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천주교로 개종하였는가?-개종실화

4. 안중근의 삶과 믿음

Skyblue fiat 2023. 11. 16. 21:44

 

 

 

 

4. 안중근(1879∼1910)의 삶과 믿음

 

다음의 내용은 2009년 12월 경향잡지에 나온 조광 교수의 글에서 따온 내용이다.
 
1) 안중근의 교회 활동
안중근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유력가문이던 안태훈의 맏아들로 1879년에 태어났다.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은 1897년 1월 빌렘(Wilhelm, 洪錫九, 1860~1938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18세 청년 안중근도 부친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영세 입교 후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천주교 선교운동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그들의 노력으로 1898년에는 황해도에서는 안악 매화동본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선천 청계동에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다.
 
안중근 가족은 선천 청계동본당을 설립하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쳤다. 그러기에 청계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빌렘 신부가 부임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가 되어 그를 수행해서 해주 옹진 등 황해도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종사했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안중근이 본격적으로 전개했던 사회적 활동은 천주교 선교운동이었다.
 
안중근은 황해도 도처를 다니며 천주교 신앙을 전하는 전교회장의 책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동포들을 향하여, “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 형제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 날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가 되어, 현세를 도덕세대로 만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 번 바라오.” 하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청년 안중근이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에 종사하던 당시 대한제국은 급박하게 몰락해 가고 있었다.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항하여 의병들이 국권을 지키고자 도처에서 봉기했다. 이 상황에 안중근도 시대의 도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방향을 고민하면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는 1906년 상하이에서 황해도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휴양 차 상하이에 나와 있던 르각(Le Gac, 郭元良, 1876-1914년)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황해도 지역에서 이미 저명한 신자인 그를 르각 신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아마도 자신의 망명 문제에 관해서 그에게 의견을 구한 듯하다. 르각 신부는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과 사회단체의 조직 그리고 민심의 단합과 실력의 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역설했다. 르각 신부의 이 권고는 안중근의 평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말이 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즉시 귀국하여,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교육운동에 직접 투신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청계동에서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했다. 국민교육을 비롯한 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고 그는 좀 더 넓은 지역을 찾아서 옮겨간 것이다. 안중근은 그곳의 성당에서 창설한 돈의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성당에 설치한 야학교인 삼흥학교의 재정을 도맡아 운영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1907년에 이르러 더욱 급박하게 쇠퇴해 갔다. 이때 대구의 천주교 신자 서상돈 등의 주창에 따라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에서 활동하며 평안도 지방에서 비폭력적 국권수호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국채보상이라는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 국권을 지켜보려던 시도에도 동참하였다.

 

2) 안중근의 무장투쟁
이러한 과정에서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꼈고, 직접 무장투쟁을 통해서 국권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는 간도와 연해주를 배경으로 망명생활을 했다. 그의 활동무대에는 간도의 천주교 교우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의병전쟁 중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릴 정도로 기도생활에 충실했다. 의병의 짐 속에는 당시의 대표적 기도서인 「공과」와 「첨례표」가 있었고, 그는 묵주신공(묵주기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의병전투의 과정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 그는 패전하여 산속을 헤매면서 12일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정도로 극도의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던 두 동료들에게 가톨릭 주요 교리들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동의를 얻어 대세를 베풀었다. 안중근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고자 그렇게 노력했다.
 
안중근은 1909년 자신의 마지막 의거를 결행하기 전날 밤에도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안중근은 자신이 머물던 집의 객실에서 문을 잠그고 창문 커튼을 친 다음 칼 줄로 권총 탄알 끝을 뾰쪽하게 갈고 †표시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안중근은 장탄한 뒤 “하느님께서 부디 거사의 성공을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십자성호를 그었다. 다음 날 안중근은 그 집의 문을 나설 때에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공을 위해 특별히 기도했다.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와 자신의 신앙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교회에서도 정당방위나 정당한 전투행위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교회의 기준에 비추어보더라도 자신의 행동 또한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십자성호를 긋고 나서 대한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 그의 의거는 국내외에, 그리고 교회 안팎에 많은 파문을 남겼다.
 
이렇게 안중근은 18세에 세례를 받은 이후, 의거를 단행하던 31세가 되던 그때까지도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했다. 그의 그리스도교적 행동에는 그의 의거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성화(聖畵)를 몸에 지닌 채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3) 안중근이 아내에게 한 유언
안중근은 순국하기 전 눈에 밟히는 여섯 살배기 맏아들 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다. 안중근은 그의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그러나 1911년 여름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 당했다.

 

4) 남은 말
안중근이 실천했던 겨레와 나라를 위한 행동에서 우리는 그의 자기희생적 이타심을 새롭게 본받을 수 있다. 또한 그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례를 통해서 그의 인류애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동양평화를 절규했고, 이를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평화사상을 높게 평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고 실천하고자 했던 신실한 신자였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는 그에게서 자기희생적 이타심과 인류애 그리고 평화 정신을 확인하면서 그의 정신을 따라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 다짐해 나가야 할 것이다.
 
100년 전의 안중근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토마스 안중근은 우리 신자들의 영원한 사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