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사 피카레타의 저술에 의거하여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풀어 쓴
하느님의 뜻 영성 입문서
(청소년용 후편)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녹아든
한 방울의 물 이야기Ⅱ-(2)
지은이 : 세븐드롭스
옮긴이 : 박 요한 실비아
예언자 엘리사는 군대 장수인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하느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리라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모욕당한 듯 성을 내면서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다행히 나아만의 부하들이 나아만을 설득했습니다.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언자의 단순 소박한 지시를 무시하지 않고 실행했으며, 마침내 치유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잊고 이 ‘무(無)’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비록 단순 소박한 지시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 )를 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 하고 말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조언은 시험을 받습니다. 그대가 이미 식료품 상점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식료품상에 가시고자 하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또 아이스크림콘 매장 복판에 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아이스크림콘을 드시고자 하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시점에서는 예수님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멈춰 설 시간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이 ( )를 하고자 하신다.”고 말한 뒤, 그분께서 그 다음의 빈 시간을 채우며 그대에게 말씀하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예수님께서 그대의 삶 안에서 사시도록 허락하면서 진실로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분께서 다음 순간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대는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또 그대가 행할 필요를 느끼는 일이 수없이 많을지라도 더 이상은 부담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맡아 해 주실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일들이 기적적으로 완수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대는 자주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식료품을 사러 가기를 원하신 것은 예수님이시니, 나는 그분과 함께 그것을 사고 있는 중이다.”
또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동안 생각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때에도, 예수님께서 그대에게 속삭이시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놓치지 마라.” 이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은 없습니다. 하루가 평화와 평온 속에 흘러가리니, 그대가 예수님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다면, 마침내 “예수님께서 ( )를 하고자 하신다.” 고 말하면서 매일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의식할 정도로 그분과의 긴밀한 일치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질문은 다만 이것입니다.
그대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도들에게 그날의 일정을 일러주셨을까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은 그래서 순간마다 그분을 뒤따라갔습니다. 다음 순간 그들이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뒤따라가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활동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의 음성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실’ 때에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르게 되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또 하나의 삶을 사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게 해 드립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선물을 진실로 원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나’ 중심의 세계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인식을 바꾸는 것이 성인들이 누리는 ‘지상 천국’을 창조하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사물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악이 빚어낸 환영(幻影)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것으로서, 아버지께서 이미 성인들 안에서 누리시는 그분 창조의 은혜로운 결실을 우리 안에서도 누리시기 시작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가 쓴 수많은 책들로,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우리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서서히 밝혀주십니다. 그분은 영혼 안에 그날그날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특별한 표현들’이라고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만약 기쁨이라면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그에게 구체적인 기쁨을 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만약 고통이라면 그분께서 그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그도 당신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의 변화는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이렇게 설명하실 때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영혼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예수님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대가 예수님 안에 숨은 상태로 그분과 함께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렇게 관점을 바꾸는 일입니다. 하루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분을 동반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간청기도’를 참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활동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의 걸음 안에서 걸으시고, 우리의 음성 안에서 말씀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향하여, 그 질서와 본연의 위치 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 하고자 하신다.”고 말하며 그대의 하루를 지내고, 그렇게 하면서 그대의 그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성’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께서 그대의 활동 속에서 활동하심을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기억하십시오.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인데 그대가 거기에 있는 것은, 그분을 위로하고, 계속 동반하며, 그분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기 위함인 것입니다.
가장 큰 유혹 중의 하나는 그대의 행위와 순례들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면서 하느님을 조종하려고 드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행위와 순례들을 하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내 삶 안의 모든 것을 잘되게 해 주실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그대의 행위와 순례들을 하면서 ― 좋은 일 궂은 일 할 것 없이 ―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모님은 우리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바야흐로 세상의 창조주를 낳으시려고 하는 시점에 어째서 당나귀를 타고 베들레헴에 가셔야 하는지, 어째서 ‘여관에는 묵을 방이 없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다만 “피앗.” (곧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셨을 뿐입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가혹하게 대하신다고 투덜거리면서 “왜 이러십니까?” 하고 묻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떤 상황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려고 질문하는 것은 괜찮지만, “하느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용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왜?”는 자기 본위의 이기적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지옥에서 시작되어 지옥에 묻히기 마련입니다! 또 다른 유혹은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휴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오, 그대는 일이 속히 진척되지 않거나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는 그대의 행위와 순례에 충실하지만, 세상이 그대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거나 그대가 속한 세계의 문제들이 가볍게 풀리면, 『…… 수난의 시간들』 같은 것은 이전처럼 선반 위에 도로 얹어 둡니다. 하지만 비록 한 달간의 멋진 유럽 여행 중이라 할지라도 그대의 (하느님 뜻) 행위와 순례는 계속하십시오.
또 저 모든 여름철 모임에 초대를 받았더라도 그대의 그 행위와 순례는 계속하십시오. 또 거금을 벌었기 때문에 청구서들을 두고 걱정할 필요가 없더라도 그대의 행위와 순례는 계속하십시오. 아무것도 그대를 하느님의 뜻에서 떼어 놓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영혼이 ‘지극히 높은 선’(이신 분께) 이르려면 멈추지 않고 항상 달릴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안에서 행동하시는 예수님께 항상 주의를 기울이면서 순례에 충실하십시오.
(실천 및 명심해야 할 사항. 일람표)
* (순례들을 하라).
* (하느님의 뜻) 행위들을 하라.
* 그대의 십자가를 사랑하라.
* 순명은 성덕을 자라게 한다.
*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다.
* 하느님께 “왜 또는 어째서… ?” 하는 식으로 질문하지 마라.
* 한 순간도 자기의 뜻을 행하느라고 허비하는 일이 없게 하라.
* 늑장부리지 마라.
* 그날 그날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표현들이다.
그대가 하느님 뜻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순례 활동을 하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빛’을 주실 것입니다. 이 ‘빛’은 깨달음의 순간들로, 또는 하느님 뜻의 바다 속에 더욱 깊이 잠기도록 도와주는 진리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주신 실제적인 조언이 더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루이사에게, 진리들을 받게 된 영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빛’이 번개같이 빨리 그들을 떠나게 하기 일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이 빛을 충분히 ‘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진리들이 그들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것을 가르쳐 주실 때에는,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을 활용하십시오. 복되신 어머니께서도 당신의 삶 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마음속에 간직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의 기구(器具)가 너를 잘게 부스러뜨리게 하여, 네 안에 인간적인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하여라.” 그대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감싸이게 되는 데에 필요한 일을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하시는 동안, 그대는 종종 분쇄기 안에서 가루처럼 부스러지고 있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것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루이사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영혼의 주위와 내부에 일어나는 모든 것 ― 비통, 기쁨, 반대, 죽음, 결핍과 만족 등 ― 은 다름 아닌 나의 계속적인 활동이니, 영혼 안에 내 뜻을 펼침으로써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활동이다. 내가 이를 이루면 모든 것이 완수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평화를 주고, 고통 자체도 그 영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의지가 고통보다 더 고귀하고, 모든 것을 대신하며,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대의 내부와 주위에 많은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수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선물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끈기 있게 노력하면서 그대의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고, 그대를 또 다른 예수님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활동에 마음을 열면, 하느님 뜻의 완수에 이를 것이고, 여기에서는 고통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영혼이 거기에 이르고, 나로 하여금 내 의지의 활동을 완수하게 하려고 모든 것을 활용하면, 그때에는 내가 그를 준비시켜 천국에서 살게 한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모든 영혼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지상 천국’이 있습니다. 영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선물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된 뒤에도 고통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고통은 영혼의 정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화 작업은 이미 끝난 상태이기에, 영혼이 현재 느끼는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정의에 배상을 바치기 위하여 자원해서 겪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통을 덜어 드리면서 징벌의 수위를 낮추기 위한 것이고, 또는 영혼들을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루이사가 쓴 책들은 루이사의 진보 과정을 보게 합니다. 심한 투덜거림과 고통과 의심에서부터 (비록 아직도 이따금 고통을 계속 받곤 하지만) 온통 평화가 가득한 ‘지상 천국’에 이르기까지의 진보 과정입니다. 그 평화는 모든 영혼들에게 소용될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활동에 마음의 문을 열고, 저 ‘빛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곧 잘 ‘씹으며’) 계속해서 저 행위와 순례 여행을 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그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 살며 받는 고통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두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그 하나는 정화를 위한 고통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처럼) 산 제물 (victim soul)로서 겪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고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대의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라.”는 말은 유익한 권고이지만, 그대가 이 행위와 순례란 것이 정녕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별로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행위와 순례’ 또한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충실히 최선을 다해서 하면, 하느님께서 ‘빛’을 주시어 순례 여행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는 예수님을 계속 동반하는 한편, 그대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해 주신 그분의 숨은 생활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 (하느님 뜻의) 행위와 순례의 신비를 밝히는 빛이 발산될 것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의 숨과 심장 박동과 행동과 생각과 말씀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뜻으로 행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적인 뜻도 있었지만 매 순간 그것을 신적인 뜻에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 하는 것에 대한 말씀들이 복음서에도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행위의 중요성을 루이사에게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신적인 행위들은 인간적인 행위들을 죄다 신성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세기에 걸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신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 모든 세기에 걸쳐 수행된 인간의 모든 행위를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은 영혼들 자신에 의해 수행된 행위들처럼 보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훨씬 전부터, 즉 마리아 안에 잉태되신 순간부터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의 첫 심장 박동으로 모든 인간의 심장 박동을 신적인 박동으로 바꾸시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행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은 그대 안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인 까닭에 그대 안에서 또다시 사시는 것입니다. 그대의 삶 안에서 계속 숨 쉬고 움직이며 생각하고 말씀하시니, 그 모든 거룩한 행위들이 모든 세기의 모든 영혼들에게 불어나면서 인간적인 뜻으로 행한 행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사랑과 영광을 계속 받으시게 됩니다. 그러니 첫 사람에서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행위가 거룩한 행위 ― 거룩하신 하느님께 유일하게 합당한, 거룩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들 역시 그 거룩한 행위들에 응하기로 한다면 그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행위는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태양처럼 사람들을 내리비추어, 어떤 이들은 아름답게 하고, 어떤 이들은 은총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고, 어떤 이는 냉혹한 마음을 벗게 하고, 어떤 이는 온유한 마음을 지니게 해 준다. 또 어떤 이들 안에서는 어둠을 흩어 없애고, 어떤 이들에게는 정화와 열정의 은혜를 주어, 그들 각자의 원의에 따라 크든 작든 그 자신에게 필요한 갖가지 효과를 내게 한다. 따라서 내 의지 안의 행위가 하나씩 더 보태질 때마다 모든 피조물을 내리비추는 태양 역시 하나씩 더 불어난다.” 비록 믿을 수 없는 일로 보일지라도, 기억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매 순간 우리의 인간적인 뜻을 하느님의 뜻에 산 제물로 바칠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순간이란 없습니다.
한때 루이사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일을 하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손가락이 너의 손가락 안에서 일하고 있다. 내 딸아,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나 자신을 낮추어 목재 작업이나 망치로 못을 박으면서 내 양부 요셉을 도왔던 내가 아니냐? 그 일을 하면서 바로 그 손과 손가락으로 영혼들을 창조하는 한편 다른 영혼들은 저승 삶에로 도로 불러가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신성하게 하였다. 모든 행동을 성화하면서 각각의 행동에 신적인 공로를 부여하였다. 내 손가락의 동작으로 네 손가락의 모든 동작들과 다른 사람들의 모든 동작들을 차례차례 불렀다……나는 그들 안에서 (예컨대 루이사의 손가락 안에서) 나의 나자렛 생활을 계속한다……내가 나자렛에서 영위했던 숨은 생활을 사람들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은 실상 나의 수난을 제외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베풀 수 있었던 가장 큰 선이었다.”
그대가 그대의 인간적인 뜻을 씀으로써 저 거룩한 행위의 연속을 중단시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를테면, 그대가 방금 이웃에게 불친절한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 순간은 거룩하지 않고, 따라서 인간적인 행위를 신적인 행위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대에게, “나는 거룩한 하느님이니, 네 안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너를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네 안에서 내 얼굴에 가해지는 또 하나의 타격을 받을 작정이다. 네가 그 못된 말을 중얼거린 죄에 대한 보속을 아버지께 바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에도 아버지께서는 받아 마땅한 영광을 여전히 받으시지만, 예수님께서 치르신 희생의 대가로 받으십니다.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으면, 한 순간도 그대의 뜻을 써서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듭거듭 실패하리라는 것과 그래서 당신께서 때때로 우리 모두 안에서 계속 수난 고통을 겪으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떠날 마음이 없으십니다.
완성의 길은 멀지만 그 일을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종 실패하더라도 그대에게는 아직 하느님의 뜻 선물이 있습니다. 그 선물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물론 그대가 어떤 죄를 끊어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그분의 뜻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선언하는 셈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삶이라는 선물을 사실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대가 그 선물을 원한다면 원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모든 행위가 저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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