멘의 성십자가 교회의 납골당에서 영면하고 있다. 그녀의 넘쳐 흐르는 마음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까이 있는 이들과 멀리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또한 그녀가 살던 시대의 교회와 앞날의 교회를 위해서 그녀에게 충만했던 속죄의 고통들을 여기서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중요한 인물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위대한 인물들에게도 역시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녀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불과 넉 달 동안 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그녀의 지식과 능력은 다른 어떤 원천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두 세계의 문턱에서 현존하는 생활을 영위해 왔기 때문이다.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이 아이는 암흑 세계의 권세로 인해 혼란과 유혹이 빚어지게 된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으며 이 사실을 논박의 여지가 없는 엄연한 현실로 체험했다.” “성인들이 이 아이에게 발현하여 함께 놀아 주었으며, 이 아이의 놀이와 일의 어려움을 도와 주었다. 이 아이는 영적으로 먼 세계까지 편력하고 있었으며 앞날의 일을 예견하기도 했다. 육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해서도 이 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친숙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이 아이에게는 친근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종종 그 세계는 세속의 현실보다 더욱 친근한 것이 되었다.”* 이와같이 안나 카타리나는 임종할 때까지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 안톤 브리거(Anton Brieger), ‘Visionen und Leben’, 19면, 정확한 자료는 전거 색인(典據索引)을 참조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그녀는 집안일과 밭일을 하면서 부모를 도왔다. 그 후 그녀는 3년 동안 에메리히호프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허약한 체질을 고려하여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얼마 동안 그녀는 자기 집에서 뿐 아니라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삯바느질을 해서 스스로 양식을 벌었고 수도회의 입회에 필요한 지참금도 마련했다. 그녀가 그토록 열망하던 이 소원은 그녀의 나이가 2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처음에 그녀의 부모는 수도원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그녀가 입회하려고 문의한 수도원에서도 한결같이 그녀의 몸이 허약하다는 것을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다. 뮌스터에 있는 성 글라라 수녀회의 수녀들은 만약에 그녀가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다면 받아 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르간을 배우기 위해 코에스펠트에 사는 교회 합창단의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가인 쇤트겐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식이 많은데다가 부인까지 병들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를 배우는 대신에 열심히 집안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알뜰히 하면서 이 가족을 돌보아주었다. 이렇게 수녀가 되려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는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두었다. 수녀원에 들어가려는 그녀의 소원은 자기 가족들을 열심히 돌보아준데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쇤트겐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쇤트겐은 자기 딸인 글라라가 들어가려고 하던 뒬멘의 아그네텐베르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글라라와 함께 안나 카타리나까지도 받아 줄 경우에만 자기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못박아 놓았다. 그녀는 중병을 견뎌 내야 했지만 동료 수녀들의 도움 속에서 온갖 겸손의 덕을 쌓은 수련기를 마치고 1803년 가을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서원을 했다. 이제 드디어 언표에서나 실제 사건에서나 그 신비로움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동료 수녀들은 이런 신비스런 삶에 대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이미 코에스펠트에서 살던 시기에 안나 카타리나는 예수회 성당 내부에 있는 오르간 연주 무대 위쪽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할 때에 처음으로 환영을 통해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였었다. 뒤이어 그녀가 수녀원 시절에 늘 숨겼던 여러 군데의 피흐르는 상흔은 머리에도 나타났다. 1807년 그녀는 부모를 방문했는데, 그녀가 그곳의 성 람베르티 성당 안에 걸려 있는 코에스펠트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동안 두 손과 발의 상흔에서 고통을 느꼈다.


1803년 총독의 죽음은 1811년 12월에 뒬멘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원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1812년 3월 죽을 병에 걸린 안나 카타리나는 마지막으로 수녀원을 떠나, 병을 앓고 있는 노수도원장인 람베르트의 사택에 가사 관리인으로 들어갔다. 크로이출신 공작들의 고해 신부이자 수도원장인 람베르트는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수도자로서 안나 카타리나의 내면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였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그녀와는 성격이 전연 딴판인 네 살 터울의 여동생 – 이 동생은 버릇없고 난폭하고 자기 언니에게도 무정하고 질투심이 많았다 – 이 1821년까지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는데,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안나 카타리나에게는 이 여동생이 큰 골치거리였다. 1812년 8월부터 1813년 초까지 그녀는 복부 부근의 십자가 상흔 이외에 가슴과 옆구리에 Y자와 같은, 외부에 드러난 상흔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않고 깨끗한 물만 먹고 살았다. 1813년 3월 21일 이 지역 담당 의사인 베제너 박사는 그녀가 인간의 마음을 심오하게 인지(認知)하고 있는 것에 대한 깊은 감동으로 성흔을 지니고 있는 그녀를 진찰했다. 대교구 수석 사제인 렌싱과 수도원장의 공동 보좌 신부인 클레멘스 드로스테 피셰링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피셰링은 교회측의 조사를 자신이 고안한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마무리지었다. 이 조사 서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결국 피셰링과 이 조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성흔(聖痕)은 눈속임이 아니며 안나 카타리나에게 하느님의 위업이 계시되고 하느님께서 그녀에게서 특별한 일을 이루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특별한 일이란, 계몽적 합리주의 시대이면서 한 편으로는 거짓된 신비주의 시대인 그 시기에 하느님께서 안나 카타리나를 “세상에 징표로 세우셔서” 우리 인간들이 이 생생한 징표를 보고 만인의 구원의 샘이 되신 당신께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높은 직위에 있는 근엄한 인물들이 안나 카타니라를 방문하고는 그녀의 성품과 생각과 고통에 깊이 감동되어 그녀와 함께 그녀가 죽을 때까지 기도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인물들 중에는 훗날 이른바 쾰른의 분쟁 시기에 쾰른의 증성자 주교가 된 수도원장의 보좌 신부와 레겐스부르크의 자일러 주교 그리고 뮌스터 지방의 유명한 교육학자이자 학교 제도의 개혁가인 대교구 수석 사제 베른하르트 오버베르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나 카타리나는 그녀를 사기꾼으로 폭로하려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무고한 병자인 그녀에게 정부는 전대 미문의 박해를 가하면서 조사를 실시했지만,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다. 정부측에서도 그들이 계획했던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성흔을 갖고 있는 그녀는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의 온갖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 정선되어 있는 성서 구절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의 능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클레멘스는 그녀가 직접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신약 성서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에 대한 환영을 보았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난롯가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무릎 위에 앉히시고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얘야, 이제 아빠 무릎에 앉아서 이야기를 좀 해보렴!’ 그때 나는 아주 신이 나서 또렷또렷하게 온갖 성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태껏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으셨기에 내가 이렇게 말씀드렸을 때, 그분은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셨지요. ‘아가야, 너는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니?’ 그때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빠, 이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조용해지셨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않으셨습니다.” 브렌타노의 일기의 그보다 몇 페이지 앞에는 그녀의 이런 말이 있다. “어린 소녀였을 때 나는 항상 황홀한 상태에 빠져 나의 모든 일을 했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영적으로 보는 환영들은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1819년 7월 17일에 그녀는 브렌타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리아께 드린 영보 고지의 환영을 이미 아주 어렸을 때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삶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성모님께서 소녀 시절에 방에 홀로 계실 때는 무슨 일을 하는지 엿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성모님께서 그때 무슨 옷을 입고 계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여섯 살 되던 해부터 매년 대림절 내내 나의 영혼은 항상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순례를 떠나는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지금까지 매년 나에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도 모든 교회의 축제 광경이 실제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처럼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행하고 있는 모든 축제가 마치 눈앞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 영혼은 이 모든 축제를 그렇게 거행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다기 보다는 그 축제로 인도되어 모든 축제의 진행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소녀 시절이나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 나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고 격려해 주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주님께서 사시는 동안 거쳐 가셨던 길과 장소의 대부분을 가능한 한 정확히 묘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두손을 잡고 이끄는 힘에 의해 그 장소들로 보내졌고 그 장소들만큼 생생하게 알고 있는 곳은 전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곳들이 생생하게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 안톤 브리거(Anton Brieger), ‘Visionen und Leben’, 189, 192, 210면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는 일은 병세 때문에 그녀로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 마지막 5년을 남겨 두고 있을 때에 비로소, 그녀가 그전부터 오랫동안 자신의 환영속에서 보아 왔던 바로 그 사람이 그녀의 병상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녀의 병상 옆에서 그녀의 말을 받아쓰는 모습으로 그녀의 환영에 보였던 사람이었다. 결코 용이하지 않은 이 작업을 성취하는 데 모든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클레멘스 브렌타노였다. 그녀는 그를 가리켜 순례자라고 했다. 1818년 9월 24일부터 시작되고 있는 그의 “뒬멘 일기”는 14,000면에 달한다. 이 일기는 오늘날 프랑크푸르트 대교구에 보관되어 있으면서 발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1820년 7월 27일부터 1821년 3월 30일까지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은 매일같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실 때까지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이 환영은 사도 행전에 나오는 일련의 환영과 같은 장면들로 이어졌다. 1821년 6월부터 그녀가 죽기 한 달 전인 1824년 1월까지 그녀는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던 시기의 모습을 보며 이야기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1834년에 가서야 이 같은 순서를 밝혔는데 그때는 안나 카타리나가 작고한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전거 색인에 제시된 책들은 브렌타노의 일기에 실려 있는 에메릭의 환영을 내용으로 해서 쓰여진 것들이다. 로트렐(Marie Therese Loutrel)은 브렌타노의 일기에 실린 에메릭의 환영에 대한 책(이것은 프랑스어판으로 발행되었다)을 썼는데, 그것은 이 책의 차례와같이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신약 성서에서 뽑은 성서 구절들을 라이트모티브 형식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책은, 브렌타노의 원문 그대로이고 단지 현대의 철자법과 구두법에 맞게 수정되었다. 브렌타노의 주석도 그대로 실려 있어서 원문을 읽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신약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이 총괄되면서도 상세하고 명쾌한 장면으로 우리에게 제공된다. 예수와 그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인간 차원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복음의 의미가 해명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의 최초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에메릭 숭배자로서 파리에 살고 있는 로트렐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Jesus parmi les siens)”이란 제목의 책을 선사했는데, 그 책은 파리의 떼뀌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그녀가 뒬멘을 방문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책을 기증하였을 때, ‘에메릭 연구를 위한 주교 위원회’의 회장인 콕스와 위원인 나는 이 책이 독일에서도 절실히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로트렐 여사는 이 말에 대해 기뻐하면서 자신은 독일어 원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실었지만 독일어로는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이 출판되어 나왔다. 1979년 9월 16일에 요절한 텐훔베르크 주교는 생전에 흔쾌히 추천의 말을 써주었다.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이 책의 출판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사였다. 그가 이 책의 출판을 제의하였다. 하느님의 종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의 시복식을 추진하는 작업이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그의 노고 덕분이다. 이 주교가 집필한 “에메릭의 해에 부쳐서 쓴 주교의 제언(Bischopsworte zum Emmerick-Jahr 1974)”이란 소책자는 읽어 볼 만한 것이다.


본서를 초고로 읽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안나 카타리나의 현실성에 대한 장 기통의 철저한 연구 논문을 본서에 포함시켰는데 그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레테 쉐트

 

 

출처ㅣ가톨릭 원  https://catholicone.wordpress.com/2011/12/12/%eb%a8%b8%eb%a6%ac%eb%a7%90/

 

 

 

참고: 안나 가타리나 엔메릭과 아그레다의 예수 마리아의 책에 대한 지옥의 반응

http://akfldk00700.blog.me/100179330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