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50, 희생의 가치와 효과
1922년 8월 12일
1 홀로 다정하신 예수님께서만 아실 정도로 심한 압박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분만이 내 하찮은 심정의 모든 가닥을 낱낱이 살피시고, 이 고통의 모든 강도를 헤아리실 수 있는 것이다. 측은한 생각이 드셨는지 그분은 오시자마자 당신 팔로 나를 떠받쳐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를 위해 여기에 있다. 무엇이 두려우냐? 내가 너를 떠나 버린 적이 있느냐? 네가 어떤 희생을 치르든지 한 발자국도 내 뜻을 벗어날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너의 행위와 고통 하나하나의 생명인 나야 너를 떠날 마음이 더욱 없지 않겠느냐?
3 그런데 내 뜻은 극히 순수한 금이니 ― 너는 알아야 한다.― 너의 뜻도 순금이, 순금 줄이 될 수 있다. 이 순금 줄이 내 뜻이라는 금줄과 함께 짜임에 따라 어느 것이 네 것이며 어느 것이 내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4 여기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희생과 고통뿐이다. 내 뜻의 금줄이 너의 인간적인 뜻의 줄을 태워 없애며 대치하기 때문이다. 너의 것을 나의 것에 일치시켜 단일한 줄이 되게 하여, 이 줄이 영원의 거대한 바퀴 전체를 엮으면서 도처로 퍼져 나가 모든 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5 그러나 나의 뜻은 금인데 너의 뜻은 쇠라면 너의 뜻은 뒤처진 상태로 있게 될 것이고, 나의 뜻은 자신을 낮추어야 너의 뜻과 함께 짜일 수 있을 것이다.
6 네가 만약 모양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금붙이를 가지고 있다면 함께 녹여 하나의 금덩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때에는 녹이기 전의 것들을 따로따로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금이고 또 하나는 쇠라면 함께 녹여 하나의 금덩이를 만들 수 없다. 오직 희생만이 인간 뜻의 본성을 바꿀 뿐이다.
7 희생은 녹이며 태워 없애는 불이다. 희생은 거룩한 것이며 인간의 뜻 안에 하느님의 뜻을 축성하는 능력이 있다. 희생은 은총이니, 그것의 능숙한 붓질로 인간의 뜻 안에 신적인 것의 형상과 특징을 선명히 그려 넣는다. 여기에 네 고통이 증가하는 이유가 있다. 즉, 이 고통들이 너의 뜻을 나의 뜻과 하나로 엮어 결국 도처로 퍼져 나가게 하는 데에 필요한 마지막 붓질인 것이다.”
8 “아, 예수님, 저의 모든 고통은 저를 죽일 것처럼 보일 정도로 혹독한 것이지만, 그래도 저를 압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원하신다면 더 많이 주십시오. 그러나 저를 짓누르는 고통이 무엇인지는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이 고통에 대해서만은 주님께 자비를 간청합니다.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마음에 드신다면, 부디 저를 도와주시어 여기에서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9 나의 이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너의 그 고통에도 내가 함께 있겠다. 내가 네 도움이 되어 네가 그 고통을 잘 참아 견디도록 힘을 주겠다.
10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너의 원을 풀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이 높은 일을, 곧 내가 내 뜻 안에서 살도록 너를 부른 이 숭고하고 유일무이한 사명을 내 교회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 수행하게 한다면, 내게 온당치 않은 이상한 일이 될 테니 말이다.
11 그 밖에도 네가 이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은 나의 뜻과 내 한 성직자에 대한 순명을 통해서였다. 그가 계속 개입하기를 원치 않으면 그때에는 너에게 순명을 줄 수 있고, 그러면 너는 순명으로 이 일을 하게 되므로 너와 나 사이의 완전한 일치는 그대로 유지된다.
12 사실 너 혼자 너 자신의 뜻으로 이를 행한다면, 너와 내가 일치 안에 머무를 수 없을 뿐더러 너는 보기 흉하게 손상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13 아무튼 ― 그들은 알아야 한다.― 세상은 현재 화형대 위에 처해 있다. 그들은 내가 그 위에 불길이 솟아오르게 하여 모든 것을 재로 만들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를 원하고 있는 격이다.”
14 나는 간담이 서늘해진 채 전보다 더 큰 괴로움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행할 각오로 있었다.
14권-51, 하느님 뜻 안에서 수행된 예수님과 성모님의 행위의 특색
1922년 8월 15일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상태로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의 팔에 나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너는 내 뜻 안에서 내 인성의 모든 행위들을, 내가 여기에 모든 피조물을 함께 엮어 짠 행위들을 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하올 엄마의 모든 행위들도 볼 터인데, 이는 나의 행위들과 함께 짜여서 오직 하나의 행위를 이루고 있었다.
3 그분은 내가 당신 태중에 잉태되자마자 나의 행위와 당신 행위를 섞어 짜는 그 작업을 즉시 시작하셨다. 그런데 나의 인성은 홀로 내 아버지의 뜻 외에는 다른 생명도 음식도 목적도 없었으니, 아버지의 뜻이 모든 것 안에 흘러들면서 나로 하여금 각 피조물의 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아버지께 돌려드리게 했고, 나 자신을 모든 피조물의 생명으로 내어 주게 하였다.
4 마찬가지로, 나와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하신 엄마 역시 모든 이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돌려드렸고, 당신 자신을 모든 피조물에게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나의 행위들과 함께 내 엄마의 행위들도 생명으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5 이제 그분은 하늘에서 각 피조물의 모든 영광을 다 지니고 계신다. 내 뜻이 그분에게 각 피조물의 모든 영광을 다 드렸기 때문에 그분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영광이 없고 그분에게서 내려오지 않는 영광도 없다.
6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활동과 사랑과 고통 등등을 나의 것과 섞어 짜셨으므로 지금은 하늘에서, 내 뜻 안에서 행하셨던 그 작업의 수만큼 많은 영광에 휩싸여 계신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만물을 능가하고 만물을 포함하며 만물 안에 스며드시는 것이다.
7 그러한 것이 내 뜻 안에 사는 것의 의미다. 만일 내 사랑하올 엄마의 행위들이 내 뜻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이와 같은 영광을 받으실 수 없었을 터이니, 그 행위들로 말미암아 그분이 모든 이의 여왕, 모든 이의 영관(榮冠)이 되신 것이다.
8 이제 나는 너도 내 뜻 안에 있기를 바란다. 하나로 섞어 짜는 일이 나와 내 엄마 둘 사이의 일이 아니라 너를 포함해서 셋 사이의 일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9 내 뜻은 한 피조물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 찾아낼 수 있도록 너를 넓히고자 한다. 너에게 얼마나 큰 선이 올 것인지 보이지 않느냐? 네가 참으로 큰 영광을 내게 줄 것이며, 참으로 큰 선익을 모든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이다.”
14권-52, 예수님의 내적 고통과 수난 고통의 관계 및 차이
1922년 8월 19일
1. 평소와 같이 있노라니,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각 사람을 위해 겪으신 당신의 고통들과 죽음들 일부를 겪게 하셨다. 그 일부를 통해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고 치명적인 것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나의 고통은 인간 본성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내적 고통에 비하면 내 수난의 고통은 내적 고통의 그림자 내지 비유에 지나지 않았다.
3. 내 내적 고통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어서 힘줄 한가닥도 그분의 타격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 수난 고통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는 인간이 끼친 고통이어서 그들이 원한 대로 내 힘줄 하나하나까지 사무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4. 내 내적 고통은 내 인성 안에 육화되었다. 그러므로 내 인성 자체가 못과 가시와 채찍과 상처로, 순교적 고통으로 변화되었다. 너무나 잔혹한 고통이어서 이것이 내게 계속적인 죽음들을 주면서 나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이 되었다.
5. 반면에 내 수난 고통은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가시며 못이 내부로 파고들었지만 결국은 뽑혀 나갈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 아픔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6. 하지만 내적 고통은 바로 나 자신의 살이 되어 있었으므로, 뽑혀나간다거나 가시와 못이 꿰찌르는 격통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없는 것이었다.
7. 내 내적 고통은 그토록 크고 종류도 가지가지였기 때문에, 정작 수난 고통은 이 내적 고통에 주어지는 위안이요 입맞춤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두 가지 고통이 한데 뭉쳐,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내 크고 넘치는 사랑의 최종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8. 내 외적 고통은 따라서 내적 고통의 바다 속으로 들어오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내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9. 그러므로 너도 네가 받게 된 내 내적 고통의 일부를 통하여 어느덧 내 고통의 지속적인 강도를 깨닫게 되었다. 용기를 내어라. 나를 이리로 몰아대고 있는 것은 사랑이니 말이다.”
14권-53,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고통의 샘과 기쁨의 샘이 공존한다.
1922년 8월 23일
1 나의 내면이 내 하찮은 존재의 파괴와 죽음을 끊임없이 새로이 겪고 있는 듯한 괴로움에 눌려 허덕이고 있었다. 예수님께 힘을 주시기를 간청하자, 그분께서 오셔서 나를 팔에 안으시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 새 생명은 그러나 새 죽음을 받아들일 기회로 주신 것이었고, 그 뒤에 또 하나의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내 뜻은 모든 것을 내포한다. 내 뜻 안에 모든 세기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노고와 고통과 비탄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3 이런 이유로 내 인성은 모든 것을, 곧 피조물의 모든 노고와 고통을 낱낱이 내포하고 있었다. 내 삶은 바로 하느님 뜻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 사업의 성취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고통과 비탄과 노고의 왕이 되고 도움과 힘이 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4 내가 만일 모든 고통과 비탄과 노고의 샘을 내 안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피조물의 모든 노고에 필요한 모든 도움과 지원과 힘과 은총의 샘을 소유한, 모든 것의 왕이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여러 번 말했듯이, 영혼이 내 뜻 안에서 살도록 부름 받는 이 사명은 가장 크고 높고 숭고한 사명이다.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은 달리 없다.
6 그것은 내 의지의 무한성이 모든 고통과 노고와 비탄을 그 영혼에게 다다르게 하고, 나 자신의 뜻이 이들을 견딜 신적인 힘을 그에게 주면서 그 안에 고통과 비탄의 샘을 만들고, 내 뜻이 그를 모든 고통과 비탄과 노고의 여왕으로 지정하기 때문이다.
7 알겠느냐, 내 뜻 안에서의 삶이 의미하는 바를? 이는 하나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고통을 겪는 것이고, 하나의 노고나 비탄이 아니라 모든 노고와 비탄을 겪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 뜻이 그의 생명이 될 필요가 있다. 내 뜻 말고 누가 그 많은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힘을 주겠느냐?
8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내 뜻 안에서 사는 영혼을 일컬어 순교자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가 내부에 그 고통의 실질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이의 힘이 될 수 있겠느냐? 하나의 말투나 허구(虛構)일 뿐, 실제적인 힘이 되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9 너는 이 말을 들으며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한데,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저 숱한 고통과 비탄과 노고는 셀 수 없이 많은 기쁨과 만족과 은총의 보상을 받게 된다. 나 자신의 의지가 이 기쁨과 만족과 은총의 마르지 않는 샘이기 때문이다.
10 이는 올바른 처사다. 내 뜻이 그 안에 사는 영혼 안에 온 인류 가족의 도움이 되도록 고통의 샘을 만든다면, 기쁨과 은총의 샘도 만드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11 그 차이점은 이러하다. 이 세상 것은 제아무리 큰 것이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고통의 샘은 끝이 있는 반면, 기쁨의 샘은 저 위에서 오는 신적인 것이기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내 뜻 안의 길을 따라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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