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2015-06-21)
덕신성당 주임, 이요한 십자가의 요한 신부님 강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코복음.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부산교구에서는 전에 공문을 내서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6월 25일날 당일날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9일기도 계속하고 있고 매일 미사전에 쉬는 교우를 위해 본당에서 지향을 바치지만 그것과 함께 12월 31일까지 8,000만 남북한 모든 한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아홉시에 주모경을 바치면서 주님께 민족이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기를 청하고 있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볼때, 우리가 교회안에서 더욱 일치를 이루도록 해야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계십니다.
주님이 누구신가? 주님, 주님, 하느님, 창조주, 세상의 구원자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 하느님을 그런 위치로 들여높여서 제대로 공경하고 있지 못하죠.
세상안에서는 둘째치고라도 우리 교회안에서 주님께서 다스리셔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우리가 더욱더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서 제 2독서에 바오로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말 그대로 정말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 다그치시고 요구하시고 정말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거죠.
예, 오죽 했으면 길 가다가 사도들이 싸웠죠. 아마 사도들도 우리와 비슷했던 것 같아요. 서로 누가 더 위이냐, 누가 더 사도단 안에서 힘이 있느냐, 누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냐 이걸 두고서 서로 싸우죠. 예수님께서 목적지에 도착하셔서 “길에서 왜 그렇게 다퉜느냐?”하니깐, 알죠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고 전부다 눈치만 보고 어떻게 해야되는지 모르는 거죠.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세상의 지도자들은 밑의 백성들한테 세도를 부리고, 권력자들은 나쁜 짓을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 위에 있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큰 소리치지 않습니다. 절대 무언가를 남에게 시키지도 않죠. 그건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는 사람은 절대 무언가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할 뿐이죠. 저도 물론 시키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죠. 하지만 어떤 경우도 “하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약간 그런 표현을 썼다면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니죠. 제가 신자분들에게 말씀드리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부탁입니다. ‘우리가 좀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우리가 함께 복음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면, 아, 우리가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무언가를 해서 교회를 바꿀 수 있다?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만약에 그게 가능했다면 교회가 지금 이 꼴이 아니겠죠.
왜그러냐면 제가 이 성당에 와서 세례 준 사람이 좀 됩니다. 실제로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제가 매 해 열명 가까운 신자를 계속 세례를 줬는데 벌써 4년이 됬으면 그 열 명씩만해도 사십명이거든요. 그러면 우리 성당에 자리가 없어야 되요. 제가 처음 이 성당 왔을때 미사에 참석하신 분이 120~130명 됬었는데, 제가 40명을 더 줬지 않습니까. 그럼 160명이 앉아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자리가 없겠죠. 그런데 자리가 다 비어있네~ 다 어디로 갔어요? 글쎄요. 그래서 매일 미사때마다 묵주기도 1단을 바치면서 우리 안오고 있는 신자분들이 왔으면 좋겠다 해서 묵주기도 1단을 바치죠, 또 주보 일인당 한명씩 갖다주시는 분 정해가지고 계속 넣어드리고... 지금도 잘 하고 계시죠? (네.) 주보 계속 넣어주고 ‘우리가 당신들을 잊어버린게 아니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주보를 집에다 넣어드리자 하는게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또는 내가 우리 본당에서 무언가 역할을 해서 사람들을 바꾼다. 오늘 복음서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겁니다.
세상에 폭풍이 치고 있는데 내가 배의 돛을 막 조정하면서 어떻게든 그걸 이겨보려고 애를 쓰는 거죠. 사실 그런 정도의 수준인거죠. 되겠습니까? 되겠어요? 뭘 할 수 있겠어요? 안되는 거죠.
그런데 내가 해볼려고 애를 쓰니깐 예수님이 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은 배만 타면 할 게 없어요. 왜, 베드로가 뭐라 하겠습니까? ‘내가 그래도 갈릴레아에서 40년 배질하던 어부인데~’ 예수님께서 뭐 좀 해볼라 그러면 “아~ 거 좀 가서 쉬세요! 주무세요!”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배만 타면 할 게 없죠.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할게 없으니까 ‘아이구, 뭐 잠이나 자야지’ 하고 주무시는 거죠. 자기가 해볼라다가 도저히 안되니까 어떡합니까? 그제서야...
그래도 절대 예수님은 미리 깨서 “내가 뭐 도와줄까?”하시지 않습니다. 왜, 평상시에 아무 문제 없을때에도 예수님에게 의지 안했는데 내가 뭐하러 굳이 지금 상황에서 일어나가지고 내가 미리 무언가를 해주게 되면 더더군다나 항상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죠. 그러니까 계속 주무시는 거죠. 평상시에 하던대로 주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제서야 ‘아, 이게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는구나.’를 깨달은 인간이 “주님~! 도와주십시오!!!”가 되는 거죠.
여러분, 지금 중부지방에 가뭄, 이번에 비로 해갈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강원도인데 강원도는 큰 강이 좀 적죠. 그래서 물을 풀 데도 없습니다. 자, 문제는 비가 안와서 기상청이 생기고 나서 최악의 가뭄이다. 난리를 치니까 그제서야 하는게 뭡니까? 기우제 드리죠? 21세기에... 인공강우를 어쩌고 저쩌고... 인공강우하면 비 옵니까? 결국 우리가 그런것들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교만해졌냐는거죠. 네, 교만해질만 합니다. 며칠전에 뉴스에 나왔었죠. 10년전에 발사했던 인공 로켓이 명왕성에 도착해서 활동을 개시합니다. 10년 동안 날아가서 잠자고 있다가 딱 작동을 해서 탐사를 해서 보내죠. 인간이 교만해질만 하죠. 10년을 미리 계산을 해서 보내고 정확하게 만나서 자료를 보낼정도의 과학기술 자랑스럽고 교만해질만 합니다.
하지만 막상 비 안오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물론 인공강우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만능이 아니죠. 그건 얼음같은 빗방울이 응고될 수 있는 씨앗을 비행기에 싣고 가서 공기에 뿌리면 그 씨앗이 공기중에 있는 수증기와 반응을 해서 커지죠. 그래서 비가 내리도록 만드는게 인공강우인데 이 인공 강우를 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게 한랭전선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비를 내릴 수 있는 전선이 형성이 되어 있어야 즉, 차가운 공기가 일정부분 전선이 만들어져 있는 곳에 씨앗을 뿌렸을 때, 비가 내리는 거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고기압 (저기압때 비가 오잖아요.)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갖다 뿌려도 비 안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죠. 결국 비가 오고 안오고는 하느님 손에 달린 겁니다. 메르스도 마찬가지죠. 인간이 나름대로 노력을 하겠다고 하지만,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단 한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삼성병원에서 잘 봤습니다. 한 사람이 말 안하고 그냥 응급실 몇번 왔다갔다하고, 병상갔다온 거기에 거의 7~80명의 사람이 병에 걸려버렸죠. 인간의 한계란게 그런겁니다. 어디서 셀지 모르는 단 하나의 구멍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죠.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예요. 단 한명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행동이 공동체 전체의 일치를 해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런 부분을 없애기 위해서 서로 애를 쓰는 겁니다. 함께 기도하고 더욱 공동체를 이루고... 아, 정말 내가 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제가 세례 준 사십명의 사람들이 전부 성당에 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지만, 물론 제가 준게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거지요.
하느님께서 세례를 주셨고 그들을 당신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비록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보살피시고 모든 현세의 풍랑 가운데에서 그들을 인도하실거다. 비록 아직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쉬고 계시고,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어떻게 해볼까하고 돛을 막 조절하고 물을 퍼내고 하겠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같은 배의 뒤에서 주무시고 계시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그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깨우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 해결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한 역할은 그분의 배에 예수님을 태워드렸어요. 그럼 저의 할 일은 끝났지요. 깨우는 건 본인의 일이고 일하시는 건 예수님이시니까 저는 할 게 더이상 없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타고 계시잖아요. 그럼 다 된거죠.
시련은 그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있는게 아니라 그분이 예수님을 깨우기 위해서 주어진 거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풍랑이 부는 이유는 딱 한가지인 거죠. 뭐 하라고? 예수님을 깨우라고~.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뒤에서 주무시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해야 예수님께서 깨어나시는 겁니다. 깨워야 됩니다. 가서 “예수님~ 살려주세요~~!” 해야 되요.
여기 이 표현이 굉장히 우리한테 중요한 것입니다. “스승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이 표현을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아니, 평상시에 배 모는 때는 아무런 것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던 사람들이 막상 이런때가 되니까 뭐 걱정이 안되냐고? 누구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왜 지금 자고 있냐고 질책하는 거잖아요. 이게 밑에 사람이 하는 이야깁니까? 절대 아니죠. 표현이 그럴뿐이지 절대 밑에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게 우리 바로 인간이죠.
아!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꿔다놓은 보리자루 취급을 했던 것과 똑같이 모셔놓고 우리집에 내 안에 모셔다 놓고 항상 뒷전에 뒀구나~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다스리셔야 되고, 주님께서 항상 앞에 스셔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모셔다가 앞자리에 세워야 됩니다. 이것을 깨우쳐주시는게 바로 폭풍입니다. 따라서 폭풍이 불 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아, 예수님께서 일어나실 때다. 우리가 주님을 깨울 때가 됐구나.’
정말 우리나라 이런 많은 어려운 상황에서 정말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이 모든 사건을 다 오늘 기적처럼 해결해주셔서 다시 더욱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평화를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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