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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 (7)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 하성수 박사

Skyblue fiat 2024. 1. 13. 02:02

 

교부들의 가르침 (7)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 하성수 박사

의로움 바탕, 신앙인의 실천적 삶 촉구

 


폴리카르푸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의 주교였다. 그의 제자인 이레네우스는 사도들이 그를 주교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도 요한이 그를 스미르나의 주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레네우스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복된 폴리카르푸스가 요한과 주님을 본 다른 이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인용하였는지, 또한 그들에게서 주님과 그분의 기적과 가르침에 관하여 무엇을 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폴리카르푸스는 로고스(말씀)의 삶을 목격한 이들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성서와 일치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0?6).

이레네우스가 말한 요한이 사도 요한은 아닐지라도 폴리카르푸스가 사도들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그의 순교를 영웅적 모습으로 그려낸 「순교록」은 그를 「사도적 스승」으로 높여 부른다. 교회 전통에서 그의 가르침과 주장은 사도들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지닐 뿐더러 그는 당시에도 아시아의 스승으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폴리카르푸스는 155~160년경 스미르나의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사망한 지 1년 이내에 저술된 「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9장 3절을 보면, 스미르나의 주교는 전집정관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술에서 당시 그의 나이는, 루가 2, 36~37의 여예언자 『안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산 후 여든네 살까지 과부로 살았다』에 나온 햇수를 온 생애로 해석하듯이, 적어도 86세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의 주제는 의로움이다. 폴리카르푸스는 이 의로움을 바탕으로 윤리와 도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촉구한다. 그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과제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명백히 권고한다. 그가 추구하는 윤리와 도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계명, 곧 탐욕, 돈 욕심, 거짓 증언과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는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행실이 아니라 은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은총으로 선택받았고 믿음에 따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폴리카르푸스에게 은총은 확실한 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앙을 믿음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이해하였다. 곧, 믿음에 행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덕을 쌓으려면 이를 뒷받침해 주는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폴리카르푸스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마침인사로 편지를 끝맺는다.


 ▲ 터어키 스미르나에 있는 폴리카르푸스 기념성당

 


폴리카르푸스 편지의 내용은 사목서간, 곧 사목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디모테오 전·후서, 디도서와 비슷하다. 사목서간은 바울로의 다른 편지들과 어휘와 문체, 역사적 상황, 당시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투쟁, 공동체 안에서의 서열과 직무, 신학적 내용 등에서 차이가 있다. 더욱이 사목서간이 전제하는 교회의 상황들은 바울로의 편지들보다 후대에 씌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2세기 중엽에 널리 퍼진 마르치온의 사상을 반박하고 있음도 보인다. 1디모 6, 20~21에서 맡겨진 것, 곧 선을 간직하고 불경건한 주장과 「반론」들을 피하라고 경고하는데 이 「반론」이라는 말과 마르치온의 주저인 「대립명제」라는 제목이 같은 그리스어 낱말이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서학자들은 사목서간의 저자가 바울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독일 개신교의 유명한 교부학자 캄펜하우젠은 이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사목서간의 저자가 폴리카르푸스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폴리카르푸스는 생애 말기에 로마로 건너가 주교 아니체투스(154/155~166/167년)와 부활절 날짜, 단식 문제와 같은 교회의 여러 현안을 놓고 협의하였다. 아시아 지방의 대표로서 폴리카르푸스는 당시 서방의 관습과 달리, 사도 요한의 전통에 따라 과원절 전날인 니산달 14일에 부활절을 거행하는 「14일파」를 변론하였다. 부활절 날짜 문제는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체투스의 주장이 서로 달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의 교회 공동체성은 깨지지 않았다. 아니체투스는 자신의 교회에서 스미르나의 주교가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허용하였으며, 폴리카르푸스는 아니체투스와 화해한 뒤 로마를 떠났다. 부활절 논쟁은 하마터면 당시 서방과 동방의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신학 문제였다.

그 뒤 로마의 주교 빅토르(189~199년)는 로마의 관례대로 부활축일을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하려 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전통을 따라 이를 반대한 에페소의 주교 폴리크라테스를 파문하였다. 이때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빅토르를 독려하여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유지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뒤로도 음력인 니산달 14일이 태양력의 언제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계속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이 문제는 교회에서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모든 교회가 로마의 관례에 따라 부활축일을 지내야 한다는 규정을 교령으로 결정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가 한번 분열되면 일치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2천년 교회사의 여러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저마다 전통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였지만 상대편의 의견도 존중하여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갈라진 모든 형제 교회들은 일치를 위해 공유하고 있는 성서와 성전을 토대로 배타심이 아닌 대화,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깨달음, 상대방의 교의와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이 사건에서 배울 수 있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가톨릭신문 (catholictim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