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열한 번째 편지 (서울, 순교하신 신부님들에 대해)

Skyblue fiat 2023. 9. 25. 15:07

● 김대건 부제의 열한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4월 6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리부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이 포졸들에게 자수한 것은 올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고, 또 신자들이 배반자를 제외하고 마치 신부님들을 경멸하고 저버린 사람들처럼 비난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처해 있던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주목하고 인식한다면 어김없이 그들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부님들은 체포될 위험에 놓여 있었고, 또 탈출하기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굶주림에 억눌려 있었고 그들은 거의가 집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다가 체포되어 몰살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인과 포졸까지도 신자들을 동정할 정도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서 계셨고, 또 신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드리려 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자진하여 포졸들에게 가셨고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한사코 만류하지 않았으며, 어떤 신자들은 포졸들이 오기 전에 앞질러 떠나기도 하였음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다지도 좁디좁은 왕국에서 조정은 신부님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고, 주교님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신부님들을 부르셨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에 깔려 신부님들을 수색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불가피한 사정에 몰려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님들을 최후의 형장에 속히 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주교님의 명령에 순명하였고 또 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신부님들은 일시적으로 피할 수는 있었겠지만 당신들이 구하려고 온 자기 양들을 위하여 많은 환난을 무릅쓰고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판단으로는 그것은 과오가 아니라 덕행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졸들을 찾으러나갔습니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인 유다에 의하여 넘겨졌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해 가셨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겼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사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또 그들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은 당신들이 죽은 다음에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으며 목자 없는 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장차 이리와 늑대들이 주님의 양떼를 잡아먹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죽음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몰려와 슬픔에 젖어 목자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고아로 남겨놓고 죽음의 길로 떠나가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였고, 자기들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타일렀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들도 신부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였으나 그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부님들은 미사성제를 봉헌한 다음 길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양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목자들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통곡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떠나자 신자들은 비록 몸은 함께 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신부님들과 결합되어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장차 닥쳐올 사태를 기다리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포졸들은 신부님들을 보자 관례를 벗어나 부드럽게 대하였고 예의바르게 하였습니다. 관장들도 많은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대우를 잘해 주였고 감시를 하지 않았으며 어디를 가든지 허락하였습니다. 밤에도 포졸들이 신부님들을 매우 신임하여 마음놓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그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였고 말에 태워 조심스럽게 끌고 갔습니다.


서울에 끌려온 신부님들은 존경하을 주교님을 뵙고 나서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참아냈고 지극히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 그리스도를 용감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더욱 큰소리로 하느님을 증언하였고,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강요를 당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벌을 극복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에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함으로써 하늘나라로 개선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마지막 박해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 신자들은 비참과 가난에 쪼들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었을 뿐 아니라 박해와 무수한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4년 전부터 박해가 멈추었지만 아직도 평온한 상태는 아닙니다.

지금은 신자들을 죽이려는 적극적 박해는 없지만 신자들은 예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집이라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포졸들이 즉시 그 집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당하고 난 후라 맥이 빠지고 열성이 식어 대다수가 냉담자들이 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열성적 상태로 돌아올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점차 열성이 오르고 그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교자들이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인들에게 설교한 사람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외교인들이 많지만 신자들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자진하여 그들에게 종교를 전하려는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종교를 찬양하고 그 종교가 참된 종교임을 고백하면서 박해가 없었더라면 자신들도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귀의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포졸들은 서로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만일 박해가 없었더라면 누구라도 송아지 새끼가 아닌 이상 천주교신자가 되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천주교는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기는 한데 우리가 만일 신자가 되면 우리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군. 온갖 모욕을 참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여야 한다네. 자기 자신과 사물을 경시하며 모욕을 받더라도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네."

"신자가 되면 세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니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고 비참할 뿐이겠지"

일반적으로 외교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정직하다고 알고 있고 신자들의 비참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박해 때는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어떤 좋은 것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 "필시 천주교 신자의 소행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외교인들끼리도 어떤 것을 올바로 행하면 "자네도 천주교 신자인가? 왜 그렇게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나?"라고 농담을 합니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죽인 왕후(貞純王后)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한 임금님이 없었습니다. 모든 박해는 벽파(僻派) 대신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왕들은 흔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벽파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허락하였을 따름입니다.
1838년에 대왕대비(순원왕후)가 바로 그러하였고 그 다음 몇 해 동안의 마지막 박해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고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대신들이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김 대비의 동생 김두근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 안에 외국인 신부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비신자이고 궁중의 2품 고관인 김정의와 순교자 유 아우구스티노(유진길)와 매우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도 천주교에 가담하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838년경에 중병을 않고 정신을 잃었으며 183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박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출처: 한국성지와 사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