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인들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부(1784년 명례방 공동체 계승)

Skyblue fiat 2023. 10. 4. 17:05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벽의 권유로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세례자 요한)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이벽,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명례방 신앙공동체 (김범우 토마스의 집)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

 

 

이승훈, 정약전 · 약종 · 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노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설계와 공사 지휘를 맡은 코스트신부(1842-1896)

 

 

1890년 주교관 완공- 현재 역사박물관

 

완공되기 전의 마지막 종탑공사 모습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1898. 5.29 명동성당 축성식 기념사진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소에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신은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성해실로 모셔지기 전 1909년 이곳 지하 묘소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1998년 5월 29일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 대성당은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서, 일제와 6.25 전쟁의 수난을 거쳐 70년대 독재에 맞서 민족의 양심과 지성을 지켜온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2002년 기존의 문화관과 부속건물을 합쳐 새롭게 문화관을 리모델링하여 문화의 전당으로 탈바꿈하였고, 그해 9월부터 심하게 훼손되고 부식된 외벽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문화재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미 1974년과 1984년에 대규모 보수 공사를 진행했으나 이번에는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낡은 벽돌들만 한 장씩 빼낸 뒤 새 벽돌을 끼워 넣는 고난도 보수 공사를 거쳐 2008년 말 공사를 위해 감쌌던 장막을 벗고 새 단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명동 주교좌성당

http://www.mdsd.or.kr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내용출처: 서울대교구>명동 주교좌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