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 24권
13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이는 어떤 고통도 못 들어가는
하느님의 신성 안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태양의 비유.
1928년 5월 10일
1 한없이 무거운 무엇에 짓눌리는 악몽 속에 있는 기분이다. 내 하찮은 정신이 질식의 고통으로 신음하듯 울부짖고 있다. 다정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상실한 탓으로 신음 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것이다.
2 그러나 내 생명이요 내 전부이신 분 없이 지내야 하는 끔찍한 고통으로 숨줄이 타들어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고통이 나를 용맹스럽게 하여 내 안에 있는 고통의 생명을 죽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고통 속에 잠겨 있음을 느끼면서도 - 이런 나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까? - 이 고통에는 고통이 없다. 비통에 빠져 있는데도 비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마음이 씁쓸해져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3 ‘어째서 나는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을까? 나를 떠나신 분이 무한한 분이시듯이 그만큼 무한한 고통이 감지되건만, 내 예수님 없이 있어야 하는 고통이기에 의롭고도 거룩한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리하여 내 가난한 영혼에 쏟아 부으려고 하면, 그것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다. 나는 그러니 고통의 생명이 없는 고통, (곧 고통스럽지 않는 고통)과 함께 남는다. - 저의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이토록 불행한 상태에 있는 저를 떠나지 마소서.’
4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무렵 사랑하올 예수님은 나의 내면에서 이동하시면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딸아, 내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은 신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 (성삼위)의 신성은 고통을 받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을 약간이라도 흐릴 수 있는 것은 도무지 없다.
5 그러니 피조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굴건, 그 고통, 그 죄는 우리의 바깥에 머무를 뿐 우리의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다. 설령 고통이 우리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즉시 그 본성을 잃고 행복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6 그와 같이 내 뜻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더구나 그런 이는 내 거룩한 뜻의 본성적인 빛과 힘과 행복을 내적으로 감지하기에, 자기가 빼앗긴 것으로 여긴 예수의 존재를 이미 소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이상 어떻게 비통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고통은 그 영혼의 외부, 곧 그 인성 안에 머무를 뿐이다.
7 말하자면 나를 상실한 끝없는 고통, 곧 내 부재 고통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내 ‘거룩한 피앗’에 싸여 있기 때문에 정작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는 듯한 것이다. 고통이 없는 고통, 비통이 없는 비통을 느낀다고 할까, 고통도 비통도 내 뜻의 지성소 안에는 들어올 수 없어서 바깥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8 사실 사람은 그것들을 느끼고 보고 만질 수 있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중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만약 들어올 수 있다면 내 뜻이 그 자체의 행복한 성질을 잃을 터인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9 태양도 그렇다. 어둠이 될 수 없다. 사람이 제아무리 힘을 써도 단 한 톨의 어둠도 태양 빛 안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어둠은 그 빛의 바깥에서 퍼져 나가기에 태양은 그 열도 그 놀라운 효과도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언제나 의기양양한 빛의 상태로 있다. 어둠이 그 빛을 약화시키거나 그 빛에서 무엇이라도 앗아가는 일은 도무지 없다.
10 하지만 태양이 만약 마음 아파할 수 있다면,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에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비록 태양의 중심에 해를 끼치거나 태양의 행복한 상태를 해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는 모든 고통을 뛰어넘는 고통이다. 신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11 나의 인성이 그것을 얼마나 자주 느꼈는지! 그때마다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도 내 안의 하느님 뜻에는 손을 대지 못했으므로 하느님 뜻은 무한한 행복, 끝없는 지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12 말하자면 내 안에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본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행복하고 또 하나는 불행한 본성이었다. 오! 그러니 내 인성의 고통이 내 신성의 무한한 기쁨 앞에서 얼마나 더 사무치게 통감되던지!
13 그런 까닭에 네가 너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적 차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14 전에 내가 너에게서 모습을 감추곤 했을 때에 네가 (그토록 심하게 내 부재의) 고통을 겪은 것은, 내 뜻의 생명이 아직 네 안을 완전히 채우지는 않아 군데군데 빈 공간이 있는데다 그 공간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네가 그 고통을 과민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네 안의 모든 것이 고통으로 바뀐 것 같았으니 말이다.
15 그러니 오늘날과 같은 굳건함이 네게 없었고, 따라서 차분하고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굳건함이 있어야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함을 받아 가질 수 있는데 말이다.
16 나는 그래서 너를 떠받쳐 주려고 즉각 달려 나가곤 하였다. 내가 내 뜻의 지워 없앨 수 없는 특성들을 전부 보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뜻은 결코 지워 없앨 수 없는 것을 배치하기에, 내가 안심하고 내 ‘거룩한 피앗’에 일을 맡기지만 말이다.
도서 구입처: 가톨릭출판사 (catholicboo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