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건 부제의 열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3월 27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신부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에 지극히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몽고를 출발하여 변문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온 신자들이 이미 도착하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 담당 선교지인 조선에 입국하는 데는 난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저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시어 제가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그 가능성 여부에 따라 주교님의 입국을 주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페레올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한밤중에 신자들을 따라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바라보이는 곳까지 왔습니다.
거기에 이르러 연락원들에게 어떠어떠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약속을 하고서 연락원들을 앞세워 보내고 저 혼자 의주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속 어둠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방에 눈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어찌나 지루한지 묵주의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를 향하여 가는데 발소리마저 없이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어떤 곳은 눈이 다섯 자 혹은 열 자나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겨우 약속하였던 곳에 이르러 보니 신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어 두 번이나 읍내로 들어가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습니다.
결국 약속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밭에 앉아 있자니까 처량한 생각이 소용들이치기 시작하여 몹시 심란해졌습니다. 연락원들이 잡힌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락원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에 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여 서울로 가자니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자니 그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올 길이 아주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추위와 굶주림, 피로와 근심에 짓눌려 기진맥진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고대하면서 먼동이 틀 때까지 녹초가 된 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저를 찾아다니던 신자들이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먼저 와 있었는데 저를 만나지 못하자 되돌아갔다가 두 번째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 기다려도 제가 오지 않으니까 모두 걱정을 하면서 5리나 나가서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여 근심으로 밤을 지새운 뒤 절망하고 낙심천만하여 돌아갈까 하던 참에 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신자 일곱 명이 말 두 필을 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중간에 오다가 네 명은 신부님들을 영접하는 어려움과 위험 때문에 낙심하여 뒤에 떨어지고 세 명만 변문까지 왔던 것입니다. 현 가롤로(玄錫文)와 이 토마스(李在誼)와 두 명의 하인은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뜬 뒤에 신자 두 명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뒤 따라오도록 남겨두고 저는 한 명만 데리고 의주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30리를 겨우 걸은 다음 주막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말 두 필을 세내어 타고 닷새 만에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말 두 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던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길을 떠나 7일 만에 수도, 즉 한양에 도착하여 신자들이 마련해 둔 집에 들어갔습니다.
신자들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움과 위험을 염려하여 필요한 신자 몇 명 외에는 아무에게도 저의 귀국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저의 어머님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당부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우리가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귀국하는 대로 즉시 잡아 죽이도록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방안에 갇혀 있은 지 며칠이 지나니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저를 괴롭히더니 마침내 병에 걸렸습니다. 마치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듯이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아팠습니다. 때때로 심하게 아프다가 좀 낫기도 하고, 이렇게 한 보름 넘게 앓았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자 의원과 외교인의원을 청하여 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약을 먹었습니다.
지금 병은 다 나았으나 몸이 허약하여 글씨를 쓸 수도 없고 다른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 20일 전부터는 눈병까지 생겨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련한 처지의 허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의지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롤로(현석문)를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 한 채와 배 한척을 샀는데 그 값이 은 백 46냥이었습니다.
이제 중국 강남성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참입니다. 그러나 신자 뱃사공들에게는 미리 겁먹을까 봐 염려되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두 신자이기는 하지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먼 바다에 나가본 적도 없고 또 배를 조종할 즐도 모르는데다 항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항해술이 능통한 것처럼 이야기하며 설득시켰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즉 조선 배가 국경을 넘어 중국측 해안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그 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는데, 만일 조사해 보고 죄가 있을 경우에는 죽이도록 되어 있고 또 중국 배에 대하여도 조선에 오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 대한 경의와 인자하심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가 무사히 강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실 줄 희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스승님께 몇 가지 청할 것이 있는데 혹 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컴퍼스, 먹 없이 글씨를 쓸 수 있는 검은색 철필, 세계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그리고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올 스승님께, 무익하고 지극히 부당한 종 김해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추신 :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斑點)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天然痘)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명확하게 적어 보내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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