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권 복음준비 1p~10p
※ 통독한 뒤 마음에 세길 구절 1~2개를 나눕니다. (선정한 이유 등의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합니다)
마리아 발또르따의 인물과 작품
출생과 유년
마리아 발또르따는 1897년 3월 14일 이탈리아의 카세르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롬바르디아 주 출신으로 카세르타는 임시 거주지였다. 1862년에 만토바에서 태어난 아버지 조셉은 제19기병연대의 하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1861년에 크레모나에 태어난 어머니 이시데 피오라반찌는 프랑스어 교사였다. 어머니가 난산으로 다시 자녀를 갖지 못하게 되어 마리아는 결국 무남독녀가 되었다.
그녀가 생후 18개월이 채 못 되었을 때 그 가족은 로마냐 지방의 파엔짜로 이사했고, 몇 년 후인 1901년에는 다시 밀라노로 이사했다. 그녀는 그곳의 비아 만쪼네에 위치한 우르술리네 자매회의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여기서 4살 반의 그녀는 사랑으로 인하여 자발적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처럼 됨으로써 그분을 위로해드리려는 갈망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월 7세 때 그녀는 비아 벤티 세템브레에 있는 마르셀리네 자매회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학급에서 1등을 했다. 1905년 5월30일 그녀는 그 학교에서 거룩한 안드레아 페라리 추기경에게서 견진성사를 받았는데, 그때 그녀에게 사랑의 성령이 주입되었다.
1907년 9월 아버지의 전근으로 그녀의 가족은 보게라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녀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프랑스에서 망명해온 수도회에서 목요일마다 받았던 프랑스어 수업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영혼을 하느님과의 교감에 이르게 했다. 1908년 10월 첫째 주일날 그녀는 까스뗏지오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그녀는 자기가 아주 사랑하는 아버지가 참석하지 않아서 몹시 슬퍼했다. 아주 엄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의 남편이 거기 참석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몬짜의 기숙학교에서
1909년 3월 마리아는 어머니의 습관적인 횡포한 태도로 인하여 12살의 나이에 강제로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가장 거룩한 아이 마리아의 사랑의 자매회가 운영하는 몬짜의 아름다운 비앙꼬니 학교였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의 관대하고, 확고하고 강하고 충직한 성격은 그녀를 발또르띠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했다. 그녀는 공부, 질서, 순종으로 인하여 모범생으로 불렸다.
그런데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기술과정을 공부하도록 결정했는데,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 그녀는 시험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집중적인 공부를 통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했고, 늘 성공적으로 교과과정을 이수했다.
4년간의 끔찍했던 세월을 보낸 후 1913년 2월 그녀가 그 학교를 떠나라고 명령한 것 역시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평화의 둥지를 떠나야 했다. 고통스러운 미래를 예감한 그녀의 가련한 마음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떨었다.
그녀가 그 학교에서 참석한 마지막 영적 훈련은 카차니 주교가 실시한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그녀는 세상에서 곧 닥쳐올 자신의 모든 삶의 항구한 열매와 자기의 장래의 삶을 위한 프로그램을 얻기를 원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분 자신을 그녀의 영혼에게 계시하셨으며, 그녀가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그분과 관련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해하게 하셨다.
피렌체에서
1913년 9월 발또르따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했다. 이때는 그녀의 아버지가 건강상의 이유로 군대에서 제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주 아버지와 함께 피렌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종교적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녀는 피렌체에서 로버트를 만났다. 그는 미남이고, 부유했으며, 교양이 있었다. 또한 그는 착하고,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그들은 서로 ‘조용하고, 인내하고, 존경하는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그 우정 어린 사랑의 꽃봉오리를 따내도록 강요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9년 후 마리오와의 약혼 시에도 일어났다. 마리오는 ‘착한 남자이자 용감한 장교’가 되기 위하여 보호와 사랑이 필요한, 어머니 없는 매력적인 젊은이였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필수조건이었으나, 그녀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닫고 나서 하느님께 가기로 했다.
꿈
1916년 봄 절망과 욕구 사이에서 번민했던 힘든 시기에 주님께서 꿈을 통하여 그녀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하여 돌아오셨는데, 그 꿈은 그녀의 일생동안 ‘생생히’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문학 작품의 특징인 각성상태의 환상(waking vision)들을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복음 환상에서 속죄와 축복의 손짓과 아울러 훈계와 경건의 말들로 그녀를 도우셨는데, 그녀에게는 그것이 자기를 완전히 정화하는 씻김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무언가에 의하여 영혼이 조명되면서 깨어났다.
사마리아 간호사
하지만 그녀의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는 여전히 멀었다. 1917년 그녀는 사마리아 간호사들 진영에 들어갔고, 연애하거나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18개월간 피렌체의 군병원에서 장교들이 아니라 사병들을 위하여 봉사했다. 이러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하느님께로 즐겁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등에 받은 타격
그것은 그녀가 점진적으로 희생제물이 되기 시작한 것을 상징하는 몰지각한 폭력행위였다. 그것은 1920년 3월 17일 발생했다. 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한 젊은 범죄자에게 등을 강타당했다. 그는 침대에서 뽑아낸 쇠막대기를 들고 그녀의 뒤에서 다가와 온 힘을 다하여 그녀를 타격했다. 그로 인하여 그녀는 3개월간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완전한 불구가 될 전조였다.
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같은 해 10월 그녀는 부모와 함께 한 호텔의 소유자인 그녀의 사촌들인 벨판티 가의 손님으로 레지오 칼라브리아로 갔다.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그녀의 영혼을 되살아나게 했고, 그녀의 사촌 크로틸데가 소장한 매우 아름다운 책들은 그녀에게 배움의 건강한 욕구에 대하여 일시적 휴식을 주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또 다른 ‘힘찬 분발’을 주기 위하여 한 책을 활용하셨다. 안토니오 포가차로가 쓴 ‘성인(the Saint)’은 그녀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표를 새겨 넣었는데,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마리아는 보다 의식적인 방법으로 확실한 영적 인식을 경험했는데, 그전에는 그녀는 그러한 것들을 예감이나 다른 기이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성 프란시스코와 만나는 체험도 레지오에서 재현되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영성의 불변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녀는 레지오에서 자신과 마리오의 약혼을 파기하려는 어머니의 계교를 보았다.
1922년 8월 2일 마리아는 피렌체로 돌아왔고, 그녀는 쓰디쓴 기억들로 인하여 짓눌린 채 거기서 2년을 머물렀다.
비아렛지오에서
1924년 9월 발또르따 가족은 비아렛지오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들은 새로 구입한 작은 집에 정착했다.
그녀는 여기서 가끔 해변과 소나무 숲에서 짧은 시간 동안 산책하는 것, 매일의 쇼핑을 빌미로 어머니의 벼락같은 위협 없이 가장 거룩한 성사 안에서 예수님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독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에서 새롭고 다른 기간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그 기간 동안에 하느님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숙해갔다.’
사랑의 봉헌
그녀가 단숨에 읽은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의 자서전의 모범에 매혹되어 그녀는 자신을 자비로운 사랑의 희생자로 봉헌했고(1925년 1월 28일), 그 후 매일 이 봉헌행위를 경신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비상한 높이로 자라게 되었고, 그녀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사도직에 대한 동경
그녀는 주님께 봉사하려는 염원에 고취되어 성 바오로수도회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활동보다는 고난을 통하여 양육되어 오로지 하느님께만 알려진 겸손하고 감추어진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1929년 9월 청년 문화사절로 가톨릭 액션에 받아들여졌을 때 그녀는 수많은 청중, 특히 가톨릭 냉담자들 중에서도 점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모임들을 조직하면서 열성적인 활동을 신속히 수행했다.
정의에 대한 헌신과 완전한 신체장애
한편 그녀는 ‘더욱 순결하고 희생적인 삶’을 준비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희생으로도 봉헌하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적, 영적인 고통은 갈수록 커져갔으나, 그녀는 1931년 7월 1일 봉헌을 갱신하면서 순결, 가난, 복종의 맹세를 선언했다.
1933년 1월 4일은 그녀가 극심한 피로 속에서일망정 자기 집을 걸어서 떠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1934년 4월 1일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침상을 떠날 수 없었고, 그것은 사랑의 강렬한 탈혼 속에서의 길고 활동적인 신체장애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사명은 고통 받고, 속죄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1935년 5월 24일 마르타 디코티가 발또르따 가족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마리아의 충실한 동반자이자 그녀의 글을 듣는 이로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즐겁게 그녀를 돕고 보살펴주었다.
그러나 친구가 항상 함께 있으면서 주는 위로를 받기 시작한 날로부터 한 달 남짓 후인 6월 30일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에 대한 모든 공격을 용서하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를 그릇 판단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 의하여 야기된 고통을 극복하며 인내와 온순함과 사랑으로써 항상 자기의 의무를 다해왔다.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 그분을 도울 수 없었고, 죽음 후에 그분의 시신도 볼 수 없었던 고통은 그녀를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뒤늦은 사랑의 어리석은 장면들을 연출한 후 더욱 무정하고 횡포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가 독재적인 여자임을 발견한 것으로 인하여 내친 김에 더욱 그 길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병상에서 고통 받고 사랑하기를 계속했다. 하느님의 뜻을 더욱 의지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위로하고,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아주고, 시대의 중대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고를 받으며, 그녀의 성격의 강건한 힘과 하느님께 고정된 마음의 명확한 지성을 항상 드러냈다.
밀리오리니 신부와 최초의 원고
그녀가 한 경건한 선교사 사제의 방문을 받은 것은 1942년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종복회 회원인 로무알도 M. 밀리오리니 신부 (Romualdo M. Migliorini) 는 4년간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1943년 그 신부의 요청으로 자기 영혼의 모든 좋은 것과 모든 나쁜 것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을 허락받는 것을 조건으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근면하고, 지적이고, 재능 있는 그녀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질병도 그녀가 일하고 글 쓰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복합적인 적성, 특히 여성적인 적성에 그녀는 타고난 작가로서의 재능을 덧붙였다. 그녀는 이러한 자기의 탁월한 능력을, 그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사랑한 하느님의 완전한 섭리에 맡겼다.
초자연적인 충동에 자극되어, 같은 해 1943년 4월 23일 성금요일에 그녀는 그 자서전을 완성한 후에 받아쓰기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
몇 달 후인 그해 10월 4일 자기 딸의 숭고한 사업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냉혹함까지도 지치게 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는 사랑으로 어머니를 사랑했다.
이제 집에는 마리아와 마르타만 남아 있게 되었다.
신비 작가
그녀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정점에 이르렀고, 1953년까지 점진적으로 약화되면서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무엇보다 전시에, 그리고 매우 어려운 조건들 하에서 글을 썼는데, 이 악조건들에는 1944년 4월 24일에 그녀가 콤피토이 성 안드레아(루카 지방 카판노리 자치구의 지역)로 이동해야 하는 피난이 포함된다. 같은 해 12월 23일 그녀는 비아렛지오의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거의 앉은 자세로 구부린 자기의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골판지를 받침으로 하여 통상적인 학교 공책에 글을 썼다.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어느 때든, 피로나 고문하는 것 같은 고통으로 완전히 지쳐 있을 때에도 글을 쓰곤 했다. 마리아는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정하지 않고 글을 썼다. 방해받으면 글 쓰는 것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쉽게 다시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성경과 교황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서를 제외하고는 책들에서 정보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가로서의 사명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는데, 그들의 삶과 걱정에 대하여 비추임 받은 조언으로, 필요하다면 비밀리에 영웅적인 희생으로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기적적으로 해결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의 운명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는데, 1948년 4월 18일 선거일에는 앰뷸런스로 투표소에 수송되어갈 정도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작업, 살아있는 지속적인 기도, 구속자들(redeemers)의 기쁨으로 포옹된 고통 중에서, 그녀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열렬하게 참여하는 자기의 외적 표지들을 개선해주시지 않기를 빌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환상의 풍부함과 구술의 깊음 속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녀를 충성된 대변인과 ‘펜’으로 사용하셨다.
작품들
마리아 발또르따에 의하여 쓰여진 공책들은 거의 15,000쪽에 이른다. 이 놀라운 문학작품의 3분의 2에 약간 못 미치는 부분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예수의 자서전)과 관련된다. 보다 적은 부분은 성경본문에 관한 대규모 주석, 교리강의,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의 역사 및 경건한 문학을 포함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과, 심지어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가 알지 못하고 쓰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인간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발또르따는 선언한다.
그녀가 자신이 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고도로 영감 받은 작품 외에도 마리아 발또르따는 자기의 강한 인간적인 개성을 나타내는 한 통의 서신과 흥미 있는 자서전적인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이들은 모두의 선을 위하여 하느님에 대한 영웅적이고 거룩한 봉사로 자발적으로 봉헌된 것이다.
지성의 봉헌
1949년 4월 18일 그녀는 자기의 작품에 대한 교회의 승인을 보지 못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드렸고, 자신의 지성이라는 귀중한 선물도 그 희생에 덧붙였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셨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작품이 봉쇄된 것을 본 후 그녀는 아마 1956년에 시작된 일종의 심리적 고립 속으로 점진적으로 철수하는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의 첫 징후 중 하나는 그녀의 개인서신에서의 대문자의 과다사용이었다. 그 후 성스러운 카드와 그녀가 입수한 어떤 종이 위에나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와 같은 절규들을 채워 쓰는 집착증이 이어졌다.
그녀는 때때로 자기가 받은 보속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계산했다.
그녀는 글쓰기, 작업, 기도를 했지만 결코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결국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끝나게 되었다. 그녀는 대화에서 틀리게 대답하기 시작했고, 때때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유쾌한 재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는 점진적으로 말수가 줄었고, 인사말이나 그녀에게 말해진 문구의 마지막 단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정도에 이르러 대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시시때때로 그녀는 “저기 있는 태양은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라고 고함치거나 부르짖고는 했다.
그래도 그녀의 두 눈은 항상 맑았고, 태도는 차분했다. 그녀는 결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어린이처럼 먹었다. 그녀의 글에 대한 심각한 상황으로 인하여 조사받을 때 그녀는 마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빠져나온 것처럼 간단하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죽음과 매장
1961년 9월 16일 악화된 건강으로 인하여 그녀는 구급차로 피사로 후송되어 마리아 돌로로사 종복회 진료소에 입원하여 월말까지 머물렀다.
회복의 징후가 없자 그녀는 비아렛지오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돌려보내졌고, 거기서 65세이자 신체장애자가 된 지 28년째인 1961년 10월 12일 오전 10시 35분에 운명했다. 마리아 종복회 제3회 지도신부인 인노첸쪼 로베티 신부가 그녀의 임종을 돕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녀는 이 수도회 제3회 및 프란시스코 수도회 제3회에 속했었다. 그 사제는 “프로피치세레, 아니마 크리스티아나, 데 혹 문도(오, 그리스도인의 영혼이여, 이 세상에서 떠나라)”라고 낭송했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순종의 행위로 보였다.
우리는 1944년의 한 원고로부터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안다. “네가 내 세상에 영원히 있게 될 것과, 마치 어린이가 자기 어머니를 꿈꾸다가 깨어나 어머니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환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면서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비참한 세상에서 떠나올 것을 네가 알게 된다면, 너는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나는 너에게 그렇게 해주겠다.”
그녀의 시신은 불구의 몸을 가진 저자의 고통, 근면한 활동, 봉헌의 행위들, 경건한 죽음을 증언해주었던 그녀 자신의 방의 바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장례복장으로 자기의 머리를 덮게 될 세례 면사포와 자기 묘비명이 될 구절 “나는 고통당하기를 끝냈지만, 사랑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를 여러 해 전에 선택했었다.
소수의 엄숙한 방문자들은 그녀의 왼손은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오른손(‘주님의 펜’으로 정의된 바 있는)은 밝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마리아의 책상으로 봉사한 그녀의 무릎은 그녀가 영면 속에 안치되어 있는 당시에도 그녀의 흰 드레스 아래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굽어져 있었다.
장례식은 10월 14일 이른 아침에 그녀가 전에 부탁한 대로 매우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성 파올리노 교구에서의 장례예절에 뒤이어 그녀의 시신이 매장이 거행된 자비 묘지까지 소규모의 자동차 행렬이 고인을 동행했다.
발굴과 특별 취급된 유해 안치
10년 후인 1971년 10월 12일 그녀의 유골 잔해들은 땅에서 발굴되어 가족 납골묘에 소장되었다. 그러나 1973년 7월 2일 당국 및 교회의 허가를 받아 유골 잔해들은 비아렛지오에서 피렌체로 옮겨져 지극히 거룩한 성모영보 성당의 대 회랑에 있는 참사회원 채플의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마리아 발또르따의 묘는 지금도 공경되고 있다.
원고의 보급
마리아 발또르따의 작품의 초판들은 그녀의 생애의 마지막 수년 동안에 그녀의 이름의 표시 없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광고 없이 단지 사람들을 더 좋게 변화시키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의 충격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해외 심지어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신속히 보급되어 전 세계에서 광범한 환영을 받았다.
1943년 8월 23일의 받아쓰기에서 우리는 저자에게 말씀하신 예수의 다음 말씀을 발견한다. “내 선물을 이용하려면 좋은 감각이 필요하다. 공개된 요란한 전파가 아니라 느리고 점진적으로 점점 널리, 그리고 이름 없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대 안에서 네 손이 평화 안에서 멈출 때, 그때, 오직 그때 네 이름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의 자서전
그녀의 주된 작품은 예수의 위대한 생애, 동정녀 마리아의 출생과 유년기부터 그분의 몽소승천의 이야기이다.
‘작은 요한에게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명명된 발또르따의 작품은 초판부터 더 간단한 제목인 ‘예수의 시(The Poem of Jesus)’로 명명되었다. 나중에 발행인이 다른 곳에서 동일 제목으로 출판된 소 시집으로 인하여 이 제목의 변경을 요청받게 되어, 이 책의 제목은 “사람-하느님의 시(The Poem of the Man-God)”라는 제목으로 변경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이 복음서를 대체하거나 변경하지 않는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켜준다는 선언된 목적 하에서 복음서를 이야기해주고, 통합해주고, 조명해준다.
그리고 이 책은 ‘작은 요한’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발또르따에게 계시되었다.
‘요한’은 가장 사랑받는 복음사가 가까이에 그녀를 위치시킨다.
‘작은’은 필요불가결한 것에 한정된 짧은 복음서에 대한 그녀의 방대한 작품의 의존성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의 자서전
Ⅰ. 숨겨진 생활
1. 도 입
1944. 8. 22.
예수께서 나에게 명하신다.
“새 공책을 가져와 내가 8월 16일에 구술했던 내용을 첫 페이지에 기록해라. 이 공책에는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순종하며 새 공책에 옮겨 쓴다.
1944. 8. 16.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은 이것만을 써라.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도 갇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태에 갇히신 이유가 있다. 정결은 담겨질 수 없는 분(the Uncontainable One)을 한 여인의 태 안에 담을 수 있게 할 만큼 가치 있다. 그 이유는 마리아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정결(pur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서 그분의 완전들(perfections)을 가지고 내려오시어 세 위가 함께 그 태 안에 거하시고, 하느님의 무한성을 한 작은 공간에 담으셨다. 그러나 삼위일체께서는 인간의 태 안에 계시는 것으로 인하여 그분의 품위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이 그 공간을 넓혀서 하늘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서는 삼위 각각의 성품들인 속성들(characteristics)로 그분 자신을 알게 하셨다.
성부께서는 창조의 여섯째 날처럼 다시 한 번 그녀의 창조주가 되심으로써 그분의 완전한 모습을 닮은 참되고 자격 있는 딸을 가지게 되셨다. 하느님의 표지가 마리아에게 그토록 완전하고 정확하게 찍혔기 때문에, 오로지 아버지의 맏아들(the First-born)에게 찍힌 하느님의 표지만이 마리아에게 찍힌 표지보다 더 위대했다. 마리아는 완전을 받아 그것을 보존할 줄 알았고, 하느님의 정배(Spouse), 하느님의 어머니, 하늘의 모후(Queen of Heaven)라는 품위를 가졌기에 아버지의 둘째 자녀(the Second-born)라고 불릴 수 있다. 그분께서는 성부의 아들 다음으로 둘째 자리에 계시고, 하느님의 생각 안에서도 둘째 자리에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ab aeterno) 그분에게서 기쁨을 얻으신다.
성자는 ‘마리아의 아들’이기도 하므로, 그가 태 안에서 자라고 있는 배아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은총의 신비로 자신의 진리와 지혜를 그분께 가르쳤다.
성령께서는 기다려졌던 연장된 오순절(anticipated prolonged Pentecost)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즉 ‘성령께서 사랑하신 마리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태의 열매를 통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로, 거룩한 이의 어머니 됨으로 인한 성화로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시대(the Redemption era)를 시작하는 새롭고 온전한(complete)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하여 하늘의 별이나 왕궁을 그분의 옥좌로 택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날개를 그분의 발판으로 삼기를 원치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티 없는 태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와 역시 티 없이 창조되었고, 깨끗한 세상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타락하기를 원했다.
마리아께서는 비록 타락한 세상에서 사셨지만, 죄와 관련된 작은 생각 하나로도 자신의 정결을 손상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죄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살해(deicide)라는 가장 끔찍한 죄를 포함하여 죄의 다양하고 끔찍한 형태들과 암시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 죄를 안 이유는 그것들을 속죄하기 위해서였고, 죄인들을 영원히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여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생각은 너와 많은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내가 줄 다른 거룩한 것들에 대한 도입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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