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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사제운동] 3.영성 / 가.'마리아 사제운동'의 정의 나.서약

Skyblue fiat 2025. 5. 12. 11:48

'마리아 사제운동' 개요

 

1991년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 밀라노에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

 

제 1부: 운동의 기원, 확장 및 영성


3. 영성

가. '마리아 사제운동'의 정의

'마리아 사제운동'은 성모님께서 교회의 정원에 심으신 작은 씨앗이다. 매우 빨리 성장하여 그 가지들이 (벌써) 전 세계에 뻗어 있는 큰 나무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에 솟아오르게 한,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의 사랑의 '사업'이다. 교회의 모든 자녀들을 도와, 고통스러운 정화기에 신뢰와 자녀다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끊임없이 단호하게 활동하시면서, 특히 사제들을, 당신의 모성적 총애를 입고 있는 이 아들들을 도와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사업'에도 의당 부르심을 받은 도구들이 있기 마련이니, 스테파노 곱비 신부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여기에 뽑힌 사람이다. 무엇 때문일까? 이 책의 다음 글을 읽어 보면 그 까닭이 설명될 터이다.

 

“가장 적합하지 않는 도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너를 택한 것이다. 그래야 이 일을 너의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 '마리아 사제운동'은 오로지 '나의 사업'이어야 한다. 너의 약함을 통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아무것도 아닌 너를 통해 나의 권능을 드러낼 작정이다.” (1973년 7월 16일)

 

따라서 '마리아 사제운동'은 정관(定款)과 임원진을 갖추고 몇몇 열렬한 사제나 평신도들이 밀고 나가는 그런 거창한 단체가 아니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적절히 통찰한 대로 하나의 “정신”이다. 하느님의 선물이 그러하듯이 손으로 만져볼 수는 없으나 힘차고 생동감 있는 그 무엇이다. 이것의 주된 목적은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고 그 봉헌을 생활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제들이 마리아께 (이렇게) 자신을 맡겨 드림은 '세례'와 사제 '서품식' 때 하느님께 바친 자신의 봉헌을 더욱 철저히 자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마리아 사제운동'은 (가입) 숫자나 그 이름들의 명성, 효율적인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우리가 성모님의 말씀을 귀여겨듣고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는 정도에 따라 실현될 수 있는 운동이다.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자신을 봉헌하고 이에 일치하여 살면서 순종적으로 활동하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신자들 역시 성모님께 봉헌하도록 돕고자 애쓰는 이는 누구나 이 운동의 정신에 속한 사제이다.

 

이는 (또한) 연령과 직책의 구분 없이 교구와 수도회 소속 사제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운동이다. (가입자 중에는) 평온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지녀 온 사제들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 (삶이나) 사도직 수행을 통해 부정적 체험의 쓰라림을 맛본 사제들도 있다.

 

성모님의 성심은 모든 아들들에게 열려 있다. 사제들 사이에 차별을 두든가 (어떤 부류에) 특정적으로 치우침 없이 당신 팔에 (모두를) 안아 하나로 결합시키신다.

 

그러므로 '총애' (predilezione)의 선택은 성모님 편에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분명히 ‘모든 이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가 네 (마음)속에 들려주는 말은 무엇이나, 다만 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하는 (prediligo) 아들들인 나의 모든 사제를 위한 것이다.” (1973년 8월 29일)

(그러므로 총애의) 선택은 어머니의 초대를 자발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제들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운동에 가입하기를 원하고 활동의 진전도 알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가입 신청서를 전국 본부나 지역 지부에 제출하면 된다. 아직 국내에 본부나 지부가 없는 곳이라면, 다음의 주소대로 이탈리아(의 국제 본부)에 우송할 일이다.

 

Movimento Sacerdotale Mariano
Quartitio Gabrielli SX
Via Don Milani 2
Desio MB
Italia 22038
Email: gabrielli@tavernerio-saveriani.it
Phone: 39,333,255,1598

 

그러나 가입 신청서는 내적 가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더욱이, 성모님께 자기 자신을 봉헌하고 이 봉헌을 실천하며 (다른 이들도) 실천하게 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 쓸모없는 휴지쪽에 불과할 터이다.

 

우리가 기억해 둘 것은,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 운동에 가입한 사제들뿐만 아니라, 그분께 자신을 맡기고 봉헌자로서 살려고 노력하는 (다른) 모든 사제와 주교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라는 점이다.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바친 완전한 봉헌의 서약은 사제들에게 심오한 신뢰감과 평온을 느끼게 해 준다. 성모님께서 (지상의) 여느 엄마보다 훨씬 더 도와주고픈 열망을 지니신 채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삶의 구체적 정황을 통해 믿게 됨으로써, 개인적인 고통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우리 안에 그윽한 안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복음 메시지'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바꾸어 말해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작은' 이들의 자녀다운 신뢰로써 삶의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그렇게 '예수 성심'의 무한한 자비에 맡겨진다. 미래는 모든 은총의 '중개자'(이신 마리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올 '하느님 섭리'의 선물로 기다려지며, 현재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놀거나 일하는 아기들처럼 즐거운 열성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된다.

 

나. 이 운동의 영성 특유의 서약

다음의 세 가지를 서약한다.

 

(첫째)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자기를 봉헌한다.

(둘째) 교황 및 교황과 하나인 교회와 일치한다.

(셋째) 신자들을 성모님께 의탁하는 삶에로 이끈다.

 

이 운동의 영성을 설명하는 다음 내용은 스테파노 곱비 신부의 '회람' 21, 23, 24호에서 뽑은 것이다.

 

1)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한다.

우리는 어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붉은 용'(*묵시 12,3)이 무신론적 문명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고, 기술 및 과학의 진보로 엄청나게 커진 인간은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세속적인 새 문명을 건설한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이 근본적인 배척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내려진 실제적 징벌이다.

 

하느님은 '구세주'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 홀로 인간을 '구속하신 분'이시기에,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멸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홀로 구원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을 계속 완고하게 거부한다면, 어떻게 인류가 구원될 수 있겠는가? 이 점에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역할이 개재(介在)된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예수님에 의해 만민의 참어머니로 선포되셨기에, 이리도 하느님을 멀리하는 오늘날의 반역적인 인류에게도 참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로서의 그분의 소임은 인류 구원이다. 그래서 성모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이 인류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길이 되고자 하신다. 인류의 이 회두(回頭)를 위하여 갖가지 모양으로 수많은 활동을 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발현(사건)이 우리 시대에 유난히 많아진 뜻이 여기에 있으니, '천상 엄마'가 당신 자녀들 가운데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시려는 것이다.

 

그분은 몸소 활동하시되, 직접 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여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린 자녀들을 통해서 일하실 수 있기에, 이 자녀들 안에 사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특히, 당신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을 통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

 

마리아 사제운동의 영성에 있어서 특징적인 점은, 이미 교회 안에 알려져 있는 봉헌 교의를 (신학적으로) 양식화(樣式化)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을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달하게 하는 여정이 제시되고 있는데, 성모님께 완전히 맡기고 살게 하는 이 여정은 네 가지 단계를 차례로 거치도록 펼쳐진다. 즉, 마리아와 함께 사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에서부터, 내적 변화가 일어나도록 그분께 자신을 맡겨 드리며, 그분과 나누는 마음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마리아(의 삶을) 재현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헌 – 이것이 마리아 사제운동에 속하려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첫째 서약이거니와 – 의 길이 목표로 하는 점은 바로, 마리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리는 데 있다.

 

“내가 너희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너희 눈으로 보고, 너희 입술로 위로하며 북돋아 주고, 너희 발로 걷고, 피로 얼룩진 너희 발자국을 따라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너희 몸으로 고난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1981년 7월 1일)

 

이제 성모님께서 당신 군대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티 없으신 당신 성심께 봉헌하기를 요구하시는 까닭이 납득될 것이다. 봉헌한 자녀들 안에서 몸소 사시며 활동하심으로써 이 자녀들이 당신의 비통함과 어머니다우신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되고, 만민을 하느님께 도로 데려오려고 피곤한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이와 같이 마리아의 어머니다우신 사랑의 길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이 당신을 거쳐 만민에게 이르게 하시는 물길(水路)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바치는 봉헌은 오로지 세계 봉헌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 (만민이) 주님께 온전히 돌아와 주님을 완전히 현양(顯揚)하게끔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고 맡기는 행위를 교회와 인류 전체에 하느님 ‘자비’의 선물을 얻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견해를,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15항 참조)

 

그는 번번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마리아께 개인적 봉헌을 자주, 그것도 열렬함과 깊은 기쁨을 가지고 거듭 새로이 하는데, 그 심오한 의미도 환히 드러난다. (또한) 자주 사도적인 순례 길에 올라,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거기서) 가장 유명한 성지를 찾아가서 방문 중인 지역 교회를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는 까닭도 알아차릴 만하다.

 

예수님의 값진 선물인 '자비로우신 사랑'을 현대 세계에 얻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을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는 일로 보고 있다는 것이, 교황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깊은 이유인 것이다.

 

“… 오, 인류와 세계, 곧 현대 세계를 위해, 봉헌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또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성화와 봉헌을 반대하는 모든 것(을 볼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영원한 ‘사랑’(이신 분)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든 영혼들을 축복해 주옵소서. 오, 어머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당부를 아낌없는 열성으로 나날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 그리하여 '복음' 정신을 따르는 생활로 교회와 세상에 드맑은 증언을 주고 있는 이들을 축복해 주옵소서.”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바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봉헌기도. 1982년 5월 13일, 파티마.)

 

2) 교황 및 그와 하나인 교회와 일치한다

교회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양면을 공유한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나약하고 죄가 넘쳐흘러 속죄할 필요가 있지만, 교회는 세상의 '빛', “만민의 빛”(*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Lumen Gentium>)이다. 그러나 교회가 살고 있는 세상의 악이 흔히 교회의 인간적 면을 공략하는 질병이 되어 왔고, 이는 거의 2천년에 걸친 교회사를 통해 입증되는 점이다.

 

오늘날 교회는 새로운 세속적 문명이 건설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 세속 정신 내지 세속주의가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교회로 하여금 크나큰 고통과 위기 상황에 처하게 했으니, 존경하올 교황 고(故) 바오로 6세의 유명한 언급처럼, 그야말로 '사탄의 연기'인 것이다.

 

이 세속주의가 지성 면에서는 ‘합리주의’가 되었고, 생활면에서는 '자연주의'가 되었다.

 

합리주의에 의해 하느님의 신비와 계시 진리의 보고(寶庫)를 온통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기본적인 신앙 교리가 드물잖게 부인되고 있고, 극히 심각한 오류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은밀히 배포되고 있다.

 

이러한 오류를 가르치는 가톨릭 학교들도 종종 있다. 그러기에 '성경'과 심지어 예수님의 '복음'(진리)마저 온전히 보존되는 것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지경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말로 너희의 복음을 지어내었다." (1976년 9월 25일)

 

자연주의로 말미암아 제일차적 가치인 '하느님의 은총'을 망각하고, 그리스도와 내적 일치를 이루는 삶, 곧 기도가 모든 사도직 활동의 영혼이 되어야 함을 망각한 채, 각자가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자신의 개인적 활동이나 효과, 계획 작성 같은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날의 관행(慣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죄를 악으로 보는 의식이 점차로 사라져 '화해의 성사'를 소홀히 하게 되는데, 이러한 풍조가 이미 교회 전체에 퍼져 있다.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셉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널리 알려진 한 인터뷰(그 기사는 그의 『신앙 보고서』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를 통해, 신앙의 온전성을 간교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손상시키는 이 오류들에 대한 반대론을 공공연히 표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황의 교도권'이 집요하고 강경하게 거듭 천명해 온 점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런 의문이 저절로 솟아남을 느끼게 되리라. 교회가 아직도 스스로의 심각한 신앙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니 어찌된 일인가?

 

위기의 계속은 교회가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을 뿐이다. 이 불일치로 말미암아 교황이 그의 교도권으로 지시하는 것을 귀담아듣지도 따르지도 않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한 위대한 교황을 교회를 위해 얻어 주셨고, 이 교황을 전 세계 모든 길로 데리고 다니신다.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을 얻게 하는 그분 복음의 빛을 널리 펴시기 위해서, 그리고 목자들과 그들에게 맡겨진 이들 모두를 신앙 안에 굳건해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교황 주위에는 흔히 텅 빈 공간만 있을 뿐이다. 그의 교도권을 전 교회가 다 지지하지는 않기에, 그의 말이 종종 듣는 이 없는 사막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격이 된다.

 

따라서 교회 쇄신은 오직 내적 일치를 통해서만 올 수 있다. 주교와 사제, 신자 모두가 완전한 일치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 사제운동의 둘째 서약에 근거를 주는 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날 이 일치에 있어서 만인의 모범이 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이다. 교황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고통받는 데 있어서, 그의 교도권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전파하는 데 있어서, 특히, 무슨 일에서든지 언제나 그에게 순종하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순명의 덕을 겸손하고 힘차게 실천하는 길로 돌아오는 것이 성모님의 간절한 바람인 것이다!

 

주교들과의 친교의 기준점인 교황과의 일치는, 말할 것도 없이 각자의 교구 사목자와 장상에 대한 순종적 친교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3) 신자들을 성모님께 의탁하는 삶에로 이끈다

 

이 운동의 최초부터 알게 된 것은, 수도자와 평신도들 역시 여기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마리아 사제운동의 셋째 서약이 바로, 각자의 사목적 배려에 맡겨진 신자들을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께 봉헌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 사제들을 통해 신자들에게 돌아가고자 하니, 지금은 사제들이 활동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그들 주위에 모이는 신자들로써 패배를 모르는 막강한 군대를 기르고 싶기 때문이다…” (1973년 11월 1일)

 

이것을 보면, 애초에 사제들을 대상으로 시작된 ‘마리아 사제운동’이 더없이 광범위한 평신도들의 영역에 대해서도 활짝 열려, ‘마리아 운동’을 일으킨 이유가 해명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