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제3권 공생활 둘째 해 1 p470~p482
212. 유타에서. 이사악의 집에서 전도하시다
1945. 7. 8.
(유타: 헤브론의 서남쪽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유다지파의 산악도시로 레위인에게 분배되었다. 현대의 야타인 것 같다.)
유타 사람들 모두가 산비탈에서 꺾은 야생화들과 자신들이 재배하는 조생 과일들을 가지고 어린이들은 웃음을 머금고, 어른들은 찬미하며 예수를 만나려고 앞 다투어 나온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마을에 발을 들여놓으시기도 전에 그 모든 착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신다. 그들은 선발대로 파견된 가리옷의 유다와 요한의 기별을 받고, 구세주께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자신들이 발견한 최상의 것들을 가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지고 달려온 것이다.예수께서는 그분께 바싹 다가와 그분의 튜닉과 두 손에 입 맞추고, 입맞춤으로 축복해달라고 젖먹이들을 그분의 팔에 안겨드리는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몸짓과 말씀으로 축복하신다. 그렇게 하는 최초의 사람은 사라인데, 그녀는 예사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후 10개월 된 예쁜 아기를 그분의 가슴에 안겨드린다.
그들의 사랑이 어찌나 열렬한지 그것은 전진을 방해한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도 같다. 나는 예수께서 그분의 발로 걸어가시는 것보다는 이 물결에 밀려가신다고 생각한다. 그분의 마음은 그러한 사랑의 기쁨으로 인하여 저 높이 맑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분의 얼굴은 하느님-사람의 최상의 기쁨의 순간의 밝기로 빛난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실 때의 강력한 흡인력 있는 얼굴이 아니고,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일치를 나타내실 때와 같은 위엄 있는 얼굴도 아니며, 단죄하실 때의 준엄한 얼굴도 아니다. 그 모든 표정이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데, 지금의 빛은 사방에서 공격받아 그분 자신이나 타인의 지극히 작은 몸짓이나 말씀에 항상 경계를 늦추실 수 없도록 강요당하며, 세상의 모든 덫들에 둘러싸여 계시는 그분의 전체 자아의 긴장을 푸시는 때의 빛이다.
세상은 유해한 거미줄처럼 하느님-사람이신 하느님의 나비(The Divine Butterfly of the Man-God)의 말씀을 질식시켜 세상의 가장 크고 죄 되는 무지를 깨우쳐주지 못하시게 하고, 영원한 사제이신 그분의 손을 묶어 마귀와 육체가 타락시킨 사람들을 성화시키지 못하시게 하며, 그분의 눈을 침침하게 하여 진짜 사탄의 저항이 아닌 모든 저항을 압도하는 자석, 용서, 사랑, 매력인 그분의 완전하신 시선이 마음들을 끌어당기지 못하시게 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시지 못하도록 그분의 비상(飛上)을 저지하고, 그분의 영혼을 가둘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분 주위에 악마의 실들(threads)을 던진다.
오! 그리스도의 적들의 일은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하여 항상 똑같지 않습니까? 지식(Science)과 이단, 증오와 질투, 아직도 좋은 나무의 독이 든 가지처럼 인류 자체에서 나온 인류의 적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미워하는 인류를 죽이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고, 사람들은 티끌이기 때문에 예수에게서는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는 반면 인류에게서는 기쁨을 빼앗아가기 위하여 비그리스도교화(unchristianising)라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보다 인류를 더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한 마음들 안에 거하시면서, 거기서 보시고, 말씀하시고, 인류에게 강복하시고… 그분 자신을 그 마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감정과 생각과 영혼 안에서 자신의 전 존재 안에서 기쁘게 고통당하기에 이를 정도로 자신들의 관능과 기관과 감정을 불태우며 자신들의 행복을 가지고 하늘을 접촉합니다.
눈물과 미소, 탄식과 노래, 심한 피로와 심각한 생명의 위협도 우리의 친구들이고, 친구라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 자체이기도 합니다. 뼈가 살 속에 있고 혈관과 신경이 우리의 피부 밑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처럼, 예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이 모든 불타는 것들이 우리 안에,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을 그 순간들에 우리는 무엇입니까? 몇 순간 더 지속되면 우리는 불타고 부서져서 죽게 될 터이니까요.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땅에서 사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는, 오, 주님! 교만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저를 불태우고, 열변을 토하게 하므로 당신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제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때 우리는 세라핌들입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영혼들의 유령이 나타날 때처럼 우리가 사람들과 물질이 느낄 수 있는 불꽃과 맹렬한 열을 발산하지 않는 것이 저는 놀랍습니다. 저주받은 영혼에게서 발산되는 반사광만으로도 나무 조각을 불붙게 하고 금속을 녹일 정도로 지옥불이 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 모든 것이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 당신의 불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열병으로 죽지 않고, 열병이 우리를 태우는 것이 아니며, 육체의 질병인 열병에 불살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Love)이시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열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불살라지고, 죽고, 불타 없어지며, 그 사랑에 의하여 그 사랑을 위하여 몹시 저항할 수 없는 우리 마음의 섬유들이 찢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제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망상이고, 둑을 무너뜨리고,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부수면서 떨어지는 폭포이며, 사랑은 전적으로 참되고, 현재적이며, 그것을 느끼는 마음에서 흘러넘치지만, 마음의 느낌을 생각으로 번역하는 데 있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손은 미처 그 감각들을 받아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삽니다. 생명은 열 배가 됩니다. 사람은 열 배나 되는 삶을 삽니다. 사람으로서 그리고 축복받은 영혼으로서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을 삽니다.
오! 저는 확신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 한 분이시고 삼위이시며 창조주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아담에게, 당신께로 가기 위하여 마치 마리아의 달콤한 잠과 승천처럼 천사들의 사랑하는 품에 안겨 지상의 낙원에서 천국의 낙원으로 조용히 건너간 뒤에 하늘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될 생명의 전조(a prelude to the Life)로 주셨던 흠도 없고, 제한도 없고, 한계도 없는 삶에 도달하고, 그것을 능가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참된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토록 멀리 간 것에 놀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말합니다. ‘주님, 저는 그렇게도 고상한 것에는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우리는 교만에 빠지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하며 가슴을 치고, 그 찬란한 빛을 더 두꺼운 휘장을 드리워 가립니다. 그 찬란한 빛은 우리의 한계에 대한 연민으로 압도적인 열기로 계속 타오르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여 있다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다른 복된 순간에 다시 힘차게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불과 빛과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지성소에 휘장을 드리웁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해 있지만 재충전되어 독하지만 감미로운 포도주에 취한 사람처럼 다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포도주는 이성을 둔하게 하지 않고 우리의 눈과 생각을 주님, 나의 예수님, 당신, 우리의 비참함을 천주성에 연결시키는 고리, 우리 죄에 대한 구속의 수단, 우리 영혼의 지복(blessedness)의 창조자, 당신, 성자, 우리로 하여금 이제와 영원히 당신 안에 살게 하시려고 당신의 상처 입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성부와 성령의 영적인 손 안에 쥐어주시는 분이 아닌 것으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멘.
그런데 예수께서 그분의 다정하신 시선으로 유타의 주민들을 불태우시며 저를 불사르시는 동안에 저는 어디 있었습니까? 신부님은 제가 더 이상 저 자신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받아쓰기를 하고 난 뒤에 즉시 저를 압박해오는 피로와 육체적 쇠약, 그리고 제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정신적인 수줍음이 저에게 침묵하도록 설득하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성층권의 공기는 자제력을 잃게 합니다… 저는 성층권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갔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만일 이 사랑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우리가 항상 침묵하다면 우리는 발사체처럼, 아니 밀폐되거나 과열된 가마솥처럼 터지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계속하십시다.
예수께서 유타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은 장터를 거쳐 이사악이 30년 동안 고통을 겪은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그분을 모시고 간다. 사람들이 그분께 설명한다.
“저희는 여기 와서 당신에 대하여 말하고, 회당에서처럼 기도합니다. 여기가 가장 참된 회당입니다. 저희가 여기서 당신을 알기 시작했고, 한 성인의 기도가 당신께서 저희에게 오시도록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셔서 저희가 이곳을 어떻게 만들어놓았는지 보십시오…”
지난해까지 그 작은 집에는 작은 방이 세 개 있었다. 첫째 방은 병자인 이사악이 구걸하던 방이고, 둘째 방은 광이고, 셋째 방은 마당 쪽으로 향한 작은 부엌이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을 터서 집 전체를 방 하나로 만들었고, 거기에 모임에 쓰이는 걸상들을 들여놓았다. 마당에 있는 작은 헛간에는 얼마 안 되는 이사악의 가구를 유물이라도 되는 양 넣어두고 있다.
또한 그를 존경하는 유타 주민들이 마당을 덜 황량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몇 가지 덩굴식물들을 심어놓았는데, 그것들은 지금 투박한 울타리를 꽃으로 뒤덮어 낮은 지붕과 같은 높이까지 마당 위에 그물처럼 엮어놓은 밧줄을 따라 자라나 퍼골라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 머무를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여자들과 아이의 숙소만을 제공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오! 선생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저희는 다시 당신을 모시고 이리로 올 터이니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친구 분들은 저희의 손님들이십니다. 당신과 하느님의 종들을 모시는 은혜를 저희에게 베풀어주십시오. 저희는 집들의 수만큼 손님들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동의하시고, 그 작은 집에서 나와 사라의 집으로 가신다. 그녀는 예수와 그분의 벗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기의 권리를 아무에게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 예수께서는 이사악의 집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방과 마당을 가득 채우고 집 앞의 공터에까지도 꽉 들어차 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방 한 가운데에 서서 그분의 목소리가 마당과 바깥 광장에서도 들리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어떤 질문이나 사건을 다루고 계시는 것 같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의심하지 마시오. 예레미야가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시련을 겪을 때 주님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탄산수나 양잿물로도 죄의 얼룩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옥불이라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예레미야가 말하는 정의(Justice)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유력자들은 참으로 예언자가 말하는 야생 암나귀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의 사막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한, 그가 비록 욥처럼 가난하고 혼자이고 헐벗었을지라도, 그는 결코 외롭거나 가난하거나 헐벗지 않고, 사막이 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마른 사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야생 암나귀들처럼 바람에서 수컷의 냄새를 맡는데, 우리의 경우 그것은 그들의 정욕으로 인한 엄밀한 의미의 음란 외에도 권력과 돈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그들은 이 냄새를 따라가 죄짓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냄새를 따라가고 있고, 나중에는 훨씬 더 따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발이 아닌 그들의 마음이 죄를 복수하실 하느님의 화살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보다 못한 것인 죄에게 ‘당신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이 나를 낳았습니다’라고 정말로 말했고, 아직도 말하고 있는 왕들과 왕자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때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모세는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에게 격분하여 율법의 판들을 깨뜨렸습니다. 나중에 그는 산으로 올라가 기도했고, 흠숭했고, 은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수 세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상숭배는 아직까지도 죽지 않았고, 미래에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은 오히려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지금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은 우상들의 숲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제단인데,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나쁜 정열의 노예가 아닌 사람은 다른 나쁜 정열의 노예이고, 한 가지 나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름을 가진 나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금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지위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고, 육체적인 정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아들이 금송아지들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숭배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얻어맞고 주님을 부르면, 그들이 ‘네 신들에게로 가거라.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두려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셨고, 그래서 그분께서는 각 개인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그분의 말씀의 힘으로 그분의 기억에서 그를 지워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런 판결을 선고하시다니 하느님께서 지나치게 가혹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하늘을 향하여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외쳤고, 하늘도 사람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메아리처럼 충실하게…
숙고하시오. 사람은 감사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지성에 대한 존중심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감사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생명의 선물을 주셨고, 더욱 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은총을 잃었을 때 ‘나는 너에게 은총을 회복시켜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위대한 약속을 듣습니다. 피해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치 그분 자신이 속죄할 의무가 있는 죄지은 분이신 것처럼 가해자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보시오, 사람에게 은총을 주려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것만을 주시는 것으로 그분 자신을 제한하시지 않고, 그분의 신령한 본질(His Spiritual Essence)을 낮추시어 사람의 살과 피의 조악한 필요들을 위하여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따뜻한 햇볕, 위안을 주는 물, 낟알, 포도나무, 모든 종류의 나무들과 모든 종의 동물들을 주십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생활수단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그분께 감사드려야 하고, 그분을 알려고 애씀으로써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성에 대한 존중으로.
미친 사람이나 백치는 치료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치료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씻어주고, 음식을 먹여주는 사람, 자기를 데려가 침대에 눕혀주는 사람, 다치지 않도록 보살펴주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병으로 인하여 야수 같아져서 치료를 고문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자기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합니다. 바보나 백치만이 자기의 아버지와 타인, 은인과 원수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아버지와 은인을 알아보고, 자기가 태어나기 전이나 자기의 아버지나 은인에게서 도움을 받기 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도 기꺼이 그들을 점점 더 알려고 합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고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주님께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자기의 아버지나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묻습니다. ‘처녀가 자기의 장신구들을, 신부가 자기의 허리띠를 잊어버릴 수 있느냐?’(예레2,32)
오! 있고말고요.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상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처녀들과 창녀들의 야하게 번쩍거리는 옷을 입기 위하여 자기의 정직한 장신구들과 허리띠를 잊어버리는 음란한 신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백성의 선생이 되어야 하는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노여움과 후회를 곁들인 하느님의 다음과 같은 꾸짖음은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사랑을 얻기 위한 네 행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느냐? 너는 네 악한 행동방식을 가르치고, 네 옷 술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죄 없는 사람들의 피가 묻어 있다.’
내 벗들이여, 멀리 있는 것(distance)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곳들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여러분이 생명의 말을 들을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나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한탄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죄가 부글거리고 부패가 들끓고, 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의심과 거짓말을 암시함으로써 내 일을 방해하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색색거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좋기도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타락하는 것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영적 함양(formation)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되기 전에 먼저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이사악은 여러분의 선포자입니다. 나는 내 말을 여러분에게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이사악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느님께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영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그를 가르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혼자 있게 되어 오류에 빠지게 될까봐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치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에게 불충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메시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못할 사람은 메시아가 그에게 마음을 열고 두 팔을 벌리며 ‘오시오’ 하고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시오. 여기 남아 있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여기 남아 있으시오. 그러나 전자나 후자나 모두 정직한 생활로 그리스도를 전하시오. 너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에 맞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시오. 끝까지 충실할 줄을 모르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영혼들의 장신구와 허리띠를 잊어버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경박함에 맞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시오.
여러분은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께서 여기 오신 후에 저희 중에는 병자도 없었고,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축복이 저희를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번 방문이 여러분에게 항상 모든 일에 있어 영혼의 건강을 주게 되도록 만드시오. 그렇게 되도록 나는 여러분에게 강복하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밭과 곡식과 가정과 양떼와 과수원에 내 평화를 줍니다.
그것들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것으로 살며, 그것들을 거룩하게 쓰고, 그 여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넘치는 계량(an overflowing measure)으로 아버지의 축복을 얻게 될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가보시오. 나는 남아서 기도하겠습니다.”
7. 9.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시력을 염려하여 어제 제가 기록했었던 것을 다시 읽고, 알아보기 힘든 말들을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 글은 제 감정을 묘사함에 있어 제가 느낀 것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저에게 느끼게 해주신 것을 글로 쓰는 데 있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다시 말씀드려서 그것을 잘못 묘사하지 않고 저 자신이 안심하기 위하여―사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저는 저의 성 요한에게 간구했습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이것들을 아주 잘 아십니다. 당신은 이것들을 직접 경험하셨으니까요. 저를 도와주세요,”
그렇게 하여 저는 그의 현존과 영원히 착하고 순박한 사람의 미소와 포옹으로 위로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저의 보잘것없는 언어는 제가 경험한 느낌들에 비하여 너무 열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들은 지푸라기이고, 오로지 초자연적인 것만이 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심지어 그것을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213. 가리옷에서. 회당에서 말씀하시다
1945. 7. 9.
가리옷의 회당 내부인데, 사울이 그리스도의 미래의 영광을 본 다음 죽어 그의 시신을 바닥에 눕혔던 바로 그 지점이다. 가득 들어찬 무리 중 예수와 유다가 우뚝 솟아 있고―그들이 가장 키가 큰데, 두 사람 다 얼굴이 밝게 빛난다. 한 분은 그분은 사랑으로 인하여,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고장이 항상 주님께 충실하고 엄숙하게 그분을 공경함으로써 다른 곳과 차별화하는 것을 보는 기쁨으로 인하여 그렇다―가리옷의 유력자들이 있고, 주민들은 예수에게서 좀 더 떨어져 자루 속에 들어 있는 씨앗들처럼 빽빽하게 몰려 있다.
회당에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문들을 열어놓았는데도 숨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들은 선생님께 경의를 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다가 결국 엄청난 혼란과 소음을 만들어놓아 무언가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견디시며 침묵하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손짓을 하고, 고함을 지른다.
“조용히 해요!”
그러나 그러한 외침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 해변에서 지르는 소리처럼 소음 속으로 사라진다.
유다는 지체하지 않는다. 그는 높은 의자에 올라가서 서로 엇갈려 걸려 있는 등들을 두드린다. 속이 텅 빈 금속이 울리고, 쇠사슬들이 서로 부딪치며 악기들처럼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조용해지고, 마침내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신다.
“저 선반에 있는 두루마리 중 열 번째 것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분은 그것을 받아서 펴시어 회당장에게 주시며 말씀하신다.
“마카베오 하권 제4장을 읽으십시오.”
회당장이 순종하여 읽기 시작한다. 오니아스의 우여곡절과 야손의 잘못과 메넬라오스의 배신과 도둑질이 청중들 앞에서 낭독된다. 그 장이 끝난다. 회당장은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계셨던 예수를 바라본다.
예수께서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신 다음에 청중을 향하여 돌아서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도시에서 나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하여 늘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무를 터인데, 나는 그가 그 말들을 여러분에게 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사도들과 대중 사이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접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던 상부 갈릴래아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제자들의 겸손으로 인하여 그 후 그것들은 그늘 속으로 후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하지 못할까봐, 내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까봐 염려했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하고, 그들이 잘하여 자기들의 선생을 도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와 페니키아의 경계에서부터 태양과 모래의 나라들과 경계를 함께 하고 있는 남쪽 지방인 유다의 땅까지를 오직 하나의 사랑으로 결합시키며 참다운 사도의 전도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만으로는 더 이상 군중들의 요구에 충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태양(the Sun)이 아직 그들과 함께 있어 그의 강한 날개로 새끼 독수리들을 받쳐주는 동안에 그들이 둥지를 떠나 자신들의 최초의 비행을 해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사이 며칠 동안 나는 여러분의 친구이자 여러분의 위안이 될 것이고, 내 제자들은 말씀(the word)이 되어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씨를 뿌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대중을 가르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특전을 주겠습니다. 그것은 예언입니다.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사건이 해를 가리고, 그 어둠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그릇되게 판단하도록 이끌려 갈 수 있을 미래를 위하여 여러분이 이 예언을 기억하기를 부탁합니다. 첫 순간부터 여러분은 나에게 착했기에, 나는 여러분이 오류로 이끌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세상이 ‘가리옷은 그리스도의 적이었다’고 말하는 입장에 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공정합니다. 나는 나에게 악의적이든, 우호적이든 그 비판이 감정에 자극되어 나에게 저질러진 잘못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도록 허용할 수 없습니다. 식구들이 많은 가정의 모든 자녀들에게 똑같은 성덕을 요구할 수 없듯이 큰 도시에서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아들 한 명이나 나쁜 시민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집안이 또는 온 도시가 저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사랑에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으시오. 그리고 기억하고 항상 충실하시오. 그리고 내가 부당한 비난에 대하여 여러분을 변호할 정도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무죄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항상,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죄인들과 어떤 친척관계가 있든.
이제 들으시오. 외국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며 이스라엘의 보물과 나라에 관한 정보를 외국에 제공하고, 진정한 대사제가 원수와 동맹을 맺었고, 하느님의 아들들을 해치는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를 중상할 사람들이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무죄한 자(the Innocent One)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역시 이스라엘에서 오니아스의 때(2마카 4장)보다 훨씬 더 비열한 사람이 자신이 대사제가 될 야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유력자들에게 가서 훨씬 더 비열한 거짓말의 황금으로 그들을 타락시키고, 진실을 왜곡하고, 범죄와 맞서 말하지 않고 자기의 파렴치한 목적을 추구하며 하느님의 우정을 잃은 영혼들에 대하여 더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풍습을 바꾸는 데 자기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데,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오! 물론 성공하고말고요!왜냐하면 모리아산 위에 있는 성전 자체에는 불경건한 야손의 경기장과 같은 경기장이 없지만(2마카3,12), 사실 그 경기장들은 그 산의 주민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 즉 양심 그 자체를 기꺼이 팔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오류의 열매들을 여전히 볼 수 있는데,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사랑, 순결, 정의, 선과 깊고 거룩한 종교가 있어야 할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봅니다. 이미 그 열매들이 전율의 원인이라면, 그들의 행위의 열매들은 전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저주를 야기할 것입니다.
여기 참된 예언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께 말하는데, 오랜 기간 동안의 간교한 속임수로 교묘하게 위치와 신임을 확보한 그는 돈을 받고 대사제, 참된 대사제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줄 것입니다. 참된 대사제인 그는 사랑한다는 주장에 속고 애정을 나타내는 동작으로 사형집행인들에게 지목되어 모든 정의가 무시된 채 살해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일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어떤 죄목을 만들까요? 지금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즉각적인 무시무시한 정의라는 운명입니다.
개인적인 운명이 아니라 배반자의 공범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운명입니다. 그것은 가책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마지막 죄를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마귀적인 영혼에 관을 씌울 그 사람의 운명보다 더 길고 훨씬 더 무시무시한 운명입니다. 그 마지막 죄는 일순간에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벌은 길고 두려운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음 문장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의분이 치밀어 올라 안드로니코스의 진홍색 옷을 벗겨버린 다음 바로 그가 오니아스에게 불경한 손을 댄 그곳에서 그를 죽이라고 명하였다.’(2마카4,38)
그렇습니다. 사제들의 무리는 사형집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녀들이 타격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다음 문장에서 악한 공범자 대중의 운명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피의 목소리가 땅에서 나를 향하여 부르짖으니, 너는 저주받을 것이다…’(창세4,10-11)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선물을 보호하지 않은 전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구속하러 온 것은 사실이라면, 그 첫 번째 구속이 나의 말(My Word)인 사람들 중 살인자가 되어 구속받지 못할 사람들은 불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나는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시오. 여러분이 내가 악행을 저지른 자라는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하시오. ‘아니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취되고 있는 표징이며,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위하여 살해당하신 희생자(the Victim)시오.’"
사람들이 회당에서 나가는데, 그들 모두가 예언과 예수께서 얼마나 유다를 존중하시는지에 대하여 손짓을 곁들여가며 말한다. 가리옷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한 사도의 도시, 정확하게 가리옷의 사도의 도시를 선택하시어 예언의 선물과 함께 사도들의 가르침을 시작하심으로써 자신들에게 베푸신 영광으로 인하여 들떠 있다. 그 예언이 슬픈 것일지라도 사전에 사랑의 말씀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는 것은 큰 영광이다…
회당 안에는 예수와 사도들의 무리만이 남아 있다. 잠시 후에 그들은 회당과 회당장의 집 사이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나온다. 유다는 앉아서 울고 있다.
“자네는 왜 울고 있나? 난 아무런 이유를 보지 못하겠는데…”
다른 유다가 말한다.
“아니야, 나도 울고 싶은 심정이야. 자네들도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 이제 우리는 가르쳐야 해…”
베드로가 말한다.
“우리는 이미 산 위에서 약간은 해보았잖아. 우린 점점 더 잘 하게 될 거야. 자네와 요한은 금방 성공적으로 했었는데 뭘 걱정하나.”
제베대오의 야고보가 그들을 격려하며 말한다.
“나는 최악이야…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거야. 그렇지요, 선생님?”
안드레아가 말한다.
그분께서 가지고 나오셨던 몇 개의 두루마리를훑어보시던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느냐?”
“제가 말해야 할 때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거라고요. 저는 최선을 다하여 당신의 말씀을 잘 되풀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제 형은 겁을 내고 있고, 유다는 울고 있습니다.”
“너는 울고 있느냐? 왜?”
예수께서 물으신다.
“제가 참으로 죄지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와 토마스가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 대하여 험담했는데, 당신께서는 저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라고 말씀하시고 여기서 가르치도록 저에게 부탁하시어… 저를 높여주십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럼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몰랐느냐?”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맙습니다. 저는 다시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진짜로 암흑이고 당신께서는 빛이시니까요.”
회당장이 돌아와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가 걸어가면서 말한다.
“저는 당신의 말씀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당신께서는 가리옷에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제자, 우리 시몬의 유다를 얻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께서는 여기서 비열한 자도 만나신다고 예언하시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유감스럽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유다가 그 비열한 자의 잘못을 보상하겠지만요…”
“제 전존재를 바쳐서요.”
다시 침착해진 유다가 말한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분의 대화 상대들을 바라보시면서 양팔을 벌려 ‘그렇소’라고 하시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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