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향기
최홍운 베드로(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겸
월간<사목정보>고문)
이 땅에 가득히 퍼진 돈 보스코 성인의 향기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요, 벗”(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인 돈 보스코(요한 보스코. 1815. 08.16.~1888.01.31.) 성인(聖人)의 유해가 지난 11월 1일부터 17일까지 우리나라를 찾았다.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살레시오 수도회가 펼치는 ‘돈 보스코 유해 세계 순례’의 일환이다. 지난해 7월 남미 칠레를 시작으로 남 ․ 북미 20개국 순례를 마치고 22번 째 순례국인 태국에 앞서 우리나라에 와 17일 동안 전국을 돌며 이 땅의 신자들을 만났다. 성인의 유해는 앞으로 5년 동안 성인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찾아 전 세계를 계속 순례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엄청난 사건이었던가?
순례란 신자들이 성인의 묘소 등 성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처음엔 잘 몰랐다. “성인의 유해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하는 약간의 관심을 가진 채 나와는 무관한 일로 여기고 일상을 그냥 살았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초에 가입한 카페 ‘수단이태석신부님/수단어린이장학회’(http://cafe.daum.net/WithLeeTaeSuk/) 에 들어갔더니 11월 16일 저녁에 고(故) 이태석 요한 신부 후임으로 수단 톤즈에서 사목하는 우경민 헨리코 신부와 함께 돈 보스코 성인 유해 참배 미사를 봉헌한다는 공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성인의 유해를 직접 참배하고 전대사(全大赦)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절호의 기회를 더 이상 놓칠 수 없어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수도원 정문에서부터 차량 안내와 주차 봉사를 하는 많은 남성 봉사자들의 헌신적이며 친절한 모습에서 “오길 잘했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성당 입구로 갔더니 그 곳에서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 봉사자들의 따뜻한 미소와 안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성당으로 들어 가 우경민 신부님 주례의 미사를 봉헌했다. 오후 6시 30분 미사여서 처음엔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미사를 마칠 때쯤에는 성당이 꽉 찼고, 이어 봉헌된 8시 미사에는 마당에까지 줄을 서서 차례로 들어가야 했다.
돈 보스코 성인은 미사를 봉헌하고 정원으로 나가서야 뵐 수 있었다. 유리관에 제의를 입고 두 손을 모으신 채 반듯하게 누워 계시는 모습이 122년 전 천국으로 가신 분 같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신 모습은 지난해 2월 하늘나라로 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떠 올리게 했다. 그 날, 명동대성당 유리관 안에 계시던 김 추기경도 누군가에게 빛을 준 바로 그 눈을 꼭 감고 계셨다. 그리고 그 표정이 얼마나 평화로우셨던가. 돌아가신 후 이탈리아를 처음 벗어나 우리 곁에 오신 돈 보스코 성인 또한 그대로 살아 계신 모습이었다. “살아가면서 무엇이 그렇게 너를 힘들게 하느냐. 다 나에게 말해라.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듯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청소년들은 내 삶의 전부입니다.” 하시면서 청소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또 그렇게 사셨던 성인의 향기가 온 수도원에 가득했다. 나도 그 향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인과 헤어져 귀가하기 전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요건 가운데 하나인 고백성사를 받고 수도원을 나오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교육자 돈 보스코 성인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의 배키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의 특별한 꿈을 계기로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 돈 보스코 성인. 산업화의 물결이 넘실대던 당시 사회의 가장 시급하고 큰 문제는 가난한 시골 출신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먹을 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치는 문제였다. 성인은 바로 이 중대한 문제를 사목의 핵심으로 받아 들여 위험에 빠진 청소년들을 보살피기 위한 ‘오라토리오’라고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교리와 일반 공부,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뜻에서다. 1859년에는 이 사업을 더욱 굳건하게 확산시키기 위해 젊은 협조자들과 함께 살레시오회를 창립하고 10년 후 교황청의 승인을 얻은데 이어 살레시오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협력자회’를 창설해 남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졌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 기록되고 있는 돈 보스코 성인은 1929년 시복, 1934년 시성되었으며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벗’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살레시오회는 현재 전 세계 8개 관구군 136개국 92개 관구에서 15,629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1,854개의 공동체인 학교, 청소년센터, 직업학교, 기숙사, 본당, 사회커뮤니케이션 분야 등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돈 보스코 성인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추기경 6명, 주교 118명, 사제 10,699명, 수사 2,025명, 종신부제 17명, 신학생 2,765명, 수련자 487명이 꽃향기 보다 더 진한 사랑의 향기를 뿜어내는 주역들이다. 그동안 성인 8명(순교자 2명), 복자 116명(순교자 95명), 가경자 10명, 하느님의 종 28명(순교자 9명)이 탄생한 영광도 살레시안들의 큰 자랑이며 자부심의 원천이다.
동아시아-오세아니아 관구군에 속하는 한국 관구는 1954년 설립된 이래 반세기 동안 청소년들의 영적 성장과 복지 및 인권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2010년 현재 서울, 춘천, 대전, 광주 등 전국에 11개 공동체와 중국 연길에서 117명의 살레시안들과 이들을 돕는 317명의 직원들이 청소년 교육에 힘쓰고 있다. 살레시오회의 교육 활동에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청소년은 연간 약 19만 명에 이른다.
수단에 사랑의 향기 전파한 ‘한국의 다미안’ 이태석 신부도 살레시안
앞길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25년 내전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수단, 그 곳에서도 가장 비참한 남수단 톤즈에서 그윽한 사랑의 향기 전하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천국으로 간 이태석 신부도 바로 살레시안이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와 군의관 생활을 마칠 즈음이던 1991년, 어린 시절 결심한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살레시오회다. 초등학교 시절 형 이태영 마리 요셉 신부(50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소속)와 함께 영화 ‘다미안 신부’를 보고 “다미안 신부와 같은 신부가 되겠다.”고 결심한 형제다.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출신으로 하와이 옆 몰라카 섬 한센인촌에서 결국 한센인이 되어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하며 일생을 바친 성인이다.
이태영 신부는 월간<사목정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군의관 생활을 마칠 즈음 이미 신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하던 저를 찾아와 신부가 되겠다고 상의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진정 사제로 살기 위해서는 의사직도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요. 단순히 인술을 펼치기 위한 뜻이라면 굳이 신부 되지 말고 산간벽지나 어려운 사람 곁으로 가 의사로서 봉사활동을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의사직을 포기하고 이듬해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수도회를 살펴봤더니 돈 보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라 청소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섬기며 다양한 소임을 수행할 수 있는 살레지오회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 같아 선택했답니다.”(<사목정보>2010년 12월호)고 전하고 있다.
이태석 신부는 전역 후 주저함 없이 살레시오회에 입회했고 광주가톨릭대학을 거쳐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2000년 로마에서 부제품, 2001년 6월 서울 살레시오 관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5개월 후 수단으로 갔다. “너희가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그 1년 전 여름, 신학생 신분으로 톤즈를 방문해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서품 후 꼭 돌아오리라.”고 했던 다짐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이태석 신부가 처음 톤즈에 도착했을 때 환경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땅, 1년 내내 38~45도의 뜨거운 날씨,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 콜레라와 말라리아에 걸려 구토와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발작을 하는 환자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부서지고 없는 마을과 팔 다리가 잘린 장애인들,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 하는 아낙네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아이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참혹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먹을 것을 주었고, 학교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브라스밴드를 구성해 아이들에게 전쟁의 참혹함 대신 보석 같은 재능과 아름다움을 찾아 주었다. 2008년 11월 휴가차 온 고국에서 말기 대장암 진단을 받고 지난 1월 14일 새벽 잠들어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하기까지 8년 동안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나눔과 사랑을 실천했다.
사랑의 향기에 취해 천 배, 만 배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나누고 또 나누는 삶을 산 이태석 신부는 갔지만 그의 ‘하늘나라 수학공식’은 그대로 정답을 찾아 천 배, 만 배, 그 이상으로 나눠지고 또 확산되고 있다. 톤즈에서 어린이들에게 수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던 이 신부는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십 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그것이 ‘천’이나 ‘만’이 된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의 정석을 톤즈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게 된다.”고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밝히고 있다.
이태석 신부 선종 6개월 후 살레시오회에서 우경민 신부를 선교사로 파견했고, 의사 정준원 스테파노 님과 간호사 고민정 요안나 님이 자원해 수단으로 가 의료봉사활동을 재개했다. 그런데 중단됐던 고등학교 교실과 숙소를 계속 짓기 위해 지난 8월 19일 자원해 갔던 건축봉사자 백승호 님은 안타깝게도 지난 11월 3일 숨졌다. 신자가 아닌데다 고령(64세)이면서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삶에 감동을 받고 자원해 톤즈로 가서 건축 공사를 거의 완공단계까지 이끌었으나 무더운 날씨에 말라리아와 콜레라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당초 6개월 예정으로 가 결국 병을 얻어 귀국길에 올랐으나 곧장 오지 못하고 케냐 나이로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열 속의 미망인, 우 신부와 수단어린이장학회원 등과 함께 10일 귀국해 12일 영결식을 갖고 그토록 존경하던 이태석 신부를 찾아 갔다. 그리고 우 신부는 지난 16일 바로 그 돈 보스코 유해 참배 미사를 후원자들과 함께 봉헌하고 17일 수단으로 다시 떠났다. 이런 어려운 여건인데도 의료봉사와 건축봉사를 하려는 자원자들의 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오묘한 하늘나라의 수학공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2003년 말, 한국방송공사(KBS-TV)의 ‘한민족 리포트-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이 방영된 후 설립된 온라인 카페 ‘수단이태석신부님/수단어린이장학회’와 (사)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이재현)의 회원이 올해 초 2천 3백 명이었으나 지난 9월 초까지 7천 명으로 늘었다가 이태석 신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 상영 이후 두 달 만에 3천 명이나 늘어 지금 1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 지난 4월 KBS 스페셜로 방영된 것을 영화화 한 이 영화는 지난 9월 9일 서울과 경기 지역 5개 상영관에서 개봉됐으나 폭발적인 관심으로 지금 전국 54개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10월 말 누적 관객 수 12만 명을 초과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관객 수 10만 명은 일반 영화 관객 1백 만 명에 버금가는 수치다. 해외에서도 상영 요청이 쇄도해 우선 지난 11월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CGV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교포 신자들과 미국인들에게도 뜨거운 사랑의 열기를 전했다. 이태석 신부의 2008년 8월 미국 남가주 성령대회 지도이후 결성된 '아프리카 희망 나눔 후원회'(Charity Foundation for African Catholic Mission)에서도 회원과 후원자가 최근 크게 늘고 설립 당시 10만 달러를 지원하던 후원금이 지금 그 몇 배나 모아지는 것은 그 열기의 반증이라 하겠다.
이태석 신부의 모교 인재대 의과대학에서도 그 아름다운 정신이 부활하고 있다. 인재대는 수단어린이장학회의 노력으로 지난해 12월 입국해 중원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수단 학생 토마스 타반(25)과 존 마옌(23)을 의대로 편입토록 해 이태석 신부의 뜻을 이어 수단에서 의료봉사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의사로 양성할 계획이다. 의과대학은 특히 이 신부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후배들이 계승하고 추념하기 위해 그의 일대기를 엮은 '인문사회 의학'에 관한 교육과정도 개발하기로 했다.
다미안 신부처럼 살기 위해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젊은이들을 살리고, 그들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있도록(루카 13, 6-9 참조) 그들과 함께 살았던 착한 목자 돈 보스코의 길을 걸었던 이태석 신부, 이 신부의 ‘하늘나라 수학공식’ 대로 나누고 사랑하며 사는 수많은 봉사자와 후원자들, 이들이 내뿜는 사랑의 향기는 시간과 공간을 훨씬 초월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태석 신부가 못다 한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멀리 수단의 톤즈에서 건축봉사활동을 펼치다 숨진 고 백승호 님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 누리시기를 빕니다.
<이 기사는 가톨릭경제인회지 '샘물' 2010년 겨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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