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시(새번역)/4권 공생활 둘째해(하)

하사시4권 [248. 시카미논을 향하여. 249. 시카미논에서 제자들과 만나시다]

Skyblue fiat 2025. 5. 30. 13:53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제4권 공생활 둘째 해(하)1 p137~p152

 

 

248. 시카미논을 향하여

1945. 8. 10.

고요하고 화창한 아침나절이어서 예수의 일행이 서쪽 즉 바다 쪽으로 뻗어 있는 야산들을 올라가는 것이 수월하다.

“우리가 아침 이른 시간에 산에 올라오기를 잘했습니다. 우리는 이 더위에 평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는 그늘이 있고 시원합니다. 로마 가도를 따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참 안됐습니다. 물론 겨울에는 괜찮겠지만요.”
마태오가 말한다.

“이 야산들을 넘어가면 바닷바람이 불 것이다. 바닷바람이 불면 항상 시원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저 위에서 식사하십시다. 저번 날에는 경치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카르멜 산도 더 가깝고, 바다도 더 가까우니 경치가 한층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알패오의 야고보가 덧붙인다.

“우리 고향은 참으로 아름다워!”
안드레아가 감탄한다.

“그래. 정말 무엇이든 다 있어. 눈 덮인 산들과 유쾌한 야산, 호수, 강, 가지각색의 나무가 있고, 바다까지 있잖아. 참으로 우리 시편 작가들과 우리 예언자들과 위대한 전사들과 시인들이 찬양한 더없이 매력적인 고장이야.”
타대오가 말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네가 시편의 한 대목을 암송해보게.”
제베대오의 야고보가 간청한다.

“‘낙원의 아름다움으로 그분께서는 유다의 땅을 만드셨도다. 천사들의 미소로 그분은 납탈리의 땅을 꾸미셨고, 하늘의 꿀물이 흐르는 강으로 그 땅의 과일에 맛을 주셨도다… 온 우주가 하느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신 그분의 보석인 네 안에 반영되어 있도다.

복된 땅아, 네 아름다움이 네 자녀들의 마음에는 네 산비탈에서 익어가는 탐스러운 포도송이보다 더 달고, 네 암양들의 젖을 불리는 양젖보다 더 감미로우며, 너를 꾸며주는 꽃의 풍미가 나는 꿀보다 더 도취하게 하도다.


하늘이 내려와 두 보석을 하나로 이어주는 강을 만들었고, 초록빛 네 옷에 목걸이와 속옷을 만들어주었도다.
요르단 강은 노래하고, 네 바다 중 하나는 미소 지으며, 다른 한 바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위엄이 가득하시다는 것을 일깨워주며, 석양에 야산들은 풀밭 위의 명랑한 소녀들처럼 춤추고, 천사 같은 새벽에 네 산들은 기도드리거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알렐루야를 노래하거나, 별들과 함께 당신의 권능을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를 좁은 경계 안에 가두지 않으시고, 세상이 우리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려고 우리에게 열린 바다를 주셨습니다.’”

“아름답다! 참으로 아름다워! 나는 호수 위에만 있었고, 예루살렘밖에 가본 적이 없어,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밖의 다른 것은 보지 못했어. 지금까지 나는 팔레스티나밖에 몰랐어. 하지만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확신해.”

자기 나라에 대한 긍지에 가득 찬 베드로가 말한다.

“마리아께서는 나일 강의 계곡도 아름답다고 나에게 말씀하셨어.”
요한이 말한다.

“엔도르 사람은 키프로스를 낙원 같다고 말해.”
시몬이 덧붙인다.


“오! 그래, 하지만 우리 땅은! … ”

 

예수와 함께 조금 앞서 가는 가리옷 사람과 토마스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은 팔레스티나의 아름다움을 계속 찬미한다.
맨 뒤에 여자들이 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정원에 뿌릴 꽃씨를 따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꽃들이 아름다운 데다, 여행의 기념품도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다수리처럼 보이는 몇 마리의 독수리들이 넓은 원을 그리며 야산 위를 빙빙 돌다가 이따금씩 먹이를 찾아 급강하한다. 그리고 두 마리의 독수리들이 싸움을 시작한다. 그놈들은 공중에서 급발진하여 서로를 공격하는데, 공격할 때마다 두 마리 모두의 깃털이 뽑혀져나간다.
이것은 결국 패배한 놈이 도망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우아하고도 격렬한 결투이다. 아마도 그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에서 죽으려고 가는 것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힘든 비행을 하는 그놈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생각이 들 것이 틀림없다.

“그놈은 탐욕 때문에 죽게 됐구먼.”
토마스가 논평한다.


“탐욕과 고집은 항상 말썽을 일으켜. 어제의 그 세 사람도 그래!… 맙소사! 얼마나 끔찍한 운명이란 말인가!”
마태오가 말한다.


“그 사람들의 병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을까?”
안드레아가 묻는다.
“선생님께 여쭈어보게나.”


예수께서는 질문에 대답하신다.
“그들이 회개할 것인지를 묻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거룩한 나병환자로 죽는 것이 건강한 죄인으로 죽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나병은 땅에, 무덤에 남아 있겠지만, 죄들은 영원히 지속된다.”

“당신께서 어젯밤에 해주셨던 말씀은 대단히 감명 깊었습니다.”
열성당원이 말한다.

“반대로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가리옷 사람이 말한다.

“너도 그들 중 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선생님.”
“그럼 너는 왜 염려하느냐?”
“그것이 당신께 해로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그런 있을 수 있는 해악을 피하려고 내가 죄인들과 타협하고 그들의 공범이 되어야겠느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십시오. 실력자들과 소원해지지 마십시오.”
“침묵은 동의하는 것이다(Silence gives consent). 나는 보통사람의 죄든, 유력자들의 죄든 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께서는 세례자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아십니까?”
“그의 영광이다.”
“그의 영광이라고요? 제 생각에는 그의 파멸인 것 같은데요.”

“우리의 의무에 충실하기 위한 박해와 죽음은 사람에게 영광이다. 순교자는 항상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더 이상 선생 노릇을 할 수 없고,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세례자에게 친척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에게는 여전히 자기의 제자들에 대한 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세례자에게 친척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르심은 핏줄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럼 넷째 계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하느님에 관한 계명들 다음에 온다.”
“당신께서는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로 인하여 얼마나 괴로워할 수 있는지 보셨습니다.”

“어머니! 이리 오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마리아께서는 서둘러 예수에게로 오셔서 물으신다.
“아들아,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어머니, 가리옷의 유다가 당신을 사랑하고, 저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이유로 자기의 주장을 펼칩니다.”
“내 명분이라니? 무슨 일에 대해서?”

“이 사람은 제가 우리 친척 세례자처럼 고통당하지 않으려면 더 조심해야 한다고 저를 설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넷째 계명이 명하는 바에 따라 어머니들을 불쌍히 여겨 그분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아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머니, 말씀하세요. 그래서 당신께서 우리 유다를 친절하게 지도해주세요.”

“만일 내 아들이 자신의 완전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낮추어 인간적인 사정을 고려하고 초인간적인 고려의 시각을 잊어버리는 것을 내가 보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내 아들을 하느님으로서는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고, 내가 그의 본성에 대하여 항상 잘못 생각하지 않았는지, 항상 속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될 걸세. 초인간적인 고려라는 것은 고통당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기를 각오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구속하려고 애쓰는 것일세.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겠지만, 악한 힘에 의하여 길 잃은 아들에 대한 동정으로 사랑하지, 그가 주님께 충실한 것을 보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충만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지는 않을 걸세.”

“당신의 말씀은 그분 자신께 충실하시다는 말씀이지요.”

“주님께 충실하다는 말일세. 지금 내 아들은 주님의 메시아이니 여느 사람처럼, 아니 다른 누구보다 더 주님께 충실해야 하네. 왜냐하면 그의 사명보다 더 큰 사명이 일찍이 없었고, 지금도 없고, 미래에도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그는 분명히 그처럼 큰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고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만일 그분께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당신께서는 울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내 모든 눈물을 흘릴 걸세. 그러나 나는 그가 하느님께 불충한 것을 본다면 피눈물을 흘릴 걸세.”

“그렇게 되면 그분을 박해할 사람들의 죄가 많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어째서?”
“왜냐하면 당신과 그분 모두 그들을 거의 정당화(justify)하시니까요.”

“그것을 믿지 말게. 우리가 그것을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든, 아니면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도 메시아에게 죄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든 하느님의 눈에는 그 죄들이 항상 그대로 남아 있을 걸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럼 만일 그들이 이방인이라면, 그것은 같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이방인들에게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대한 죄밖에 되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알기를 원치 않네. 그들은 의도적으로 불신하는 거야. 그들은 사랑이 없는 데에다 불신을 합치고 희망을 부인하네. 이 삼주덕(三主德, the three main virtues)을 짓밟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닐세, 유다. 그건 중죄야. 내 아들에 대한 어떤 신체적인 행위보다 영적으로 더 중대해.”

유다는 자기가 논쟁에서 이기기가 어렵게 되자 샌들 끈을 매느라 몸을 숙이며 뒤에 남아 있다.


그들은 산의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운 푸른 바다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원하는 듯 정상에서 돌출한 바위이다. 털가시나무의 두꺼운 줄기가 바늘처럼 가느다란 부드러운 맑은 에메랄드 빛 햇살을 걸러준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매력적인 산마루가 웅장한 카르멜 산맥 맞은편 가까운 해안을 향해 열려 있다. 마치 날아가기를 열망하듯 돌출해 있는 바위가 있는 산 아래, 산 옆구리 중간 부분에 있는 몇 뙈기의 밭을 지나면 깊은 급류가 흐르는 협곡이 있다.

이 급류는 틀림없이 홍수 때는 힘이 대단하겠지만 지금은 개울바닥 한가운데를 흐르는, 은빛 거품을 내는 작은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다. 급류는 카르멜 산 밑자락을 따라 바다를 향하여 흘러간다. 급류 오른 편 제방에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은 만 중간에 있는 고을과 내륙의 마을들을 연결하고 있다. 내가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마을들은 아마 사마리아의 마을들일 것이다.

“저 고을이 시카미논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 저녁 늦게 저 고을에 도착할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시원하고 짧지만 어려우니 지금 휴식을 취하자.”

일행은 빙 둘러 앉아 서로 그리고 여인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투박한 쇠꼬챙이에 꿴 어린양이 구워지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이 목자들의 선물일 것이다…



249. 시카미논에서 제자들과 만나시다

1945. 8. 11.

예수께서 급류의 기슭에서 이사악과 많은 제자들을 만나시는데, 여기에는 아는 제자들도 있고 알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다.

아는 제자들 중에는 맑은 내의 회당장인 티모네오와 근친상간으로 고발되었던 엠마오의 요셉,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는 것을 포기한 젊은이, 스테파노, 지난해에 코라진 근처에서 친구 사무엘과 함께 치유 받은 나병환자 아벨, 예리코의 뱃사공 솔로몬, 그리고 내가 알아보기는 하겠는데, 어디에서 보았는지, 이름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주 많은 얼굴들을 알아보지만, 그것들은 내가 제자들이라고만 알고 있는 얼굴들이다. 그리고 이사악이나 내가 방금 이름을 말한 제자들에 의하여 회심한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예수를 만나기를 바라며 주요한 제자무리를 따라다닌다.
그들의 만남은 살갑고, 기쁨에 넘치고, 공손하다. 이사악의 눈은 선생님을 뵙고 그분께 자기의 새로운 양떼를 보여드리는 기쁨으로 빛난다. 그는 상급으로 자기의 무리에게 한 말씀해주시기를 예수께 청한다.


“너는 우리가 함께 모일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아느냐?"

“만의 끝에 한적한 해변이 있는데, 거기 어부들의 움막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에는 건강에 해롭기도 하고, 염장하는 생선을 잡는 어로시기가 끝나 어부들이 뿔 고둥을 잡으러 시로 페니키아에 가기 때문에 그것들은 비어 있습니다.

그 어부들 중에는 몇몇 해안도시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었거나 제자들을 만났기 때문에 이미 당신을 믿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저희가 거기서 쉴 수 있도록 저희에게 그 움막들을 내주었습니다. 저희는 임무를 마친 다음에 그리로 가곤 합니다. 이 지방에는 할 일이 많이 있으니까요.


이 해안은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하여 깊이 타락해 있습니다. 저는 시로 페니키아까지 가고 싶은데, 바다를 통하여 그리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해안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 도보로는 갈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목자이지 뱃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들 중에도 돛단배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볍게 미소 지으시며 주의 깊게 들으신다. 키가 훤칠하게 크신 그분께서는 마치 병사가 장군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듯 보고하는 그 작은 목자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계신다.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네가 겸손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를 도와주신다. 내가 이곳에 알려진 것은 제자인 너를 통해서이지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아니다. 이제 우리가 호수 사람들에게 돛단배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아서 만일 가능하다면 시로-페니키아로 가자.”


예수께서는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신다. 이들은 몇 명의 제자들과 활발하게 대화하고 있다. 그 동안에 유다는 스테파노에게 인사하고 있고, 열성당원, 바르톨로메오, 필립보는 여자들 가까이에 있다. 다른 네 사람은 예수와 함께 있다.


네 명의 어부들이 즉시 온다.

“너희는 바다에서 배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신다.

네 사람은 곤혹스러워 하며 서로를 쳐다본다. 베드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곰곰 생각하다가 묻는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데요? 먼 바다로요? 저희는 민물고기들인데요…”


“아니다. 해안을 끼고 시돈까지 간다.”
“흠!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바다나 호수나 다 같은 물이지 뭐 다른 거겠어?”
야고보가 말한다.

“아니야,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답고 쉬울 거야.”
요한이 말한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요한의 형이 요한에게 대답한다.

“요한이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모든 완전을 보거든. 자네가 어떤 여자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자네는 완벽한 남편이 될 거야.”
베드로가 요한을 다정하게 흔들며 농담조로 말한다.

“아니야. 나는 조종법이 같고 항해가 아주 손쉽다는 것을 아스클론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요한이 대답한다.

“좋아, 그럼 가세!”
베드로가 외친다.

“하지만 이곳 사람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편이 나을 거야. 우리는 이 바다를 알지 못하고 그 높낮이를 모르잖아.”
야고보가 지적한다.

“오! 난 그런 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잖아! 전에는 나도 확신하지 못했었지만, 그분께서 호수를 잔잔하게 하신 다음부터는! 자, 선생님과 함께 시돈으로 가세. 아마 거기서 해야 할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안드레아가 말한다.

“그럼 가자. 내일 너는 배들을 준비해라. 시몬의 유다에게 돈주머니를 달라고 해라.”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섞인다.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수께 이미 잘 알려진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발길을 돌려 다시 시내로 들어가 시내의 변두리를 지나 마침내 구부러진 팔처럼 바다로 돌출되어 나온 만의 끝에 이른다. 자갈이 뒤덮인 좁다란 해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몇 채 안 되는 오막살이들은 여기가 그 고을의 가장 가난에 찌들고 간헐적으로만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장 인구가 희소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집 모양의 작은 입방체의 벽들은 염분과 세월로 인하여 퇴락해 있다. 집들은 죄다 닫혀 있는데, 제자들이 그것들을 열자 연기로 그을려 있는 초라한 실내와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만이 보일 뿐이다.

“자, 여기가 제가 말씀드린 집들입니다. 이 집들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편리합니다.”
이사악이 집주인처럼 행세하며 말한다.

“물건들이 초라한 건 분명하구먼. ‘맑은 내’는 여기에 비하면 대궐이었네. 그런데도 그것을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지 아마…”
베드로가 투덜거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한 재산입니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중요한 건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서로 사랑한다는 거야. 오! 보자. 우리 요한이 여기 계시는군! 잘 있었소? 당신은 어디 있었소?”

그러나 엔도르의 요한은 베드로에게 미소 지으며 예수께 인사드리려고 뛰어간다. 그분께서는 매우 다정한 말씀으로 그에게 인사하신다.


“요한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아서 제가 오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여기 남아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이곳 사람들과 메시아에 대하여 묻는 사람들을 잘 다룰 줄 압니다.”

이사악이 말한다.

사실 엔도르의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야위었다. 그러나 얼굴은 평온해 보인다. 그의 모습은 수척함으로 인하여 더 고상해 보이는데,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중의 순교에 이미 영향 받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예수께서는 그를 살펴보시고 물으신다.
“요한아, 너는 몸이 불편하냐?”

“저는 제가 당신을 뵙기 전보다 더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제 육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영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 개인적인 상처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평화로운 눈과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시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와 함께 오막살이로 들어가시며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신다. 사람들이 그들의 피로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바닷물이 담긴 대야들을 가져다놓았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냉수가 담긴 주전자들도 가져다놓았다. 그 동안에 밖에서는 사람들이 덩굴식물로 덮여 있는 매우 보잘것없는 퍼골라 밑 그늘진 투박한 널빤지 위에 탁자를 가져다놓고 있다.

황혼이 지고, 바다는 자갈 덮인 해변에서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로 저녁기도를 드리는 동안 예수께서는 여자들과 사도들과 함께 투박한 널빤지에 앉으시고,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이나 의자나 뒤집어 놓은 바구니에 앉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니 아름답다.

식사는 빨리 끝나고, 식탁을 치우는 일은 훨씬 더 빨리 끝난다. 왜냐하면 식판들이 몇 개 없어 그것들이 더 중요한 손님들에게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별 없는 밤에 바다는 어두운 쪽빛을 띠고 있다. 해변 특유의 쓸쓸하고도 엄숙한 이 시간에 그 모든 장엄함이 드러난다.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그림자들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으신 키가 훤칠하신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사도들 그룹의 가운데로 오시고, 그 동안에 여자들은 물러간다. 이사악과 다른 한 사람이 어둠을 밝히고 아울러 아마 근처에 있는 늪에서 몰려오는 구름 같은 모기떼도 쫓기 위하여 모래밭에 작은 불들을 피워놓는다.

“너희 모두에게 평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정해진 시간보다 우리를 일찍 모으셔서 우리 마음에 상호적인 기쁨을 주셨다. 나는 너희가 여기 와 있고,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 안에서 함양되어 온 사실들로 증명되듯이, 정신적으로 착하지만 낡은 이스라엘 사람이 어떻게 너희 안에서 그 모든 생각들과 편견들과 함께 여전히 고집부리고 있는지,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넓고 밝고 자비로운 마음가짐과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사랑을 가진 새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직 너희에게서 나오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너희의 몇 가지 반응들로 입증되듯이 영적으로는 불완전한 너희 모두의 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비밀을 모두 알아냈다고 해서 굴욕스럽다고 생각하지 마라. 선생은 제자들의 결점들을 고쳐주기 위하여 자기의 제자들을 알아야 하는데, 내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 선생이 착한 선생이라면, 그는 결점을 가장 많이 가진 제자들을 역겨워하지 않고, 그들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너희는 내가 착한 선생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 이제 그 반응들과 편견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왜 여기 와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함께 있어 우리가 맛보는 기쁨으로 인하여 항상 개인적인 유익에서 집단적인 유익을 이끌어내시는 주님을 찬미하자.

나는 너희가 얼마나 엔도르의 요한에 대하여 감탄하는지를 너희 자신의 입을 통하여 들었고, 그가 스스로 회개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가 나에게 데려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설교의 논거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에 두는 데 대하여 너희가 더 크게 감탄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가 죄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 그는 제자이다. 너희 중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공로를 통하여 지금 메시아에게 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스라엘의 옛사람이 업신여길 만한 바로 그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새 백성을 창조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낡은 이스라엘이 제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없는 한 자매가 여기 참석한 것에 대하여 오판을 삼가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여자들에게 가서 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너희에게 그녀의 회개에 대한 거룩하고 조심스러운 숙고의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가 사랑과 정의를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틀림없이 여자제자들을 실망시켰을 그 명령을 내가 그들에게 내린 이유이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는 큰 죄인인 막달라의 마리아가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가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이 아닌 그 누구에게서 믿음과 자비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 전체가, 그리고 이스라엘과 함께 그녀를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녀가 더 이상 그들의 방탕에 공범이 되어주지 않게 된 지금 그녀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우리 가운데 있는 외국인들이 그녀의 부활을 비판하고 조롱한다.

부활. 이것이 정확한 단어이다. 육체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은 가장 큰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죽음으로 인하여 취소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기적일 뿐이다. 나는 내가 육체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불멸성(immortality)을 주지 않지만, 자신의 영 안에서 부활한 사람에게는 영원성(eternity)을 준다. 또한 육체가 죽은 사람은 생명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자기의 의지를 내 의지에 결합시키지 않고 따라서 아무 공로(merit)도 없지만, 영적으로 부활하는 사람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 아니 먼저 그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공로를 가진다.

나는 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 행동에 대하여 설명해드려야 할 뿐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제자들이다. 너희 각자는 또 다른 예수가 되어야 한다. 너희 중 어느 누구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름으로만 일치하고 있는 저 뿌리 깊은 오류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책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착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에 덜 부적합해 보이는 것도 그렇다. 재료가 하느님의 뜻에 드려진다면, 설령 그것이 가장 생기가 없고 차갑고 더러운 것이라 해도, 그것은 살아 있고 불타는 깨끗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마카베오서의 사례 하나를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의 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재건된 성전 안 정화된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페르시아 인들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하느님에 대한 예배를 담당했던 사제들이 제단의 불을 취하여 어떤 계곡 안쪽에 있는 비밀장소인 깊고 물이 마른 우물 속에 감추곤 했었던 일을 어찌나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했던지 그 거룩한 불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제들뿐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자기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제들의 손자들에게 사제들이 죽기 전에 자기의 아들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다시 자기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자자손손 전해져 내려온 장소로 가서 희생 제사를 위한 불을 붙이기 위하여 신성한 불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사제들의 손자들이 비밀의 우물 속으로 내려갔을 때 그들은 불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모든 걸리적거리는 하수도로부터 걸러져 내려온 걸쭉한 물과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무거운 점액만을 발견했다.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그렇게 보고하자, 그는 그 물을 퍼서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는 제단 위에 나무를 쌓고, 그 나무 위에 제물을 올려놓게 하고는 그 점액질의 물을 흥건하게 뿌리게 했다.

백성은 놀라고, 사제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그의 모든 명령을 준행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 명령한 사람이 다름 아닌 느헤미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슬프고 낙심했는지 모른다! 먹구름이 잔뜩 덮여 있는 하늘로 인하여 그날이 을씨년스러웠던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우울했다.

그러나 태양이 구름을 흩어버리고, 햇살이 제단으로 내려와 점액질의 물이 뿌려진 땔나무에 불이 붙어 그 불이 대번에 제물을 불살랐다. 그 동안에 사제들은 제물 전체가 완전히 불살라질 때까지 느헤미야가 지은 기도문을 암송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찬송가들을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가장 부적합하지만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된 재료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군중들에게 확신시켜주시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남은 물을 큰 돌들 위에 뿌리게 하였다. 위에 물이 뿌려지자마자 그 돌들은 불붙어 제단에서 오는 큰 빛 속에서 불타버렸다.(2마카1,19-32)

모든 영혼은 생명의 창조주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의 제물을 불사를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의 제단 위에 하느님께서 놓으신 신성한 불이다. 모든 생명은 번제물이고, 잘 쓰인다면 모든 날들은 거룩하게 드려지는 제사가 된다.

그러나 약탈자들, 즉 사람과 사람의 영혼의 압제자들이 온다. 불은 어떤 거룩한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치명적인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진다. 그 불은 온갖 악덕의 모든 하수에 잠겨서 무겁고 썩은 냄새가 나는 진흙이 되는데, 마침내 한 사제가 그 바닥으로 내려가 그 진흙을 햇빛 비치는 곳으로 가지고 올라와 자기 자신의 제사의 번제물 위에 올려놓는다.

왜냐하면 회개해야 할 사람의 영웅적 행위만으로 충분치 않고, 회개시키는 사람의 영웅적 행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해라. 아니 후자가 전자보다 선행해야 한다. 영혼들은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흙을 취하여 불꽃으로 변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되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불살라지는 희생제물을 완전하다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킨다고 판단하시게 해드리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진흙이 축성된 불이어서 가연성 재료인 나무와 희생을 태우는 데만 유용한 보통 불보다 더 잘 태울 수 있다고 세상을 확신시키는 데 여전히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회개하는 진흙이 불연성 재료인 돌들마저 불살라버릴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이다.

너희는 어디서 그런 특성이 그 진흙에게 오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말해주마. 타는 듯한 뉘우침 안에서 그 진흙이 하느님과 불꽃 대 불꽃으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불꽃과 내려오는 불꽃, 사랑하며 자신을 바치는 불꽃과 사랑하며 자신을 주는 불꽃, 사랑하고 서로를 찾아 서로 결합하여 오로지 하나를 형성하는 두 불꽃들의 포옹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불꽃이 더 큰 불꽃이기 때문에 그것이 넘쳐흐르고, 능가하고, 침투하고, 흡수하여, 회개하는 진흙의 불꽃은 더 이상 피조물의 상대적인 불꽃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지극히 능하신 분, 무한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불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과거의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을 너그럽게 헌신하여 자신들의 진흙에서 올라오는 불꽃으로 먼저 자신들의 무거운 부분을 불사르고, 은총을 향하여 달려가 은총으로 어루만져진, 진실로 그리고 전적으로 회개한 큰 죄인들인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많은 돌들이 이 불타는 화덕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불로 공격받아 점점 더 불살라져 마침내 인간성이 완전히 불살라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있는 그들의 옥좌에서 땅의 돌들에게서 미온성(微溫性), 불확실성, 소심성을 계속 제거하고, 진정한 초자연적인 불타는 거울로서 한분이시고 삼위이신 빛들을 모아 그 빛들을 인류에게 집중적으로 비추어 인류를 하느님 안에서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내가 되풀이하여 말하거니와, 나는 내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었지만, 너희가 내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너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너희는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로 오게 하는 것은 그분을 더럽힌다는 잘못된 생각, 바리사이적인 의혹으로 인하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사명의 완성인 이 일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된다.

나는 성인들을 구원하러 오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그리고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않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라.

하늘의 필요를 느끼는 세상의 찌꺼기들을 손으로 잡는 것을 혐오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내 사명이고, 모든 회개한 영혼은 내 무한성을 비하시킨(humiliated) 내 강생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내가 환호하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데려가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불완전한 사람들이고, 너희 형제 죄인들과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어 너희 모두도 다소간 불완전에 익숙해져 있으며, 마치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처럼 땅에서의 내 일이 영속되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선택하여 구원자들의 계급에 속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사제들의 일치는 내가 생명을 주는 영(the animating Spirit)이 될 내 교회의 큰 몸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들의 무수한 조각들이 이 핵심적인 부분 주위에 모여 하나이고 유일한 몸을 이룰 터인데, 이 몸은 내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제의 부분에 생명력이 결여된다면, 무수한 조각들이 살 수 있겠느냐? 사실 내가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기를 싫어하는 걸리적거리는 불필요한 관들과 웅덩이들을 제쳐놓고 가장 멀리 떨어진 작은 조각들에게도 내 생명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는 자기가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고, 자기 스스로 생명을 원할 능력이 있는 착한 조각들은 여전히 내 생명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서로 가까운 영혼들의 긴밀한 모임인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되겠느냐?

더 이상 도관들과 웅덩이들이 하나이고, 유일한 중심에서 오는 생명의 피를 모든 조각들에게 분배해주고, 서로를 결합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서로 이웃해 있기는 하지만 분리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적으로 적대적인 조각들은 서로를 갈라놓는 담과 절벽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초자연적으로 고뇌하며 자신들의 영 안에서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였다. 비록 그들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서로 형제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영혼들의 친밀감일 뿐 융합이나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다. 내 사랑은 그 폐허 위에서 고통스럽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종교적인 분열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 그것은 홀로 남아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사제들이 그들을 부축하고, 돌보고, 사랑하기를 거절하고, ‘너희 모두는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겠다’라고 내가 말하고, 행하는 대로 말하고, 행해야 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거스르기 때문이다.지금은 평안히 가거라.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기를.”

사람들은 천천히 흩어져 각기 자신들의 오막살이로 간다. 엔도르의 요한도 일어선다.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그 내용을 기록했는데,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불 곁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멈추게 하시며 말씀하신다.
“잠시 동안 네 선생과 함께 남아 있어라.”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떠날 때까지 요한을 그분의 가까이에 있게 하신다.

“물가에 있는 저 바위로 가자. 달이 높이 떠 있어 길을 볼 수 있다.”

 

요한은 아무 말 없이 예수의 분부대로 한다.

두 사람은 집들로부터 200미터 가량 걸어가 큰 바위 위에 앉는다. 그것이 방파제의 잔해인지, 절벽 위에서 바다로 떨어진 바위인지, 아니면 어느 오막살이의 잔해가 오랜 세월 동안 물에 반쯤 잠겨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움푹 파인 부분과 돌출한 부분이 있어 마치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는 곳을 딛고 작은 해변에서 그 바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바다 쪽을 향한 그 바위의 전면은 푸른 바다 물에 잠겨 있는 수직 절벽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조류로 인하여 그 바위의 절반가량이 물에 잠겨 있는데, 그 물은 웅얼거리다가 바위를 찰싹 친 다음 거대한 한숨소리를 내며 후퇴했다가 한동안 잠잠한 후 그 과정을 반복하여 마치 당김음을 많이 사용한 음악처럼 찰싹거리는 소리와 한숨소리와 침묵으로 이루어진 규칙적인 소리를 되풀이한다.
두 사람은 바로 바닷물이 부딪치는 그 암괴의 꼭대기에 앉는다. 달은 물 위에 은빛 길을 만들어놓아 달이 뜨기 전에는 캄캄한 밤에 거대한 거무스름한 공간이던 바다가 군청색으로 보이게 한다.

“요한아, 너는 왜 네 육체가 고통당하는지 그 이유를 네 선생에게 말하지 않겠느냐?”

“나의 주님, 당신께서는 아십니다. 그러나 ‘육체가 고통당한다’고 말씀하지 마시고, ‘소멸해간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편이 더 정확합니다. 당신께서 아시고, 당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육체는 기쁘게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도 불붙는 돌들에서 저 자신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돌들에게 불붙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저는 세상의 증오를 통하여 너무 많이 고통당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환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생명에 여한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죄 지을 수 있고,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사명을 게을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일생에서 이미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저는 선생으로서의 제 사명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교직에서 저 자신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것을 찾아냈어야 할 터인데, 저 자신을 훈련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편으로서의 제 임무에도 실패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완전하게 만들 줄을 몰랐으니까요… 그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데도 말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완성시키지 못한 것처럼 그녀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자로서의 제 사명에도 실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께 잘못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죽음이 죄지을 수 없는 곳으로 저를 데려간다면, 그 죽음은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제가 가르치는 제자로서의 운명을 가지지는 못했다 해도, 저는 희생자인 제자는 될 것입니다. 그 운명은 당신의 운명과 더 비슷합니다. 오늘 저녁에 당신께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불사르며’라고 말씀하셨지요.”

“요한아, 그것은 네가 고통당하고 있는 운명이냐, 아니면 네가 바치고 있는 희생이냐?”
“제가 바치고 있는 희생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불이 된 진흙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요한아, 너는 많은 고행을 하고 있구나.”


“성인들도 그것을 합니다. 당신께서 가장 먼저 하시고요. 아주 많이 갚아야 할 사람이 고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제 속죄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께서는 제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금하시겠습니까?”

“나는 사랑하는 영혼의 착한 갈망들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나는 고통은 속죄이고, 슬픔은 구속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왔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모순되는 말을 할 수 없다.”


“주님, 고맙습니다. 그것은 제 사명일 것입니다.”


“요한아, 너는 무엇을 쓰고 있었느냐?”

“오! 선생님! 때로 옛 펠릭스가 선생으로서의 자기의 습관들을 가지고 다시 나타납니다. 저는 마르지암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평생 동안 당신을 전해야 할 텐데,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여기서 당신의 설교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시는데, 아이가 장난에 주의가 팔려 있거나 저희 중의 어떤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어 듣지 못한 어떤 가르침들을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말씀들에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속에 참으로 많은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친근한 회화들은 매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일, 삶에 있어 가장 사소한 일들에 있어 하나의 교훈인데, 그것들은 쌓여 거룩하게 견뎌내야 하는 인내, 끈기, 체념을 요구하는 무거운 부담을 형성하기 때문에 결국 가장 중요한 것들이 됩니다.

항구적인 덕의 현존이 요구되는 천 가지의 작은 일들보다 한 가지 유일한 영웅적인 위업을 완수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많은 작은 일들을 쌓아 올리지 않고서는 선에 있어서나 악에 있어서나 중요한 위업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저는 악에 대해서는 경험으로 압니다. 저는 제 아내의 경박함에 지쳐서 처음으로 그녀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쳐다보았을 때 살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르지암을 위하여 당신의 짧은 가르침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 저는 당신의 중요한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가 옛 선생인 저를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달리는 가지지 못할 이 가르침을 그 애가 가질 수 있도록 저는 제 작품을 그 애에게 남겨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보물이 될 당신의 말씀을 저에게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렇다, 요한아. 그러나 지금은 이 바다처럼 완전한 평화 안에 있어라. 알겠느냐? 네가 햇볕을 받으며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힘들 것이다. 사도의 생활은 참으로 힘들다. 너는 평생 동안 참으로 많이 싸워왔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차분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이 고요한 달빛 아래서 너를 그분께로 부르신다. 하느님의 인자하심 안에서 나아가거라.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흡족해하신다.”

엔도르의 요한은 예수의 손을 잡고 그것에 입 맞추며 속삭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께로 오시오!’ 하고 말하는 것도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너는 낙원에서 그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너는 불타는 거울이 될 테니까. 요한아, 가자. 나는 네가 기록한 것을 읽고 싶구나.”

그들은 바위에서 내려와 자갈이 깔려 있는 해변을 은빛으로 바꾸어 놓은 지극히 선명한 달빛을 받으며 집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요한은 무릎을 꿇고, 예수께서는 그의 머리에 그분의 손을 얹으시고 강복하시며 그에게 평화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