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55, 참된 흠숭은 하느님의 뜻과 영혼의 완전한 일치에 있다.
이 흠숭의 완전한 모범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시다.
영혼이 본의 아니게 만드는 사랑의 빈자리를 채우는 법.
1924년 5월 13일
1. 일상적인 기도 중에, 나 자신을 온전히 지고하신 뜻의 팔 안에 맡기고 이 뜻 안에서 거룩하신 임금님께 나의 흠숭을 드리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기동하시며 두 팔로 내 영혼을 안으시고 이것을 하늘과 땅 사이로 들어 올리시며 나와 함께 지극히 높으신 분을 흠숭하셨다. 그런 다음 내게 이르셨다.
2. “딸아, 참되고 완전한 흠숭은 하느님의 뜻과 영혼이 한마음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에 있다.
영혼이 자기의 뜻을 자기 창조주의 뜻과 하나되게 할수록 그의 흠숭이 더욱더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 된다.
3. 그러니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지 않으면 - 하물며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 흠숭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그림자, 또는 흐릿한 그늘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뜻이 지고하신 뜻의 일치와 입맞춤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흠숭은 고사하고 모욕이나 조롱이 될 수 있다.
4. 흠숭의 첫행위는 자기 창조주의 뜻을 알아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말로만 흠숭할 뿐 실제로는 악담과 모욕을 퍼붓는 격이 된다.
네가 흠숭의 참되고 완전한 모범을 알고 싶다면, 나와 함께 거룩하신 삼위 가운데로 들어가자.
5. 예수님께서 나를 더 세게 껴안으시면서 -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 더 높이 끝없는 빛 가운데로 들어 올리셨다. 나는 무화(無化)되는 느낌이었지만, 이 나의 무가 하느님의 생명과 맞닥뜨렸다. 하느님의 생명이 그 자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빛과 선성과 평화와 사랑 등의 다양한 그늘을 내뿜었고, 그 그늘들로 인해 나의 무가 알아볼 수 없도록 변화되어, 나를 이처럼 아름답게 꾸미신 분을 매혹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시 계속하셨다.
6. “보아라, 딸아, 우리 성삼위의 원초적 행위는 우리 뜻의 완전한 일치다. 우리의 뜻은 합일되어 있어서 각 위(위)의 뜻이 서로 구분될 수 없다. 세 위격은 서로 구분되지만 - 그러니 우리는 셋이다. - 우리의 뜻은 하나이고, 이 하나의 뜻이 성삼위 상호간의 완전한 흠숭 행위를 계속한다. 이 뜻의 일치가 거룩함과 빛과 선성과 아름다움과 능력과 사랑의 동일성을 낳고, 우리 안에 질서와 평화의 진정한 다스림을 이룩하면서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 끝없는 지복을 주는 것이다.
7. 따라서 하느님 뜻과 인간 뜻의 일치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잇는 첫 연결 고리이고, 이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제(제) 덕이 도관을 통과하듯 피조물 안으로 내려오면서 그 사람 안에 자기 창조주에 대한 참된 흠숭과 완전한 사랑이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그는 동일한 도관으로부터 신적 속성들의 다양한 그늘을 받는다. 그러므로 영혼이 높이 올라 이 영원한 뜻 안으로 뛰어들 때마다 아름다워지고, 뛰어든 횟수보다 더 많고 다양한 신적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8. 이것이, 내가 내 뜻을 이루는 영혼이 나의 낙이며 만족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나는 이 낙을 즐기려고 내 뜻의 붓을 손에 들고 있다. 영혼이 내 뜻 안으로 뛰어들면 붓을 대어, 나의 아름다움과 사랑과 거룩함과 내 모든 속성들의 그늘을 하나씩 더 그려 넣으면서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그 영혼 안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똑같다. 성삼위의 흠숭과 똑같은 흠숭, 나의 뜻, 나의 사랑을 보기 때문이다.
9. 또한 내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이 언제나 있기에, 때로는 한 화가로서 그 안에 나의 모상을 그려 넣고, 때로는 스승으로서 지극히 높고 탁월한 가르침을 주고, 때로는 열렬한 연인으로서 사랑을 주고 또 받기를 원한다. 요컨대 그 영혼과 함께 즐기기위하여 나의 모든 기량을 동원하며 발휘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내 사랑이 사람들에게 모욕 받고 피신처를 찾지 못할 때, 나를 몰아내어 죽이거나 하늘 궁창으로 떠나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지 못할 때, 그때에는 내가 자기 안에 내 뜻을 지닌 영혼에게 피신한다. 여기에 있으면 내 능력이 나를 보호하고, 내 사랑이 나를 사랑하며, 내 평화가 내게 안식을 준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11. 나의 뜻은 따라서 모든 것을 - 하늘과 땅과 모든 선을 - 함께 연결하여 하나로 만든다. 여기에서만 가능한 모든 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선이 나온다. 그러니 내 뜻을 실천하는 영혼이 나의 전부이고, 나는 그 영혼의 전부라고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12. 그러고 나서 사랑하올 예수님은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물러가시며 모습을 감추셨다. 나는 위안을 얻고, 그렇다,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분 없이 홀로 남겨진 슬픔과 나의 힘겨운 처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13. 아! 그렇다.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분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기뻐하게 된다. 그러니 아무런 아쉬움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예수님과 함께 온갖 좋은 것이 그 현장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시고 나면 모든 근심 걱정이 되돌아오고, 그분 부재의 고통이 한층 더 날을 세워 영혼의 가련한 심장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며 언제나 새롭고 더욱 심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14. 그 사이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당신의 성심이 수없이 많이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 마음에 이 상처들을 입힌 것은 너다. 네가 나를 부를 때마다 상처를 내었고, 나 없이 혼자 있다는 것을 상기할 때마다 거듭해서 내었고, 나의 부재로 괴로워할 때마다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보탠 것이다.”
15.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저의 사랑이시여, 제 마음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피를 흘리는지를 아신다면... 당신의 부재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아픔을 겪는지를 아신다면... 그러니까 당신보다는 제가 더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와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상처를 입고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하시며 내 영혼의 내면을 두루 살펴보셨고, 그런 다음 그분과 내 상처들의 수를 비교하셨다. 그런데, 적지 않은 상처들이 내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예수님께 더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17. “내가 너보다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이제 알겠느냐? 한데 나의 부재로 인한 사랑의 빈자리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그 빈자리들을 채우는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너 혼자 있으면 나와 함께 있을 때처럼 일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18. 게다가 이 사랑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은 너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 예수가 그것을 채우는 일을 돌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일치 안에 있기 위해서는 내가 너로 하여금 내 뜻 안을 한 번 날아다니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이 사랑이 밖으로도 넘쳐, 우리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일하도록 맡기고 나를 신뢰하여라.”
16권-56,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사람의 행위는 영원한 신적 행위들의 가치를 입는다.
하늘과 땅에 있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
1924년 5월 19일
1. 나의 하찮은 정신이 지고하신 의지의 무한성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바다 속에 있는 느낌이어서 내 온 존재가 영원하신 뜻의 이 유익한 물을 큰 모금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뿐만 아니라 이 물이 신체의 각 부분에, 곧 귀와 입과 눈과 콧구멍과 피부의 숨구멍 속으로도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기척을 내시며 이르셨다.
2. “딸아, 내 뜻은 영원하다. 그러니 내 뜻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의 모든 행위가,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영원성을 포함하여 영원하신 뜻에 의해 생명을 받고, 신적이고 영원한 행위들의 가치와 공로와 형상을 입는다.
3. 하느님의 의지가 그 모든 행위들에서 인간적인 것을 전부 비우시고, 그것을 그분의 거룩하신 뜻으로 채워 그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그 행위들 위에 그분 뜻의 인장을 찍으시어, 같은 수의 영원하고 신적인 행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4. 나는 이 말씀을 듣고 화들짝 놀라면서 “오, 지극히 높으신 저의 선이시여, 당신의 뜻 안에서 사는 것만으로 피조물이 이리도 큰 선을 - 그의 행위가 영원하고 신적인 행위가 되는 선을 얻을 수 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5. 그러자 예수님은 “왜 놀라느냐?” 하시며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모든 이유는 내 뜻이 영원하고 신적이라는 것에 있다.
내 뜻에서 온 모든 것은, 영원하고 신적인 뜻에서 태어났기에 영원하고 신적인 성질을 띠기 마련이다. 피조물이 자기의 뜻을 제쳐놓고 나의 뜻에 자리를 내준다면 말이다. 나의 뜻에 자리를 내주는 한, 가장 크든 가장 작든 사람의 행위들이 우리 (성삼위)의 행위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6. 같은 일이 천지창조에서도 일어났다. 크고 작은 것들이, 작은 씨앗과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창조되었느냐? 그런데 큰 것들은 하느님의 지고하신 뜻에서 생겨난 하느님의 작품이지만 작은 것은 하느님 손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7. 또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 속에 창조된 것들, 곧 하늘에 태양과 별들 따위는 언제나 한결같이 안정되어 보이는 반면, 그보다 아래쪽에 창조된 것들, 곧 꽃이며 초목이며 새들 따위는 죽음과 소생의 무상(無常)한 변화를 겪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내 뜻의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하신 뜻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 씨앗이 증식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된 만물 안에 나의 창조력과 보존력이 있기 때문이다.
8. 이와 같이 만물이 내 전능한 ‘피앗’의 힘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하물며 영혼이 자신의 인간적인 뜻을 내 의지의 발치에 두고 내 뜻이 활동할 수 있도록 내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때문에 내 뜻이 그 영혼 안에서 활동한다면, 이런 행위야 얼마나 더 신적이고 영원한 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9. 아! 내 뜻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서 살게 하는 영혼을 사람들이 만약 볼 수 있다면, 일찍이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을 목격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뜻이라는 작은 영역 안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볼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땅과 하늘에 있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기적이 아니겠느냐? 피조물 안에서 내가 계속 활동하는 이 놀라운 일에 비하면, 바로 창조 사업마저, 오, 얼마나 아득히 뒤떨어진 일인지 모른다!”
16권-57, 하느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의심할 터무니가 없는 까닭.
그분의 첫 말씀인 ‘피앗’이 당신 뜻에 대한 첫 가르침이다.
1924년 5월 24일
1. 다정하신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괴로움이 절정에 달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와 함께 의심까지 부글부글 괴어오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모든 말씀과 내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이 다만 나의 착각이거나 지옥 원수의 속임수로 보여,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던 것이다.
2. ‘내가 허락만 받을 수 있다면, 또 이제껏 써 온 글이 내 수중에 있기만 하다면, 오, 너무나 기뻐하며 모조리 불살라 버리련마는! 하지만, 아아 슬프다, 그것은 내 수중에 있지 않고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있다. 또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들 누가 용납할 것인가?
3. 아! 예수님, 이 가련한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적어도 멸망하게 버려두지는 마십시오. 설령 모든 것이 끝나고, 당신과 저의 관계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저로 하여금 좀이라도 당신의 거룩하고 흠숭하올 뜻을 실행하지 않는 불행만은 - 이 최대의 불행만은 자초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4. 내가 그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에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나의 내면에서 나오셨다. 그분의 흠숭하올 현존 앞에 있게 되자 어둠이 달아나고, 의심이 사라졌으며, 빛과 평화가 내 안에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5. “내 뜻의 딸아, 어찌하여 네 안에서 하고 있는 나의 일에 대해 의심하느냐? 더구나 내 뜻에 대하여, 내가 내 지고한 의지에 대하여 너에게 말한 것을 의심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터무니없는 짓이다. 내 뜻에 대한 가르침은 내 신성의 맑은 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수정처럼 맑은 물보다 더 맑고, 빛을 비추며 열을 주는 찬란한 태양보다 더 밝다. 그것은 지극히 선명한 거울이다.
6. 그러므로 이 천상적이며 신적인 가르침(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행운을 잡은 사람은 누구든지 감동을 받을 것이고, 자신의 더러운 얼룩에서 정화되고 싶은 간절한 원의가 내면에서 끓어오름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이 천상적인 가르침을 다량으로 꿀꺽꿀꺽 마시게 될 것이기에 신적인 거룩함으로 단장되어 아름다울 것이다.
7. 너는 하느님의 지혜의 전능이 천지창조 때에 왜 ‘피앗’을 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도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뜻이 만물 위에 감돌기를, 그리고 당신의 뜻이 지닌 힘과 좋은 것들을 만물이 받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피앗'을 발하셨다. 이를 발하시면서 당신 뜻의 놀라운 것들을 소통시키심으로써 만물이 이 뜻을 생명으로, 통치 제도로, 모범과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8. 딸아, 하늘 궁창에 울려 퍼진 네 하느님의 첫 말이 바로 ‘피앗’이었고 그것은 굉장한 말이었다. 그분은 다른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이는 일체 모든 것이 '피앗' 안에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 '피앗'으로 내가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모든 것을 제정했으며,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고, 모든 것을 포괄했으며, 이 영원한 뜻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하여 그것의 좋은 것들을 전부 한데 엮어 집결시켰으니 말이다.
9. 그렇게 만물을 창조한 뒤 사람을 창조하고자 했을 때에도, 나는 사람을 나 자신의 뜻과 함께 반죽하여 빚어내려는 듯이 '피앗'을 반복하였다. 그다음에 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러면 우리 뜻의 힘으로 사람이 그 내면 전체를 우리와 비슷하게 유지할 것이고, 우리의 모습을 아름답고 흠 없게 보존할 것이다.'
10. 그러니, 보아라, 창조되지 않은 지혜가 마치 '피앗'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이를 발하기를 원하였다. 이 숭고한 가르침이 그토록 필요했던 것이다. 이 '피앗'은 나 자신의 작품들의 보존자로서 지금도 여전히 모든 피조물 위를 감돌고 있고, 사람을 다시 그 자신으로 감싸며 자신 안에 담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 올 태세로 있다. 사람이 스스로의 기원으로 - 내 뜻에서 나왔으니 다시 내 뜻 안으로 -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11. 사실 나의 지음을 받은 만물이 그들이 온 것과 같은 길로 내게 돌아오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마치 나 자신의 뜻이 데리고 오는 것처럼 승리한 모습으로 내게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12. 따라서 내가 내 뜻에 관해 너에게 말한 모든 것의 목적은 바로 내 뜻이 알려지는 것과 세상에 와서 다스리는 것이고, 내가 한 말도 알려지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모든 것을 눌러 이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이 말, 곧 '피앗' 안에서 내게 돌아올 필요가 있다.
13. 하느님께서 '피앗' 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람도 '피앗'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의 모든 것 안에 오로지 내 '피앗'의 반향, 내 '피앗'의 각인, 내 '피앗'의 업적만을 지니고 있어야 비로소 내가 내 뜻이 지닌 좋은 것들을 그에게 줄 수 있고, 이리하여 내 모든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게 될 것이다.
14. 이런 이유로 나는 내 뜻이 지닌 효과와 가치와 좋은 것들과 숭고한 것들을 알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혼이 내 '피앗'과 같은 길을 따라가면 얼마나 고상하게 승화되고 신화되며 성화되는지, 하늘과 땅이 이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는 내 '피앗'의 경이로운 일을 보고 크게 놀랄 정도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리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내 뜻의 능력으로, 일찍이 내가 준 적이 없는 새로운 은총들이, 더없이 찬란한 빛이, 지금까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내게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15. 나는 그래서 제자에게 자기가 아는 학문 분야를 가르치는 스승처럼 행동한다. 이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그를 자기와 비슷한 또 하나의 스승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숭고한 가르침은 내 첫 말인 ‘피앗’이었고, 내가 가르친 기도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피앗’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가 내 뜻에 관한 더 넓고 더 분명하고 더 숭고한 가르침을 너에게 주고 있다.
16. 이는 제자인 네가 내 뜻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되어 다른 이들을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내 재산과 보화, 내 기쁨과 나 자신의 행복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내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 충실하고, 절대로 내 뜻을 벗어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