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연옥 영혼의 기쁨
연옥에 대해서는 주로 그 혹독한 괴로움만을 이야기한다. 연옥에서의 기쁨을 설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연옥에서의 기쁨은 죽은이를 위해서나 산이를 위해서도 훌륭한 교훈이 된다.
성화 은총
현세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미움받을만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연옥 영혼은 상존 은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의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부친은 아들의 가슴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곤 했다. 그것은 성세로 말미암아 이 천진한 가슴이 주님의 거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루도비코의 모후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아이들 이마에 입맞추기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이마에 성녀 엘리사벳이 입을 맞추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세례성사 때에 하느님의 입맞춤으로 거룩하게 된 어린이의 영혼이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라면 한평생 스스로 은총에 따라 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불타면서 이승을 떠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어떻겠는가? 연옥 영혼은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반사하는 충실한 거울이다.
연옥에서 가장 신분이 낮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세계와 같다. 그 세계에 하느님의 영광은 영원히 나타난다. 연옥에 있는 제일 못난 영혼이라도 이 점에 있어서는 물질 세계보다 가치 있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만일 신부님께서 상존 은총을 갖추고 있는 한 영혼을 볼 수 있다면 신부님께서는 신부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온갖 고통과 치욕과 가난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고 또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번이 아니라 천번이라도 죽기를 원할 것입 니다.”
연옥 영혼은 청정 결백한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흡사 천사와도 같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죄의 잠벌을 받는다는 것이 몹시 괴로운 것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순명과 인내로써 즐거이 이 고통을 참아 받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도 보태어 느끼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중에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불타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교자는 연옥 영혼의 상징이다.
괴로운 감옥에서도 사랑과 상존 은총으로 인해 연옥 영혼은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다. 그 고통으로 자신이 천국에 맞갖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몹시 갈망하는 것이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연옥 영혼에게 비상한 영향을 주어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이 크나큰 즐거움이 연옥 영혼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지만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로 그들의 즐거움은 점점 더해간다. 또 하느님과 교제하는데 방해가 되는 잠벌이 없어짐에 따라 이 교제는 더 친밀해지기 때문에 연옥 영혼은 비상한 즐거움과 비상한 괴로움을 동시에 느낀다."
영원한 천상 행복의 확정
"관뚜껑을 덮어 봐야 결과를 안다.'
이승에서는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코린 10,12)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를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즐거움과 함께 죄로써 그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정당한 두려움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말했다.
“주님, 제가 오늘 당신을 거스를지도 모릅니다. 부디 저를 믿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을 거스르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굳센 은총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너의 영혼은 연옥 벌을 면제받았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면제가 확정되었다."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하여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마음은 즐거움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연옥 영혼의 기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큰 것이다. 그 영혼은 자기 영혼의 구제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삶을 살았건, 어떤 죄를 범했건 현세를 떠나기 전에 다 사해졌기 때문에 조만간 천국에서 성모님과 모든 천사, 성인과 함께 온갖 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뵈옵고 끝없이 사랑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유명한 신비 신학자 페버 신부는 말했다.
“현세의 덧없고 변하기 쉬운 즐거움을 얻기보다 나는 확실한 거처인 연옥의 가장 낮은 자리를 좋아한다."
거룩한 교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현세에서도 모두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이, 정직한 이, 덕을 갖춘어진 이들과 만나기를 원한다. 하물며 착함과 거룩함의 장소인 연옥에서는 어떻겠는가? 한 집안, 한동네, 한 나라가 모두 일치하여 산다면 세상은 아주 즐거울 것이다. 그러면 연옥은 어떤가? 연옥에서 선인들이 서로를 위로해 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중에 들어간 영혼은 먼저 와 있던 이에게 세상에서 싸우고 있는 교회의 새 소식을 전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인간계에서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친 형제들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연옥 영혼은 의심 없이 천사들, 특히 자기 수호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는 말한다.
"한 영혼이 연옥에 내려가면 그 수호천사가 안에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영혼이 깨끗해질 때까지 문 밖에 서서 가끔 그를 찾아보고 위로해 준다. 하느님의 의노를 풀기 위하여 살아 있는 이의 기도와 선행을 모아서 하느님께 바치고 또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에게 베푸는 것이다."
또 수호천사는 현세의 이들에게 기도를 하고 미사를 바치며 고행을 하라는 등의 권고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연옥 영혼은 상상 이상의 괴로움과 함께 상상 이상의 기쁨을 느낀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며 연옥에서 큰 위로를 받아야 한다. 연옥 영혼이 아직 천국의 완전한 영복은 얻지 못했을망정, 불완전하기는 해도 이승에 있는 모든 즐거움보다 더한 즐거움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위로를 받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에게 동정을 기울여야 한다. 한시바삐 저들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말한다.
"천국에서 누리는 성인들의 복락을 제외하고는 연옥의 즐거움에 비길 수 있는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현세보다 연옥
이렇게 본다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연옥의 관념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보다 위로를 받아야 한다."라고 한 말은 참되다. 두 가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해 보자.
성 필립보 네리와 왕자
성 필립보 네리가 살던 16세기의 일이다. 그 당시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자비로 돌봐 주었기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나라의 바오로 왕자도 늘 성인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왕자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왕비는 성 필립보 네리에게 왕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 그의 곁에 있어 달라고 청했다.
"그때가 되면 알려 주십시오."
성인은 왕비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날 밤 바오로 왕자의 병세가 대단히 나빠졌다. 날이 새기 전에 심부름꾼이 성인을 부르러 갔다. 마침 미사가 시작되었기에 미사를 마치자마자 성인은 왕자에게로 달려갔으나 이미 한 시간 전에 왕자는 죽었다는 것이었다.
성인은 왕자의 손을 잡고 슬픔에 잠겨 침대 곁에 꿇어앉아 기도했다. 그러자 왕자가 홀연 눈을 뜨고 성인에게 말했다.
"아, 신부님이세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고백할 때에 제 죄를 잊어버렸었어요." (왕자의 이 말을 들은 부모 형제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잠시 후 왕자의 고백을 듣기 위하여 신부만 혼자 남았다. 고해성사가 끝나고 성인은 모든 이 앞에서 왕비에게 말했다.
"이제 바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봅시다."
성인은 왕자에게 물었다.
"바오로야, 너는 우리하고 같이 있고 싶으냐, 아니면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신부님,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성인은 왕비에게 말했다.
"왕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자님은 왕비님의 뜻대로 할 겁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모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바오로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곳에 가 있다면 억지로 붙들지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왕자는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왕자는 소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에 돌아오기보다는 그곳에 있기를 원했다. 혹 여러분은 '그건 천진한 어린이였으니까 연옥이 그다지 괴롭지 않았겠지.' 하고 생각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더 감동적인 일화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성 스타니슬라오와 지주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의 주교 성 스타니슬라오는 1079년 잔인한 불레술라우스 왕 때문에 순교했다. 그 수년 전의 일이었는데 주교가 "교회가 어떤 토지를 빼앗았다."라고 고소를 당했다. 주교는 증인 앞에서 대금을 치렀지만 그 영수증을 받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땅을 판 사람은 베드로라는 그 고장의 지주였는데 3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증인은 살아 있지만 불레술라우스 왕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었다. 죽은 이의 상속자인 조카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국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함께 주교를 고소했다. 그래서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남의 땅을 빼앗았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판결은 나라 곳곳으로 널리 퍼졌다.
주교는 3년 전에 죽은 지주를 증인으로 출두시키기 위하여 3일의 말미를 청했다. 비웃음을 샀으나 이 청은 허락되었다. 주교는 사흘간 금식을 하며 기도를 바친 뒤 제의를 입고 성직자와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묘지에 가 지주의 무덤을 파고 그를 부활시켜서 재판소에 데리고 왔다. 지주는 사실을 진술하여 거짓된 증인을 부끄럽게 하고 또 자신의 조카들을 몹시 비난했다. 재판소에서 나온 성인은 지주에게 말했다.
“만일 몇 해 동안 이승에서 지내고 싶으시다면 저는 하느님께 그걸 청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지주는 대답했다.
"저는 연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세에서 영혼의 구원 때문에 불안해하느니 그곳으로 돌아가서 고통받기를 원합니다."
지주는 성인에게 자기가 빨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묘지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기도를 청하면서 무덤에 몸을 누이고 다시 죽었다.
-연옥실화(정화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곳, 연옥) 제 6장. 연옥 영혼의 기쁨
/ 막심 퓌상 지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옮김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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