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영혼을위하여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 - 은사

Skyblue fiat 2017. 2. 15. 04:54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 

 

「연옥 실화」의 제9장 ‘연옥 영혼을 위로하는 방법’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은사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귀에는 나쁘게 들리고 일반 사람에게는 오해받는 점이다. 대사로 어떤 죄인이 사면되고 어떤 이는 감형되는 따위의 일이 있다. 은사(恩赦)는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대죄를 고백하고 다시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영원한 벌, 즉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용서를 받지만 사함을 받은 죄의 보속, 즉 유한한 벌은 현세나 후세에서 영복을 얻기 전에 다 받아야 한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자기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갚는데 교회의 재산, 즉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의 공로를 사용하여 기도나 고행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이 은사이다. 예를 들면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의 기도 같은 것을 바침으로써 해야 할 보속의 전부나 또는 일부가 사해지는 것이다.

 

성 마리아 드 귀도는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넓은 장소의 책상 위에 많은 금, 은, 보석, 다이어몬드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 재산은 아무나 써도 좋다. 원하는 자는 마음대로 가져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은사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이런 재산을 우리는 연옥 영혼의 빚을 갚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아이가 나쁜 짓을 했다. 아버지한테서 벌을 받아 외출을 못하게 된다거나 또는 찬 없는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자. 어머니가 불쌍히 여겨 네가 학교 숙제를 잘하면 아버지께 용서를 청해주마고 한다. 또는 누나가 이를 보고 어떤 좋은 일을 해서 동생을 위하여 빌고 벌을 용서받는다. 이것이 은사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치 이와 같다. 우리가 규정된 어떤 일을 하면 연옥 영혼의 빚을 갚고 그로써 저들의 고통이 다소 감해지고 영복을 얻는 시간이 빨라진다.

 

은사는 교회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어떤 고린토인이 공공연하게 중죄를 범했기 때문에 성 바오로는 그를 교회에서 파문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고 목숨을 건 고행을 했으므로 1년 후에 완전히 사함을 받아 전과 같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박해 시대에 감옥에 갇힌 순교자들이 주교들에게 글을 보내어, 자기네의 가난과 가까운 장래에 신앙을 위하여 바칠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드러난 죄인의 벌을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이것이 곧 은사이다.

 

어떤 자선을 베푼 자에게 교회는 은사를 베푼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물을 파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부나 자선을 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어떤 자선을 한 사람이 자기 죄를 통회하고 개과 천선할 결심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조건하에서는 은사를 얻어 연옥 영혼을 구해 줄 수 있다.

 

은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전대사와 한대사이다. 전대사는 잠벌을 아주 사해 주는 것으로서, 이를 얻고 곧 죽으면 연옥에 가지 않고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

 

한대사는 잠벌의 일부를 사해 주는 것이다. 10일, 40일, 1년, 10년 등의 은사란 그 날수나 또는 햇수의 연옥벌을 감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옛날 교회에서 드러나게 범한 죄의 벌로서 명해졌던 10일, 40일, 1년, 10년 따위의 보속과 같은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12세기까지 교회는 죄인에게 길고 엄한 보속을 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점을 친 사람은 5년간의 고행.

 

하느님, 성모, 모든 성인을 공공연하게 모욕한 사람은 일곱 주일은 성당 입구에 서고, 그 마지막 주일에는 맨발로 목에 끈을 걸고 서며, 일곱 금요일에 대재를 지키고, 신분에 따라 일곱 주일에 세 사람이나 두 사람 또는 적어도 한 사람의 가난한 이를 대접하고,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선업을 한다. 보속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도 장례 예절을 받을 수 없다.

 

주일과 축일에 노동한 사람은 3일간의 대재, 대재를 깨뜨린 사람은 20일간의 고행.

 

사순절 중에 고기를 먹은 사람은 부활날 영성체하지 못하고, 그 날 소재를 지켜야 한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3년간의 고행. 폭행을 한 사람은 7년간의 고행. 저주한 사람은 40일 동안 대재. 욕한 사람은 7일간의 대재.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은 5년간의 고행. 거룩한 예식 중에 지껄인 사람은 10일간의 대재. 고리 대금, 사음은 3년간, 간음은 7년 혹은 10년간, 간통은 12년간의 고행.

 

정부나 교회의 권리를 가진 자에게 폭동을 일으키는 자는 한평생의 보속. 암살자는 일생을 성제를 드리는 동안 성당 입구에 서고 임종 때에만 영성체가 허락된다.

 

그러면 10년 은사가 옛날 10년의 고행과 마찬가지의 공로를 발생케 한다면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얼마만한 효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기는 전연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느님의 비밀이다.

 

무릇 은사를 얻기 위해서는 상존 은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대죄가 없고 하느님 뜻에 맞는 자라야 한다. 또 은사를 얻는 데는 지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에 모든 행위를 하느님께 바침과 동시에 “오늘 모르는 중에서도 은사를 얻고 싶다”라고 뜻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명하여진 일, 예컨대 고해, 영성체, 어떤 선업, 교황을 위한 기도 등을 하여야 한다.

 

은사의 중요한 부분은 연옥 영혼에게 사양할 수 있다. 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업은 없다.

 

 

성녀 막달레나 드 파치

 

성녀는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모든 은사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어느 날 수녀원에서 많은 덕을 쌓은 동료 수녀가 죽었다. 그러나 천사들 가운데서도 흠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수녀 안에서도 더러움을 보시어 길고 엄한 연옥의 선고를 내리셨다. 성녀는 망자의 관 옆에 엎디어 기도와 은사로써 수녀의 영혼을 구해 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영원한 심판관 앞에 나아간 지 15시간 후 수녀의 영혼이 태양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며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부르짖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매여, 잘 가시오. 그대는 영복을 얻지만 나는 아직 이 눈물의 골짜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대 영광의 위대함이여, 그리고 또 연옥 고통의 짧았음이여. 그대 시체가 아직 묻히기도 전에 천국에 올라가는구나. 지금 그대는 현세의 모든 고통과 연옥 보속도 영복에 비한다면 온전히 무(無)와 같았음을 깨달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저 수녀의 영혼이 단 15시간만 연옥에 있었던 것은 너의 은사의 덕이었다.”

 

 

10일 은사의 가치

 

성 베르톨드는 프란치스코회의 유명한 설교사였다. 교황의 특별 윤허로 자기 설교를 듣는 이에게 10일 한대사를 줄 권리를 받았다. 어느 날 자선에 대하여 훌륭한 설교를 하자 몹시 빈궁에 빠진 한 귀부인이 불행한 사정을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성인은 옛날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성 베드로가 한 말을 상기하며 말했다.

 

“나는 금이나 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기꺼이 드리지요. 나는 설교를 들은 사람에게 10일 은사를 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혼의 재산보다 물질의 보배를 더 소중히 하는 이러이러한 은행가한테 가서 자선을 청하고 당신의 은사를 넘겨주십시오. 반드시 환영할 터이니, 주저하지 말고 가 보십시오.”

 

다행히 그 시대의 은행가는 이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무시하지 않았다.

 

“10일 은사 대신에 얼마의 돈이 필요합니까?”

 

부인은 두터운 신앙으로 한 장의 종이 위에 ’10일 은사’라고 써서 저울의 한쪽 접시에 얹고 말했다.

 

“이것과 비등할 만큼 필요합니다.”

 

은행가는 한쪽 접시에 은화 한 개를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사를 놓은 접시가 올라가지 않고 도리어 내려갔다. 2개, 5개, 30개, 아무리 놓아도 접시는 올라가지 않았다. 마침내 이 부인이 필요한 만큼의 액수가 되었을 때에 양쪽 접시는 균형이 잡혔다.

 

은행가는 이것을 보고 그 때부터 영적 재산의 가치를 알고 전보다 더 구령을 걱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어떤 청년이 부친을 여의었다. 아버지의 영혼을 빨리 구해 주려고 어떤 수도원에 가서 많은 예물을 바치고 기도를 청했다. 원장의 명령으로 수도자들이 전부 성당에 모였다. 일동이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란 말을 노래하자 원장은 “아멘.”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모두 각기 자기 방에 돌아갔다.

 

 청년은 이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단 한 번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이라니. 아버지는 참 불쌍하구나.”

 

 그래서 원장한테 가서 겸손하게 자기 심정을 털어 놓았다. 원장은 각 수도자에게 작은 종이 위에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고 쓰게 하고 그것을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또 한쪽에는 청년이 바친 많은 돈을 담았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돈이 담긴 쪽의 접시는 위로 올라가고 종이가 담긴 접시는 아래로 내려갔다. 뜻밖의 이 결과를 보고 청년은 자기 신앙이 부족했던 것을 원장에게 사과하였다. 그리고 부친 무덤에는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는 글을 새겨 두었다.

 

   

화살 기도

 

 은사 문제를 끝마치기 전에 화살 기도에 대하여 한마디하기로 하자. 이것은 사람이 한숨을 쉬듯 짧은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고 마치 아궁이 속에 5분이나 10분마다 석탄을 잔뜩 넣는것처럼 한다.

 

신앙을 가지고 다음 화살 기도를 하면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갖가지 은사를 얻을 수 있다.

 

“예수” 한 번에 3백 일 은사.

 

“예수, 마리아” 2백 일.

 

“예수, 마리아, 요셉” 7년.

 

“십자 성호” 50일.

 

“성수로 십자 성호” 백 일.

 

“내 주, 내 하느님” 7년.

 

“주 예수여,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50일.

 

“마음이 양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여, 제 마음을 당신 마음과 같게 하소서” 백 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달아드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백 일 (하루에 한 번만.)

 

“선종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3백 일.

 

“임종 때에 우민(憂閔)하신 예수 성심이여, 임종한 사람을 가련히 여기소서” 3백 일.

 

“자비로우신 예수여” 백 일.

 

“루르드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3백 일.

 

“주여,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3백 일.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 7년.

 

“삼종 기도” 10년.

 

“성 베르나르도의 성모께 바라는 기도 (생각하소서…)” 3년.

 

 자기 묵주알 위에 3백 일 은사의 기도, 예컨대 “선종의 모후여…” 기도를 외우면 2, 3분 동안에 1만 8천 일의 은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원의만 있으면 후세를 위하여 대단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수도자는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거기 묻혀 있는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주여,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신앙 없이 인간적 생각으로 말한다면 짤막한 기도가 무슨 도움이 되랴는 생각도 들지만 죽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수도자는 깜빡 잊고 이 기도를 하지 않고 묘지 앞을 지나갔다. 그랬더니, 대여섯 명의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불만스런 모습으로 시편(128,8)을 읊었다.

“‘주님의 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하고 지나가는 길손조차 말하지 않는도다.”

이것을 들은 수도자는 부끄러워하며 곧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위로를 받은 듯한 모습으로 그들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

 

위의 이야기로도 은사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은사에 무관심한 신자는 마치 여문 이삭을 발로 짓밟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현세 재물은 탐내어도 영적 재산은 버리고 들여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후세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은 선업 뿐이다. 다음의 병자처럼 한다면 영원한 재산가가 될 수 있다.

 

 

백만 장자

 

어떤 병자가 자기를 친절히 간호해 준 수녀에게 감사하고 싶었으나 재산이 없어서 기도를 해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모송을 백만 번 외웠다. 어느 날 그는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녀님, 수녀님은 부자가 될 생각은 없으시죠? 그렇지만 수녀님은 부자이시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농담이시겠지요.”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수녀님께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어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당신에게 갚아 주십사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성모송을 백만 번 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것을 끝냈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백만 장자이십니다.”

 

 

용감한 원의

 

일반적으로 말해서 원의(願意)란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만일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용감한 원의’는 그래서 특별한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일생 동안 자기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공로를 연옥 영혼을 위해 조금도 남기지 않고 성모 마리아께 드리고 또 사후의 자기 영혼을 위하여 봉헌되는 모든 선업과 미사나 은사 등을 전부 사양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알몸이 되신 것처럼, 연옥 영혼을 구하기 위해 빈털터리가 되고 알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돼. 나 역시 연옥에서 오래 고생해야 될 텐데. 속담에도 ‘자애(自愛)는 타애(他愛)보다 낫다.’고 했는데 빨리 연옥에서 구원되도록 나를 위해 공로를 쌓는 것이 당연하지. 남의 일은 뒷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오이다.

 

 

성녀 제르투르다

 

성녀는 오랫 동안 매일 세운 모든 공로를 전부 연옥 영혼을 위하여 사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종 때에 마귀는 이를 시기하여 오래 연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거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괴롭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로하여 말씀하셨다.

내 딸 제르투르다야, 연옥 영혼에 대한 너의 애덕은 몹시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 네 죄의 모든 보속을 완전히 용서한다. 또 이 완전한 사랑의 상급으로 천국에서의 네 행복의 정도를 더해 주겠다. 네가 연옥에서 구한 영혼은 내 명령으로 성가를 부르면서 너를 천국에 영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성녀는 확신과 기쁨에 충만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빨리 연옥에서 구원되는 첫째 방법은 이런 영웅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연옥 실화 / 막심 퓌상 지음 / 한국 순교복자수녀원 옮김 / 가톨릭출판사 )

 

- 출처 : 평화의 오아시스(http://peace.new21.net/?p=18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