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티없으신 마리아성심께의 봉헌과 결과②] 1954년 9월 4일 독일 봉헌

Skyblue fiat 2017. 2. 16. 11:47

 

 

 

티없으신 마리아성심께의 봉헌과 결과②

1954년 9월 4일 독일 봉헌

 

 

1954년 9월 4일 토요일 저녁, 독일 풀다의 성 보니파시오 대성당 앞에는 동독과 서독에서 온 1000,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교황 비오 9세가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선포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날 모든 이의 마음을 보아 요셉 프링스 추기경은 수백 년 된, 프라운베르크의 성모상을 앞에 모시고 주교와 성직자들과 함께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도서로 갈라진 조국 독일을 봉헌했다.

“… 저희는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에 저희를 봉헌합니다. 마리아께서 주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도 저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희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리아께 저희 가족을 봉헌합니다. 주님 어머니의 보호에 저희 민족을 봉헌합니다. 죄와 곤경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을, 희망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이 민족을 봉헌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청하오니, 마리아의 영혼을 감쌌던 성령으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마리아의 힘 있는 중재에 힘입어 주님께 우리 독일 민족의 운명을 맡깁니다. 은총으로 이 민족을 받아 주소서. 저희를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소서.

오, 자비의 하느님, 저희를 곤경에서 구해주소서. 저희 조국의 분단을 끝내주소서. 아직도 낯선 나라(러시아)에 있는 저희 형제자매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저희가 신앙 안에서 하나 되게 해주소서(개신교인들의 회개). 주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저희와 전 세계에 일치와 평화를 주소서.“

이 봉헌식에 이어서 동서독의 젊은이들은 스포트라이트로 빛나는 대성당 광장을 행렬하며 기도와 합창의 축제를 열었다. 그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다. 소련에서도 25,000명이 참석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와 다른 대륙에서도 약 800명이 역사적인 이 봉헌식에 함께했다. 영국의 그리핀 추기경도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표하여 그 자리에 참석했다.

 

 

봉헌의 계기는?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의 세계 봉헌에 이어 개인, 공동체, 가족 단위로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기를 촉구했다.1948년 5월 1일 발표한 회칙 <Auspicia Quaedam 세계 평화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공적 기도에 관하여>을 통해서.

“저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전 인류 가족의 대표자로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전 세계를 봉헌합니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자주 모두가 이 봉헌을 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교구 혹은 본당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도 봉헌하기를 촉구합니다.”

파티마 발현의 목격자 루치아 수녀는 1942년의 세계 봉헌과 관련하여 교황 비오 12세에게 이렇게 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 포루투갈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는데) 다른 민족들도 우리나라처럼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한다면, 성모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은총의 보증이 되실 것입니다”(루이스 콘도르, 파티마, 127쪽).

 

 

 

파티마 성모상 순례가 먼저 있었다

 

독일 가톨릭 교회가 이 봉헌을 행하기 전인 1954년 1월 23일 독일 마리아 노동자 공동체는 주교들에게 자국의 봉헌을 공적으로 요청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경외심으로 여기에 서명한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은 존경하는 교회 수장에게 청합니다. … 그동안 강한 영적 운동으로 전파된 가톨릭 평신도들에게서 이 생각이 나왔습니다. …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1954년에 교황 비오 12세의 전 세계 봉헌을 계기로 독일 전체를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기를 청합니다. … 믿음 안에 독일의 쇄신보다 하찮은 것이 아닌,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극복, 민족들의 평화, 교회의 자유, 러시아의 회개 그리고 분단된 독일의 통일이 이 봉헌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교황 비오 12세가 최초로 세계를 봉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랐으며, 가톨릭 세계는 환호하는 기쁨으로 교회 수장의 모범을 따랐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폭풍의 물결처럼 가톨릭 세계에 마리아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완전히 고립되고 곤경에 처했던 독일도 천상의 어머니가 내미는 구원의 손을 잡았다.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군대)의 유럽 본부장인 A. 푸스 신부에 따르면, 파티마 순례 성모상의 독일과 유럽 순례는 봉헌을 위한 큰 길을 열었다.

“독일의 가톨릭 교회가 파티마 메시지에 점차 귀를 기울이는 사이, 이미 파티마의 성모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른 대륙들을 순례하고 있었다. 교황 성하에 따르면, 파티마 성모상의 순례 효과는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독일에서도 순례 요청이 쇄도했다. 그리하여 1954년 마리아의 해에 독일에서도 파티마 성모상의 순례가 실현된 것은 쾰른 대교구장인 요셉 프링스 추기경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것의 계기가 있었다. 요셉 프링스 추기경은 그 2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했다가 포르투갈 파티마를 방문했다. 그 결과 그는 독일의 교회 지도자 중 파티마 발현을 알게 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이렇게 썼다.

“파티마에서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신 불을 우리 독일인들이 무심코 지나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54년 마리아의 해가 시작되기 직전, 그는 W. 하이넨 주교로부터 파티마 성모상 순례를 제안 받았을 때 즉시 동의했다. 그리고 그 순례는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요셉 프링스 추기경은 쾰른 대성당의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순례로)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마리아의 중개에 힘입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독일 지역 단위의 봉헌

 

독일 전체 봉헌에 이어서 그해 1854년 12월 8일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독일 전역의 모든 성당에서도 행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풀다에서의 봉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봉헌의 가치와 의미는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얼마나 생생하게 그리고 내적으로 동참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신자는 합당한 준비를 거쳐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자신의 본당 공동체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또한 사정에 따라 앞 주일에 마리아께의 봉헌을 행해야 한다”(풀다의 관보, 1955년, 85쪽).

그리하여 그날 독일의 모든 교구에서 봉헌이 행해졌으며, 그때 주교들은 성모님의 전구로 독일의 전쟁포로들이 러시아에서 귀환하기를, 독일의 통일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독일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했다.

 

 

 

-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 안에서의 교회 일치>에서 이정은 옮김

- 마리아 177호 201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