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 중에 시간이 나서 어느 노인분과 대화를 하고 난 뒤 안수 기도를 해드렸다.
80이 넘으신 노인은 겉으로 보기엔 큰 치매가 아닌 것 같아도 치매가 오신 분이다.
그 할아버지는 나에게 죽고 난 뒤의 내세(來世)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세례를 받으신 것도 꽤 되었고, 본당에서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도 하신 분이
노환과 치매라는 육체적 한계 속에서 어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우리 인간의 죽음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인데,
육신은 물질이라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성(진리를 깨닫는 능력)과 의지
(선을 추구하는 행동의 원리), 감성(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서 생활의 원리)과 같은
정신력의 원천인 영혼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물리적으로 파괴도 되지 않고
화학적으로 분해도 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자유를 시험하는 기간인 현세 생활이 끝나면
하느님 심판 대전에 잘한 것은 상을 받고 잘못한 것은 벌을 받으며, 천국(영원한 생명과 복락)과
연옥(정화의 장소), 지옥(영원한 벌)이 결정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이 세상은 인과론(因果論)에 의해서 창조주라는 원인이 있으니까
이런 세상의 피조물이 존재하며, 삼라만상이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이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존재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계셔요.
우리 주변의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으니까 모든 피조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아니겠어요?
눈에 안보인다고 없다고 말하시면 안되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탱하며 움직이고 있음을 믿으셔야 해요.
우리가 죽고난 뒤에 심판과 내세가 없다면, 우리가 무얼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며 계명을 지킵니까?" 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저승사자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가톨릭 신자이신 할아버지가 '저승사자'라는 미신적이고 불교적인 용어를 쓰기에
짐짓 놀랐지만, 지금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음을 즉시 느꼈다.
선교 사업의 수호자이신 성녀 소화 데레사도 24살에 카르멜 봉쇄 수도원에서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지만, 죽기 전의 글을 보면 '못된 유물론적 무신론적
생각이 엄습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교회가 11월 11일 기념일을 지내는 성 마르티노 주교의 임종 전 이야기를 보면,
당신 곁에 당신 영혼을 낚아 채서 가기 위해 서 있는 악마에게 '너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물러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루카 복음 23장 39~43절에 나오는 예수님 십자가의 좌도와 우도의 이야기 속에서도
죽기전 마지막 말한마디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것임을 알려 준다.
육신의 음식은 잘도 드시지만, 치매로 정신 세계가 오락가락 하시는 분들의
마지막 영혼 준비는 어떻게 해드리고 가야 하는지? 앞으로 교회 안에서
걱정해야 할 지금보다 더욱더 심각한 순간이 올 것이다.
마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건드리지 못한다.
다만 기억(memory; 축적된 경험의 창고)을 건드리고, 상상력(imagination)을 건드려
온갖 불안과 두려움, 의심과 절망을 초래하고 야기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몸이 안좋으면 마사지를 받는데, 자신의 머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한다.
그러나 나의 성령 체험 속에서 인간의 머리는 어떤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고 지시하는
곳이며, 뇌에 문제가 있을 때 뇌졸증이나 치매, 중풍 등으로 고생도 하고,
뇌종양 등으로 뇌사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평소 온 몸을 마사지 하듯이 머리를 자주 문질러 주고,
손가락 끝으로 두드려 주면 좋다.
소위 '헤드 케어'(Head Care)를 해 주어야 한다.
대체의학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머리의 왼쪽 혈이 막히면
치매가 오고, 오른쪽 혈이 막히면 몸에 마비가 오며, 머리의 앞은 장기가 안좋을 때,
머리의 뒤편은 스트레스가 많을 때 아프다고 한다.
이것을 손바닥의 아래 부분(예를 들어, 오른손 같으면 오른손바닥의 아래왼쪽 부분)으로
아픈 곳 뿐만 아니라 골고루 문질러 주면 좋다.
나의 경험으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구마 은사와 치유 은사를 주셔서 그냥 만지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기도하면서 만지게 되고, 내 손이 본인이 말을 안해도 저절로 아픈 곳을
찾아가게 된다.
대개는 아파서 피하려 하고 도망가려 하지만, 그 순간을 잘 참고, 아픈 경우
입으로 숨을 뱉으면서 받으면, 아주 상태가 좋아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에 어둠의 세력이 붙어 있다고 말하면 싫어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내 자신도 분노하거나 마음보를 잘못 쓰면, 어둠이 머리에 붙어 있다는 걸 알고
스스로 자가 치유를 한다.
얼굴이나 목이나 어깨나 팔이 안좋은 경우에 머리 부분이 해결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따로 다루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 신부님은 저 은사를 가지고 사이비 치료사가 되어
돈벌이 많이 하겠네'하고 말하거나 오해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 저기 강의를 다니고 안수 기도를 해주지만,
올해부터는 일체 강사료나 수고비를 받지 않는다.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을 거저 베풀 뿐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하루에 몇 명을 그렇게 만져주고 기도해주고 난 뒤에 그 사람의
안좋은 것을 내가 다 받아내고 토해 내어야 하며, 정화(씻음)의 기도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고충과 고통을 생각하면 감히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나로부터 그렇게 기도를 받는데, 자꾸만 아파서 도망가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치매걸린 분을 만지면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만지면 아픔을 느끼고, 동시에 치유되어 시원하고 상쾌함을 느낀다.
구마 기도를 통해서 마귀를 쫓아내었으면, 반드시 성령 충만을 위한 안수 기도를 해서
영혼의 핵인 심령을 성령으로 채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둠이 또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는 내 안수 기도를 받으시고 잠시 소파에서 쉬셨다.
그리고 깨셔서 화장실을 갖다 오시면서 불경을 외우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다시 입을 여셨다.
자신이 어려서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올라가는 시기에 신경쇠약에 걸려
어느 절의 스님과 함께 일년을 살았다고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그 절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혼과 내면에
각인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나중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무늬만 천주교 신자이지
그 속은 온통 불자의 삶과 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사회학에서는 교의(dogma)체계, 계율체계(계명과 윤리 도덕), 의식체계(예배)
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으면 다 종교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종교(宗敎)란 절대자 하느님과 그 피조물인 인간과의
생명(生命)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요
목적이신 절대자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종교가 아닌 것이다.
종교 다원(多元) 주의 사회에 몸담고 살면서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할 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4장 6절이하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도 "그분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라고 베드로 사도가 분명히 말씀하신다.
고타마 싯타르타, 마호메트,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등 성현, 군자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을 그들 성현, 군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2,000년전 팔레스티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33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다가신 역사의 예수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
예수님의 인성(人性)만을 받아들이고 신성(神性; 天主性)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종교 다원 주의의 맹점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성현, 군자의 한 사람이고, 모든 종교에 구원(救援)이 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셨으며,
무죄하신 분이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인가?
타종파나 타종교의 구원 문제와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도 언급하고 있으니,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할 문제가
아니며, 하느님의 영역이고 소관이다.
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다 있지만, 완전한 진리, 절대 진리,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이 계신 것이다.
유교는 한마디로 사람답게 사는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교육학이고,
불교는 인생의 고(苦)의 원인을 사람의 탐욕에서 보고 그것에서
해탈하는 길을 가르치며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초자연적 계시(啔示)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참된 종교인 것이다.
물론 타종교에서 수덕적(修德的) 차원에서 배울 것이 많고,
함께 인류의 평화와 복지와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사이좋게 지내고 공생공존(共生共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참된 진리(眞理)라는 보화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복음적 가치관을 다른 어떤 종교적 가치 체계와도
나는 바꿀 수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 선조들도 스스로 유불선을 연구하면서 천주학을 천주교로 섬기게 되었고,
박해 시대에 순교로서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을 증거했던 것이다.
종교 다원 주의 사회에 살면서 아무리 좋은 게 좋다고 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해도
내가 가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수발을 들던 어느 불자가 어느 그리스도교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죽는 장면을 보고, 자신과 병실의 아버지께 세례를 달라고
원목실에 찾아가 간절히 청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천주교 노사제가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께 불평, 원망을 하여 너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는 어느 봉사하는 수도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죽기 전 마지막에 세 가지 성사(고해, 병자, 성체)를 다 받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영혼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이렇게 어둠이 본성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늙어 죽을 때가 다가오면, 본인 스스로 소,대변을 못가누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갓난 아기때 다른 사람들이 기저귀를 갈아주듯이 말이다.
이렇게 처음과 끝은 하느님 대전과 사람들 앞에 비슷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죽을 때에는 어린이가 되어 나의 마지막 자존심도 내려 놓아야 생(生)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모습은 다르므로, 마지막 죽음의 준비는 평소 믿음과 기도 생활이
결정지워 주는 것이기에 노인 사목이 참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나는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ㄱ)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갈라1,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9,16)
http://cafe.daum.net/FiatLove/ba08/1071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님(2015.09.15일 선종)
주님, 임언기 안드레아 사제에게
하느님 뜻 안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내가 사는 한.
나의 하느님께 노래하리라, 내가 있는 한." (시편146,2) - 신부님이 자신의 글에 단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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