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강의
(2010. 9. 7. 사제 피정)
4. 사제와 희생 제물 - 1
† 성령께서 오시기를 비는 기도
오소서, 오, 성령님. 창조주시여, 저희 마음에 오소서.
당신 은총과 함께, 창조하신 저희들을 찾아오소서.
오, 정다운 위로자시며 지고하신 아버지의 선물이시여,
당신은 살아 있는 물이요 불이며 사랑이시고,
영혼의 거룩한 기름부음,
하느님의 손가락, 구세주의 약속이시니,
당신의 일곱 은사를 쏟아 부으시어
저희 안에 말씀께서 살아 움직이시게 하소서.
저희의 지성을 밝히는 빛이 되시고
저희의 마음을 태우는 불꽃이 되시어
저희의 모든 상처를 당신 사랑의 향유로 치유해 주소서.
저희를 원수에게서 지켜 주시고 평화를 선물로 주시며
당신의 힘 있는 인도로 모든 악에서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영원한 지혜의 빛이시여, 사랑이신 당신 안에 일치해 계신
천주 성부와 천주 성자의 위대한 신비를 저희에게 알려 주소서.
영광이 천주 성부와 부활하신 성자와 보호자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1) 루이사의 희생 제물
네 번째 강의, 지금 우리는 하느님 뜻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중에 잠깐 루이사의 생애에서 희생 제물의 면, 그 차원을 보기 위해 잠깐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 강의에서 루이사 생애의 두 가지 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희생 제물로서의 삶, 또 하나는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입니다.
희생 제물로서의 삶의 차원은 사제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이 차원의 신비 속으로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루이사의 삶과 글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녀의 희생 제물로서의 사명이며 이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뜻의 나라에 대한 봉사와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 제물로서의 사명을 살았습니다.
루이사의 희생 제물로서의 삶은 완전한 사제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다 이 희생 제물적인 차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금 짧게, 그리스도의 신비의 희생 제물적인 차원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제이고 희생 제물로서 이미 구약에 야훼의 종의 모습으로 미리 다 표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또 수많은 죄를 보속하는 희생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는 야훼의 종입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에 쓰인 대로 구약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또 그분이 이 세상으로 들어온 이후 자신의 그 희생 제물적인 조건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여기 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사랑으로 완전히 봉헌하고 희생될 것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수난 동안에 완전한 사제와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됨으로써 당신 자신 안의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표현합니다.
이 사랑의 희생 봉헌은 수난 동안의 침묵 속에서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죄인들과 함께 동일화시켜서 하나로 보기 때문에 성부께서 그 죄를 벌하시려는 것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수난 안에서 침묵 속에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죄인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수난 중에 성부의 벌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 들어있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약으로 들어갑니다.
신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당신의 피를 쏟음으로써 속죄하는 희생 제물로서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로마서 3장 25절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에 나타난 대로 이것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모든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을 봉헌하는 절정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 제물로서의 봉헌은 그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신 말씀 안에 또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그리고 루카복음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희생 제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피는 모든 죄들을 다 제거하고 다른 모든 희생 제물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대사제로서 드러나고, 그분의 사제직에 희생 제물로 나타납니다.
또 예수님이 사제로서, 또 희생 제물로서 바치는 희생 제사는 우주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단 한 번 희생 제물로 봉헌됨으로써 우리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제직 안에서, 또 희생 제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성화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사제적이고 희생 제물적인 차원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표현하여 드러내주신 사랑의 봉헌 앞에서 그분의 삶을 삶으로써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고 또 교회가 계속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사제로서의 기본적인 사목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매일의 생활 안에서 봉헌해야 합니다.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생생하게 되어 성부께 봉헌되는 그분과 함께 사랑의 친교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하느님께 하자 없는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의 희생 제물적인 차원은 세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은총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도록, 희생 제물 영성으로 살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좀 더 완전한 희생 제물로 살도록, 특별한 은총을 통해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희생 제물 영성은 세례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이 영성은 성체성사와 그 봉헌 정신으로부터 자양분을 받습니다.
미사의 전례는 아주 효과적으로 예수님의 희생 제물로서의 삶을, 모두에게 그렇게 살도록 초대하면서 그 영성을 보여줍니다.
미사의 셋째 감사기도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적인 차원을 지적해서 말한 다음 우리에게 성부께 청하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로 만들어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사도생활 안에서 이 정신으로 살고 봉헌하는 데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고통을 받으셨는데 그 부족한 부분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채워야 합니다.
사제이며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대하는 것은 아주 심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 이런 협력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 우리들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가 계속하게 만듭니다.
(2) 희생 제물의 두 가지 특징
희생 제물에게는 두 가지 필수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사랑의 봉헌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발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희생 제물이 가져야 될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희생 제물의 실체 안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서 사랑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속과 희생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희생과 보속, 이런 모든 것을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본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복음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의 핵심이며 열쇠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도록 해드리는 것, 이 사랑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완성되면 모든 정의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냥 주는 사랑이고 또 정당화시키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정의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공으로 주신 사랑을 받아들이고 애덕을 통해서 작용하는 신앙으로 그 사랑을 완성한다면, 희생 제물의 영성 안에서 또 하느님의 관점에 따라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사랑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고통 그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라고 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 제물은 언제나 사랑의 희생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희생 제물의 또 다른 특성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발적으로 합치하는 것입니다. 신비 영성 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발적으로 합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합치는 우리를 그분의 전적인 희생과 보속에 합치시켜 주고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응답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 안에서 세상을 축성하는 일을 완성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이사가 살았던 것과 같은 수준의 희생 제물로서 살도록 불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합치하는 체험을 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의 극기는 필수적으로 해야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의 신분에 따라서 매일의 십자가를 겸손하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일들도 우리가 꼭 해야 되는 일이고, 매일의 의무를 충실히 성취하는 가운데 은총에 응답하고, 은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살아있는 성체로 관대하게 봉헌하고 내어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희생 제물 영성에 교의적인 바탕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루이사 안에 어떻게 있었는지, 현존해 있는지, 거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 희생 제물로서의 삶
루이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루이사는 어릴 때부터 십자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의 희생 제물로서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이사는 희생 제물 영성의 아주 아름다운 모범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희생 제물의 영성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성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우리의 세례로, 우리의 사제 서품으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희생 제물 차원을 살도록 불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이사는 우리와 동시대에 살았으면서, 대사제이고 영원한 사제이며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일체가 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빛과 도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루이사의 삶에서도 그렇고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도 모든 것이 다 사제이며 희생 제물이며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속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4) 희생 제물 영성의 두 가지 특별한 면
끝까지 사랑하는 이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계속적으로 상처를 받고 우리의 배은망덕과 미지근함 때문에 계속 모욕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그분의 가슴을 찌릅니다.예수님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루이사의 마음속에, 창조된 마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이 두 가지 실체가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희생 제물 영성의 특별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루이사 안에 만들어 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공으로 바쳐드림으로써 보속하는 사랑, 고쳐주는(repair) 사랑으로 보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보속의 정신이 루이사의 생애, 루이사의 기도, 루이사의 단식(재 지키는 것)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부인 순명이 지켜보는 아래에서 지속적인 고행과 자기 자신의 뜻을 없애는, 자기 존재 전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지속적인 공의 정신으로 살고 고해 신부님에게 절대 순명하고 의탁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사는 고해 신부님의 허락 하에, 동의하에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 영혼과 몸으로 거의 영구적으로 신비스럽게 참여했습니다.
아가서에 있는 정배처럼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루이사가 사랑하는 사람인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계속적인 아픔이 그녀를 사랑으로 죽고 사랑으로 아파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보통은 루이사가 예수님의 현존 속에 사는데 가끔 예수님께서 루이사로부터 사라져 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루이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빼앗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루이사의 글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라지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5) 희생 제물로서의 초대와 하느님의 뜻
희생 제물로서의 루이사의 사명과 루이사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루이사는 세 살밖에 안 되었을 때 벌써 십자가의 길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루이사가 첫영성체를 했을 때, 루이사는 성체성사에 대한 굉장히 특별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내적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십자가에 대한 것과 덕들에 대한 가르침을 강의하듯이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루이사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루이사의 글은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내적 삶을 그대로 살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루이사의 글의 모든 장들은 다 실천하라는 초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왜 썼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대로 다 실천하라고 쓴 것입니다.)
이제 실천하라는 초대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너의 행동에서 항상 똑바르기를 원한다. 너에게 고통받을 기회를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감사하게 될 것이고, 또한 네가 나한테도 아주 애정을 가지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루이사가 고통받게 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아주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하면 그 고통 때문에 루이사는 불안한 것이 전혀 없을 것이고, 그리고 언제나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이렇게 실천하도록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지향의 순수함을 가져야 되고, 고통을 받을 때는 그 고통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고, 나를 고통받게 만들어 주는 그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대로 실천하면 우리는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또 다른 가르침이 있습니다. 루이사를 진정한 희생 제물로 만들기 위한 준비로 예수님께서 이런 가르침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지속적으로 겸손의 행위를 하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엄마한테서 모든 것을 기대하는 아기처럼 행동해라. 언제나 나에게 너를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거들어 달라고 항상 청해라. 그리고 언제나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너는 모든 것을 나에게 기대해라.’
이것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원한다. 비록 너한테 필요한 것까지도 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의 정신으로 해라.’ 희생의 정신은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너의 의지를 내 앞에 희생 제물로써 계속적으로 봉헌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너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너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내 앞에 항상 너의 의지를 희생 제물로 봉헌해라.’
이것은 제1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의미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루이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루이사의 글에서 이 두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은 척추와 같은 것입니다. 루이사의 글 전체에서 이것이 척추입니다.
처음 10권까지는 수난과 예수님의 인성과의 합치, 그것만 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 바탕에는 이 주제가 있습니다.
11권부터 끝까지는 예수님께서 당신 뜻 안에서의 삶에 대해서 설명을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너는 행복하지 않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물으십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에서 너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피조물들을 통해서 너를 반대할 것이다.” 이런 삶, 이런 예수님과의 뜻의 일치는 이론만이 아닙니다. 주님께 ‘예(Yes), 제 뜻과 당신의 뜻이 하나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나 자신이 모든 것 안에서 너를 반대하겠다. 또 때로는 다른 피조물을 통해서 그렇게 반대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희생 제물로서의 삶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완벽한 희생 제물이시기 때문에, 절대적, 대표적, 유일한, 원(原) 희생 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의지, 인간적인 의지는 예수님의 신성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절대적으로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쳤기 때문에(히브 10, 10 참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이 영원한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6)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진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단지 하나의 그림자로 간주하여라. 네가 붙잡으려고 하면 재빨리 달아나는 그림자 말이다. 그게 바로 너다. 그러니 네가 내 안에서 그럴 듯한 사람이 되려면, 언제나 너 자신을 허무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면 흐뭇한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네 안에 쏟아 부어 주겠다.”(천상의 책 1권 10,7)
루이사의 첫 번째 책에서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지, 또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분명하지 않으면 나는 네 안에 무엇을 만들 수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금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진실 안에는 그분이 있고 우리는 그 진실 안에 없습니다. 그분은 그 진실 안에 혼자 있고,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에게 삶과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루이사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7)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것
2. “사랑하는 얘야, 내가 지금까지 네 안에서 행해 온 일은 작은 준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내 수난의 무한한 바다 속에 너를 잠금으로써 네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내 수난의 고통을,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려는 갈망으로 나를 삼키던 사랑을,
그리고 너를 위하여 그 모든 고통을 겪은 내가 누구이며 네가 누구인지를 - 극히 비참한 피조물인 너를 -
네가 일단 분명히 깨닫고 나면, 그때에는 나에 대한 사랑으로 겪게 될
수난 고통과 타격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3. 또한, 얼마 동안 네가 짊어지도록 내가 마련한 십자가를 사랑으로 불타는 영혼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의 스승인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를 생각만 해도 네 고통은 한낱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고, 고통이 네게는 오히려 감미로운 것이 되어 고통 없이는 지낼 수도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천상의 책 1-12,2~3))
그리고는 루이사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신비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영혼아, 나를 도와다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이사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 13세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루이사 안에서 이 작업을 마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루이사로부터 모든 위안을 다 거두시고, 느낄 수 있는 은총도 다 빼앗아 가시고, 마귀들이 루이사를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마귀들과 싸워서 이기는지 그 방법을 루이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루이사가 공식적으로 희생 제물 영혼이 된 것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희생 제물이 되어 달라고 공식적으로 부탁하신 것은 루이사가 17세 때였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본 것은 13세 때입니다.
이것으로 이 강의를 끝내고 계속해서 희생 제물 영혼으로서의 루이사의 삶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주님께 우리가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5. 사제와 희생 제물 - 2
†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
주님의 기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희에게 아드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오니,
아버지께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시어
아버지 뜻의 무한성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면 아버지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이 아닌 것은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아버지 뜻의 나라를 청하나이다.
† 마리아께 바치는 기도
성모송
천주의 성모님, 저희는 당신의 보호 아래 피신하오니
이 가련한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오,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제 5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루이사의 생애에서 희생 제물 차원에 대한 2번째 이야기입니다.
강의 시작 전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뜻의 집들, 또 하느님 뜻의 집에서 하는 프로그램들 등에 관한 내용들은 다음 주 강의에 정식 강의로 들어가 있습니다. 다음 주 그 강의에서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외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Q 왜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보충해야 되나? 예수님의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나?
A. 질문의 대답으로 제일 먼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 바오로가 했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 24)라는 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기에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고통의 한 부분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가 이 신비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 전체를 보면 그리스도는 인성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머리도 있고 그의 신비스런 몸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전체는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한 부분입니다.
루이사의 글에서,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역시 산 제물이었지만 세상을 모든 징벌로부터 구해 낼 허락은 받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게 하늘을 열어 주었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켰으며 인간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졌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자초하는 징벌의 몫은 당연히 인간 스스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산 제물인 영혼들이 없다면, 인간은 징벌을 받아 육신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영혼도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여기에 산 제물인 영혼들의 존재 이유가 있다. 즉, 그들을 활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 왜냐하면 인간은 늘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으니까 - 누구든지 징벌로부터 면제를 받고 구원의 항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상의 책 4권 16, 11)
또 다른 차원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안에 당신 자신을 재생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받으시는 고통이고 그 고통이 그분의 가장 위대한 영광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의 지체인 우리가 같은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 안에 자신이 반영된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수난 고통의 열매와 공로를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통과 영광의 차원에서 혼자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 몸의 모든 지체가 당신과 일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구원자이시고, 우리가 동반 구원자, 협조 구원자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이렇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동전의 다른 면과 같이,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신이 예수님 앞에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Q 두 번째 질문은 루이사는 자기 몸 밖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A.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루이사가 더 이상은 고통받지 못하는 어떤 지점에 도달합니다. 루이사는 예수님의 수난에 좀더 깊이 강렬하게 참여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지점에 이릅니다. 우리 인간의 조건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육신으로 이 지상에서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제한되어 있어서 금방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무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루이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루이사의 몸과 루이사의 초기 생활이 그런 무한한 고통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점에 도달해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루이사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고통은 한계가 있는데 루이사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한 고통을 받게 하려니까, 루이사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나오게 해서 그 무한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루이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는 고통, 측량할 수 없는 무지무지한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분 말씀대로 우리는 이런 체험은 못합니다. 이렇게 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 안에 사는 어떤 영혼에게 주님이 이런 일을 또 하실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루이사에게는 무엇인가 아주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루이사의 사명은 아주 독특한 것.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루이사의 사명을, 루이사와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도록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장(章,chapter)에서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명과 루이사의 사명과 내 어머니의 사명은 너희 형제자매들을 불러서 그 안에서 살라고 하는 그런 한 도시를 건설하는 사명이다. 그래서 루이사와 나의 어머니와 나는 그런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형제자매들은 도시를 건설하는 일에는 불리지는 않았지만, 그 도시 안에 들어와서 살고 즐기라는 불림을 받았다.”
그러니까 아마 우리는 루이사가 겪었던 것 같은 그런 고통은 안 겪을 것입니다. 그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이미 수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루이사와 같이 그런 식으로 고통을 받도록 불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Q. 루이사를 희생의 산 제물로 표현합니다. 산 제물은 루이사에게만 독특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도 산 제물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요?
A. 하느님 뜻을 사는 우리는 모두 다 산 제물이 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루이사와 같은 그런 정도의 산 제물은 아닙니다.
Q (조금 전에 질문의 세 가지 답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대답의 첫 번째에서) 왜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보충해야 되나? 예수님의 고통이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두 번째 이유로 하느님의 지혜가 피조물의 모든 고통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모든 고통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이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신부님의 생각과 영감이신지, 아니면 루이사의 책에 나오는 것인지요?
A. 루이사의 글에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사랑은 인간의 고통을 다 없애 버리고 싶은데 하늘에 계신 성부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내용이 아주 여러 번 루이사의 글 속에 표현됩니다.
산제물인 루이사도 예수님처럼 “자기가 산 제물로 고통받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 없애 주소서.”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에게는 그런 행동을 할 허락이 주어진 것이 없다. 이렇게 하면 영혼들의 구원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너무나 단단해서 고통만이 인간의 영혼을 회개로 열 수가 있다. 만약 내가 너의 고통을 모든 사람들의 고통으로 받아들여 주면, 루이사가 없어서 루이사가 고통받지 못하게 될 때 그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것처럼 너의 뜻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해라.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들이 자발적으로 그 고통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Q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셨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다른 표현도 있는데 왜 예수님의 고통에서 부족한 고통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A. 성경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이것이 신비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루이사를 희생 제물의 영혼이 되라고 초대하시는 그 부분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루이사를 희생 제물의 영혼으로 초대
지금 루이사는 17세입니다. 코라토 근방의 언덕에서 루이사가 17세 때에 신비스러운 체험을 합니다.
그 농장의 이름이 토레 디스페라토(절망의 탑)입니다. 왜 그 농장의 이름이 그렇게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농장 언덕에서 루이사가 예수님이 원수들에 의해서 파멸된다고 할까, 고통받으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는 그 원수가 다 망가진 예수님의 몸을 성모님의 팔 안에 안겨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시면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얘야. 그들이 내 아들에게 어떤 짓을 했느냐?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주시며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그분께 아무런 위안도 휴식도 드리지 않다가 결국 이와 같이 만신창이가 되신 그분을 내게 안겨 준다. 이토록 그분을 학대하며 저질러지는 엄청난 죄악들과 그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실 무서운 징벌들을 생각해 보아라.”(천상의 책 1권 18,5)
루이사는 그것을 보고 아주 큰 고통을,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고통이 너무나 작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고통을 안 당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큰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떻게 느끼겠는가?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루이사는 자기 고통이 너무 작아서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모님께서 또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선이신 예수님께로 와서 이 상처들에 입맞추어라. 그렇게 하면서 내게 대답하여라. 너는 예수님께서 너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보고 있으니, 너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산 제물이 되고 싶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악하고 비뚤어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는 모욕들을 그분 대신 받고 싶지 않느냐? 너 자신을 산 제물로 봉헌하면 이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고 계시는 그분께 위로와 원기를 드리게 된다. 그분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분께 대한 네 사랑으로 희생을 바칠 마음이 들지 않느냐?”(천상의 책 1권 18,8)
그래서 루이사는 예수님한테 입맞춤하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위로해드렸습니다. 루이사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진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이 예수님의 고난과 같은 극심한 고난을 받고 천 번이라도 죽어, 내 사랑하올 그분께서 이렇게 고난 당하시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천상의 책 1권 18,6)
예수님의 기막힌 고통을 보면서 루이사는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루이사를 당신의 수난 고통에 참여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번은 루이사가 18일 이상이나 죽은 상태로 있은 후에 루이사의 가족이 루이사의 고해 신부님을 불렀습니다. 코소메 로요리체 신부님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이 루이사가 그런 죽은 상태에서부터 돌아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이 십자성호로 루이사를 강복하시면서, 순명으로 깨어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루이사는 고해 신부님이 성덕이 높으시기 때문에 자기를 깨우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번은 이 고해 신부님께서 다른 곳에 가시어 안 계실 때, 루이사가 또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해 신부님이 안 계시니까 가족이 루이사를 도와주고 깨워줄 다른 신부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찾은 다른 신부님이 오시더니 먼젓번 신부님이 했던 것과 똑같이 루이사가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루이사는 사제 개인의 성덕 때문이 아니라 사제라는 권위 때문에 자기를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루이사가 희생 제물 상태로 사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예수님과 루이사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니까, 말하자면 루이사가 죽은 사람처럼 되고 사제의 권위를 통해서만 되살아날 수 있게 되니까, 하느님의 뜻이 사제가 예수님과 루이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진정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있어야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사제입니다. 사제가 희생 제물로 영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희생 제물은 자기 자신을 봉헌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희생 제물은 자기 자신을 봉헌해 줄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에서 항상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생 제물이시고 우리 사제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하늘에 계신 성부님께 봉헌합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아래에서 사제에 의해서 희생 제물이 봉헌되었습니다. 누가 사제였습니까? 성 요한 사제입니다.
(제4권 157장 7절 p245 참조)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루이사에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루이사는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누가 끼어들지 않고 직접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니다. 중간에 누가 있어야 된다. 사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루이사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너한테 나의 고통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하면, 그러면 너는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너의 고해 신부가 그것은 안 된다고 하면 너는 너의 고해 신부님께 순명해야 된다. 그리고 나를 거부해야 된다. 먼저 고해 신부님에게 순명해라. 내가 너의 고해 신부를 설득할 줄 안다. 그러나 우선 너는 너의 고해 신부께 순명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입니다. Charisma(카리스마)입니다. 무엇이 진정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를 식별하는 은사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받은 사명입니다.
성 바오로의 삶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가 신비로운 그 체험을 한 후에, 아주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복음 전체가 성 바오로에게 현시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하고는 바오로가 주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당신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사도 9,6)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가 바오로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이 불고 싶은 데서 부십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교회의 인준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성 바오로의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한테 나타나셔서 ‘너는 수녀가 되어야 된다.’ 이런 말씀은 안 하십니다. 교회가 나를 수녀로 받아주고 그것을 인정해주고 그래야 내가 수녀가 되는 것이지 그전까지는 나는 수녀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소는 교회가 식별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주 굉장한 방법으로 아니면 보통 방법으로 사제가 되는 성소를 받았더라도 주교님께서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 줄 때까지는 절대로 그 사람은 사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뜻인 교회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희생 제물의 영혼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사는 항상 고해 신부님의 동의, 허락을 청했습니다. 이것이 루이사에게는 아주 힘든 희생이었습니다. 고해 신부님께서 항상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것도 아니고, 또 고해 신부님께서 항상 이것을 받아들여서 허락해 주시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루이사에게는 이것이 항상 힘든 희생이었습니다.
(2) 루이사와 예수님과의 친교
루이사와 예수님과의 그 친밀함은 너무너무 깊었기 때문에, 루이사는 예수님의 믿을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항상 의식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루이사는 예수님의 정배로서 예수님의 그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해 신부님은 차마 그런 허락을 못 해주시는 것입니다. 고해 신부님이 루이사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 주님의 수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허락을 항상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 후 루이사가 22살~23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해 신부에게 청해라. 일정 기간 동안 너를 내 고통에 참여시키고 싶으니까 고해 신부님께 그것을 청해라.”
루이사는 그것이 40일 정도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해 신부님도 ‘뭐 한 40일쯤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에게 예수님께 ‘OK, 예스’라고 대답하라고 시키셨습니다.그런데 그게 40일이 아니고 루이사의 남은 생애 전체였습니다.
만약 고해 신부님께서 그 기간이 루이사의 남은 생애 전부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루이사를 깨우고 미사를 드리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해 신부님도 60년 동안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루이사를 깨워 주어야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루이사한테 ‘네!’라고 대답하라고 시키신 것입니다.
17세부터 22세까지 첫 5년 동안 예수님의 수난에 루이사가 참여한 것은 며칠 정도 또는 어떤 일정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처음 5년 동안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은 며칠이고, 그 며칠이 지나면 루이사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이사와 루이사의 고해 신부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부터는 3일, 5일, 8일이나 며칠이 아니라 루이사가 죽을 때까지 60년 동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고통에 루이사가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루이사는 이걸 받아들일지 어떨지에 대해서 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체성사 때문이었습니다.
루이사가 정상적인 생활 상태였을 때는 성당에 가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받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영성체를 하고 예수님과 특별한 친교를 가지면서 예수님의 목소리도 듣고 그런 좋은 체험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이 기간 동안에는 성당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도 받아 모실 수 없었습니다. 영성체를 하면서 체험했던 그 특별한 체험들을 이제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루이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루이사에게 격려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를 거슬러서 이루어진 모든 모독을 보상하기 위해서 너 자신을 자원(自願)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죄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채찍질 같은 고통들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의 맹세로써 내가 너를 보러 오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로 내가 너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지금까지는 네가 나에게 왔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너한테로 오겠다. 너는 행복하지 않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말씀을 한 번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60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는 이런 방식으로, 어떤 때는 저런 방식으로 당신의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제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오셔서 미사도 드려주고 영성체도 시켜주는 그런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혹은 아주 특별한, 신비적인 방법으로 루이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루이사의 영혼이 루이사의 몸을 떠나게 만들기 시작하신 부분을 보겠습니다. 나는 왜 루이사의 영혼이 그녀의 몸을 떠나야 했었는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벌써 말했습니다. 하루는 루이사가 예수님께 불평을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안에 너를 포함시키고 싶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에게서 외적인 삶을 제거했다. 그리고는 나는 나 자신을 분명하게 너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네 영혼을 나에게로 끌어 오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어디를 가든지 너도 나와 함께 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너는 나를 더욱 누리게, 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전보다도 더 너 자신을 나에게 묶을 것이다.”
우리 영혼이 몸 안에 있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과 같이 굉장히 한정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은 감옥에 있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존재인데, 이 영혼이 몸 밖에 있으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이사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 즉시 예수님께서 그녀의 영혼을 그의 몸의 모든 부분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주 순수한 빛으로 빛나는 아주 단순한 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그 무한한 공간을 같이 돌아다니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루이사가 당신의 가장 깊은 고통에 참여하기를 원하실 때 그녀의 영혼이 그녀의 몸을 떠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루이사를 당신과 함께 데리고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 때문에 받은 그 쓴 독을 루이사에게 쏟아 넣어 주셨습니다.
(3) 지상에서의 신비적 결혼
이제 지상에서의 신비적인 결혼에 대한 말씀으로 이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889년 9월 8일,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에 루이사는 신비적인 결혼의 은총을 받습니다. 신비적인 결혼과 함께 그녀는 세 가지 향주덕 안에 감추어진 세 분 삼위의 위격을 영원히 받습니다. 삼위께서 루이사 안에 영원한 거처를 만들어서 이때부터 삼위께서 루이사 안에 영원히 정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날 루이사가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32년 후에 루이사가 예수님께 뭔가를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10. “너의 가족은 삼위일체시다. 네 침상 생활 초기에 내가 너를 천국에 데려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앞에서 우리의 혼인식을 거행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
11. 그때 성삼위께서 너에게 선물들을 주셨는데,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그래서 내 뜻에 대해, 내 뜻의 효과와 가치에 대해 말하면서, 네가 그때 받은 선물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있다. 내 지참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니 말이다.
12.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우리 성삼위가 하늘에서 내려와 네 마음을 차지하고 그 안에 우리의 영구적인 거처를 마련하였다. 우리가 너의 지성과 마음과 네 전체의 고삐를 잡았던 것이니, 네가 행한 모든 것이 너를 지배하는 우리의 창조적인 뜻의 유출이었고, 하느님의 영원한 뜻이 너의 뜻에 생명을 주고 있음을 드러내는 확증이었다.
13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이제 알릴 일만 남아 있다. 너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이 크나큰 선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어떤 때는 이 성직자를 부르고 다른 때는 저 성직자를, 또는 저 먼 곳에 있는 이들을 불러 이 위대한 진리를 알게 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다.(천상의 책 13권 39,10-13 / 1921년 12월 5일)
내일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성모 성탄 축일, 1889년 9월 8일. 우리 성모님의 생일을 축하할 것입니다.
121년 전에 하느님 뜻의 선물이 한 피조물에게 다시 주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예수님과 성모님만 하느님 뜻의 선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피조물 하나가 더 하느님 뜻의 선물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 다음에 성모님 다음에 루이사가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한없이 무한한 선물에 대해서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사제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질문 :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하느님의 뜻 영성을 루이사에게 가르치면서 특별히 사제들을 아주 특별히 선택하셨습니다.
답 : 정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제들을 부르시니까 우리는 정말 운이 좋습니다. fortune, 행운입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이 '지금'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200년 전이 아니고 500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 우리의 시대에 온 세상과 사제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21년 전에는 사제들에게만 주었는데 이제는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의 핵심 말씀은, ‘너의 뜻은 영원한 뜻에 의해서 기운을 받았다, 생기를 받았다.(animated)’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또 성경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원 역사의 시작 때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우리가 복종해야 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그러나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만, 지금 이 영성의 새로운 점은 땅에서도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도록 불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무슨 장군이 명령을 내려서 하는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는 하늘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에서 사는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뜻에 순명합니다.그런데 그것은 순명보다 훨씬 더한 것입니다. 단순한 순명이 아니라 순명 이상의, 훨씬 더 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천사나 성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하느님의 뜻이 하는 모든 일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이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하느님 뜻과 함께 성취하고, 모든 차원의 공로와 풍요로움을 주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와 하나가 됨을 원하시고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 역사 안에서 아주 특별한 시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의 시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 번째 피앗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Fiat Voluntas Tua.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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