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울 물이야기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녹아든 한 방울의 물 이야기Ⅱ-(1)

Skyblue fiat 2017. 2. 10. 16:45

 

루이사 피카레타의 저술에 의거하여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풀어 쓴

하느님의 뜻 영성 입문서

(청소년용 후편)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녹아든

한 방울의 물 이야기Ⅱ-(1)

 

지은이: 세븐드롭스

옮긴이: 박 요한 실비아

 

 

 

헬렌과 다른 여러 산 제물인 영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이 책은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녹아든 한 방울의 물 이야기」의 후편입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께서 루이사 피카레타를 하느님의 뜻 안으로 더 깊이 끌어당기시려고 주신 권고나 조언이나 지식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루이사의 책은 그 권수가 상당히 많은데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지식의 보화를 그토록 많은 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따금 압박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는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주셨고,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주신, 소중한 ‘빛’인 몇몇 구절들을 따로 뽑아 보았습니다. 이 ‘빛’이 나타내는 것은 한낱 물방울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도록 귀중한 물방울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진리의 끝없는 바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거의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면, 목적의식이 뚜렷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동참을 허락하시는 계획이 있으니, 이 지상에 그분의 나라를 다시 세우시려는 계획입니다. 그대가 완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있으면, 낮이나 밤이나 매 순간이 하느님의 그 계획 달성에 쓰일 것입니다. 한데 그분의 뜻에 완전히 감싸인 상태로 있으려면 많은 희생과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완전히 감싸여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오직 이렇게 물으실 뿐입니다. ―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이 선물은 그것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쉽게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보다 더 큰 선물을 주실 수는 없으리니, 곧 그분 신성의 한 몫을 ―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전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알 필요가 있는 것도 다 알 수는 없고, 영원 속에서 점차 알아갈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루이사 피카레타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선물에 대하여 총 36권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부분이든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면,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그만큼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루이사는 자신의 그 책을, 사람이 바다에서 걸어 나올 때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물방울들을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대한 진리들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성장하려면 이 선물에 대하여 계속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느님 뜻의) 행위와 순례를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행위들과 순례들이 바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의 활동이니, 이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뜻 안에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하느님 뜻의 바다에 발끝만 담그고 있는 격일 것입니다. 그대가 그 활동에 충실하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대를 깨끗하게 만드시어 그분의 거룩하신 뜻 안으로 더 깊이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 행위들과 순례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병들어 심히 앓고 있습니까?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마음속에 의혹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온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보입니까?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예의 그 일이 성사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정화 작업은 그대 안에서 세속적이고 악마적이고 육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니, 때때로 그대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대의 그 행위와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하느님 뜻의) 행위와 순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순례는 (하느님 뜻 안에서 행하는) 그대의 전(全) 활동 중 한 부분으로서, 그대가 예수님을 부르며 그대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시도록 청할 때, 그 “하느님 뜻에 바치는 간청기도”의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특별한 기도, 곧 예수님의 기도가 되고, 예수님께서 2천여 년 전 지상 생활을 하실 때에 바치신 기도의 연속이 되기도 합니다. 그대가 하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 동안 하신 행위들의 연속입니다.

 

하느님 뜻이라는 선물의 본질은 그대의 인간적인 뜻을 매 순간 하느님의 뜻과 하나되게 함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또 한 번의 지상 생활로 영혼들 안에서 구원 사업과 성화 사업을 계속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믿기 힘든 사실입니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가 질서와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 안에, 그 질서와 본연의 위치 안에 있었습니다. 그 질서와 위치와 목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만이 그대가 이 (하느님 뜻) 선물 안에 성장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더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어디에서 그것이 끝날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와 본연의 위치와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한 이해와는 거의 담쌓고 지내는 것이 현대 세계의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일터를 오가는 우리를 감시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때때로 천사나 은총을 내려 보내고, 또는 기도에 응답하기도 하는 존재 ― 이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하느님관(觀)인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하느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단지 우리를 굽어보기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하는 일을 하시며 즐기셨습니다. 그들이 산책을 하면 그들 안에서 산책하며 즐기셨고, 그들이 짐승들과 놀거나 강물 속으로 뛰어들거나 꽃송이들을 따거나 하면 하느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뒤에 앉아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뜻을 선물로 받았고, 하느님의 본질인 그 거룩하신 뜻을 써서 모든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뜻을 처음으로 쓰자마자 하느님 뜻 선물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도 그들 안의 낙원을 더 이상 즐기실 수 없게 되셨고, 오히려 그들의 영혼이라는 동산에서 (겟세마니에서처럼) 고뇌를 겪게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영혼 안에서 그러한 고뇌를 6천 년 동안 겪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을 우리에게 다시 선물로 주심으로써, 기꺼이 이 선물을 받아들여 그 안에 성장하는 영혼들 안에서 다시금 저 낙원을 가지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천상의 성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그들 각자 안에서 갖가지 색다른 낙원을 즐기십니다. 그분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 바오로 안에서는 말을 타시는 한편, 아브라함과 성 비오 신부 안에서는 산책을 하시고, 성녀 아녜스와 성 에디트 슈타인 안에서는 노래를 부르시고,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안에서는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를 즐기시고, 아인슈타인과 엘리아 안에서는 어떤 별의 폭발을 지켜보시고, 복되신 어머니와 마더 데레사 복녀 안에서는 초콜릿을 잡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이 일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 프란치스코와 성 바오로와 아브라함과 여타 모든 이들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내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빛을 내게 하고, 행성들이 그들의 위치를 지키게 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 안에서도 활동합니다. ― 성인들의 통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요 그 질서이며 (우리 본연의) 위치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즐거움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그분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 사랑의 일부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발하시는 성령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넘쳐흐르는 사랑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교회가 쓰는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인성인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우리와도 그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 루이사 피카레타에게 하느님 뜻 선물을 맡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의) 행위들과 (영적) 순례들을 계속하는 것이니,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그것을 실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께서 그대를 질서와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에 필요한 일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 지상에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천국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의 활동에 전념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대의 영혼 안에서 하시겠다고 루이사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시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뜻 계약서

 

하기 서명자인 본인은 2017년 2월 10일인 오늘, 하느님께서 저를 창조하신 목적과 질서와 위치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다음 3가지를 실천하기로 약속합니다.

 

1. 하느님의 뜻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 가기

2. (하느님 뜻의) 행위들을 하기

3, (영적) 순례들을 하기

 

 다음은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1. 그 사람을 속속들이 정화시켜 주리라.

2. 그를 하느님인 나 자신으로 가득 채우리라.

 

 

루이사가 쓴 36권의 『천상의 책』은 완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가려고 예수님과 함께 순례 여행을 하는 영혼에게는 실로 도로(道路)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실용적인 권고를 루이사에게 주셨는데, 이 권고 말씀들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아시기에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각 영혼의 여행은 저마다 독특하지만 공통적인 체험도 많기 때문에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져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갖가지 모양과 크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하여 수없이 여러 번 루이사와 토론하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올바른 관점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십자가들은 유익합니다. 그리고 강력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은 그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그대의 십자가를 합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엄청난 가치 속으로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가게 하십니다. 즉, 그대가 예수님의 제물에 합하여 바친 제물을, 아버지께서 마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영혼들이 몸소 하느님께 바친 제물처럼 보십니다. 하느님 뜻의 능력으로, 제물이 다만 그대에게서만 온 것이 아니라, 수없이 불어나서 모든 영혼들에게서 온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순간, 하던 일을 뚝 그치고 무릎을 꿇은 채 십자가와 합쳐진 그대의 고통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영혼들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 아버지께 봉헌헌다면, 얼마나 굉장한 선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십자가를 질 때 일어나는, (또 더 굉장하게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현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救贖) 사업을 계획하실 때에 하느님의 뜻 안에서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고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고 가실 십자가를 처음 보신 순간에 “오, 사랑스러운 십자가야!” 하시며 끌어안으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것을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를 친히 지심으로써 영혼들에게 하늘을 열어 주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러분이 자신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죄에 대한 보속으로 여러분의 고통을 바칠 때 나오는 유익한 결과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도 우리의 일상적인 십자가들 앞에서 불평을 그치고 “오, 사랑스러운 십자가야!” 하고 외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하기야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순례들을 계속할 경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실 변모의 일환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이 우리의 인성에 “접목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십자가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여러 길들 중 하나라고 하시지 않고,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신성이 여러분의 인성에 접목되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창조된 목적과 질서와 그 위치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이 길을 따라 그분의 지상생활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일단 접목이 이루어진 뒤에는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순명이야말로 영혼 안에 하느님의 성덕들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장상에 대한 순명, 부모와 스승과 교회에 대한 순명이 포함됩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참성덕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그분의 거룩하신 의지안에 사는 것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텔레비전을 너무 오래 보지 말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예수님께, “오셔서 제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셔요.” 하고 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 선물의 힘으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따금 루이사도 ‘순명’을 두고 갈등을 겪곤 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은 저에게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누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네가 죽은 뒤에 내가 연옥에 있는 너의 손에 뜨거운 불 펜을 쥐어 준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말하겠느냐?’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내십니다. 표징이나 장상이나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귀띔해 주실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대에게 장상이 있다면, 그 장상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그대에 대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장상이 없다면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일상적인 실천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큰 신뢰가 요구됩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사도, 자기가 현재와 같은 상태로 침상에 붙박인 채 글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여러 번 되묻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었을 때에 어떤 성인이 나타나서 그녀가 그런 상태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달리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명백한 표징을 그분에게서 받았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 성인의 이 충고는 그대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대가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대가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라면, 마음 편히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다른 어떤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는 명백한 표징을 그대에게 주셨다면, 그대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음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하느님의 뜻 선물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실행하도록, 순명을 통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성덕들이 그대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설명해 주셨듯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서 인간적인 것을 비우시리니, 모든 것(이신 하느님 자신)으로 충만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정화시키실 때면, 그대의 몸에 배어든 악습이나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여러 모로 분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늑장 부리지 말고 (곧바로 대응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꾸물거리다 보면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가 주님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만류하자, 예수님은 홱 돌아서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또 사탄 자신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자를 즉각 물리치셨습니다.

그대도 유혹을 당할 때에 늑장 부리지 마십시오. 즉각 대응하여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의 싸움터에 대해서는 이것이 특히 좋은 충고가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이를테면 공포나 걱정이나 증오나 실망이 갑자기 뇌리에 뛰어들어 부산스럽게 굴면 곧바로 물리쳐서 한바탕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의 생각 안에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보여주신 대로, 거룩한 질서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생각이 저마다 가시가 되어 찌르는 참혹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 특히 이 마음의 싸움터에서 ― 늑장을 부려, 예수님께 가시관 고통을 더 많이 보태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죄들 가운데 하나는 혀로 짓는 죄입니다. 남의 말을 하기를 그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라나면, 하느님께서 갖가지 상황을 만들어 내시어 그대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도록 가르치실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루이사에게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주셨습니다. ― “네 이웃을 쳐다보지 마라. 그러면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선물을 받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할 때에는 단 한 순간도 남을 심판하느라고 허비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실행에 옮겨야 할 행위와 순례들이 너무나 많이 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또 하나의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심적 태도로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무가치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간청기도’가 “저희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옵니다.”로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 순간 우리에게서 물러가시면, 우리는 한 줌의 먼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그 숨을 매번 천사의 날개에 태워 가져가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매 순간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을 존속시키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 특히, 아무도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 그 진리를 받아들이 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기는 해도 실행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실행에 옮기려면,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쳐야 할 것입니다. 그대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참으로 인정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무슨 생각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생각할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딸아, 영혼이 자기를 잊으려면 그가 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마치 내가 그 영혼 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가 만약 기도하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할 일이다.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기도한다. 일을 해야 할 때에도 ‘예수님께서 일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하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식사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다.’ 등 삶 속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일이다. 이와 같이 할 때라야 비로소 영혼이 자기 망각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기 때문에 하고, 또한 나 자신이 그것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 그것이 바로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니 말이다.” 이 조언의 의미는 간단명료합니다. 질문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 그대는 기꺼이 이렇게 하겠습니까?

즉, “예수님께서 식료품상에 가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약간의 식사를 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천상의 책』 중) 한 권을 읽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한두 바퀴 순례를 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잠자리에 들고자 하신다…….” 하고 말하면서 기꺼이 그대의 하루를 보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좀 바보스러워 보입니까?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출처] 하느님 뜻의 끝없는 바다에 녹아든 한 방울의 물 이야기Ⅱ-(1)|작성자 도미니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