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처럼 온유함과 선으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함께 선포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2월 15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복음화를 위한 열정’에 대한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교황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선교에 대한 가르침”(마태 10,7-16 참조)을 설명하면서 복음 선포가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복음 선포는 단순히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열정적으로 “생각, 마음, 손”이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김호열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화를 위한 열정: 신앙인의 사도적 열정에 대한 교리 교육]
4. 첫 사도직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복음화를 위한 열정, 사도적 열정”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을 계속 이어갑시다. 복음화는 “보세요, 어쩌고저쩌고 (...)”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마음, 손, 행동 등 모든 것을 말입니다. 전인적으로 복음 선포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복음화를 위한 열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교리 교육을 통해 복음 선포의 모델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과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마르 3,14) 하셨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곧 사도들을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그들이 가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순처럼 보이는 한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곧, 사도들을 불러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신다면서, 가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혹자는 ‘이것 아니면 저것’, 다시 말해 함께 머물든지 복음 선포에 나서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함께 머물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복음을 선포하러 나가지 않고 함께 머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해 봅시다.
우선, 함께 머물지 않고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을 “가까이 부르셨다”(마태 10,1 참조)고 말합니다. 복음 선포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활동, 특히 선교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빛으로 빛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꺼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머물지 않는다면 그분 아닌 우리 자신을 내세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헛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머물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러 나가지 않고 머물기만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내면적이기만 한 무엇이 아닙니다. 선포, 봉사, 선교사명 없이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복음 선포에 나설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주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신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그들을 부르시자마자 바로 파견하십니다! 이는 선교 체험이 그리스도인 양성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제자를 위한 이 두 가지 중요한 순간을 기억합시다. 곧,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당신께로 부르시고 그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선교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려진 설교를 하십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 10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복음 선포의 “헌장”과 같습니다. 짧은 분량입니다. 오늘 읽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이 가르침의 세 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곧, ‘왜’ 선포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왜’ 선포해야 하나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다섯 마디 말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면 좋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다섯 마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포해야 하나요?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포는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런 공로 없이 거저 받은 것, 곧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고, 우리가 사랑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아름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만 간직할 수 없을 만큼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파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같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곧,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물을 받았으므로 우리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았고, 우리의 소명은 ‘우리 자신’이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아직 알지 못하는 형제자매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받은 기쁨을 전하기 위해 가서 선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무엇’을 선포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를 잊지 마십시오. 곧, 하느님께서는 항상 백성들 가까이 계셨고, 당신 친히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들 가까이 있는 것만큼 가까이 있는 신이 또 어디 있느냐?” 친밀함은 하느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곧, 친밀함, 온유한 사랑,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고요? 하느님은 가까이 계시는 분, 온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종종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초대합니다. 이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주된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친밀함과 온유한 사랑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항상 중심에 있길 원하고, 주인공이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빚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기보다 나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는 경향이 있고, 경청하기보다 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먼저라면 우리는 여전히 주인공일 것입니다. 하지만 선포는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어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나는 뒤에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측면은 ‘어떻게’ 선포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다루시는 측면입니다. 어떻게 선포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언어로 선포해야 하는가? 이처럼 방식이나 스타일이 증거하는 데 있어 본질적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측면이 중요합니다. 증거는 단지 생각이나 말, 개념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모든 것, 이를테면 생각, 마음, 손, 모든 것을 아우릅니다. 생각의 언어, 애정의 언어, 일의 언어 등 사람의 세 가지 언어 말입니다. 생각으로만, 마음으로만, 손으로만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연관됩니다. 그리고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리와 맞서는 방법, 곧 논쟁할 수 있는 역량, 반론할 수 있는 역량,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숫자가 많아지고, 권위를 가지게 되면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를 존중할 것이며 마침내 우리는 이리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양처럼, 어린 양처럼 세상에 보내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양이 되기 싫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리에게서 지켜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신만의 힘으로 한번 해보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양이 되고 싶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리에게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길 바라십니다. 곧, 흠 없는 마음으로 온유해지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사실 어린양은 유순함, 흠 없음, 헌신,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목자이신 그분께서 당신의 양을 알아보시고 이리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리의 옷을 입은 양들은 정체가 폭로되고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교회의 한 교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린 양인 한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수많은 이리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리가 되면 목자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패배할 것입니다. 목자는 이리가 아니라 어린 양을 먹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33번). 만약 내가 주님의 것이 되려면 그분을 나의 목자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리의 목자가 아니라 어린 양의 목자, 당신처럼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고 친절하신 어린 양의 목자이십니다.
선포하는 ‘방식’에 관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러 갈 때에 가져갈 것을 이르시는 대신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신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 스스로를 사도로 자처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자신의 삶을 바쳤다고 말하면서 이사갈 때 많은 짐을 가지고 가는 경우를 봅니다. 이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가져가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물질적인 확실성에 의지하지 말고, 세상의 것 없이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테면 ‘나는 세속의 스타일이나 세속의 가치, 세속성 없이 세상으로 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성에 빠지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입니다. 홀가분하게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곧,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보다 예수님을 보여줌으로써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보여주냐고요? 우리의 증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끝으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파견하시지만, 홀로 가는 제자는 없습니다. 사도적 교회는 온전히 선교적이며, 선교 안에서 일치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처럼 온유함과 선으로, 세속적인 것 없이 함께 가야 합니다. 여기에 복음 선포의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성공을 부르는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초대를 받아들입시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준거가 되게 합시다.
“‘어린 양처럼 온유함과 선으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함께 선포합시다” - 바티칸 뉴스 (vaticannews.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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