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가르멜산의 성모님께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심

Skyblue fiat 2025. 4. 30. 12:55


가르멜산의 절정에 계시는 성모 마리아


가르멜산의 성모님께 대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심

어떤 성인들은 너무 대단해서 가까이 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을 이 범주에 넣는다. 모든 피조물로부터 이탈할 것을 냉혹하리 만큼 강조함으로써 마치 딴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르멜산의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그가 Nada(無), nada를 계속해서 외칠 때 그의 비전(직감력, 통찰력, 미래상)은 너무나 부정적인 색채를 띤다.

그러나 요한 성인의 삶을 알게 되면 처음의 이러한 피상적인 생각들이 바뀌게 된다. 요한 성인께서 그의 형 프란치스꼬에 대해서 품고 있는 애정과 존경은 “영웅 숭배”에 가까워서 그는 그의 수련자들을 일하고 있는 그의 형에게 데려가 그로부터 보고 배우게 하였다. 프란치스꼬가 개혁 수도원을 방문하곤 했을 때 요한 성인은 수도원 식당에서 그의 옆에 앉도록 고집하곤 하였다. 임종 때 그는 형에게 “형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보배니까 내 곁에 머물러 있어 줘” 라고 청하였다.

때때로 요한 성인은 수도원 주위의 숲에서 묵상할 수 있도록 그의 수련자들을 데려 가곤 하였다. 또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관상에 빠져 있다가 수도원 미사에 늦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요한 성인의 인간적인 면은 성모님과의 관계 안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광범위한 작품 안에서 하느님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에 관한 언급은 당혹스러우리 만큼 빈약하다. 성모님의 호칭이 겨우 네 번 정도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요한 성인의 영성에 끼쳤던 바는 요한 성인이 성모님께 느꼈던 친밀함의 잣대로 재야 할 것이다. 요한 성인은 기꺼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성모님의 수도회에 들어 왔고 후에 수도회의 개혁을 도왔다.


요한 성인의 어린 시절에서의 성모님의 중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생활은 어린 시절에 한 하느님 체험에 의하여 형성된다. 감수성이 강한 나이에 영의 세계와의 만남은 때때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모님의 모성적 사랑에 대한 요한 성인의 첫 번째 체험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4살이나 5살밖에 안된 꼬마 아이가 또래들과 함께 그가 태어난 마을인 폰티베르스 밖의 들판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한 연못을 발견하고는 연못 안으로 막대기를 던지기 시작했고 막대기들이 연못 수면으로 떠오르면 건졌다. 그렇게 놀다가 요한이 갑자기 진창에 빠졌다. 목까지 빠진 채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이 중대한 때에 빛나는 한 부인이 요한 위에 나타났다. 요한의 어머니는 요한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성모님께 맡겨 드렸는데, 요한은 자기 위에 나타난 빛나는 그 여인을 보고 성모님으로 알아보았다. 요한은 성모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꼬마야 손을 내미렴, 내가 꺼내줄테니.”

요한은 그에게 내민 아름다운 성모님의 손을 그의 진흙 투성이의 손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팔 아래로 손을 감추었고 결국에는 그의 또래들의 도와 달라는 외침을 듣고 지나가는 한 농부가 달려와 그를 구하였다. 후에 요한 성인은 그때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떠올리며 웃곤 하였다. 죽음과 옥신각신하던 이 체험으로 인해 요한은 성모님께서 그를 구해 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요한은 이웃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그 연못에 들러 엄마처럼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하여 성모님께 감사드렸다. 

요한 성인은 물에 빠지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열 두 살 때 그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보조 간호사가 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그가 일하던 공립 병원으로 가던 중에 우물에 빠졌다. 그가 우물에 떨어 질 때 성모님께서 그를 붙드시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로프를 내려 그를 안전하게 끌어올릴 때까지 물위에 떠 있었다고 그는 그를 구해준 사람들에게 말하였고 후에 이 사실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했다. 거의 익사할 뻔한 이러한 체험들과 후에 이와 비슷한 성모님의 중재를 체험함으로써 성모님께 대한 요한 성인의 신심은 한층 강화되었다.

 성모 승천의 마르틴 수사는 시복 소송과정 중에 요한 성인이 그가 까스티야에서 안달루시아까지 여행을 할 때의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고 증언하였다. “요한 신부님께서는 한 강가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너무 불어서 네 명의 노새 몰이꾼들이 강을 건널 엄두를 못 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경하올 십자가의 요한 신부께서는 강물로 들어 가셨다.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가장 깊은 지점에서 요한 신부님께서는 큰 나무 조각이 그를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큰 나무 조각은 그가 타고 있던 말 다리 사이에 부딪혀 그는 물에 떨어졌다. 물에 잠겼을 때 그분은 그의 망또를 잡아 당겨 그를 물에서 구해내시는 성모님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요한 성인은 근처에 있는 한 여인숙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서 몹시 다친 여행자를 보았다. 그 여행자는 나중에 배교한 수도자로 밝혀졌는데 요한 성인은 그가 죽기 두 시간 전에 그에게 종부성사를 줄 수 있었다. 이제 요한 성인은 왜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는지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모님의 자비의 도구로써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십대에 메리나에 있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는 예수회원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가르멜회에 이끌렸는데 그것은 확실히 가르멜회의 기도 정신과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신심을 지닌 채 그는 가르멜의 수도복을 입었던 것이다. 성모님의 보호와 모성적 사랑에 대한 평생 지속된 확신은 가르멜회의 카리스마에 따라 그의 성모 신심을 깊게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었던 그의 수련기에 더 굳어졌다. 수련자들은 성무일도 외에 매일 성모님께 바치는 소성무일도를 해야만 했다. 수련자들이 적어도 네 명 있을 때는 매일 복되신 동정 성모님을 기리기 위한 별도의 미사를 영창하기를 바랬다. 이 미사 후에 그리고 끝기도 때 하는 Salve Regina 후에 수련자들은 특별한 성모 찬가를 하나 더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외적으로 표현된 신심

성모님께 대한 요한 성인의 신심의 두드러진 특징은 외적인 표현에 있다. 영적 성장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이탈해야 할(뛰어 넘어야 할) 종교의 외형주의(형식 존중주의)라기 보다는 내적 쇄신이다...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는 영성생활의 대가인 그가 성모님에 관해서는 이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 같다. 요한 성인의 경우 성모님의 보호와 사랑은 단지 영적인 신념만은 아니었다. 즉,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들 안에서 끊임없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많은 증인들이 성모님의 이러한 중재에 관하여 말했다는 사실은 요한 성인이 성모님의 중재(도우심)를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성인은 성모님의 도움들을 성모님의 변치 않는 구원 현존의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번은 그러한 일이 코르도바에서 일어났다. 그때 요한 성인은 산로체의 개혁 가르멜 수도원의 한 수방에 머물러 있었는데 새 성당을 짓기 위하여 인부들이 수방과 인접한 벽을 허물고 있었다. “인부들은 벽의 기초 주위를 팠고 로프를 사용해서 그 벽을 한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벽은 공경하올 십자가의 요한 신부님이 계시던 그의 수방 쪽으로 무너졌습니다. 벽은 수방과 부딪히면서 수방을 무너뜨렸습니다. 모든 인부와 형제들이 요한 신부님이 이미 돌아 가셨으리라 생각하면서 요한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 그의 수방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많은 돌과 석고들을 치웠을 때 방 한 구석에서 웃고 있는 요한 신부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요한 신부님은 하느님의 모친께서 그녀의 망또를 펼쳐 그를 보호해 주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것이라고 자세히 이야기하셨습니다”(Summarium, p 124,122).

 

감각적인 신심에 의존하는 것에 대하여 일관되게 그리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던 요한 성인께서 성모님을 공경하여 드리는 전례의식이나 준전례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는 당신 자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은 이상하다. 요한성인께서 가르멜 수도복을 입혀 주셨고 성인의 손에서 수도 서원을 발하였던 십자가의 제롬 수사는 70세 때 요한의 시복 소송과정에서 증언을 하였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분명하였다. “저는 그의 여행에는 물론이고 관구의 많은 수도원에 갈 때 그를 동반하였고 그가 복되신 어머니에 대한 열렬한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축일에는 그가 머물렀던 모든 수도원에서 그는 애정과 특별한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끼며 축일을 지냈다. 축일 전야에는 신비를 재현하는 식으로 행렬을 하였다. 행렬 때는 성모상을 모시곤 하였다. 요한은 복되신 동정녀께서 베들레헴에 가셨을 때 묵을 여인숙을 찾지 못하고 외양간으로 돌아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던 그 때의 장면을 연출하면서 몇몇 수도자들로 하여금 한 처녀를 잘 맞아 주도록 도움을 청하게 했다. 다른 성모님의 축일에도 이런 식으로 연극이 공연되었다. 요한 성인은 지극한 기쁨과 신심을 지니고 이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성모님의 이름으로 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적절한 때와 장소를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자고 권하였다. 그는 성모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셨던 호의에 감사드리며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해왔다.” (Summarium p.126).

 

그는 성모님의 축일을 맞갖게 지내기 위하여 외적인 차원에서도 그의 모든 창조성을 십분 발휘하였는데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굉장한 기쁨을 느끼며 그렇게 했던 것이다. 성상, 성화, 로사리오, 행렬, 구일기도와 같은 신심의 외적 표상물에 대한 그의 교설을 연구할 때에는 요한 성인의 이러한 특성이 너무 자주 잊혀진다. 요한 성인은 경고한다. 그는 이러한 모든 수단들은 보다 진지하고 중요한 것 즉 우리의 내적 신심의 도구이며 표지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이러한 모든 수단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할 필요성을 단호히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이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드러내며 마음을 움직여 성인들에 대한 신심을 일깨우는 한 이러한 수단들을 활용하는 것은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다 (가르멜의 산길 3권 35장 3절 참조).

 

요한 성인은 성모 신심에 있어서의 형식주의에 반대해서 “묵주가 다른 모양 말고 한 가지 모양으로 또는 다른 색깔 말고 한 색상이나 다른 재료가 아닌 이 금속 재료로 만들어 져야 하며 한 가지 특별한 디자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견딜 수 없었다. 어떤 묵주가 다른 묵주보다 하느님께 대한 신심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묵주 기도드릴 때 사용된 묵주의 종류를 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이며 이러한 기도는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만 마음을 쓰며 대사와 관련된 경우가 아니면 사용되어진 묵주의 종류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개의치 않는다” (Id, 7 ; trans. p.276).

 

요한 성인의 목적은 신앙의 외적면을 이용해서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접근을 정화하는 데 있다. 요한 성인은 분명히 성상파괴 주의자는 아니며, 사실 주님과 성모님의 성상들은 내적 투신과 흠숭을 일으키는 데 적절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요한 성인은 어떤 성상이 다른 성상보다 이렇게 하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도 한다. “ 많은 사람들이 성화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그 그릇됨을 말하려면 할 말이 많다. . . ”

 


성모님께서 요한 성인을 감옥에서 탈출시키시다.

요한 성인의 동료인 성모 승천의 마르틴 수사와 후안 에반젤리스따 두 사람 모두 요한 성인이 자신을 “성모님께 가장 헌신적인” 이라 불렀다고 증언했다. 요한 성인은 무릎을 꿇고 성모님께 소성무일도를 드렸고 매우 상냥하게 성모님에 대하여 말하였다. 여행할 때나 슬프고 지칠 때 성인은 성모님을 생각하며 공경의 뜻으로 찬가를 하나 부르곤 하였(cf. Fr. Bruno, O.C.D., St. John of the Cross, p179). 

 

이것은 성모님께서 요한 성인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 주신 지극하신 모성애에 대한 요한 성인의 응답이었다. 요한 성인이 똘레도 수도원의 감옥에서 탈출할 때에 성모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요한 성인은 그 수도원의 화장실 옆에 위치한 헛간에 감금되어 있었고 고집 세고 반항적인 수사나 받을 만한 가혹한 취급을 받으며 요한 성인은 영혼과 육신의 어둔 밤을 경험했다.

 

이 어둔 밤을 통해서 전에는 결코 써본 적이 없는 가장 드높은 신비적인 몇몇 시를 썼는데, 요한 성인의 심미적인 영혼은 체험한 샘솟는 은총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담아 둘 수 없었다. 요한 성인은 그의 어머니이자 후견인인 성모님께서 그의 탈출을 보장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성인의 친구인 마르틴 수사는 요한 성인이 그에게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가지도록 권고했다고 맹세를 하며 증언했다.

“어느 날 똘레도 수도원의 원장이 한 명 또는 두 명의 수사를 데리고 요한 성인이 감금된 방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 때 성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고, 성인은 감금 이후로 다소 침울해 있었습니다. 수도원장이 요한 성인에게 다가와서 발로 그를 밟으며 ‘내가 들어 올 때 왜 일어나서 인사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 성인은 감금으로 인해 병약해져서 즉시 일어서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도원장이 그때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고 묻자 성인은 다음 날이 성모님의 축일인데 그가 '미사를 드릴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것이고 또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대답했고 수도원장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이 방을 떠나자 요한 성인은 미사를 드리러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극도로 침통해졌다.

다음날 저녁에 성모님께서 주위에 빛을 발하시면서 요한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아, 인내하여라. 너의 고통은 곧 끝날 것이고 너는 감옥에서 나와 미사를 드리고 위로를 얻을 것이다. 성인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애정과 신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모든 것을 증인에게 말했던 것입니다”(Summarium 127).

 


천주 강생 때 성모님의 역할

요한 성인의 성모 신심에 비해 그의 저서에는 성모님이 드물게 등장하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몇몇 군데에서 성인이 언급한 것을 보면 성인의 성모 신심이 그의 나머지 영적 가르침들도 마찬가지로 카톨릭 신학에 굳건하게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다. 신비가로서 성인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그의 카리스마적 하느님 체험에 근거한다. 정확한 신학적 바탕에서 요한 성인은 그가 연가라고 부른 중요한 일련의 연에서 하느님 안에서의 삼위일체의 내적 삶을 묘사하고 있다. 창조와 구원은 삼위일체의 품안에서 취해진 가족협의의 산물인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매우 소중히 여기시는 인성을 성자에게 부여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성모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지니신 인간이셨고,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실 때는 언제나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성모님의 사명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에게 동의를 구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스런 선택을 성모님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성모님의 동의에 의해서 영원으로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계신 아드님께서 시간 안에서 동시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경이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모든 것은 성모님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이며 다른 인간적 출생에서와 같은 인간적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부르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보내셨네.
그녀의 승낙에 의해 이 신비가 이루어 졌고, 그녀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말씀에게 육신의 옷을 입히셨다네 !
삼위께서 이일을 하셨을 지라도 한 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요, 말씀이 강생하시어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셨어라.
아버지만 계시던 분이 이제는 어머니도 모시게 되었네. 그러나 그녀는 남자에 의해 잉태하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네.
그분은 그녀의 살로부터 당신의 살을 취하셨으니,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라 불린다네(trans. Kavanaugh, p.731, 732).

신비가들은 그들이 하느님과의 가장 친밀한 교감을 묘사할 때 한결같이 혼인의 이미지를 회상한다. 하느님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이 압도적인 사랑을 혼인에 비유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가깝고 친밀하며 애정 어린 비유는 없다. 요한 성인께서 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같은 비유로 묘사하곤 한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인간적 요소들을 인성을 당신 자신께로 기묘하게 일치시어 다른 이미지들은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제외되어진다.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직관하였듯이 요한 성인 또한 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눈물과 가난(빈한함)에 경이로와 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혼인이라는 무한함을 강조하고 있다. 은총을 가득 받으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문제의 (신비의) 핵심에 들어가는 영성적인 사람들의 전형이 되신다. 성모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지만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들의 가치체계를 뒤엎으시는 가에 놀라워하신다. 이 혼인을 위한 보석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육신 안에서 눈물을 흘리시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천상적 행복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는 성소로 비유될 수 있다.

탄생하길 때가 되자 그분은 신랑처럼 신부의 방에서 나오시었네.
신랑이 신부를 안듯 그분의 팔에 안듯이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구유에 누이셨다네.
그때 동물들이 그분 가까이 있었고 사람들이 노래하였으며 천사들은 가락을 맞추었네.
사람과 하느님사이의 혼인, 하느님은 구유 속에서 우셨다네 혼인을 축하하시면서
이 눈물은 신랑이 혼인식에 가져온 예물이었네, 성모님께서는 이 교환을 놀라 바라보시네.(trans. Kavanaugh, p.732).


가르멜산의 절정에서의 성모님의 상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교회 안에서의 소명은 영성생활의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성인의 저서들은 교회의 교도적 권위에 의하여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까지 이르는 확실한 영적 성장의 길로서 칭송되어져 오고 있다. 성모님에 대한 몇 안 되는 짧은 언급은 요한 성인께서 교의를 넘어 살과 피를 지닌 인간 존재 안에서 내재하는 그의 원리(원칙)들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요한 성인은 복되신 성모님께서 가장 완전한 길을 가신 것을 알았다. 성인이 성모님에 대해서 쓴 가장 유명한 글은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는 상태로 가는데 필요한 정화의 대목에서 나온다. “ 영광이 가득하신 우리 성모님의 일과 기도가 그러하였으니, 당신은 처음부터 이 높은 상태로 올림을 받으신 까닭에 당신 영혼에는 어느 피조물의 형상이 찍힌 바가 없고, 그로 하여 움직여지지도 않으시고 항상 당신의 동작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가르멜의 산길 제 3권 제 2장 10절).

“일과 기도가 그러하였다.” 이 문맥에서 요한 성인은 하느님과 너무나 밀접히 결합되어서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활동의 원리가 되신 한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아직 육신에 머물러있고 그의 인간 본성이 아직 작용하고 있지만,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가치가 충만히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활동은 그 안에서 현존하시며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요한 성인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과 합한 영혼의 작업은 하느님의 것, 따라서 그런 영혼이 하는 일들은 틀림없고 사리에. . . . ” (가르멜의 산길 제 3권 제 2장 9절) 성령의 강력하고도 부드러운 역사하심은 사람의 세속적 욕망과 활동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하게 지속되는 실체적인 것들에로 방향을 전환시켜준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만을 따랐기 때문에 성령의 그느르심에 의해서 하느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을 낳아서 이 세상에 주실 수 있었다. 신성한 동기(부여)가 마리아의 출산능력 안에 아주 깊이 스며있었기 때문에 성모님이 낳으신 분은 인간이시자 또한 하느님이시었다. “가장 영화로우신 동정 성모님” 요한 성인은 성모님을 은총으로 가득 차있는 인간으로, 그래서 단지 얇은 장벽만으로도 하늘나라의 완성을 위해 유보된 영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인간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나머지 사람들과 비교해서 성모님께서는 한 인간에게 최고라고 여겨지는 모든 속성들을 가득 가지고 계신 지극히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뜻을 이루기 위해 동정녀로서 자신의 전존재를 투신하였기 때문에 성모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자체를 바치신 동정녀로서 영광이 더해지신다. 성모님의 모성적 기능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자유의지, 구체적인 삶의 길, 성모님의 선택들,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등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대하여 가지고 계셨던 아름다운 계획에 잘 맞아떨어진다.

 

“이 높으신 상태로 올림을 받으신” 요한 성인은 “상태”라는 말을 할 때 일상적이며 영속적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일컫는다. 여기서 왜 요한 성인이 성모님에 관하여 그렇게 적게 언급하고 있는 지에 대하여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성인은 힘들고 가파른 가르멜 산 절정을 오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영적 진보를 위해서 기대하고 사용하게 되는 많은 함정, 유혹, 정화, 그리고 어둔밤들에 성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이 정상적인 길을 초월해서 들어 올려지셨다. 성모님의 자신의 공로나 가치에 의해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스럽고 가치있게 만드신 탁월하게 선택되신 분이셨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선으로 충만하시었기에 선하셨다. 성모님께서는 신성한 예술가이신 하느님께서 그녀를 창조하시고 선택하셨을 때 그분께서 생각하신 대로 그녀를 형성하기 위하여 그녀 안에서 영원한 진리와 협력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 대하여 참으로 진실 되셨다. 하느님의 중재로 요한 성인은 가르멜 산길을 오르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이신 가르멜산 절정에 놓인 채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요구하신 것처럼 전적으로 그분께서 소유하도록 그녀 자신을 맡겨드리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본다.

“처음부터”. 요한 성인이 살던 때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가 교의가 명확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요한 성인은 가르멜의 확고한 전통에 따라서 성모님께서 지상 생활을 시작하시던 순간부터 은총으로 충만한 상태로 들어 올려 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특은을 받은 것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때부터만은 아니었고 세상에 나실 때부터이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소명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준비되셨다. 이점에서 성모님께서는 성자를 잉태하시어 낳으시기 이전부터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걸작품이었다.

“ 당신 영혼 안에는 어느 피조물의 형상이 찍힌 바가 없고, 그로 하여 움직여지지도 않으시고 ” 이것은 앞서 말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즉, 요한 성인은 피조물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한 사람의 내면에 강한 인상을 주기 쉽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현실주의자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우리를 너무나 쉽게 속이는 우상들인데 그것은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진, 선, 미의 많은 부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성인의 자기 부정(극기), nada, 어둔밤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가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정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요한 성인은 피조물을 경멸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피조물을 창조주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발판으로 삼지 않고 너무나 자주 피조물 속에 빠져있는 것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요한 성인은 성모님께서 처음 존재하실 때부터 인간 안에 내재하는 피조물로 기우는 경향을 물리치셨기 때문에 성모님을 존경한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적인 권능으로 지으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셨지만, 마치 피조물 안에서 충만한 실현과 결정적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피조물들이 그녀를 유혹하여 피조물 안에서 쉬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은총이 성모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휘감았기 때문에 - 성모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한낱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아셨다. - 피조물들이 그녀를 움직이도록 결코 허락할 수 없었다.

항상 당신의 동작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요한 성인은 성모님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이유를 맨 마지막에 밝히신다. 성모님께서는 존재하시는 처음 순간부터 성모님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셨으므로 정화되거나 점진적인 이탈이 필요 없으셨다. 이점에서 요한 성인께서는 오늘 살아 계신다면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를 가장 철저하게 카리스마적인 분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모든 세대가 성모님을 복되다라고 불러왔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지상에서 순례의 삶을 사시는 동안에 성령께서 언제나 성모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와 존재에 영감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부들은 성모님께서 그녀의 자궁에 말씀을 육체적으로 수태하시기 전에 그녀의 영혼 안에 말씀을 잉태하셨다고 자주 강조하셨다.

 

성모님께서는 성령께서 그녀 안에서 활동하시게 하여 그녀로 하여금 당신 성자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가 되게끔 하는 당신 아드님의 모든 특성들을 그녀의 존재와 행동을 통하여 구현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단지 강생하신 순간에만 성모님께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전 존재를 한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전형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너무나 자주 요한 성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구체적 삶과는 동떨어진 신비 생활의 정상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성인께서는 일반적인 원리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일반화(보편화)하는데 마음이 많이 쓰셨지만 때때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현실적)이시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셨을 때 요한 성인은 즉각적인 기도와의 관련을 본다. 실제로 요한 성인은 우리가 기도의 대목에서 분석한 글에서 성모님을 예로 들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한 영혼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람이 분명하게 이러한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 드리지 않을 때라도 갈망하는 이를 위해 은혜를 얻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의 능력을 이용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신다. 성령께서 성모님 안에서 섬세한 사랑으로 성모님을 충만케 함으로 성모님은 그녀의 간청을 들어 달라고 지극히 사랑 받으셔야 할 분을 졸라 델 필요가 없으시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아시며, 짓밟히고 궁핍하며 가난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을 잘 아시므로 그들의 불확실한 처지를 넌지시 비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안에서 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진실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의탁하기 전일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가페적이라는 것을 안다. 즉 아가페적 사랑이란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이익이나 기쁨도 남겨 놓지 않은 채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피조물의 선만을 바라신다. 따라서 궁핍한 이들과의 인간적 유대를 나타내는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그분께 보여드리는 것으로 충분하게 되며 이 사랑은 전적으로 어떤 이익이나 기쁨을 위한 사랑이 아님을 알게된다.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당신 피조물의 선익을 원하신다. “영혼은 다만 지극히 사랑 받으셔야할 분에게 그의 결핍과 고통을 털어놓는다. 사려 깊은 연인은 그의 연인이 부족해서 바라서 청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극히 사랑 받으셔야 분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간청을 들어주신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께서 갈릴래아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에게 말씀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예수님께 포도주들 주십사 하고 청하지 않으시고 ‘이들에게 포도주가 다 떨어 졌습니다”라고 언급하셨을 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영혼의 체념과 궁핍을 보시면 더 많은 동정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간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영혼이 자신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함으로 인해 생기는 자기애와 소유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Spiritual Canticle 영적 찬가, 영의 노래 Cantico B 제 2 노래 8절 박병해 譯 p. 301-302)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그들 안에 부어진 사랑에 의해 이끌려진 성모님과 같은 사람들 특징은 고요함이다.

무절제하며 반항적인 저급한 본능들은 정신, 의지, 기억으로 다려왔다. 요한 성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주된 정념은 기쁨, 희망, 슬픔과 두려움이다. 불완전한 영혼 안에서 이러한 정념들은 그 사람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주 날뛰는 반면에 (크게 위세를 부리는 반면에), 성모님과 같은 상태에 이른 사람들 안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확실하게 제거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들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만큼 그러한 전념들은 자제된다(통제가 된다).

 

기쁨이 그 사람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지 않으며 희망이 그에게서 남에게 공헌할 필요성을 앗아가지도 않으며 슬픔이 그를 압도하지도 않으며, 두려움이 그 사람을 마비시키지도 않는다. 측은지심은 그 사람을 약하게 만들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기도 전에 다른 이들의 필요를 생각할 줄 아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애덕)안에서 그를 강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그 사람에게서 아픔과 고통을 면제시키지 않는다. 복음서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은 요한 성인에게 그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도록 상기시켜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때때로 그리고 특정한 시기동안에는 하느님께서는... ” 고통을 주곤 하였다. (영의 노래 B 제 20 노래 10절 박병해 譯 p.430).  공로가 쌓이고 사랑이 성장하는 것은 성덕의 삶을 사는 영혼들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두 가지 요인이라고 요한 성인은 말하고 있다. 성모님과 같은 거룩한 이들이 선 자체이신 분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악의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라고 가르쳤던 사람들에 의해 당신의 사랑스럽고 온전히 선한 아드님이 조롱 당하고 배척받으시는 것을 보는 성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까!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유대인인 당신의 아드님을 단죄하고 로마 제독에게 그분의 피를 요구했을 때 이 유다 여인은 칼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느님의 고무하심에 영혼이 민감하면 할수록 그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함께 살고 일하며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이해 받지 못하고 따라지지 않으므로 그 영혼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된다. 그 영혼이 그의 사랑하는 친구들, 이웃들과 동료 인간들을 위해 최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하느님의 의지)과 실제로 살아지고 있는 것(주로 자아 의지와 지상적이며 세속적 비전들) 사이의 이분법은 그와 같은 영혼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러한 눈멀음과 불충실로부터도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그 영혼은 안다. 그 영혼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으로 평화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극심한 슬픔(비탄이)스며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에 대한 증인들이 요한 성인이 얼마나 슬퍼했고 고통받았으며 지쳐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시는 성모님께서 마음이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셨다면 하느님의 성령께서 똑같은 변형시키는 그 어느 누구라도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에서 면제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모님께서는 신적 사랑의 역동성을 보여 주신다.

요한 성인은 그의 글에서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신적 사랑에 의해서 가능한 한 많이 변모된 한 영혼의 상태를 묘사할 때 여러 번 성모님의 예를 들고 있다. 요한 성인은 분명히 이러한 신적 사랑의 홍수가 인간 영혼을 결코 익사시키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하느님께서 강생하실 때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께서 취하셨던 인간적인 요소를 흡수하거나 또는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고 풍부케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잠재력을 꽃피웠다면 하느님의 성령의 현존과 활동으로 충만된 사람들의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또한 어떻게 이러한 사랑이 퍼져나가는가를 깨달은 자는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이 누구이신 가를 아는 사랑의 지식 안에서 항구히 성장하게 된다. 그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속성이 알려지고 흠숭받고 사랑 받으며 한층 깊이 동화되어 나간다. 진정한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나누기를 바라듯이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영혼과 나누기를 바라시는 당신 존재의 무한한 대양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단지 하느님 성령의 활동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 영혼의 활동인 것이다. 요한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지식이 성장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관상이라고 불리는) 신적 불꽃이 깜빡이고 타오르는 것에 비유한다.

 

“이 신적 화염의 활동, 즉 그 진동과 불꽃의 튀김은 성령의 불꽃에 변화된 영혼이 혼자서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또 성령만도 아니다. 그것은 그와 영혼이 함께, 성령은 영혼에게 움직이며 마치 불이 붙은 공기에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 박병해 譯, 셋째 노래, 제 2절 10항. p. 142).

요한 성인은 그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이미지를 찾다가 성서에서 “그느르심” 이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회상해낸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듣기 위해서 그느르심이란 그늘을 드리우는 것과 같으며, 그늘을 드리움으로써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그에게 가깝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또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은 동정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혜인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것을 성령의 그느르심이라 불렀다. 성령께서 동정 마리아에게 은총의 그림자를 던지셨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너에게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너를 감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 셋째 노래, 제 2절, 12항. 박병해 譯 p. 143).

요한 성인은 하느님의 내적 삶과 하느님의 속성들은 그늘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알려지고 설명을 계속하신다. 이곳 지상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지혜와 아름다움과 굳셈의 광채와 장엄함을 견디어 낼 수 없으므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필요에 맞추시는 성령께서는 이 찬란한 실제에 그늘을 드리우신다. 그 그늘은 하느님의 계획과 속성들에 의해서 드리워졌으므로 영혼이 분명하게 하느님의 탁월성을 알게 되는 것은 그 그늘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이다.(Id, 14).

인간이 신적 사랑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평을 체험하기만 하면 그때까지 그 사람의 관심을 끌어 왔던 다른 모든 것들은 점차 시들어져 버린다. 그와 같은 사람은 오직 “참된 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 사랑이다 - 그 밖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마는 반면 - 라는 사실에 압도되어 하느님의 삶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과 체험을 기뻐한다. 성모님처럼 매우 믿음이 깊은 영혼은 하느님 광채의 그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영혼을 자극하여 현세에서나 또 영원히 그늘 없이 (온전히)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가치 있는 삶에로 자신을 준비하도록 이끈다.

하느님의 내적 삶에 대한 이러한 체험 안에서조차도 요한 성인은 일관되게 성모님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 하느님의 지혜여- 당신은 성부의 보물 창고이시며 영원한 빛의 광채이시며 티없으신 거울이시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형상이십니다.”(Id,). 요한 성인이 그의 시에서 서정적으로 그는 사랑하는 영혼이 애써 이르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한 영혼이 말씀을 소유할 때, 아니 말씀에 사로잡힐 때 그 밖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Nada(無)의 박사 요한 성인이 열렬한 기도 중에서 “천국이 나의 것이고 지상이 나의 것이다. 제국이 나의 것이며 의로운 사람들이 나의 것이며 죄인들이 나의 것이다. 천사들이 나의 것이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나의 것이며 만물이 나의 것이며 하느님이 나의 것이며 나를 위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며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prayer, trans .Kavanaugh p.669)라고 외칠 때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만 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만물은 왜 그분에 의해서 모두 으뜸으로 창조되었는지 진정한 이유를 발견한다고 성인은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안에서 요한을 위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그분은 나의 모든 것이다 ”



요한 성인의 죽음의 순간에서의 성모님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끝까지 그의 변호자로서 성모님을 믿었다. (cf, Letter 11; trans. Kavanaugh p.692). 요한 성인은 성모님께서 임종 때 그와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라고 요한 성인은 그의 희망을 그가 이룬 일이나 쓴 글에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와 성인께서 그렇게도 충실히 입으셨던 성모님께서 보호해주시는 수도복에 두었다. 

 

요한 성인은 완고한 그의 장상에게 간청하였다. “ 신부님, 저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으니 제가 입고 사용해온 성모님의 수도복을 입고 묻히기를 간청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친애하는 원장님께 자비로이 이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빕니다.” (cf Fr. Bruno p. 351). 

 

이 신비가는 스카풀라의 특전을 믿음으로 소중하게 여겼다. 요한 성인은 친구들의 임종시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가르멜의 어머니이시자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분께서 토요일마다 연옥을 찾아오시어 은총과 도움을 주시며 당신의 거룩한 스카풀라를 착용한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을 연옥에서 어떻게 빼내시는가”를 상기하였다.

 

이 진정한 신비가는 그의 믿음을 우리 주님과 그 분의 천상 어머니에게 두었다. 밤 10시에 다른 수사들이 가대에서 성모 성무일도 1시과를 바치고 있을 때 요한 성인은 평온하고 행복하게 들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에서 성모님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칠 것입니다” (Bruno p.353).

 

성모님께서는 요한 성인의 일생을 통해서 성인의 피난처가 되시었고 도움을 주셨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가르멜의 아들을 죽음에서 현혹되도록 하지 않으셨다. 요한 성인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평화로이 선종하셨다. 토요일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출처ㅣ 성모성인 Saint - 성모님과 십자가의 요한